
정동영 통일부 장관, 천정배 법무부 장관,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원, ‘새벽21’ 소속 의원 등 당시 민주당 정풍(整風)운동을 주도했던 현 여권 인사들은 검찰 수사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나라당은 “여권 인사들도 도청대상이 됐는데 야당 의원들을 도청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검찰이 ‘야당 의원을 상대로도 도청이 있었다’는 정황을 잡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런 가운데 ‘신동아’는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당 소장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도 도청을 당했다”는 의혹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권 전 고문이 도청을 당한 시점은 2002년 2월2일.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사정기관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2002년 2월2일 권 전 고문도 도청을 당해 녹취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신동아’는 이 녹취록을 사정기관으로부터 입수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검찰 수사 내용과 ‘신동아’의 취재 결과로는 DJ 정부 때인 2000년 말∼2002년 초, 소장파에서 동교동 구파에 이르기까지 여권 정치인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도청이 이뤄졌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권노갑 전 고문도 도청당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짐으로써 DJ 정부 시절의 불법도청 파문은 여야 정치권 전체로 확산될 전망이다.
‘신동아’는 최근 사정기관 관계자에게서 “2002년 2월2일 저녁 언론사 간부 4명과 권노갑 전 고문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권 전 고문의 발언을 도청한 내용”이라는 설명과 함께 A5용지 5매 분량의 녹취록을 건네받았다.
정보, 권력 집중되던 때 도청당해
이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당일 참석자들의 발언을 모두 녹음한 뒤 언론인들의 발언은 빼고 권 전 고문의 ‘워딩’만을 정리해 이 녹취록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든 참석자의 발언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싣는 통상적 녹취문이 아닌, 정보 수요자의 목적에 따라 필요한 사람의 발언만을 실은 ‘가공된 녹취록’이다. 이 녹취록은 권 전 고문의 발언을 그대로 실으면서도 발언 내용과 관련된 2002년 2월 당시의 정치적 상황도 각주 형식으로 설명해놓아 읽는 사람이 권 전 고문의 발언 요지와 의미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신동아’는 녹취록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 녹취록을 권노갑 전 고문의 측근을 통해 발언 당사자인 권노갑 전 고문에게 보여줬다. 권 전 고문은 구속 수감되어 있다가 최근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으며, 서울시내 모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 전 고문은 “녹취록의 내용은 2002년 2월2일 언론인들과의 모임에서 내가 한 발언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밝혔다. 그는 “그 자리에서 농담 반 애교 반으로 ‘OO일보 최OO 기자, 에이 나쁜 놈’이라고 말한 적 있는데 녹취록에 그 말까지 그대로 기록돼 있다. 충격적이다”고 놀라워했다.
권 전 고문은 당시 서울 L호텔 양식당에서 언론사 부장급 간부 4명과 저녁식사를 함께했는데, ‘동북아 물류기지 세미나’ 참석차 미국 하와이로 출국하기 전날인 데다 참석자 모두 10년 이상 자신을 취재해 친분이 두터운 언론인들이어서 잘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날 자리는 포도주를 곁들여 스테이크 메뉴로 식사만 하는 식으로 진행되어 1시간여 만에 끝났다고 한다.
권 전 고문이 도청을 당한 2002년 2월 초순은 권 전 고문에게 정보와 권력이 집중되던 때였다. 당시 그는 정풍 파동으로 일선에서 한걸음 물러난 상태이긴 했지만 동교동계의 좌장으로서 동교동계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민주당 등 여권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이 무렵은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불과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김윤환(虛舟·작고) 민국당 대표는 여권 일각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던 ‘영남후보론’에 대한 지원을 권노갑 전 고문에게 요청하고 있었고, ‘이인제 대세론’을 이어가려는 이인제 의원도 권 전 고문 측과 우호적 관계여서 권 전 고문의 행보는 차기 대선구도와 연결되어 여권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