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급 과학자로서 전세계에 ‘바이오 코리아’의 이름을 드날리는 황우석(黃禹錫·53) 서울대 수의과대학 석좌교수. 그를 이해하는 코드는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 휴머니즘, 조국애, 리더십, 근면, ‘찍소’ 정신(우직한 소처럼 일관되게 일을 추진한다는 뜻)…. 하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황우석의 어린 시절’을 관통하지 않고는 맥을 추스르기 어렵다. 나무의 성(盛)한 외관을 받쳐주는 게 튼튼한 뿌리이듯, 개인의 위대함도 근본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작가 최인호가 무령왕릉을 단서로 백제의 마지막 역사를 되살려냈듯, 부여에서 만난 어린 시절의 황우석을 실마리로 오늘의 황우석을 생생하게 양각해보자.
三代가 모여 산 초가삼간
충남 부여군 은산면 홍산2리 계룡당(鷄龍堂) 마을. 인접 군(郡)인 청양군에서 발원한 칠갑산 자락에 61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계룡당’이라는 별칭은 마을 지세(地勢)가 닭 벼슬과 용 꼬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 뒤로는 녹음이 드리운 산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냇물이 흘러간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동양화 한 폭을 보는 듯 정감이 넘친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이름도 정겹다. 우렁창세기, 승적골, 말두덤골, 산재당골, 파래골…. 어디서 연유한 이름인지는 모르지만 예부터 마을 사람들이 불러온 이름이다.
황 교수가 살던 집은 마을 초입에서도 한참 더 들어간 곳에 있다. 꼬불꼬불 길을 돌고 돌아 들어가면 가장 위쪽에 두 채의 집이 있다. 위쪽에 있는 집은 이미 허물어져 옛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옛날 그 집에는 황 교수의 절친한 고향 형이자 친구인 이광희 이장이 살았다). 아래쪽에 그나마 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곳이 황 교수의 생가다. 담벽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위태위태하다. 녹이 슨 대문은 긴 세월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건듯 부는 바람에 삐걱삐걱 불협화음을 자아낸다.
초가삼간. 부엌 한 칸에 방 두 칸짜리 전형적인 옛 집이다. 이 작은 집에 삼대가 모여 살았다. 황 교수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다섯 형제와 지내던 방은 각각 2~3평 남짓. 좁다. 누우면 몸을 뒤척이기에도 비좁을듯하다.
“우석이와는 놀지 말아라!”
황 교수의 선조인 창원(昌原) 황씨 문중 사람들이 계룡당 마을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 광해군 때라고 한다. 다른 황씨 문중과 달리 황 교수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했다. 할아버지도 독자였고, 아버지는 3대 독자였다. 다행히 황 교수 아버지 대에 와서 많은 자녀를 뒀다. 3남 3녀, 여섯 명이나 낳았다.
고향 형이자 친구인 이광희 계룡당 마을 이장 덕분에 부여에 살던 어린 황우석을 그려낼 수 있었다. 면사무소 직원이나 인근 동리 사람들은 이광희 이장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황우석의 어린 시절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했다.
이광희 이장은 황 교수보다 두 살 위다. 당시 시골에서 한두 살 차이는 친구로 통했다고 한다. 이 이장도 황 교수를 동생이라기보다는 친구로 대했다. 하지만 황 교수는 이 이장을 꼬박꼬박 형이라 부르며 형으로서 존경했다. 호칭이야 어찌됐든 두 사람은 지금까지 가장 친한 친구로 우정을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