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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떠나는 중국여행 ③

‘귀신이 온다(鬼子來了)’

농민의 논리, 국가주의 앞에 무너지다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귀신이 온다(鬼子來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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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보니 탕산 지진이 괜히 난 것이 아니다. 황제이던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면서 탕산 사람들을 데려간 것이고, 탕산 지진은 마오쩌둥의 죽음을 알리는 전조였다.”

중국에서 용은 황제를 상징하는데, 용이 승천할 때 많은 사람을 데려간다고 믿었다. 중국인이 마오쩌둥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위대한 인민 승리의 기록’

마오쩌둥이 죽고 한 달 뒤 장칭(江淸) 등 문화대혁명을 이끈 이른바 ‘4인방’이 체포됐다. 탕산 지진이 일어난 1976년에 마오쩌둥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탕산 지진을 마오쩌둥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정치적 상징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항진 기념관’에는 마오쩌둥 이름으로 중공당 중앙이 내려 보낸 ‘13호 지시’가 전시되어 있다. 탕산 일대에 발생한 지진에 전국 당원과 군, 인민이 모두 긴급 복구에 나서라고 지시한 문건이다. 아마도 마오쩌둥이 중국 각급 기관과 인민에게 내린 최후의 지시였을 것이다. 기념관에는 지진으로 형편없이 구겨진 철로 등 피해 사례를 보여주는 사진도 있지만, 주요 전시물은 당과 군, 인민이 하나가 되어 피해 복구 사업을 펼친 ‘위대한 인민 승리의 기록’이다.



그 기록 사진들 위에 ‘사람은 결국 하늘을 이긴다(人定勝天)’고 씌어 있다. 인간의 운명과 일의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이 중국인의 전통적 사고방식이지만 마오쩌둥은 사람의 의지가 더 강하다고 믿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통행에 장애가 되는 마을 앞 큰 산을 옮기기 위해 평생 산을 파던 우 노인이 죽자 하늘이 감동하여 산을 옮겨줬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 이야기를 국민 교육 자료로 자주 애용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역사는 사람들의 의지에 달려 있어서 어려운 난관도 극복할 수 있고, 하늘은 그런 사람을 도와주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마오쩌둥은 모든 중국인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길 바랐다. 추위와 굶주림, 국민당군이 포위 공격하는 악조건 속에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2만5000리 장정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마침내 중국 대륙을 차지한 마오쩌둥다운 신념이다.

역사 발전의 동력을 객관적 법칙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신념에서 찾는 마오쩌둥의 사고를 두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비판이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하늘을 이긴다고 믿는 마오쩌둥은 인간중심주의자였고, 자력갱생의 신봉자였다. 그는 중국이 낙후되어 있지만 중국인이 단결하여 노력하면 난관을 극복하고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중국인이 그렇게 생각하게끔 교육했다. 탕산 지진 현장은 단순히 재난 복구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라 중국인에게 그런 마오쩌둥 정신을 교육하는 마지막 교육장이었다.

폐허 속에 꽃피운 정치학습

지진이 나고 사흘 뒤부터 마을별로 정치교육이 시작되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당 간부들이 상황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지진은 곧 공산주의 교육이다”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지진이 쓸고 간 곳에서 우리는 혁명을 한다’ ‘지진이 태산처럼 우리를 눌러도 우리는 허리를 굽히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은 끝까지 인민의 재산을 복구한다’ ‘탕산의 재난을 보지 말고, 그 재난 위에 핀 붉은 꽃을 보라’…. 당시 탕산에는 이 같은 정치 표어가 적힌 깃발이 나부꼈다. 탕산은 이미 정치학습의 장이 된 것이다.

당시 중국 정부는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거듭된 인도주의적 원조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외국 구호팀에 섞여 스파이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보다 이미 훌륭한 교실이 된 재난 현장에 외국인의 진입을 허용해 공산주의 정치교육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탕산은 마오쩌둥이 죽기 전 그의 사상과 정신을 중국인에게 주입하는 최후의 교육장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한 기자의 취재수첩엔 그런 사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8월3일 ‘항진 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개학식장에는 이런 구호들이 걸려 있었다. ‘지진을 이기기 위해 학교를 열고, 재난 속에서 새로운 사람을 키워내자.’ 200여 명의 학생이 참석했고, 혁명적인 학부모 대표와 초등학교 홍위병 대표, 빈농 대표들이 연설을 했다. 다들 항진 학교의 개학은 마오 주석의 혁명 노선의 위대한 승리라고 말했고, 초등학교 홍위병들은 ‘우리는 적들의 파괴책동을 막는 데 각별히 노력하고 인민해방군을 도와 우리의 역할을 다하자’고 외쳤다.”

탕산 지진 때 중국인이 보여준 공동체 의식이 마오쩌둥 시대 중국의 한 면이라면, 지진으로 폐허가 된 탕산을 정치학습의 장으로 둔갑시키는 과잉 정치화된 사회, 사람들이 철저하게 국가에 조종당하고 통제된 채 마오 정신을 실천하는 전체주의 사회 또한 마오쩌둥 시대 중국의 한 면이다. 탕산은 마오쩌둥 시대의 그런 두 가지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다.

그 두 면을 균형 있게 보는 것이 마오쩌둥 시대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이 아닐까. 지난날 내가 한 면만 보면서 편향에 빠졌듯 둘 중 어느 하나로 마오쩌둥 시대를 색칠하는 일이 중국에서도, 세계적으로도 흔하다. 그럴수록 중국을 제대로 보는 길은 멀어진다.

갈 길이 아득해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중국에 오면 늘 그렇듯 더우저얼(豆汁兒)이라고 하는 콩국에 멀건 쌀죽 한 그릇, 그리고 밀가루반죽을 긴 꽈배기처럼 만들어 기름에 튀긴 유타오(油條)와 속에 아무런 소도 넣지 않은 만터우(饅頭)로 아침을 먹었다. 중국인의 가장 일반적인 아침식사이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다. 속에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도 든든하다. 중국식 콩국을 먹을 때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침에 이런 콩국과 죽을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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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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