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로 새로운 세상 꿈꾸다
총이 아닌 붓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려보고자 했다는 한낙연.
최용수 교수도 한낙연이 중국에 알려진 것에 비해 정작 조국인 한국에서는 그를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하긴 그런 인물이 어디 한둘이랴. 널리 알려진 스타에만 초점을 맞추는 세상 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라도 나서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동안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자료를 방 안에 풀어놓고 단 한순간도 살아보지 못한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의 모습을 그려보기로 했다.
사실 한낙연의 그림이 우리에게 소개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과 수교한 직후인 1993년 봄에 그의 유작전이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도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올해 개최된 한낙연의 유작전은 그때와는 다른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그동안 이념 대립으로 인해 인정되지 못했던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지난 광복절, 국가보훈처는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중에서 공적이 인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훈포장 명단을 발표했다. 예년과 달리 올해는 독립운동의 공적이 명확했지만 그동안 이념적 제약으로 인해 훈포장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던,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Song of Ariran)’의 주인공인 김산을 비롯해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그 명단에 ‘한낙연’, 그의 이름도 포함돼 있었다.
신문에 나온 그의 이름을 보면서 그를 찾아가는 내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념의 색안경을 벗고서 그의 진실된 모습을 세상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현실적 여건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인이라는 불리함을 딛고 중국인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며 화가로 혁명가로, 더 나아가 고고학자로 광활한 중국의 대지에서 활동하다 실크로드에 뼈를 묻은 그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마지막으로 삶을 불태웠던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이리라.
1947년 비행기 추락사고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7월30일, 실크로드에 세워진 도시 우루무치(烏魯木齊)를 떠나 란저우(蘭州)로 향하던 국민당 소속 257호 비행기가 자위관(嘉틾關) 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광활한 중국대륙의 오지에서 일어난 이 추락사고는 자칫 긴박한 내전 상황 속에서 중국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영원히 묻힐 뻔했다. 하지만 그 비행기에 한낙연이 탑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중국 문화계는 큰 슬픔에 빠졌다.
당시 한낙연의 나이는 49세. 예술가로서 한창 성숙된 작업을 선보일 나이에 당한 그의 조난 소식은 중국 언론뿐 아니라 영국의 ‘더 타임스’ 등 외신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얼마 후 수색대가 비행기의 잔해를 발견했으나 그의 주검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았으나 그는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실크로드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 발굴에 전심전력을 쏟아부은 그의 염원대로 자신이 사랑하던 그 땅에 영원히 묻힌 것이다.
주검도 없이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평소 그를 알고 지내던 많은 인사가 참석했다. 화가이던 그의 장례식에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석하는 것이야 당연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의 인물들까지 참석하자 자세한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장례식장에는 당시 국민당 서북 행영의 주임이던 장즈중(張治中)과 부주임 타오즈웨(陶峙岳) 장군이 보낸 만장(輓章)이 걸려 있었고, 한낙연이 불의의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 저우언라이(周恩來)도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어버렸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렇듯 어느 한쪽이 아니고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양쪽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그의 죽음에 슬픔을 표시했다는 것은 꽤나 이례적이다. 더구나 당시 정국이 중국 대륙의 주인이 누가 되냐를 두고 국공내전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무렵이란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중국의 저명한 교수인 성청(盛成)은 한낙연을 가리켜 ‘중국의 피카소’라고 했다. 그것은 그만큼 중국 미술계에서 한낙연의 공적이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쏟아진 찬사와 달리 그는 살아 있을 때 중국 중앙화단에서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 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고 항일운동과 혁명사업에 투신해 혁명가로서의 임무에 더 충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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