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종호 교수(왼쪽)와 신경림 시인(오른쪽)은 학창시절 정춘용 선생(가운데)에게 문학을 배웠다.
내가 크게 실망한 것은 전쟁 전에 계시던 선생님들 태반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특히 내가 좋아하던 영어, 수학, 국어 선생이 몽탕 바뀌어 있었다. 나는 다니는 둥 마는 둥 교과서도 없이 공책 한 권만 꽁무니에 꽂고 책상도 걸상도 정해진 자리도 없는 교실을 들락거렸다.
한 달도 못되어서였을 것이다. 모내기철 집일을 도우라는 가정실습기간이 되었다. 관례대로 숙제가 주어졌는데,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별로 한 일이 없는지라 그동안 읽은 소설 독후감을 써 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전원교향악’이었다.
그 얼마 뒤였다.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맨 뒷자리에 숨어 앉아 있는 내 이름을 불렀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선 내게 그는 대뜸 “실제로 그 책들을 읽었는가” “그 감상문을 직접 썼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니까 그는 그날 배울 교과서 한 대목을 읽게 했다. 더는 아무 말씀이 없었지만 그 뒤로 시간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 한 대목씩 읽게 한 것을 보면 그 감상문을 실제로 내가 썼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 같다.
영어교사·문학교사·철학교사
이렇게 정춘용(鄭春溶) 선생님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는데, 그는 그때 서울대 독문과 학생으로서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가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것은 젊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교과서의 구문을 설명하면서 많은 예문을 인용했는데, 늘 명작 속에서 가져와, 가령 톨스토이, 헤밍웨이,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의 문학의 편린들을 우리는 그를 통해서 접할 수 있었다. 또 데카르트와 니체를 좋아한 듯, 그들이 한 말이 영문법 설명에 이용되었다. 그는 영어교사이면서 문학교사요 철학교사인 셈이었다.
선생님과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한 사건이 있고서였다. 나는 이전까지는 수학시간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수학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 담당 선생님이 좋아서였던 것 같다. 내 하숙집 근처의 수학 선생님 댁에는 큰 살구나무가 있어, 선생님 댁에서 하숙하던 동급생한테 놀러가면 사모님이 잘 익은 살구를 한 소쿠리씩 내놓고는 했다. 전쟁 소식을 듣던 날도 그 친구와 마루에서 사모님이 따다준 살구를 먹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6·25를 살구와 함께 떠올린다.
한데 그 선생님은 6·25 뒤로는 학교에서 볼 수 없었다. 부역을 해서 감옥에 갔다는 둥 분명치 않은 소문이 떠도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을 가르친 선생님은 전에 농업과 생물을 담당했던 분으로, 발음도 불분명하고 설명도 엉망이었다. 게다가 나는 두어 달이나 진도가 뒤처져 있었으므로, 당연히 수학시간이 지겨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학시간이면 소설 따위를 감추어들고 읽곤 했는데, 그날따라 들키고 말았다. 나는 교무실로 불려갔고, 선생님은 분기탱천해서 내가 읽던 책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면서 나를 때리고 차고 했다. 마침 옆에 계시던 정춘용 선생이 그 책을 집어들면서 말렸다. ‘수업시간에 다른 책을 본 것은 잘못이지만, 이런 책을 읽는다면 상당한 수준이니까 봐줘야 할 것 아니냐’는 뜻의 말도 했던 것 같다.
그 무렵 그는 우리반 담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각별히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참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선생님이 여간 고맙지 않았고, 나는 선생님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