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호

<새연재> 난임전문의 이성구의 ‘수태 이야기’

여풍당당 그늘서 찬밥 된 불행한 난자들이여!

  • 난임전문의 이상구

    입력2017-09-1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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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풍(女風) 시대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의 지위 향상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거세다. 법조계, 의료계는 물론이고 남성들만의 분야에 진출한 여성도 적지 않다. 조직의 장으로 발탁된 여성도 많다. 군 장성, 대기업 임원, 장관에 이어 정계에도 여성 당 대표 시대가 펼쳐졌다. 정말이지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여풍당당의 시대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평생 한 명이라도 더 임신시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난임(難姙) 치료 의사로서는 걱정이 태산이다.

    요즘 저출산 시대에 ‘난임’이 화두다. 난임은 그 원인이 남성에게 있든 여성에게 있든 간에 임신이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지금 한국은 난임 인구 20만 쌍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왜 난임이 되는 걸까?

    단적으로 말하면 난임의 제 1주범은 만혼(晩婚)이다. 그것도 남성보다는 여성의 늦은 결혼이 원인이다. 2000년 이후 우리 사회에 난임 인구가 부쩍 많아졌다. 여풍이 불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을 게다. 결과적으로 여풍이 저출산 시대를 담금질한 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고 이면(裏面)이 있는 법이다. 여성이 사회인으로 독립하고 경제력을 가질수록 피할 수 없는 인지상정이 있다. 현대여성에게 자식은 더 이상 헤게모니의 중심이자 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발목을 잡는 짐이 되고 만 것이다. 힘들게 사회인이 된 그녀들이 남성에게 지고 살 리가 없다. 그녀들에게 결혼은 안 해도 그만, 늦게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자를 찾아온 고령의 난임 여성 중에는 늦게 결혼한 사례가 많고 많았다.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어렵게 대기업 사원이 된 미스 김. 능력을 인정받아 빨리 대리가 되겠다며 이를 악물고 일만 하던 그녀는 막상 대리가 되자 마음이 바뀐다.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고 손해 보는 장사라는 선배들의 경험담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있었다. 백마 탄 왕자님은 드라마와 소설 속에나 존재한다는 현실을 아는 순간 “결혼은 무슨…” 하며 콧방귀를 뀐다. 하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녀도 인간이었던지라 외로움이라는 덫에 빠져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 무렵 그녀의 나이, 서른일곱.



    여자 나이 서른일곱은 생식학적으로 환갑을 바라보는 황혼기다. 아무리 천부적으로 타고난 고운 피부로 절대 동안(童顔)을 자랑하며 나이를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난소(난자의 보관 창고)의 시계는 되돌릴 수 없다. 난소란 본래 회춘이 없는 기관이다. 그 잘나가던 미스 김은 결혼한 지 3년째 접어들었지만(40세) 임신이 안 되자 난임 치료 병원을 방문, 검사를 해보았다. 충격적 얘기를 듣게 된다. 나이 마흔인데, 난소 나이가 40대 후반으로 폐경 직전이라지 않은가. 설상가상으로 난소에는 자궁내막증으로 인해 생긴 난소낭종까지 커지고 있었다.

    난자는 정자처럼 무한 생산체제가 아니라 한정소멸식이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난자를 평생 사용해야 한다. 37세 즈음이면 초경(15세 기준)으로부터 20~22년이 흘렀을 때가 된다. 가지고 태어난 난자의 4분의 3을 사용한 상태다. 그것도 질 좋은 난자를 우선순위로 배란시켜버렸으니…, 고령 여성들은 몇 안 남은 난자로 임신을 시도해야 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35세 여성의 난소에는 난자의 반이, 마흔을 넘긴 여성의 경우 90% 이상이 부실 난자다. 나이 든 여성일수록 질 좋은 난자가 배란될 가능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부실 난자가 배란되어 수정되면 자궁에 착상돼도 유산으로 막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고령일수록 자칫 유산되거나 기형아가 잉태될 확률이 높아진다.

    고령 여성이 난임이 되는 이유는 부실 난자 외에도 많다. 업무상 불규칙한 생활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여성일수록 배란이 불규칙해질 수 있다. 임신을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난자가 배란되는 그날(유효 시간 24시간)에 수억의 군사(정자)를 만나야지 다른 날의 헛수고는 의미가 없다. 전업 주부 비율이 높았던 1980~90년대 젊은 신혼부부들은 이틀이 멀다 하고 부부관계를 했을지 모르겠지만 요즘 부부들은 사정이 다르다. 많은 업무량과 스트레스로 인해 부부관계 사이클에 엇박자가 나기 일쑤다. 실제로 고령의 난임부부 중에는 타이밍이 안 맞아서 난임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야말로 사회적 난임인 것이다.

    최근 건강보험 통계상 지난해 자궁근종과 선근종 등으로 진료를 받은 환자 수가 약 30만 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60% 이상 증가했다. 가임기 여성 중 40~50%가 내막증, 자궁근종, 선근종 등 질환을 갖고 있다고 한다. 35세 이상 여성 2명 중 1명꼴로 자궁과 난소 내 질환이 있다는 얘기다. 서구화된 식생활과 환경에 그 원인이 있겠지만 난임 전문 의사가 봤을 때 임신을 미룬 것도 일조를 했다고 본다.

    난소 입장에서 유일한 휴식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수유다. 임신이 되는 순간부터 출산 후 젖을 떼는 순간까지 최소한 2년간 난소는 난자를 키우지 않아도 된다. 배란이 되지 않는다면 생리를 할 일이 없다. 결론적으로 많은 여성 생식기 내 질환이 생리를 하면서 생기는 질환이므로 젊은 나이에 임신을 반복했더라면(多産) 난소 입장에서 휴식시간이 길어 여러 질환으로부터 보호받았을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여성이 서른다섯을 넘겨서 결혼했을 때 난임이 될 소지는 다분하다. 슈퍼 정자를 보유한 연하남을 만난다 해도 여러 변수를 극복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단언컨대 폐경이 되면 임신이 불가능하며, 설사 임신이 된다고 해도 고령 여성은 온갖 변수와 사고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위험부담이 크다. 어지간하면 마흔 전에는 임신 출산을 마무리하는 것이 당사자의 건강을 위해서도,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필자는 난임 의사로 23년간 6만례 이상의 시험관시술을 통해 세상의 고통 중에 난임이 얼마나 인간을 좌절케 하는 큰 고통인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다. 순리란 이성으로 억지로 뭔가를 하려는 게 아니라 본능에 충실하며 물 흐르는 대로 사는 것이다. 여성의 승승장구는 박수 칠 일이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서도 여성은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거기엔 나이 제한이 있다는 것 또한 명심해야 한다. 신이 여성에게만 부여한 축복을 누리며 감동을 느끼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성구
    ●1961년 대구 출생
    ●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대구마리아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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