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한국 영화 ‘원조 스타’ 최은희

“김정일은 나를 김일성에게 바치려 했어요”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2006-06-07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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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영화 ‘원조 스타’ 최은희
    영화배우 최은희(崔銀姬·76)씨는 분당 신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자락 빌라촌에 산다. 상부(喪夫)한 미망인은 검은 옷차림이었다. 안방 신상옥 감독(향년 80세) 영정 앞에서 촛불이 탔다. 영정 위에는 예수상 성서 연도(煉禱)책, 옆에는 장미꽃 화병이 놓여 있었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1954년 결혼해 부부이자 동료 영화인으로 52년을 함께 살았다.

    응접실에는 신 감독과 최씨가 인생의 고비 고비에서 찍은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70대 후반을 맞은 최씨의 얼굴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 나온 30대 초반 주연 여배우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장례 치른 지 한 달이 다 돼가는 데도 현실로 믿어지지 않아요. 서재에서 금방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아요. 장례식에서 공군 군악대가 ‘빨간 마후라’를 연주할 때 위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 감독을 회고하던 최씨의 눈가에는 간간이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사진을 찍는 동안 신 감독이 앓던 신병(身病)에 대해 설명했다.

    “신 감독이 북한에서 탈출하다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단식투쟁을 벌였더랍니다. 단식 8일째 의식을 잃었다는군요. 깨어보니 북한 의사가 수액을 놓아주고 있었대요. 북한의 의료기기는 위생상태가 열악합니다. 이때 C형 간염에 감염됐어요. 그동안 잠복해 있다가 20여 년 만에 발병해 두 번이나 간 이식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불귀(不歸)의 객이 됐습니다.”



    이 인터뷰는 ‘최은희 신상옥 납북수기, 김정일 왕국’의 저자 김일수(동아일보 전 홍콩 특파원)씨의 도움으로 성사됐다. 최씨는 장례를 치른 후 신문, 잡지에서 인터뷰 요청이 숱하게 들어왔지만 일절 사절했다. 그러나 각별하게 지낸 김일수씨의 권유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김씨는 인터뷰에 동석해 최씨가 기억이 가물거릴 때마다 평소 신 감독에게 들은 이야기를 ‘리바이벌’하며 기억을 되살려줬다.

    최씨의 딸 명희씨가 차와 과일을 내왔다. 부모가 북한에 납치됐을 때 고등학교 2학년이던 명희씨는 이 사건으로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다. 그녀는 부모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시골 총각과 연애 결혼해 1남 3녀를 뒀다. 신 감독이 첫 번째 간이식 수술을 받을 때 명희씨의 남편(서동엽)이 “아내를 곱게 잘 길러줘 너무 고맙다”며 장인에게 간을 제공했다. 서씨는 지방에서 인테리어 사업을 한다. 장례 이후 큰아들 정균(영화감독)씨와 명희씨가 번갈아가며 분당 집에 와 어머니의 수발을 들었다. 기른 자식이 낳은 자식보다 낫다.

    “쟤들이 그때 당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둘이 한창 사춘기에 들어섰는데 어머니가 행방불명되고 아버지도 사라졌지요. 충격이 얼마나 컸겠어요. 다행히 나쁜 길로 안 빠지고 잘 살아줘 참 고맙게 생각해요.”

    -신상옥 감독의 영화인생 60년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한마디로 영화 미치광이였죠. 영화에 살고 영화에 죽은 사람입니다. 가정생활 자체가 영화였으니까요. 우리에게 집필한 시나리오를 나눠주면서 화장실에서 한 챕터씩 보라고 하죠. 화장실에 앉아서도 책 보고, 앉으나 서나 영화 생각밖에 없었던 분입니다.”

    신 감독은 세상 떠날 때까지 남북한과 미국 할리우드에서 100편에 가까운 영화를 찍었다. 그는 도쿄미술전문학교를 나와 미술감독으로 일하다 1952년 김광주 원작의 ‘양공주’를 각색한 ‘악야(惡夜)’로 데뷔했다. 마지막 작품은 2002년 ‘겨울 이야기’. 미개봉작이다.

    끝내 제작 못한 ‘칭기즈 칸’

    -고인의 작품 하나하나에 다 사연이 있고 애착이 가겠지만 평소 어떤 작품을 대표작이라고 생각했습니까.

    “당신 입으로 대표작에 관해 말한 적이 없어요. 이상하게 저도 그래요. 제가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작품에 만족해본 적이 없거든요. 이 양반도 당신이 만든 작품에 항상 뭔가가 부족한 느낌을 가졌어요. 주변에서는 첫째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꼽죠. 그 외에도 ‘로맨스 빠빠’(1960) ‘상록수’(1961) ‘연산군’(1961) ‘빨간 마후라’(1964) ‘이조여인잔혹사’(1969)를 비롯해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본인은 한번도 그런 걸 입으로 얘기한 적이 없어요.”

    -최 선생님은 이들 작품에 모두 주연배우로 출연했지요.

    “하여간 신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 좋다는 말을 들은 작품은 제가 안 나온 게 없어요. ‘연산군’은 외국인들도 좋아했죠. 이 양반은 북한 감옥에서도 머릿속으로 온갖 필름을 재편집하는 거예요. 감옥에서 할 일이 없으니까. ‘연산군’에서 어디를 잘라 불태워버리고 어떤 장면은 다시 찍고…. 인편을 통해 조카한테 비공식적으로 보내는 편지에 그런 구상을 담은 적이 있잖아요. 그 정도로 영화에 애착이 많았죠.”

    신 감독은 북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영화 ‘칭기즈 칸’을 구상해 시나리오 원고를 완성해놓고 틈만 나면 손질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투자자를 찾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그 작품을 못하고 돌아가셨죠. 북한 감옥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고치고 또 고치고, 계속 십몇 년을 그렇게 했죠. 칭기즈 칸의 웅대한 스케일을 담자면 막대한 제작비가 들지 않겠습니까. 미국에서도 찍으려고 시도했지만 출연진 문제가 걸렸어요. 백인을 출연시켜 만들면 칭기즈 칸 맛이 안 나죠. 국제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칭기즈 칸 역에 동양계 미국인을 쓰려고 했어요. 시나리오가 남아 있죠. 초원이 너르고 말이 많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쪽에서 찍으려고 구상했어요. 로케이션 헌팅 다 하셨어요. 타슈켄트까지 갔으니까.”

    -회고록을 쓰고 있다면서요. 언제 출간됩니까.

    “초고(草稿)를 써놓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요. 작가가 도와주고 내가 다시 고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결혼, 이혼, 북한에서 재결합.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이 부부는 지난해 결혼 50년 금혼식을 하려고 준비했다.

    “행사를 치를 만큼 몸이 좋지 않아 금년 가을로 미뤄놓았죠. 그때 둘이 함께 자서전을 써서 발표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덜커덕 돌아가셨어요. 이 양반도 초고는 다 써놓았습니다. 언젠가는 이걸 내가 완성하고 가야지요.”

    -두 분에 관해서는 수많은 인터뷰, 기사, 책, 다큐멘터리가 나왔죠. 회고록에는 지금까지 소개되지 않은 비화(秘話)가 많이 있습니까.

    “많죠. 자서전은 자기 치부를 다 드러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미화하면 자서전이라고 볼 수 없죠. 과거를 다 드러내놓고 정말 팬 여러분한테 공정한 심판을 받는 기분으로 쓰려고 했어요. 내용은 지금 얘기할 수 없습니다.”

    배신과 이혼

    -50년을 함께 살았는데 두 분 사이에 자녀가 없어 서운하지 않습니까.

    “우리 애들이 효도하고 있어요. 큰아들이 맏상제 노릇을 잘 했어요. 미국에서 사는 둘째아들(상균)도 달려와서 같이 하고. 내가 출산은 못했지만 아주 흐뭇했어요.”

    신 감독은 영화배우 오수미씨와의 사이에 1남(상균) 1녀(승리)를 뒀다. 오씨는 신씨가 납북된 뒤 사진작가 김중만씨와 재혼해 살다가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최씨는 북한에서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뒤 상균과 승리를 미국으로 불러 공부를 시켰다. 승리씨는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나와 연극을 한다.

    납북 수기를 쓰기 위해 미국에서 6개월 체류했던 김일수씨는 “오씨의 소생들을 자상하게 가꾸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고 거들었다. 신 감독은 홍콩에서 납북된 최은희씨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김 특파원의 도움을 받았다. 신 감독이 북한을 탈출하자 한국의 언론매체들이 수기(手記)를 따기 위해 거금(巨金)을 제시하며 경합을 벌였는데 아무런 조건 없이 김 특파원을 수기 집필자로 지목했다. 잘나갈 때 거들면 빛이 안 나지만 어려울 때 도와준 인연은 평생 간다.

    ‘왕의 남자’ 이준기가 신 감독의 병원비와 추모사업비로 2000만원을 내놓았다고 온라인 오프라인 매체들이 다투어 보도했다.

    “돌아가신 양반한테 그런 모독이 어디 있어요.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더군다나 신인을 겨우 벗어난 배우가 어떻게 2000만원을 낸다는 거예요. 언론은 확인도 안 하고 마구 써요.”

    실제로 들어온 돈은 100만원. 이미지 관리를 위해 그렇게 튀겼는지, 연예지들의 작문(作文) 기사가 유포된 것인지 최씨는 진상을 궁금해했다.

    “각계 계층에서 조화를 보내주고 조문해주셔서 정말 깊이 감사드리고 싶어요. 고인도 고마워할 거예요.”

    -스타 여배우로서 인생에서 많은 걸 성취했는데, 혹시 못 이뤄 서운한 것이 있다면….

    “내 인생에서 출산 못한 게 제일 가슴에 남죠.”

    그녀는 이 말을 하면서 더듬었다. 또 울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답변을 듣고 나서 공연한 것을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이외에는 어떤 취미가 있습니까.

    “난 배우이면서도 가정 일을 좋아했어요. 신 감독 입는 옷도 내가 집에서 다 고쳤죠. 뜨개질이라든가 안 해본 거 없어요. 신 감독이 이발관에 가기 싫어해 내가 집에서 머리를 잘라줬어요. 미국에서 아이들 이발도 내가 해줬죠. 집에서 가끔 재봉틀을 돌려요. 내가 바느질을 하고 있으면 신 감독은 제발 그만두라고 해요. 그럴 시간 있으면 책 보고 연구하라는 거지요. 그만큼 신 감독은 욕심이 많았죠.”

    -어떤 배우로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요.

    “배우 생활을 충실히 해왔다고 생각하거든요. 열심히 살다간 배우로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딸 명희씨가 지하철역까지 차로 바래다줬다. 그녀는 “남편도 아버지처럼 바람기가 있지만 장인한테 간을 떼어주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한국 영화 ‘원조 스타’ 최은희

    신상옥 감독 영전에서 그를 추모하는 최은희씨.

    신 감독과 최씨는 결혼 22년 만인 1976년 이혼했다.

    “그땐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죠. 나는 출산을 못했고 수미는 출산을 했으니까. 아이들이 친부모 밑에서 양육을 받아야 올바로 자랄 게 아니겠어요. 내가 중간에 껴서 뭐가 되겠어요. 그래서 양보하고 이혼했죠.”

    -신 감독이 바깥에서 자녀를 둘이나 가질 때까지 까맣게 몰랐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감각이 무딜 수가 있습니까.

    “감각이 무딘 게 아니라…. 우리 부부는 종이 한 장 들어올 틈바구니가 없는 생활을 했거든요. 부부이자 영화 동료로서 하루 24시간 잠시도 떨어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 저녁까지 함께 작업하다 똑같이 귀가했죠. 이런 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꿈에도 상상 못했죠. 내가 출산을 못하니까 신 감독에게 ‘연애해 아이를 가지라’는 말도 했죠. 신 감독이 찬성해 두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그런 일이 생기니까 배신감 때문에 이혼 안 할 수 없었죠.”

    오수미씨는 ‘이별’(1973)을 비롯해 신 감독 영화에 두세 편 출연했다.

    -오수미씨가 신 감독 아이를 가진 것을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잡지에 터졌더라고요. 오수미와 신 감독이 애를 둘 낳았다고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났어요. 수소문해 찾아 내 눈으로 확인했지요. 신 감독은 이혼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제가 강제로 하다시피 했어요. 왜 배신감을 더 느꼈냐 하면 출산을 못하는 데 대해 걱정하면 신 감독은 ‘애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 둘이 영화 많이 만들면 그 걸로 다 되는 거다’고 했거든요. 24시간 같이 생활하니까 질식할 거 같아서 제가 ‘여보 당신 제발 연애 좀 하오. 감독이 이렇게 생활 범위가 좁아서 어떻게 예술 활동을 하느냐’고 하기도 했어요. 그만큼 두 사람의 믿음이 두터웠죠. 그랬던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배신감에 치가 떨렸죠. 정말 가슴을 치면서 이혼했는데…. 천생연분이라 그런지 북한에서 다시 만나게 됐죠.”

    그녀는 이 말 끝에 “신 감독이 나를 찾아 나섰다가 5년 동안 고생한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안됐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신 감독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줬지요”라고 말했다.

    “신 감독 데려다줄까요?”

    -신 감독이 “최은희가 북한에 앉아서 또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농담 같기도 하고, 뭔가 의미가 있는 말 같기도 하고….

    “우리는 이혼을 했지만 중요한 일에 관해서는 완전히 동지적 입장에서 상의했죠. 북한의 함정에 빠져 납치된 후 억류되니까 꼭 죽은 거 같았어요. 죽어서 생전의 생애를 돌아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저녁이면 몰래 남한 방송을 들었죠. 고은정이 대북방송에 나와 제가 이북에 있는 걸 알았는지 ‘언니, 어디 있어?’라고 울면서 말하더라고요. 나도 이불 속에서 통곡했죠. 신 감독이 몹시 그리웠죠. 누구 하나 자기 속내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사지(死地)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항상 신 감독을 생각했죠. 그런데 북쪽 사람들이 ‘앞으로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권하기에 ‘고기도 제 물을 만나야 제대로 놀 수 있다. 내가 여기 와서 무슨 일을 하겠느냐. 남과 북이 몇십년을 갈라져 있었다. 서로 호흡이 맞아야 연기할 수 있는 거다’고 했죠. 그랬더니 김정일이 한번 지나가는 말처럼 ‘신 감독 데려다줄까요?’하더군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렇게 말한 시점이 신 감독이 납치되기 전인가요.

    “아무튼 따져보니까 나를 납치해놓고 6개월 후에 신 감독을 데려왔던 거예요. 김정일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신 감독 납치 전인지, 후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속으로 납치를 또 하려는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북한이 납치에 한창 열을 올린 시기는 1970년대 후반이다. 일본에서 오쿠다 메구미 양이 납치된 시기가 1977년. 1977∼78년에는 이후 메구미의 남편이 된 김영남을 비롯해 한국 고교생 5명이 북한으로 납치됐다. 신 감독과 최씨가 납치된 것도 1978년이다.

    최씨 부부가 북한에서 들고 나온 사진 중에는 납치돼 남포항으로 들어오는 최씨를 김 위원장이 직접 나와 마중하는 사진이 있다. 최씨가 외국인을 납치하는 행동대원들과 김정일의 파티에서 악수를 나누는 사진도 있다. 이런 증거를 보면 외국인 납치는 김 위원장이 직접 지휘하는 북한의 국가사업이었다.

    “남한 방송을 몰래 듣다가 일본 바닷가에서 사람이 행방불명돼 찾고 야단이라는 뉴스를 들었지요. 북한이 행방불명된 일본 사람들을 나처럼 납치해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죠.”

    그녀가 납치된 지 6개월쯤 지났을 무렵 마카오에서 납치된 공(孔)이라는 여성을 초대소에서 만났다. 1년 전 납치된 그녀는 매스컴을 통해 최씨를 알고 있었다.

    “그녀와 북한에서 가까이 지냈는데 얼마 전 마카오에서 공양의 아버지와 동생이 확인하러 왔어요. 공양이 아버지를 똑닮았더라고요.”

    최씨가 북한에서 탈출한 직후 필자는 신의주 맞은편 중국 단둥(丹東)에서 북한 여배우를 만난 적이 있다. 여배우는 최씨 부부와 함께 일했다고 말했으나 자신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최씨에 대해 “연기도 신통치 않았고, 하늘 같은 은혜를 저버린 배신자”라는 표현을 썼다.

    ‘신 감독 이전, 신 감독 이후’

    -북한에서는 ‘배신자들을 감쪽같이 처치했다’고 알려져 있더군요.

    “그렇다고 해요. 이번에 신 감독이 수술을 받고 의식이 없는 동안 산타모니카에서 김정일을 만나는 꿈을 꿨대요. 지금도 저는 도망가는 꿈을 꾸거든요. 거기서 받은 충격이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제가 끌려간 직후 그쪽 사람들이 ‘배신하는 사람은 그냥 죽이지 않고 베개 밑에 약을 숨겨놓거나 주사를 놓아 10년, 20년 후에 죽게 만든다’고 겁을 줬어요. 그래서 탈출한 후에도 어딜 가든 베개와 시트를 다 들춰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나는 탈출하고 싶어도 겁이 나 못했죠. 신 감독은 대담하게 몇 번 시도하다가 실패해 감옥 생활을 했지요. 신 감독의 실패 경험이 없었다면 탈출에 성공 못했을 거예요. 실패를 바탕으로 빈틈없이 탈출계획을 세웠죠.”

    -김 위원장이 두 분의 팬이었다죠. 그가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의 영화 필름은 다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맞습니까.

    “네, 사실이에요. 저희도 깜짝 놀랐죠. ‘상록수’는 너무 좋아 자기네 교재로 썼다고 김정일이 말했죠. 김정일이 영화 문헌부에 전세계 영화 1만5000편을 소장하고 있는데, 지금 여기 없는 작품도 갖고 있더군요. ‘열녀문’(1962)이라는 작품은 필름이 여기에 없는데 거기에는 있더라고요. 애착이 가는 작품이죠.

    김정일은 영화에 대한 안목이 있어요. 북한의 이미지가 해외에서 좋지 않으니까 좋은 영화를 만들어 수출해 나쁜 이미지를 씻으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를 데려간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인으로서 우리의 가치를 그 사람이 인정한 데 대해서는 고마운 생각도 들어요.”

    -북한의 영화는 신 감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하더군요. 두 분이 가기 전까지는 천편일률적으로 사상 영화만 찍었다는 거죠. 탈북자 강철환 기자에 따르면 두 분이 북한에 오면서 사람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나왔다고 합니다. 강 기자는 고등학생 때 ‘철길 따라 천만리’라는 영화에서 우산으로 가리기는 했지만 남녀가 키스하는 장면을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북한에서는 삼각관계도 못 다루죠. 남녀 사랑을 표현 못해요. 그런데 김정일이 북한 영화를 활성화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도무지 발전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네 체제상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 같은 사람 납치해다 시키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북한 영화에는 출연자 이름이 안 나왔거든요. 신 감독이 출연자 이름을 넣기 시작했죠. 여배우들이 지퍼가 없어 스커트에다 단추를 달아요. 그러니 옷매무새가 안 나지요. 헤어핀도 제대로 없어요. 우리 부부가 중국을 오가며 지퍼 사다가 여배우들 스커트에 달아줬죠. 브래지어며 팬티까지 사다주고, 중국에서 천을 끊어다가 의상을 만들었어요.”

    신 감독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중에 ‘탈출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문학 계열의 최서해(崔曙海) 원작이다. 신 감독의 첫 작품은 궁중 사극 ‘돌아오지 않는 밀사’. 최씨는 “여건 미비로 수준은 떨어지지만 신 감독이 북한에서 처음으로 궁중 사극영화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월북 아닌 납북 확실

    강수연씨가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이 한국영화 최초의 국제 영화제 수상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최씨가 1985년 ‘소금’이라는 북한 영화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이 최초. ‘소금’도 카프 작가 강경애(姜敬愛)의 작품이다.

    -몸만 탈출하기도 황망했을 텐데 북한에서 사진, 테이프, 영화필름을 다 어떻게 갖고 나왔습니까.

    “신 감독이 탈출을 준비하면서 미리 미국으로 빼돌렸던 거죠. 어릴 적 신 감독의 동기동창 친구가 미국에서 의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 친구 도움을 받았죠. 부인이 헝가리까지 와서 받아가기도 했습니다.”

    -최 여사는 납치된 게 분명하지만, 신 감독에 대해서는 아직도 자진 월북설이 그럴 듯하게 유포돼 있어요. 한국에서 영화도 못 찍게 되고 여권 만료일이 다가오니까 최 선생님을 만나러 북한으로 스스로 들어가신 것이 아닌가 하는….

    “신 감독은 북한에 스스로 올 만한 성격이 못 돼요. 자유분방하고, 형식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죠. 경직된 사회에 스스로 찾아올 리가 없어요. 우리가 이혼했어도 영화 동지이자 부부로서의 애정이 깔려 있었어요. 제가 갑자기 없어지니까 신 감독이 허탈해 찾으러 다녔지요. 동남아 일대와 프랑스를 오고가다가 여권 만료일이 다가왔죠. 한국 정부에서는 여권 만기 연장 안 해준다고 했어요.

    북쪽에서 여권 만들어주겠다고 낚싯밥을 내미는데, 함정인 줄 모르고 따라갔다가 납치된 거죠. 동남아에는 여권 위조하는 조직이 있으니까. 홍콩에서 납치됐는데 자루를 씌우더래요. 자루를 찢고 마취 주사를 놓기에 일부러 마취된 것처럼 숨을 안 쉬고 참았다고 해요. 납치범들이 자루를 들고 모래사장을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자기네끼리 북한 말을 쓰더래요. 그래서 ‘아 이거 이북으로 끌려가는구나’ 싶더랍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도 신 감독을 철저히 조사했다죠.

    “거짓말 탐지기 조사까지 받았는데요.”

    김일수씨가 CIA 한국 전문가 클리핀저씨에게 “내가 보기에 신 감독은 자진월북 가능성이 높은데, 당신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과학적으로 다 조사해보았는데 신 감독도 납치당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고 보충설명을 했다.

    증언을 종합해보면 신 감독 납치 지령을 내린 이는 김 위원장이다. 그러나 최씨가 신 감독을 납치해오는 유인(誘因)을 제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북쪽은 최씨가 절망감에 빠져 일을 안 하니까 신 감독도 데려와야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최씨도 북한의 움직임을 감지하면서 한편으로 신 감독이 사지에서 자기를 구출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졌음직하다. 이런 맥락에서 신 감독이 “최은희가 북쪽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 것이나 최씨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 말은 통하는 대목이 있다. 김정일은 신 감독을 오수미씨에게서 빼앗아 최씨에게 되돌려준 ‘은인’이다. 필자의 해석론이 독자에게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김정일 ‘작은어머니’ 될 뻔

    김정일은 한때 최은희를 ‘작은어머니’로 삼으려 한 정황이 엿보인다.

    -여담 삼아 여쭤보는 건데요. 당시 40대 후반의 이혼녀이지 않았습니까. 혹시 김정일이 이성적으로 유혹한 적은 없습니까.

    “그건 말도 안 돼요. 그런 건 없어요. 그리고 이것도 내가 진실을 얘기하는 건데, 저는 ‘기쁨조’ 같은 거를 본 적이 없어요. 파티 열면 여성들로만 구성된 밴드가 있더라고요. 그걸 기쁨조라고 이름을 지었겠죠. 음악 시켜 놓고 한쪽에서는 마시고 즐기죠. 그러다가 신이 나면 밴드 앞에 가서 지휘하죠. 나도 끌어다가 지휘를 시켰어요. 김정일만을 위한 기쁨조는 없어요. 우리 모르게 뭔가는 있을지 모르죠. 그런 위치에 있는데 없겠어요.

    오히려 나를 자기 아버지한테 바치려고 하지 않나 하는 공포를 느꼈어요. 한국에서도 그런 소문이 났다죠. 나도 그런 걸 느꼈어요. 한번도 직접 김일성을 만나게 한 적이 없고 사진만 계속 찍더라고요. 옷이 없으니까 양복감 한복감 산더미같이 갖다주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금도깨비, 은도깨비한테 홀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로 내 식대로 한복 해 입었죠. 내가 쇼트헤어에 한복을 입으니까 김정일이 ‘머리가 짧은데도 한복이 잘 어울립니다’ 하더군요. 이 사진을 김일성한테 보여주었던 모양이에요. 김일성이 사진을 보고 나서 ‘괜찮구만’이라고 했대요. 김정일이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한국 영화 ‘원조 스타’ 최은희
    신 감독과 재회하고 나서야 처음 김일성을 만나게 해줬어요. 북한에 간 지 5년 만이죠. 그런 거(김정일 유혹)는 일절 없었어요.”

    -김정남을 본 적이 있다죠.

    “조그만할 때 만났죠. 내가 붙잡혀가던 해 2월 김정일 생일이었죠. 갑자기 저녁 때 초대를 했어요. 그때 봤어요.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도 파티에서 여러 번 만났죠. 허담, 김영남도 만난 적이 있어요. 김정남의 모친 성혜림도 보았죠.”

    최씨는 고영희와 김정철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신 감독은 김정일 위원장이 국가 경영능력을 인정받아서 지도자가 됐다는 말을 했다면서요.

    “어려서부터 제왕 교육을 받았어요. 후계자가 돼서 1970년대부터 노동당을 장악해 실질적인 일을 다 했습니다. 앞에는 김일성이가 있지만 뒤에서 김정일이 정치를 다 했더라고요. 여기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베일에 싸인 탈출경로

    -김 위원장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술 좋아하고 다변(多辯)이고, 한번 마음먹으면 거침없이 해내는 성격이죠.”

    -두 분이 미국에 있을 때 전두환 대통령이 이학봉 민정수석을 미국으로 보내 귀국 협상을 벌였다지요.

    “이학봉씨가 ‘집도 사주고 영화제작 지원도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우리로서는 금방 들어갈 여건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거절했죠. 1988년에 들어오려고 했더니 못 들어오게 막더라고요. 올림픽 끝나고 들어오라고. 사건 터질까봐서. 결국 1989년에 귀국했어요.”

    귀국협상이 결렬되는 바람에 동아일보에서 출간하려던 ‘김정일 왕국’도 괘씸죄에 걸렸다. 안기부의 방해 공작으로 출간이 1년 늦어졌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까지 온 탈출경로를 말해줄 수 있습니까.

    “그건 죽어도 얘기 못해요. 말하지 않겠다고 서약했죠. 뒤에 탈출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비밀로 해둬야죠. CIA에서 북한이 우리에게 50만달러 현상금을 걸고 살해하려는 정보가 들어왔다고 잔뜩 긴장했죠. 미국 들어갈 때도 변장을 했죠. 안가(安家)에 들어갈 때도 직코스로 가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 들어가죠. 미국에서는 버지니아 주 안가에 머무르면서 조지아 주 전화번호를 사용했어요.”

    -김정일 위원장이 해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 CIA에서 그 정보를 탐냈겠죠.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도 빨리 들어오라고 했던 거고….

    “그렇죠. 미국의 정보망이 전세계에 뻗어 있었지만, 그때까지 김정일의 음성도 모르고 있었어요. 우리는 김정일 녹음 테이프를 내놓았거든요. CIA가 김정일이 생일에 동구라파에 와 있던 김경희와 통화한 내용을 도청했던가 봐요. 우리가 갖고 간 녹음테이프와 맞춰보고 김정일 목소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죠.”

    -북한에서 최고권력자인 김 위원장과 바로 통하는 최상류층이 되었는데, 국가 지원을 받으며 영화제작하고 그냥 그 체제에 눌러 살 생각은 안 들던가요.

    “상류층 대우를 받았지만 북한 인민을 볼 때마다 괴로운 감정이 생겼어요. 우리만 대우받으면 뭐해요. 저 불쌍한 사람들…. 우리가 탈출한 후 미국에 오니까 먹을 게 흔해 북한 사람들 생각하며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몰라요.”

    -북한에서 들고 나온 제작비는 돌려줬다지요.

    “오스트리아 빈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230만달러가 예금돼 있었죠. 그걸 우리가 먹었으면 아마 김정일 손에 죽었을 거예요.”

    김일수씨가 이 대목에서 술을 청했다. 술 한잔 마시면서 인터뷰해야 이야기가 술술 잘 나온다는 취지였다. 셋이서 과일을 안주로 스카치 위스키를 홀짝였다. 인터뷰를 하면서 술을 마셔보기는 처음이다. 최씨도 스카치를 온 더 로크로 두 잔 비웠다. 그녀는 “잠이 안 오면 한잔씩 하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했다.

    공전의 히트작 ‘빨간 마후라’

    -최 선생님이 출연한 영화 중에서 애정이 가장 많이 가는 작품은 어느 것입니까.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이 히트해 신필름이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죠.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도 공전의 히트작이고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는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어요. 작품은 계속 히트했는데 회사는 부도가 났죠.”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빨간 마후라’를 단체로 관람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가설극장에서 보았다. 1960년대 시골에는 공터에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하는 가설극장이 가끔 찾아왔다. 전국의 극장을 다 돌고 난 필름이라 흠집투성이여서 화면에 비추면 마치 비가 오는 것 같았다. 필름이 낡아 영화가 돌아가다 끊기면 가설극장은 갑자기 어둠 속에 묻히고 관중 속에서 “빼먹지 말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가난하던 그 시절 최은희, 신상옥의 영화는 최고의 국민 오락이었다. ‘빨간 마후라’의 주연 남우는 신영균씨. 그는 신 감독의 장례위원장을 했다.

    -영화가 계속 히트하는데 영화사는 왜 부도가 납니까.

    “신 감독이 작품에 너무 욕심을 내다보니까…. 신 감독은 작품에 돈을 아끼지 않거든요. 당시 다른 감독들은 필름을 1만자 쓰면 완성하는데 신 감독은 2만자씩 썼어요. ‘빨간 마후라’는 10만자나 썼어요. 공중에 비행기가 떠가는데 구름이 없으면 속도감이 안 나잖아요. 올라가서 찍다가 구름이 없으면 못 찍고 내려오고, 찍은 것도 다 버리죠. 제작비는 많이 들고 아무리 히트하더라도 그만큼 남는 게 별로 없죠. 시장이 작으니까요. 운영 잘못도 있었죠.

    신 감독이 기업화해서 당시에 한류(韓流) 붐을 일으키려고 애썼어요. 신 감독은 선두에서 새로운 걸 개척하려고 하니까 부닥치는 바람도 많고 돌멩이질도 당했죠. ‘성춘향’에서 시네마스코프 컬러를 처음 시도했죠. 다양한 작품을 했어요. 사회성 있는 작품도 했고 문학작품도 다수 했습니다. ‘빨간 마후라’는 수공업적으로 만든 거예요. 요즘에는 디지털이 있으니까 쉽지만 수공업적으로 그만큼 찍었다는 건 정말 놀랍죠.”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는 한운사 작곡에 황문평 작곡이었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 구름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중장년 중에는 지금도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흥얼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주제가였던 이 노래는 국민가요처럼 널리 애송됐다.

    “작곡에도 일일이 간섭했죠. ‘그쪽은 조금 올리고 이쪽은 저음으로 깔아라’ 하는 식으로. 그 작품은 전체가 신 감독 힘이에요. 우리가 용산에서 살 때 응접실 마루에 ‘빨간 마후라’ 필름을 산더미같이 풀어놓고 편집을 했어요.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작품이 동남아 일대에서도 크게 히트했죠. 우리가 대만에 가면 ‘빨간 마후라’ 때문에 VIP대우를 받았어요. 대만 나이트클럽에서도 ‘빨간 마후라’ 곡을 연주해줬어요.

    회사가 부도 나서 빚쟁이가 달려들었어요. 나는 작품에 출연만 했지 회사 운영은 전혀 모르거든요. 신필름 작품을 수십 번 했지만 개런티 한번 안 받고 했거든요. 물론 생활비는 갖다 썼지만 출연료는 없었어요. 의상이나 화장품은 신 감독이 아끼지 않고 사줬지만.

    신 감독은 작품에 너무 욕심을 부렸어요. 1년에 26작품을 했거든요. 그때 스타의 반수 이상이 신필름 전속배우였잖아요. 기업화한 영화사였어요. 빚에 시달리는데 화교(華僑) 영화 상인이 와서 ‘빨간 마후라’를 사겠다고 해요. 귀가 번쩍 뜨이더라고요. 너무 다급해 3000달러에 팔았죠. 그 사람이 그걸 들고 가 동남아 일대에서 10만달러를 벌었대요.”

    “할 만한 역 있으면 연기하고 싶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그 작품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오고가는 대화가 하나도 없잖아요. 순전히 정적으로만 연기해야 하니까 고심했죠. 오히려 동적인 연기는 하기가 쉬워요. 내면 연기 하기가 더 힘들죠. 커트마다 똑같은 표현을 할 수는 없잖아요. 머리 쪽찌고 피아노 치는 장면은 우리나라에서 아마 그 작품이 처음일 거예요.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해서 내가 직접 했죠. 굉장히 어려운 곡이었죠. 두 사람이 대화로 표현 못하는 사랑을 어린애 옥희를 통해서 했죠.”

    한국 영화 ‘원조 스타’ 최은희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영화 ‘탈출기’에 출연한 최은희씨.

    -조연이 도금봉씨였는데 얼마 전까지 삼청동에서 복집을 했지요. 지금은 연락됩니까.

    “소식을 알려고 해도 통 알 도리가 없어요. 어떻게 됐는지. 어디 산속에 푹 파묻혀 있는지 아무리 수소문해도….”

    최씨는 “근래에는 신 감독 몸이 안 좋아 극장에 갈 수 없어 영화를 통 못 봤다”고 말했다.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같은 히트영화는 봤다고 한다.

    “영화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흥행에만 치우치는 감이 있어요. 요즘 검열이 없지 않습니까. 마음 놓고 자기표현을 할 수 있게 됐죠. 그런 게 참 우리로서는 부럽고요. 우리는 검열 노이로제에 걸려서 제대로 작품을 못했거든요. 이런 거 피하고 저런 거 피하고, 이러면 될까, 이러면 괜찮겠지…. 항상 걱정이 앞섰죠.

    요즘은 험악하게 치고받고 쌍소리 마음대로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죠. 처음부터 쌍소리 욕을 하는데 얼굴이 뜨거워 볼 수가 없어요. 주연 여배우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오는 데 나는 질렸어요. 외국에서도 그런 장면은 대역 써요. 인기도 좋지만 배우가 직접 그렇게 하는 게 좋아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앞으로 혹시 영화출연 요청이 있으면 나갈 생각이 있습니까.

    “요즘 만드는 영화 같으면 나 같은 사람 출연할 틈바구니나 있겠어요. 조연이고 단역이고 간에 내가 할 만한 역이 있으면 하고 싶은데 요즘 젊은애들 영화만 만드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명함을 내밀겠어요.”

    최씨는 남북한에서 네 번 메가폰을 잡았다. 남쪽에서 ‘민며느리’(1964)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을 연출했고, 북에서 ‘처녀 교환수’의 감독을 맡았다.

    여배우 중매 나선 中情

    한국 영화사에서 최고의 맞대결은 신상옥·최은희 커플의 ‘성춘향’과 홍성기·김지미 커플의 ‘춘향전’. 한국 최초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된 두 편 영화가 1961년 설에 맞춰 동시에 개봉됐다. 결과는 ‘성춘향’의 압승. 서울에서만 42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춘향전’ 실패로 홍성기 감독과 김지미씨가 결국 헤어지게 됐다죠.

    “난 꼭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작품이 실패했다고 헤어진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부부애와 영화인의 동지애가 있다면 작품 하나 실패했다고 헤어질 수는 없지요. 다른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요.”

    정진우 감독은 ‘한국 최초의 스타 여배우’로 최은희를 꼽았다. 그 다음 세대가 김지미, 그리고 문희 윤정희 남정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정 감독이 저를 최초의 스타 여배우라고 했다고요. 그렇게 평해주면 고맙긴 하지만 우리 선배들도 있잖아요. 일제 때 활동하던 문예봉, 김소영, 한은진씨도 있죠. 한은진씨는 내가 제일 존경하는 선배예요. 그분은 연극을 해 밑바탕이 튼튼한 연기자였죠. 인간성도 좋고, 가정생활도 충실하고, 연기 잘했죠. 처녀 적부터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모셨어요. 2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김지미씨는 가끔 만났나요.

    “우리가 서방세계로 탈출하기 직전 베를린 영화제에서 만났거든요. 그때 우리의 반가운 기분은 아마 아무도 이해 못할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감격스러움을 대하는 상대방의 느낌은 전혀 달랐어요.”

    -안기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겠습니까.

    “안기부도 그때 쫓아와 있었어요. 우리가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이해는 되는데 야, 사람의 진실이 이렇게 통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지미는 앙금이 지금까지 있는 거 같아요. ‘춘향전’ 때의 앙금. 우리는 승자(勝者)니까 그런지 몰라도 미안한 생각까지 드는데, 걔는 아직까지 그런 앙금이 있는 거 같아요. 서먹서먹해하더라고요.”

    간통죄 被訴 1호

    -신 감독이 여배우 X씨 커플을 맺어주는 계기를 만들었다죠.

    “1972년 베를린 영화제 때 이야기죠. 윤이상씨의 오페라 ‘심청’ 초연 관람을 위해 독일에 들른 피아니스트와 베를린 영화제 출품작의 주연 여우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신 감독이 만들었어요. 옆에서 도와준 거 같아요. 나도 거들었어요.

    잘 아는 중앙정보부 간부가 한번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제게 부탁하더군요. ‘피아니스트의 부모가 반대를 하는데 결혼을 꼭 시켜야 되겠다. 후배니까 옆에서 얘기를 잘 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X씨를 만나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부모가 반대하더라도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꿋꿋이 밀고 나가라’는 얘기를 해줬죠. 제가 그런 역할을 했어요. 이런 얘기 처음 공개합니다.”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박정희·육영수 부부와도 가깝게 지냈다.

    “우리가 영화를 만들면 청와대에서 시사회를 자주 했어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는 프린트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밤 12까지 기다렸다가 박 대통령과 육 여사 모시고 시사회를 했죠. 부부가 함께 식사 초대도 여러 번 받았어요.”

    -한국 최초의 스타 여배우가 돈은 별로 모으지 못한 것 같군요.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나는 평생 출연료 안 받고 일만 했으니까. 출연료 받아 남들같이 땅이라도 사놓았으면 누구 못지않게 부자가 됐겠지만, 우린 지금 사는 집 하나밖에 없어요. 이것도 신 감독 입원해 있을 때 팔았어요. 이사해야 돼요.”

    -첫 남편 김학성씨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정진우 감독은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날리던 카메라맨이었다고 말하더군요.

    “내가 철없을 때였죠. 나하고 열두 살 차이거든요. 그 양반에게는 첫 결혼에서 생긴 아이들이 있었죠. 누나 김연실씨가 영화배우를 하면서 동생을 동경 유학시켰죠. 유학시절에 촬영기술도 배우고 권투도 했더라고요. 젊은 사람이 공부하기는 싫고 영화판, 권투판에 얼씬거리느라 공부를 제대로 한 거 같지는 않아요. 영화에 대한 열정은 있었어요. 누나가 어머니 노릇까지 했죠. 요즘 하는 말로 마마보이였어요.

    ‘새로운 맹서’를 촬영하다가 처음 만났죠. 물정 모를 때 동정심에서 결혼하게 됐지만 결혼생활은 불행했어요. 3년도 못가 깨졌죠. 6·25 사변 나고 인연이 끊어지고 별거에 들어갔죠. 1953년 부산에서 신 감독이 ‘다큐멘터리 코리아’라는 작품을 할 때 춘향전 한 장면을 다큐멘터리에 넣고 싶다고 출연교섭을 해왔어요. 나는 그때 신협에서 춘향전을 했거든요. 이도령은 김동원씨, 춘향이 나고, 이해랑씨가 방자였죠. 나는 그래도 연극을 하면서 영화 세 편에 출연한 유명배우였죠. 신 감독은 영화 두 편을 찍은 무명감독이었어요.

    신 감독이 연극을 참 좋아했어요. 연극 하면 꼭 와서 보더라고요. 유난히 키가 크고 흐트러진 머리에 쫙 웃는 게 무대에서도 보이더라고요. 본인 말로는 내가 인천에서 공연하면 인천까지 따라와 봤다고 그러더라고요. 결국 그런 게 인연이 돼서 좋아하게 됐죠. 1954년 정식 부부가 돼 신 감독이 저를 주연배우로 하는 첫 작품으로 이광수 원작의 ‘꿈’을 만들었죠. 결혼식은 안 올렸어요. 신 감독이 그런 형식을 좋아 안 해요. 암만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어요. 부친상(喪) 때도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며 상제가 상복을 입지 않았어요. 그렇게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어요.”

    최씨가 신 감독과 결합하자 김학성씨가 고소를 했다. 간통죄 피소(被訴) 1호였다. 언론은 최씨를 ‘한국의 잉그리드 버그만’으로 불렀다. 버그만은 가정을 버리고 유부남인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져 ‘타락한 우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최씨의 경우 다행히 혼인신고가 돼 있지 않아 간통죄가 성립되지 않았다.

    바람기 많았지만 하나뿐인 사랑

    그녀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한 사람은 신 감독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혼했다가 북한에서 다시 만난 이 커플을 두고 ‘세기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 감독을 유혹하는 여성이 많았죠.

    “많았죠. 멋쟁이거든요. 스위트한 사람이에요. 애인감으로는 최고죠.”

    한국 영화 ‘원조 스타’ 최은희

    자택에서 필자와 함께 선 최은희씨.

    -최 선생님한테도 스위트하게 해줬습니까.

    “그러니까 사랑했지요. 가장으로서는 점수가 떨어져요. 자기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 항상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이죠. 그러다 보니 가정에는 조금 등한할 수 있거든요. 이해해줘야지요. 그래도 미국에서 3, 4년은 가장 노릇을 충실히 했죠. 가족이 다 모여서 밥 먹고….

    큰딸은 시집가서 못 왔고 세 아이를 공부시키려고 미국에 데려왔거든요. 그때는 나무랄 데 없이 잘했어요. 문짝도 바꿔 달고 못 박고 액자도 걸고. 작품 활동을 안 할 때라 심지어 김장도 도와줘서 같이 했죠. 주부로서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죠. 아마 신 감독도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LA쪽으로 와서 감독으로, 제작자로 다시 동분서주하게 됐죠.”

    -오수미씨 이전에도 바람 피워 속 썩인 적이 있습니까.

    “몰래 피웠겠죠. 바람 안 피는 남자 어디 있어요. 여기 순진한 김 선생도 아마 바람 피웠을 거예요. 근데 얼마나 길게 쓰려고 이렇게 많은 걸 물어요? 이거 나오면 나 얼굴을 들고 못 다니겠어. 너무 자세히 쓰면 자서전 낼 필요 없어지는 거 아닌가요?”

    -신 감독은 예술적으로는 천재인데 사회생활에서는 바보라는 말이 있더군요.

    “바보예요. 어떤 모임에서 이야기가 오가면 가만히 듣고만 있어요. 그러다가 영화 얘기만 나오면 신들린 사람처럼 화제를 주도하지요. 어떤 때는 대여섯 살 먹은 아이 같아요. 어디 길을 갈 때도 내가 오든지 안 오든지 개의치 않고 혼자 가요. 어린아이들이 엄마 손 놓고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듯 그런 식이에요.”

    안방에 영정을 모셔놓고 이렇게 흉을 봐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고인이 지하에서 귀가 간지러울 것 같다.

    “둘이 연애할 때 신 감독을 두고 ‘젊은 놈이 교만하고 건방지고 선배들한테 인사성이 없다’는 소문이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제발 선배들 보면 꾸벅 인사 좀 하라고 충고했죠. 한번은 을지로 입구 쪽으로 둘이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키가 큰 윤봉춘 감독이 걸어오더라고요. ‘여보 빨리 인사해요’라고 했더니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차렷 자세를 하고 꾸벅 인사해요. 윤 선생이 깜짝 놀랐다가 웃더라고요. 신 감독이 이렇게 인사도 할 줄 아느냐고 하면서.”

    -두 분이 좋아하는 음식은 비슷했습니까.

    “신 감독은 냉면을 좋아했어요. 저는 서울 출신이라 냉면을 별로 안 좋아했죠. 그 양반은 냉면 평론가입니다. 신 감독 따라다니면서 냉면을 하도 많이 먹어 저도 냉면 맛을 구별할 수 있게 됐어요. 이번에 돌아가시기 전에도 인스턴트 쌀국수를 달게 잡수셨어요. 이승에서 마지막 식사였죠.”

    ‘열심히 살다간 배우’로 기억되길…

    신 감독은 함북 청진, 최씨는 경기도 광주 출생이다.

    -한국 연극의 트리오 하면 손숙 박정자 윤석화씨를 꼽는데, 박씨가 중학생 때 최 선생님 연극 보고 “감동 먹었다”고 토로하더군요.

    “그런 얘기 나한테도 여러 번 했어요. 신협에서 셰익스피어 ‘오셀로’ 할 때 봤대요. 그때 학생 동원을 많이 했거든요. 그 연극 연출자이던 박상호 감독 동생이죠.”

    학력에 관해 묻자 최씨는 “꼭 그런 것까지 답해야 하나요” 하며 말하기 싫은 기색을 보이다가 “종로 6가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학비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극단 아랑에서 책을 읽으며 지식의 높이를 키웠다.

    “선배들이 책을 권해줘 그때 많이 봤죠.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기론’도 읽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는데, 지금까지의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요.

    “불행했다고만은 할 수 없죠.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었고 사랑하는 남편을 뒀죠. 출산은 못했지만 애들이 참 착해요. 교대로 와서 나를 도와주니 마음이 안정돼요. 그렇지 않으면 미칠 거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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