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As Times Go By’ 선율 타고 흩날리는 아랍 항구의 바다 냄새

  • 사진·글 이형준

    입력2006-09-06 18: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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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카사블랑카(Casa Blanca)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잡한 항구도시다. 포르투갈어로 ‘하얀 집’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도시는 온통 흰색 건물로 덮여 있다. 대서양에 접해 있어 늘 온난하고 따뜻한 기후를 자랑하는 이 도시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포르투갈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15세기 무렵부터였다. 그렇지만 이 도시가 지구 반대편의 우리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영화 ‘카사블랑카’가 만들어진 1942년 이후부터다.

    만든 지 60년이 넘은 영화 ‘카사블랑카’는 지금도 ‘세계의 명작’ ‘영화광이라면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 등등의 리스트에서 어김없이 수위를 차지한다. 사랑하는 여인 일리자(잉그리드 버그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주인공 릭의 쓸쓸한 표정은 배우 험프리 보가트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내면을 잘 묘사한 영화의 무대답게, 현실의 카사블랑카에서 만나는 것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향취를 품고 있다.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흰색 건물과 모스크가 어우러진 카사블랑카 시내 풍경.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석양을 즐기기 위해 항구 주변을 산책하는 시민들.

    뒷골목의 활력, 어시장의 혼돈

    영화의 흔적을 둘러보려는 관광객은 먼저 모하메드 5세 광장에 있는 하얏트리젠시 호텔을 찾아야 한다. 호텔 출입구를 지나 왼쪽 모퉁이를 돌면 영화의 핵심무대인 릭스 카페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릭스 바’가 나타난다. 온통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먼의 영화 포스터나 사진으로 도배된 이 카페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영화 속 광경과 똑같다. 특히 바 중앙에 있는 피아노는 당장이라도 흑인 피아니스트 샘이 나타나 ‘As Times Go By’를 연주하며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어 보일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릭스 바는 아침부터 문을 열지만 영화 속 분위기를 만끽하려면 역시 저녁 시간대가 제격이다. 시가를 연신 피워대는 중년신사와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랍 여성이 얼굴을 맞댄 채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이고, ‘카사블랑카’의 색 바랜 오리지널 흑백필름을 감상하며 옛 추억에 잠겨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모두들 단순히 영화의 배경장소에 온 것이 아니라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기분에 취한 모습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요 배경인 카사블랑카의 뒷골목도 잊지 않고 찾아야 할 공간이다. 릭스 바가 위치한 하얏트리젠시 호텔에서 5분쯤 걸으면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으로 단장된 게이트를 지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골목에 닿는다. 낮에 만나는 골목의 분위기는 독일군과 험프리 보가트가 쫓고 쫓기며 긴장을 자아내던 영화 속 풍경과는 사뭇 다르지만, 대신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부산한 움직임은 싱싱한 활력을 품고 있다.

    아랍식 재래시장 ‘슈크’가 있는 메디나 지역은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카사블랑카의 유일한 도심이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과일 가판대와 원색의 옷가지를 쌓아놓은 슈크 사이를 걷다 보면 전통을 온몸으로 전하는 장인들을 만나게 된다. 소규모 공방에 앉아 흙으로 만든 도자기에 화려한 물감으로 색칠하는 이들의 작업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 손놀림에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카사블랑카를 말하면서 항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항구에 들어서면 지금까지 보던 여유롭고 한적한 도시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서는 만선의 기쁨을 즐기며 입항하는 어선이 줄을 잇고 다른 쪽에서는 한푼이라도 높은 가격에 생선을 팔려는 상인들이 고함을 질러댄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시끄럽고 복잡한 항구는 카사블랑카 시민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다. 사는 사람, 파는 사람, 짐꾼과 화물차가 어우러진 인산인해의 항구는 마치 인력시장 같다.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시내 곳곳의 노천카페는 카사블랑카의 명물이다.

    사랑 나누는 연인들, 기도 올리는 신도들

    이른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분주하기 이를 데 없던 항구는, 해질 무렵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그 많던 상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석양을 즐기려는 방문객이 하나둘 모여든다. 해변을 찾은 젊은 연인들은 다른 이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사랑을 속삭이지만, 바로 그 옆에서는 모로코 전통복장 차림을 한 이들이 카펫을 깔고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 어느 것이 이 ‘아랍권 도시’의 진면목인지 말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카사블랑카는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공간이다. 영화 속 광경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고급 바와 부산한 어시장이 한치의 모순도 없이 공존한다. 조금만 천천히 골목을 걷고 해변을 산책해보자. 어디선가 본 듯한 풍광을 음미하는 동안 당신은 도시 전체가 한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카사블랑카의 하산 모스크는 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이다.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영화 ‘카사블랑카’의 포스터로 장식한 릭스 바 내부.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영화의 무대가 된 하얏트리젠시 호텔 입구.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어선이 즐비하게 모여 있는 포구. 바다 색깔과 건물 색깔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시장에서 어패류를 파는 노점상.

    ‘카사블랑카’가 놓친 카사블랑카의 진면목

    시장 골목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만나는 거리의 물장수.



    여행 정보

    직항편이 없는 카사블랑카는 네덜란드항공(KLM)이나 에어프랑스(AF)로 유럽을 경유해 가는 것이 편리하다. 배를 타고 가려면, 스페인 최남단 알헤시라스에서 페리를 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 세우타에 닿은 뒤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모로코는 비자 없이 3개월간 여행할 수 있다. 공항이나 항구에서 허가 없이 사진을 촬영하다 적발되면 조사를 받아야 하므로 주의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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