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목회자로 살아가는 ‘1·21사태 무장공비’ 김신조

“‘살아남은 자’의 고통에 자포자기… ‘공비 귀신’ 겪고 신앙 얻었죠”

  • 김승훈 동아닷컴 기획취재팀 기자 huni@donga.com

    입력2006-09-13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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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와대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 비둘기와 태극기가 결혼예물
    • 처형된 부모, 수용소 끌려간 형제 잊으려 술, 도박에 빠져
    • 결혼생활 힘들어하던 아내, 자살하려 쥐약 모으기도
    • 아이들 ‘공비 자식’ 소리 안 듣게 하려 이름까지 바꿔
    • ‘투항’을 ‘생포’로 발표한 건 아직도 억울
    목회자로 살아가는 ‘1·21사태 무장공비’ 김신조

    김신조 목사 가족. 딸 남희씨는 목사와 결혼했다.

    초야에 묻혀 목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김신조(金新朝·64) 목사’. 그를 다시 불러내는 계기가 된 것은 지난 4월 신문에 난 짤막한 기사 하나였다.

    ‘북악산 38년 만에 일반에 개방’

    ‘개방’과 ‘38년 만’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강하게 와 닿았다. 38년 만에 개방된다는 것은 그전에는 북악산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는 말이다. 38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북악산이 폐쇄됐을까. 기사 전문은 이렇다.

    ‘4월1일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北岳山·342m)이 1968년 북한 특수부대원의 청와대 습격으로 폐쇄된 이후 38년 만에 일반에게 개방됐다. 개방구역은 총 193만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약 4분의 3에 달한다. 4월에는 1차적으로 홍련사에서 촛대바위까지 약 1.1km의 구간만 개방됐다. 오는 10월에는 와룡공원에서 숙정문, 촛대바위로 이어지는 약 1.6km 구간이, 내년 10월에는 청와대 뒷산이 모두 개방된다.’

    ‘1968년 청와대 습격’이라는 구절이 눈을 사로잡았다. 당시 사건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다. 그 속에서 ‘김신조’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까마득히 잊혀졌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1·21 사태’ 무장공비 중 유일한 생존자.



    기자적 호기심을 떠나 개인적으로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하나둘 뒤적이던 끝에 그가 충남지역의 S교회 부목사로 있음을 알게 됐다. 그곳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전도사는 “김 목사께서 다른 곳으로 옮긴 지 꽤 됐다”며 “지금은 서울 S교회에 있다”고 했다. 서울 S교회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더니 그는 현재 경기도에 있는 S교회 목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 목사를 처음 만난 건 4월 하순경이었다. 새벽부터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가서 S교회에 전화를 걸었더니 전도사가 승합차를 끌고 나왔다. 차에 올라 교회로 향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예배당은 신자들로 시끌벅적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 김 목사를 만나 간단한 수인사를 나눴다. 기자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그날 김 목사는 “마흔 가까이 돼서야 하나님을 만나 영혼의 구원을 얻었다”며 종교인으로 살아온 삶에 대해 언급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지나온 삶이 궁금해졌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고, 북한에서는 어떻게 지냈으며,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됐는지….

    하지만 처음 만난 자리에서 다짜고짜 개인 신상에 관한 것들을 물을 수는 없었다. 김 목사의 그날 일정이 빡빡해서 긴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부족했지만, 개인적인 삶에 대해 물어볼 만큼 신뢰 관계도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서울로 돌아왔다.

    김 목사를 다시 찾은 건 7월5일이었다. 수요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연단에서 예배를 집도하던 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자를 맞았다. 자리에 앉아 예배를 봤다. 예배를 마친 후 김 목사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김 목사는 간간이 옛일을 곁들여가며 목자로서의 삶에 대해 들려줬다. 마침내 그에게 기자 신분임을 밝혔다.

    “목사님께서 살아온 세월을 글로 쓰고 싶습니다.”

    김 목사는 “일단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예배당 앞에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에 올랐다.

    “그동안 여러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왔지만 안 했어요.”

    김 목사는 짧게 언급한 뒤 침묵을 유지했다. 고심하는 듯했다. 식당에 도착해서도 그는 내내 말이 없었다.

    반공강연 기수에서 목사로

    그는 1970년대 반공강연의 기수였다. 정부의 요청으로 군부대, 학교 등 전국을 누비며 반공강연을 했다. 언론도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거리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언론에 많이 시달렸고 그 때문에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이름까지 바꾸고 조용히 살려고 했지만 언론은 그냥 놔두지를 않았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그는 인터뷰 제의를 받아들이는 데 많이 망설였다. 점심을 같이 먹는 동안에도 내내 침묵을 지켰고, 기자의 시선을 피한 채 힘겹게 숟가락을 드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자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방황하며 힘겹게 살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평온하게 살게 됐는데, 이제 다시 언론에 그의 얘기를 쓴다는 게 마땅한 일인가.’

    갈등 끝에 그에게 말했다.

    “인터뷰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목사님 찾아뵙고 좋은 말씀 듣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괜히 부담을 드려 죄송합니다.”

    김 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갈 때쯤, 정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내 삶을 쓴다면 댐을 지을 때 기초공사도 하고 철근도 세우고 하듯, 출발부터 말해야겠죠. 이번 주는 도저히 시간을 못 낼 것 같고, 다음주 월요일에 시간을 내도록 하죠.”

    김 목사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어렵게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두 시간 정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나요? 질문 목록을 작성해서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도록 하죠.”

    김 목사는 월요일 오후에 연락을 주겠다며 연락처를 적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일 12시쯤 그에게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다음에 기회를 봐서 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 사이에 또 수없이 갈등한 듯했다. 그 고뇌가 목소리에 묻어났다.

    아이들의 놀라운 변화

    이후 한동안 김 목사와 연락하지 않고 뜸하게 지냈다. 왠지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8월2일 수요일, 다시 S교회를 찾았다. 신도들이 이날 수련회를 떠나서 그런지 교회는 텅 비어 있었다. 김 목사는 밀짚모자를 쓰고 제초작업을 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시골 농사꾼의 모습이었다. 그는 기자를 보자 “인터뷰 때문에 온 것이라면 아직 준비가 안 됐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 때문에 온 게 아니라 목사님을 뵙고 싶어서 왔다”고 하자 “그럼 예배나 드리고 가라”고 했다.

    그가 풀을 뽑는 동안 예배당에서 땀을 식히며 김 목사의 부인 최정화 전도사에게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 인터뷰 내용은 지난 4개월여간 김 목사를 만나며 그와 주고받은 이야기와 부인 최 전도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쓴 것이다. 글에 나오는 연도는 김 목사가 태어난 1942년을 기준으로 환산해서 썼음을 밝혀둔다. 그는 “스물일곱 살 때…” “마흔 살 때…”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무척 바빠 보이는군요.

    “평일에는 수요일 오전 10시, 목요일 오후 8시에 예배를 드리고, 일요일에는 오전 11시에 예배를 드려요. 월요일에는 서울에 있는 S교회에 나갑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시간에는 간증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참, 하나가 빠졌네요. 잠들기 전에는 꼭 서재에서 아내와 함께 기도하며 하루를 돌아보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목회자로 살아가는 ‘1·21사태 무장공비’ 김신조

    1968년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침투했다 생포될 당시의 김신조씨. 이 사건을 계기로 북악산 출입이 금지됐고, 38년 만인 지난 4월 부분적으로 다시 개방됐다.

    ▼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오래 전부터 아내가 교회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안 갔어요. 교회는 나약한 인간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제 마음을 움직인 건 아이들이었어요. 아이들을 보며 교회라는 곳을 달리 생각하게 됐어요. 제 곁에 통 오지 않으려 하고, 늘 주눅이 들어 어두운 얼굴로 지내던 아이들이 교회에 나가고부터는 확 달라졌거든요. 나날이 밝아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제게 살갑게 말도 붙이고, 성격도 활달하게 바뀌었어요. 그게 참 신기했어요. 한 2년간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교회에 나갔죠.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 후 그때 처음으로 아내한테 괜찮은 선물을 준 것 같아요.”

    ▼ 처음 교회에 갔을 때는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그날 목사님이 성경의 한 구절을 읽어주셨어요.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걷는 장면이었어요.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아내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집에 가자’고 했어요. 그날 집에 와서 아내한테 ‘이 봐라, 어떻게 사람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냐, 순 거짓말이다’며 난 못 믿겠다고 했죠(웃음). 그랬더니 아내가 ‘진심으로 믿으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고.”

    ▼ 목사가 되기까지 부인의 힘이 컸겠군요.

    “아내가 신앙생활을 참 잘했어요. 아내는 믿음을 믿음으로 끝내지 않고 제게 행동으로 보여줬거든요. 처음에는 아내의 신앙생활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교회 간다며 집을 비울 때가 많았거든요. 이상하게도 그때는 ‘아내가 나를 버렸다’는 배신감, 그로 인한 ‘혼자라는 외로움’이 크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자주 행패를 부렸죠. 아내는 그 모든 걸 감수하며 제 곁을 지켰어요.”

    내 몸에 숨어 있던 ‘공비 귀신’

    ▼ 아무튼 교회에 나간 뒤로는 신앙생활이 순조로웠나요.

    “그렇진 않았어요. 생각해보세요. 북한에서는 종교라고는 모르고 살았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공산주의 교육만 받아왔는데…. 딱딱하게 굳어버린 제 사고가 쉽게 바뀌겠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죠.”

    ▼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하나님을 만나게 됐습니까.

    “교회를 다닌 지 1년쯤 됐을 때였어요. 김기동 목사님이 저를 위해 안수기도를 해주셨어요. 제 머리 위에 손을 얹고서 기도하는데, 목사님이 기도하는 내내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어요. 결국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고 말았어요. 정신을 차린 제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네 몸속에 공비 귀신이 둘 숨어 있다. 그중 한 명은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그 말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 사건은 제 치부였으니까요. 그런데 목사님께서 그 일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1968년 1월, 청와대 습격이 실패해 동료 두 명과 북으로 달아났어요.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두 명의 동료가 앞장서고 제가 뒤를 엄호하며 북으로 올라갔어요. 그런데 어느 길모퉁이를 돌 때쯤 앞서 가던 두 명이 총을 맞고 죽었어요. 그 중 한 명은 머리에 맞았죠. 그날 이후 ‘내가 앞장을 섰으면 그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자책감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죠. 목사님께서 그 일에 대해 말씀하시며 ‘네 몸속의 공비 두 명이 너를 죽이려고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해 분해하며 나간다고 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그때 ‘영적 체험’을 한 겁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영적 체험’을 한 이후 김 목사의 삶은 달라졌다.

    “그때가 1981년 4월이었어요. 서른아홉일 때죠. 한국에서 지낸 지는 13년째 되던 해였고. 그때껏 남한에서 지내며 몸에 밴 나쁜 습관들을 단번에 없앴어요. 술, 담배, 도박 모두 끊었죠. 그리고 간증집회에 열심히 다니며 10여 년을 바쁘게 살았습니다. 외국에도 간증 집회하러 갔어요. 캐나다에서는 200여 개 교회를 돌아다니며 간증 집회를 했습니다.”

    술, 담배, 도박에 찌들어

    김 목사는 간증 집회를 하는 틈틈이 신학 공부도 열심히 했다. 1991년 서울 침례신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에는 신학원을 수료했다. 1998년 1월22일, 그가 남파된 지 꼭 30년째 되던 날 목사 안수식이 거행됐다. 무장공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짊어져야 했던 중압감, 방황과 절망, 불행의 그림자에 종지부를 찍고 목사로 새로 태어났다.

    ▼ 목사가 되셨을 때 감회가 남달랐겠군요.

    “제가 진정한 한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이었죠. ‘무장공비 김신조’가 아닌 ‘인간 김신조’로 새로 태어난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지금껏 세 번 태어난 것 같아요. 한 번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북에서 생활했고, 또 한 번은 1·21 사태 때 투항함으로써 남한에서 다시 태어나 ‘무장공비 김신조’로 살았고,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 ‘인간 김신조’로 태어나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죠.”

    ▼ 부인은 어떻게 만나게 됐습니까.

    “제가 결혼하던 1970년 당시만 해도 저는 꽤 유명했어요. 그래서 이름값 한다고 여자들에게서 편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대부분 결혼해달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는 편지가 있었어요. 발신인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았어요. 이상하게도 그 편지를 읽을 때면 용기를 얻게 되고, 진실함이 느껴지더군요. 그렇게 한 5개월 정도 편지를 받았는데, 하루는 마지막 편지라며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보냈어요. 겉봉에 ‘최정화’라고 적혀 있더군요. 즉시 그이에게 남대문 워커힐다방에서 만나자고 답장을 보냈어요. 편지를 읽는 동안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감정적으로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어요. 아마도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시려 했나봐요. 아내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됐으니까요.”

    ▼ 첫인상은 어땠나요.

    “솔직히 좀 실망했어요. 편지에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날씬하다고 썼는데, 썩 미인은 아니었거든요(웃음). 하지만 마음씨가 참 고왔어요. 아내는 한 주간지에 난 제 기사를 보고 편지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군요. 그 주간지 인터뷰 때 기자들이 제 소망을 묻길래, ‘장가들어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거든요. 아내는 그걸 보고 위로나 해주자며 편지를 보내게 됐고, 편지가 거듭될수록 위로가 사랑으로 바뀌어갔다고 하더군요.

    1970년 3월에 결혼했습니다. 만난 지 5개월쯤 됐을 때 제가 프러포즈를 했어요. 전남 벌교에 있는 아내 집에 찾아가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뵙고 인사도 드렸습니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무장공비’라는 딱지를 달고 다닐 때라 아내 집안에서 반대가 심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따뜻하게 맞아주시며 허락하시더군요. 정말 감동했습니다. 결혼식은 서울시민회관에서 했어요. 지금도 생각나는데, 저희의 결혼예물이 좀 특별했어요. 저는 아내에게 비둘기를, 아내는 제게 태극기를 예물로 줬으니까요.”

    ‘공비 마누라’ ‘공비 자식’

    ▼ 결혼자금은 모아놨던 모양이죠.

    “강연을 하며 모은 돈이 좀 있었어요. 거기다 빚을 좀 내고, 처가에서 돈을 보태 15평짜리 아파트 전세를 얻을 수 있었어요.”

    ▼ 결혼 후에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1년이 좀 지났을 때 남희가 태어났어요. ‘남희’는 ‘남쪽에서 얻은 희망’이라는 뜻이에요. 제가 지었습니다. 남희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정말 남한에서 살기 시작한 후 아이들을 통해 처음으로 희망이란 걸 봤어요. 아들은 2년 뒤인 1973년에 태어났어요.”

    ▼ 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도 태어났으니 더없이 행복했겠군요.

    “그렇지 못했어요. 1·21 사태 때 31명이 남으로 넘어와 그중 한 사람은 살아서 북한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30명 중 29명이 죽었잖아요. 저 혼자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요. 어딜 가든 사람들이 저를 감시하는 것 같아서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두려웠어요. 게다가 전향해서 남한 정부에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북한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될지도 몰랐어요. 늘 불안했죠. 그리고 밤마다 저 때문에 처형된 부모님,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누님들과 동생들 생각에 너무 괴로웠어요. 불면증에 걸려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런 불안감, 두려움, 괴로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셨어요. 매일 술에 찌들어 살았어요. 보통 한자리에서 소주 네 병에, 맥주 스무 병쯤 마셨어요. 담배는 하루에 3갑 이상씩 피웠습니다. 도박에도 손을 댔어요. 제가 서빙고에 있을 때 화투라는 것을 처음 배웠는데, 그때 잠깐 배운 실력으로 한 5, 6년간 화투에 빠져 살았어요. 집에는 새벽에 잠깐 들어가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왔죠.”

    ▼ 부인께서 여간 힘들지 않았겠습니다.

    “그렇죠.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아내에게 많이 했어요. 북한의 보복이나 사람들 시선 때문에 바깥에서는 아무 짓도 못해요.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어요. 그러니 그런 억눌린 감정을 어디에다 풀었겠어요. 집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렸죠. 밥상 때려엎고, 손찌검을 하고…. 아내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걱정돼 다시 들어오곤 했어요. 1년이면 두세 차례씩 집을 나가고 들어오는 일이 되풀이됐어요.

    아내는 자살까지 하려 했어요. 조금씩 모아둔 쥐약을 먹으려 했죠. 나중에 제게 그러더군요. ‘내가 죽으면 언론에서 내 죽음을 당신과 연결시켜 이상하게 쓸 것 같아서 죽지 못했다’고. 이후 아내는 날이 갈수록 빼빼 마르더니 체중이 40kg으로까지 줄었어요. 그러다 악성 위염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습니다.”

    다음은 김 목사의 부인 최정화 전도사의 말이다.

    “처녀 때 교회에 다니다가 결혼하면서 신앙생활을 중단했어요. 그러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교회에 다시 나갔어요. 그 뒤 김기동 목사님께 큰 은혜를 입었고, 예배를 드릴 때 영적 체험을 하게 됐어요. 제 몸에 있던 친정아버지, 시아버지 귀신이 나갔어요. 그러면서 악성 위염이 씻은 듯 단번에 나았습니다. 그때 알게 됐어요. 남편이 북에서 받은 교육 때문이 아니라 귀신 때문에 남한에서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남편 몸에 깃들인 귀신만 쫓아내면 남편이 제대로 생활하겠구나’ 하는 믿음이 암흑 같은 그 시절을 이겨내게 했어요.”

    다시 김 목사와의 대화가 이어진다.

    ▼ 아이들의 삶도 말이 아니었겠는데요.

    “아이들은 정서가 불안했어요. 늘 기가 죽어 있고 얼굴이 굳어 있었어요. 모든 사람을 두려워했어요. 큰아이는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발작을 일으키곤 했어요. 경기를 일으키는 거였죠. 둘째아이는 밤마다 이부자리에 오줌을 쌌어요. 그런 생활이 10년 가까이 이어졌죠. 정말 사는 게 아니었죠. 자살하던지, 정신병자가 돼 병원에 들어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예요.”

    ▼ 힘든 삶 속에서 전향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전향 후 남한에서 한국인으로 살며 결혼을 했는데도 ‘무장공비’라는 딱지가 계속 따라다녔어요. 아내는 ‘공비 마누라’, 아이들은 ‘공비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사를 참 많이 다녔어요. 제 신분이 노출되면 바로 이사했어요. 신분이 드러나면 저뿐 아니라 아내나 아이들까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거든요.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아이들이 놀림 받는 건 정말 아비로서 참기 힘들더군요. 아이들을 위해 주민등록상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안 되더군요. 이름을 바꾸고 다른 데로 이사 가도 어떻게 알았는지, 그 동네 반장이 제 소문을 쫙 내요. 제게 자유를 줬으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도 줬어야죠. 정말 나중에는 29명의 동료와 함께 죽지 않고 전향한 것이 후회되더군요.”

    영화 ‘실미도’ 때문에 아들 파혼

    ▼ 지금 자녀들은 어떻게 지냅니까.

    “딸아이는 목사와 결혼해서 경기도 모 교회의 사목으로 있어요. 어렸을 때 사모는 안 되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하나님 품에 안겨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죠. 아들은 미국에서 지내고 있어요.”

    ▼ 영화 ‘실미도’ 때문에 아드님이 파혼했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38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한국에 정착하면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어요. 아이들도 공비 자식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힘겹게 살았어요. 세상에서 잊혀 조용히 지내고 싶었고,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마음의 평안도 찾았는데…. 상업영화 한 편이 어렵사리 찾은 가정의 행복을 깼죠. 처음에는 법적으로 문제 삼으려 했는데, 그것도 하나님에게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 감내해야 하는 시련 중 하나려니 생각하고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 요즘 탈북자 행렬이 줄을 잇고 있고, 국내에도 많이 들어와 살고 있는데, 그분들도 젊은 시절의 목사님처럼 살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탈북자들을 위해서 간증 집회를 자주 다녔어요.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듣고 용기도 주고…. 탈북자들은 말이죠, 무엇보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고 괴로움에 시달려요.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힘들고 불안정하게 삽니다. 결국 그들도 제가 그랬듯, 술과 담배에 찌들어서 살고 심한 경우에는 어렵게 이룬 가정이 파탄나곤 하죠.”

    ▼ 탈북자들이 사기를 당해 정착금을 모두 날렸다는 기사도 심심찮게 나오죠.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결혼한 후 부동산에 손을 댄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찾아와서 ‘월급 모아서 언제 집 사냐, 애도 둘이나 있는데 빨리 돈 벌어야 하지 않겠냐’며 동업해서 건물을 하나 짓자고 하더군요. 부동산 경기가 한창 좋을 때라 솔깃했죠. 그래서 그때까지 모아놓은 돈을 건물 짓는 데 다 투자했어요. 그런데 건물이 완공되자 동업하자고 했던 사람이 약속을 깨고 건물 내 상가를 다른 사람과 똑같은 조건으로 분양받으라고 하더군요. 정말 기가 막혔지만 별수 없었어요. 있던 집도 날렸으니 분양을 받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거기서 아내는 양품점을 했어요. 2년 동안 하다가 장사도 제대로 안 되고 해서 동업자에게 2년 전 가격 그대로 팔았어요. 제게 잘해주신 분도 많지만, 이곳 경제와 사정에 어둡다고 저를 이용하려던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김신조 목사는 1942년 6월2일 함경북도 청진시 수남동에서 아버지 김중엽, 어머니 이분옥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경옥, 경숙 두 누나가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 신복과, 여동생 정숙, 정복, 정자가 있다. 모두 세 살 터울이다.

    ▼ 집안 어른 가운데 특별히 영향을 받은 분이 있다면.

    “작은할아버지입니다. 만주와 함경도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하셨죠. 광복을 위해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 뿌듯했습니다.”

    공학도 꿈꾸던 소년

    ▼ 어렸을 때 집안 형편은 어땠나요.

    “어머니가 방앗간을 하셨고, 아버지는 공장에 나가셨어요. 방앗간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배는 안 곯았어요. 고무신도 귀하던 그 시절에 구두를 신을 정도로 넉넉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열여섯 살 때 모든 사유재산이 국유화됐어요. 우리 집 살림밑천이던 방앗간도 공산당에 헌납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에는 배급쌀을 먹었어요. 그때부터 배가 고프다는 게 어떤 건지 뼈저리게 알게 됐죠.”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아버지는 자상하셨어요. 공산당이 조직되기 전에는 집안에 충실했는데, 당이 조직된 뒤로는 집안에 소홀해지셨죠. 그 때문에 어머니와 종종 다투셨어요. 어머니는 공산당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거죠. 7남매를 키우는 것만도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부지런하고 꼼꼼한 분이셨어요.

    제가 투항한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처형되셨고, 누나들과 동생들은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들었어요. 수년 전에 북에서 탈출해 남한으로 온 고향 후배가 얘기해주더군요. 이후에는 고향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아마 수용소에 있던 형제들 중 몇은 세상을 떴을 겁니다.”

    부모와 형제들을 회상하는 김 목사의 목소리는 처연했다. 38년이 지난 오늘도 김 목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북의 가족인 듯했다.

    ▼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저는 축구선수였어요. 공 차는 게 너무 좋았어요. 8월15일 광복절이나, 5월1일 노동절, 4월15일 김일성 생일에는 큰 경기가 벌어지곤 했어요. 학교간 대항전에도 자주 나갔죠.”

    ▼ 어느 포지션을 맡았습니까.

    “공격수 아니면 골키퍼였습니다.”

    ▼ 극과 극의 포지션을 소화한 걸 보면 운동신경이 꽤 좋았나 보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웃음). 보시다시피 저는 상체보다 하체가 길어요. 운동신경이 잘 발달해서 그런지 외부 반응에 대한 동작도 날쌔고, 판단도 무척 빠른 편이에요. 100m 달리기와 400m 이어달리기 선수도 했어요.”

    ▼ 어린 시절 꿈은 운동선수였겠군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제가 자란 청진은 공업도시였어요. 아버지도 공장에서 일하셨죠. 눈만 뜨면 보고 자란 게 공장이어서 장래 공학도가 되고 싶었어요.”

    꿈을 향한 행보는 순조로웠다. 1955년 인민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경쟁률이 10대 1이 넘었다는 청진3중학교에 합격했다. 1958년 중학교 졸업 후 청진 제일고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했다. 이후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청진 공작기계공장에서 선반공으로 1년 정도 일하다가 1959년 3년제인 흥남 기계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인민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전문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김 목사는 공학도의 길을 걸었다. 그런 그의 꿈을 바꾸게 한 것은 북한사회였다.

    “북에서는 군대에 가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아요. 군대를 갔다 와야 여자도 따르고, 지도자가 될 수도 있고, 존경받는 대상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도 군에 갔고, 거기서 제 인생이 바뀌게 된 거죠.”

    군 입대로 인생이 바뀌다

    ▼ 자원 입대한 거군요.

    “네. 열아홉 살에 입대해서 황해북도 곡산군 석천리 제2집단군 사령부 6사단 제3대대에서 45일 동안 신병 훈련을 받았어요. 이후 정찰중대에 배속됐죠. 정찰중대는 적진에 투입돼 임무를 수행하는 중대였어요.”

    ▼ 훈련 중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총검술이 제일 힘들었어요. 이게 남한 군대에서 하는 그런 총검술이 아니에요. 양편으로 편을 갈라 무작정 상대편을 공격하는 거예요. 한쪽이 무너질 때까지 치고받는 거죠. 처음에는 서로 머뭇머뭇했는데 몇 번 거듭되다 보니 나중에는 서로 감정이 격앙돼서 피터지게 싸웠죠. 부상도 많이 당했어요.”

    ▼ 군 생활이 정말 힘들었겠습니다.

    “아니요. 전혀. 저는 체질적으로 군대 생활이 맞았어요. 그러다 보니 군에서 모범생으로 통했습니다. 뭘 해도 남들보다 먼저 했고, 부지런히 했어요. 그런 제 노력을 윗사람들이 좋게 봤는지, 제가 그토록 염원하던 당증을 받게 됐어요.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거죠. 그리고 당에 입당한 지 일주일 만에 상등병에서 바로 중사로 진급했습니다.”

    ▼ 남침 훈련은 언제부터 받았습니까.

    “스물네 살 때였죠. 5년째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송악산 골짜기의 제2집단군 도보정찰소 2기지에 있었어요. 그곳에서 산악훈련, 사격훈련, 납치훈련, 습격훈련, 총검술훈련, 밀로 정찰훈련을 받았어요. ‘밀로 정찰훈련’은 휴전선을 넘어 남쪽 철책 가까이 침투한 뒤 남쪽의 군사 배치 상황을 정찰하는 훈련이죠. 저는 두 번 했어요. 처음에는 떨렸지만 두 번째는 한번 해봐서 그런지 겁이 안 나더군요.

    이곳저곳 옮겨다니면서 훈련을 많이 받았죠. 산악훈련, 사격훈련, 습격훈련 같은 건 어디를 가나 매일 했어요. 평안도에서는 비밀 아지트 만드는 훈련이나 격파훈련도 받았고, 마지막으로는 평양에서 대동강 10km를 완주하는 수영훈련을 받았어요. 모든 훈련을 다 마친 후에 당시 언론에도 보도됐던 124군부대 6기지로 배치받았고, 거기에서 총 31명이 선발돼 서울 침투작전 지시를 받았어요. 5~7명씩 조를 짜서 6개조를 만들어, 1조부터 5조까지는 청와대의 1층과 2층, 경호실, 비서실, 정문위병소를 담당하고, 6조는 습격이 성공했을 때 청와대 수송부의 자동차를 탈취해 문산까지 가서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돌아온다는 거였어요.”

    ▼ 군에 입대한 이후 가족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열아홉 살에 가족과 헤어져 군에 들어온 이후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한 번도 못 봤어요. 그후 예순이 넘도록 가족들을 못 보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체포’가 아니라 ‘투항’

    김 목사를 비롯한 조선인민군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원 31명은 1968년 1월21일 밤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하했다. 그중 29명은 한미 군·경합동수사대와 교전 중 사살됐고 1명은 북한으로 도주했다. 김 목사는 투항해 남한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 목사는 1월22일 새벽 3시에 ‘생포’된 후 그날 오후 7시부터 30분간 육군방첩부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 당시 기자회견에서 “나, 청와대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라고 하셨죠. 이 말이 지금까지 회자되곤 합니다.

    “간첩이나 공비가 생방송에 출연해 기자회견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들었어요. 세월이 흐른 뒤 저도 그 장면을 다시 봤는데, 솔직히 제가 봐도 좀 ‘심했다’ 싶더군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제가 ‘투항’했다는 사실입니다. 1·21 사태와 관련해서 제가 제일 억울했던 게 남한 정부에서 저를 체포했다고 선전한 거예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저는 투항했습니다. 군이나 정부로서는 한 명이라도 잡았다고 발표해야 체면이 섰을 테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김 목사는 ‘투항’을 ‘체포’ 혹은 ‘생포’라는 말로 바꿔 발표한 정부의 처사가 지금도 억울한 듯했다. 그는 몇 번에 걸쳐 ‘투항’을 거듭 강조했다.

    “투항 후 효자동에 있던 방첩대 사령부에서 수사를 받았어요. 1969년 한 해는 서빙고에서 지내면서 전방 부대에 강연도 가고, 중앙정보부에서 요구하는 강연에도 나가고, 방송 출연도 했어요.”

    ▼ 서빙고에서는 언제 나왔습니까.

    “1970년 4월초에 자유의 몸이 됐어요. 그때 주민등록증도 받았어요. 중앙정보부에서 마련해준 집에서 하숙을 하며 홀로 서기를 시작했습니다. 중정에선 한국화약에 취직시켜 줬어요. 그런데 중정이 실수한 거죠. 생각해보세요. 화약공장에서 사고가 나면 그 피해가 엄청날 것 아닙니까. 그럼 누구를 의심하겠어요. 폭약과 총기를 다뤄본 저를 맨 먼저 의심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사흘 만에 그만뒀죠. 제가 그런 걱정을 이야기했더니 중정에서 삼부토건에 다시 입사시켰습니다. 거기서 11년 정도 일했어요.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동료들과 어울리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료들도 저를 인정했고, 모임이 있을 때는 저를 꼭 불렀어요. 과장까지 승진도 했어요. 그런데 회사에 나간 것보다 반공강연에 더 많이 불려 다녔어요. 이름만 회사에 올려놓은 거였죠. 사회에 나왔어도 저는 방첩대에 소속돼 있었고, 당시는 반공, 멸공이 국시(國是)였기 때문에 반공강연을 많이 다녀야 했어요. 회사 업무를 제대로 파악할 겨를이 없었죠.”

    ▼ 당시 김 목사께선 ‘반공강연’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였죠.

    “1970년대 후반까지 반공강연 요청이 끊이질 않았어요. 1968년 4월인가 5월에 서울시민회관에서 처음으로 반공강연을 한 후 2000회를 넘게 했죠. 아마 귀순용사 중 제가 반공강연을 가장 많이 했을 겁니다.”

    ▼ 반공강연을 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전방 강연이 참 힘들었어요. 두 시간 정도 강연한 후에는 직접 강연 내용을 시범으로 보여줘야 했거든요. 완전무장을 해서 구보하고, 철조망을 통과하고, 벼랑을 타고 오르는 걸 직접 시연해야 했죠. 그것도 오전에 한 번, 오후에 두 번, 하루에 세 번씩 했습니다. 전방에서 한 달, 후방에서 한 달 그렇게 하고 나면 온몸에서 기가 다 빠져나가죠.”

    ▼ 기억에 남는 강연이 있다면.

    “반공강연을 하러 다니다가 1·21 사태 때 작전지역으로 잘못 들어온 버스에 타고 있다가 총에 맞아 죽은 청운중학교 학생들의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정말 괴로웠죠. 저는 1·21 사태 당시 총을 한 방도 쏘지 않았어요. 하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죄로 그 모든 책임을 제가 다 짊어져야 했어요. 1·21 사태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의 가족, 친지, 그리고 남한 사람들 모두에게는 ‘죽일 놈’으로 낙인찍혔던 거죠.”

    ▼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생각입니까.

    “제게 죄가 있다면 그건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삶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죠. 이제 목회자로 거듭 태어나서 지금은 세 번째 삶을 살고 있어요. 한 인간으로, 종교인으로 인생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늘 겸손하게 사람을 대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봉사하고…. 목회자로서 제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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