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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6

‘국제철도 종단항’ 둘러싼 최초의 부동산 투기 소동

한 달 만에 1000배 뛴 땅값…“나진에선 개도 지폐 물고 다닌다”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국제철도 종단항’ 둘러싼 최초의 부동산 투기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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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철도 종단항’ 둘러싼 최초의 부동산 투기 소동

가장 유력한 길회선 종단항 후보지였던 청진항. 함경북도 최대의 항구였지만 다롄에 필적하는 대항구로 확장되기에는 만의 크기가 협소했다.

1917년 안정적으로 성장하던 김기덕의 사업에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일본 돈 1엔당 1.2~1.3루블에 거래되던 루블화의 환율이 러시아의 정치적 동요에 따라 급격히 오르내렸다. 김기덕은 제정(帝政) 러시아와 볼셰비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루블화의 수요가 격증할 것이라고 오판하고 루블화를 공격적으로 매집했다.

수백만 루블을 매집하고 루블화가 반등하기를 기다리던 그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됐다는 소식이었다. 루블화의 환율은 0.7루블, 0.6루블, 0.5루블… 날마다 폭락하더니 급기야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무모한 환투기의 실패로 김기덕은 러시아와의 국제무역에서 모은 수십만원의 현금을 하루아침에 고스란히 날려버렸다. 10년 남짓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찾아온 첫 시련이었다. 그러나 서른 살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김기덕은 조선은행에 전 재산을 담보로 잡히고 50만원을 대출받았다.

비록 빚은 빚이로되 50만원이나 졌다면 그의 수완을 알 것이다. 더욱이 조선은행 같은 빚지기 어려운 중앙은행에서 50만원의 거액을 빌려 쓴 것은 오늘날까지 희귀한 일이다. (‘재계의 괴걸 홍종화·김기덕 양씨’, ‘삼천리’ 1932년 12월호)


조선은행이 ‘한낱’ 조선인에게 20만원 남짓한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선뜻 50만원을 빌려준 데에는 총독부 국장의 압력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김기덕은 대출 알선을 부탁하기 위해 총독부 국장에게 1만원짜리 순금 괘종시계를 선물했다고 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본인 관리들을 누구보다도 잘 요리한 조선인 사업가였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한국형 정경유착’의 선구자였다.

어쨌거나 현재 가치로 10억원 상당의 뇌물로 500억원 상당의 현금을 확보한 김기덕은 파산 직전에 몰린 사업을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공동무역상사를 ‘동일상회’로 확대 개편해 만주, 연해주, 조선을 잇는 삼각무역을 개시했고, 회령에 백산상회를 차려 목재와 물화를 수집하는가 하면, 무산과 청진에는 각각 목재회사를 설립했다. 함경선 부설공사에서도 김기덕은 조선은행 대출 때와 비슷한 방식의 수완을 발휘해 철도국에 다량의 침목과 전신주를 납품했다. 그러나 김기덕의 ‘본업’은 무역과 목재가공업이 아니었다.



김기덕은 조선은행에서 대출받은 50만원을 밑천으로 땅 장사를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세상 사람들은 60억톤의 석탄과 3억그루의 목재, 10만정보의 미개간지와 무진장의 해산물을 지닌 함북을 점차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함북의 토지가격도 점차 올랐다. 예민한 눈을 가진 김기덕은 이 점을 깨닫고 상공업의 부지가 될 만한 곳을 택해 싼 값으로 사서 비싼 값으로 되팔았다. 그리하여 일약 백만장자라는 명성을 들었다. (‘재계의 괴걸 홍종화·김기덕 양씨’, ‘삼천리’ 1932년 12월호)


탁월한 안목을 가진 ‘부동산 투자자’ 김기덕이 1925년 가을 비포장도로 100km를 달려 외딴 포구 나진을 찾아간 이유는, 과연 길회선의 종단항이 될 만한 곳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청진과 웅기가 유력한 종단항 후보지라 하더라도, 나진이 종단항이 될 확률이 단 1%라도 남아 있는 한 투자를 신중히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해의 다롄’

일본은 섬나라다. 섬나라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려면 일본과 대륙 양측에 각각 대규모 항구가 필요했다. 근대 이후 일본은 대륙과 교역하기 위해 세 가지 간선을 개척했다. 첫째는 쓰루가(敦賀)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 철도로 이어지는 ‘동해항로’, 둘째는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부산, 신의주를 경유해 펑톈(奉天)으로 연결하는 ‘조선철도’, 셋째는 모지(門司)에서 다롄(大連), 남만주철도로 이어지는 ‘황해항로’였다.

거리만 보면 최적의 노선은 쓰루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동해항로였다. 그러나 동해항로는 블라디보스토크항이 겨울에 얼고 러시아 영토라서 일본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가장 안전한 노선은 1910년 이후 완전히 일본의 통제 하에 놓인 조선철도지만, 이동거리가 너무 길고 철도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물류비가 비싸지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대륙과 교역할 때 일반적으로 황해항로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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