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6·25전쟁 이래 제2의 국난(國難)을 맞아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정치활동의 재개라고 본다면 그렇게 봐도 좋다고 했다. 내년 대선에서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정치를 떠나 있는 처지”라며 분명한 답을 피했다. 대권과 대선 차원을 넘어 구국(救國)의 길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8개월 전 한 월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시 현실정치에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던 태도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가 풍겼다.
서울 숭례문 인근 단암빌딩 21층 사무실에는 문패가 붙어 있지 않고 ‘2105’라는 방 번호만 크게 씌어 있다. 2105호에는 비서실, 집무실, 접견실이 들어 있다. 대통령후보 시절 언론특보를 지낸 이종구씨가 맞아주었다.
접견실 팔걸이 탁자에 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황장엽 회고록’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21세기 국가전략’ ‘변증법적 전략전술론’ ‘A Troubled Peace’ ‘공영방송 특강’ 같은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짐작케 해주는 책들이다.
이회창 전 총재는 약속시각 3분 전에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차가 막혀서 늦는 줄 알았어요”라며 집무실에 잠시 들렀다 나왔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보좌진에게 책을 치우라고 했다.
“저자들이 보내준 책인데 그냥 쌓아놓았을 뿐이에요. 전에 박근혜 대표를 만날 때 ‘만약에’라는 역사서가 놓여 있었는데 기자들이 책 제목을 인용해 ‘대선에서 만약에…’라며 추측 기사를 쓰더라고요.”
그가 들어오기 전에 책 제목을 얼른 메모해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게 오전 10시에 인터뷰가 시작됐다. 필자는 그를 두 번째 인터뷰하는 자리였다. 필자가 첫 번째 인터뷰를 기억하느냐고 묻자 그는 “대법관 때였나요”라고 되물었다. 그가 1986년 첫 번째 대법원 판사 임기를 마치고 대한상공회의소 빌딩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을 때 필자가 인터뷰를 해 ‘동아일보’에 수첩 크기만한 기사가 난 적이 있다. 그는 “정치 입문 전에 한 인터뷰라 기억하지 못하겠군요”라고 했다.
그는 대통령후보 두 차례와 야당 총재, 국무총리, 감사원장을 하며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인터뷰를 했다. 정치의 풍상을 겪고 돌아온 그에게 정치 입문 이전은 선사시대쯤에 해당하지 않을까.
우선 분위기를 풀기 위해 그가 기분좋아할 만한 화제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