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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8

평양 ‘백 과부’, 이 여인이 사는 법

“돈은 써야 값을 하지, 안 쓰려면 모아 뭐해”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평양 ‘백 과부’, 이 여인이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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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백 과부’, 이 여인이 사는 법

만국기가 펄럭이는 백선행기념관에서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해 성황리에 개최된 백선행 여사 찬하회 광경. ‘동아일보’ 1930년 11월10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한때는 나에게도 남편이 있었다.’

과부라고 손가락질당할 때마다 남편을 향한 사랑을 한순간도 저버리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고단한 삶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백 과부는 한식과 추석 때면 어김없이 남편의 무덤을 찾았다. 야속하게 떠났어도 그리워할 기억이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결혼생활의 기억은 아름답게 윤색되었고, 남편에 대한 사랑은 커져만 갔다.

백 과부는 키가 크고 몸집이 벌어진 억센 여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억세다 해도 여자는 여자였다. 조선에서 젊은 여자가 남편도 없이 홀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아침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백 과부가 돈푼이나 만진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사내가 재산을 ‘날로’ 집어삼키려고 달려들었다. 사악한 사내들 눈에 혼자 사는 젊은 과부의 돈은 임자 없는 돈이나 마찬가지로 비쳤다.

철창 속의 여인

그해 팽한주가 평양 부윤(府尹)으로 부임했다. 악명 높은 탐관오리였던 팽한주는 박구리에 사는 백 과부가 기백석 추수의 재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죄 없는 여인을 잡아다 하옥했다. 홀로 사는 여자가 돈을 모은 게 죄였던 것일까. 팽한주는 백 과부에게 갖은 누명을 씌운 후, 재산을 바치면 풀어주겠노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러나 20년간 과부로 남 못 당할 곤란과 풍상을 겪은 평안도 여성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못하는 짓이 없던 팽한주 부윤으로서도 고집 세고 뻣뻣한 백 과부의 재산만은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백 과부는 옥중에서 10여 일이나 고생하다 그대로 방면되었다. (‘고 백선행 여사 일생2’, ‘동아일보’ 1933년 5월11일자)


탐관오리만 백 과부의 재산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과부 혼자 사는 집에는 수시로 강도가 침입했다. 백 과부는 강도의 완력 앞에 맨손으로 저항하다가 뒷머리와 앞이마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때 생긴 얼굴 흉터는 늙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백 과부는 현금을 벽지 안쪽이나 이불 속 등 집안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백 과부를 때려눕힌다고 숨겨놓은 돈을 찾을 수는 없었다. 목에 칼을 들이대도 백 과부는 찌르라고만 할 뿐 돈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백 과부 집에 숱한 강도가 침입했지만, 엽전 한 닢 훔쳐나간 강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위문 간 사람들이 “가지고 계신 돈을 조금 내어주셨으면 이런 곤욕을 보시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하며 채근하면 백 과부는 항상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다 못 나눠주는 돈을 밤중에 달려들어 사람 때리고 중상 입히는 놈에게 어찌 주겠나? 내 목숨이 없어져도 돈만 남아 있으면 그 돈이 좋은 일에 귀하게 쓰이게 될 것을 아는데, 눈을 뜨고 내 손으로 그런 나쁜 놈에게 내어줄 수야 있나.”

강도의 침입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백 과부는 ‘목숨’과 목숨보다 귀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문 중문 방문 부엌문 들창 장지 등 집안 곳곳을 굵은 철창살로 에워쌌다. 백 과부는 그 철창살 속에서 돈 궤짝을 부둥켜안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한번 백 과부의 손에 들어간 돈은 좀처럼 세상 구경을 하기 어려웠다. ‘수전노 백 과부’ ‘철창살 속 암사자’라고 험담하고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백 과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가난한 시절과 마찬가지로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돈을 모았다.

혼자 사는 과부가 나이 들어 험한 꼴 보지 않으려면 돈이라도 악착같이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백 과부는 ‘그 돈이 있으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겠다’는 이웃들의 손가락질에도 아랑곳없이 무서울 정도로 돈에 집착했다. 그러나 백 과부는 그 시절 흔히 보는 수전노들과는 달리 고리든 저리든 단 한 번도 가난한 사람을 상대로 돈놀이를 하지는 않았다. 돈을 벌되 되도록 깨끗이 벌려고 노력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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