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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민 교수의 옥새 이야기’에 대한 반박

“영·정조 대왕이 쓰던 옥새는 흔적조차 없다”

  • 김성호 옥새 연구가 sindo88@hanmail.net

‘서지민 교수의 옥새 이야기’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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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몰래 옥새를 만들어 사용한 임금은 숙종이다. 당시 조선은 명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들어선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숭명사대(崇明事大)주의에 젖어 있던 조선의 숙종은 과거 명에서 보낸 옥새의 사본을 토대로 옥새를 만들어 사용했다(숙종 24년).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다만 나름대로의 자주성을 견지했던 세종은 명나라에서 내려준 인장 가운데 일부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은 전한다(세종조차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등의 옥새는 명나라에서 내려준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세종은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을 불러 말하기를, “모든 신하를 제수함에는 일찍이 중국에서 내려준 인장을 사용했는데, 그 후에 본국에서 주조한 것으로 고쳐 사용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이다(세종 31년 8월25일).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인장을 ‘주조’해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주조했다는 것은 금속을 합금해 옥새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만일 옥으로 옥새를 만들었다면 ‘조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옳다.

서지민 교수는 “정조대왕의 옥새를 본떠 제작한 국무총리용 옥새의 손잡이는 용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할 옥새는 영조대왕이 쓰던 것을 본떴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다”라고 밝혔다. 옥새에 대한 양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먼저 정조의 옥새, 영조가 쓰던 옥새를 본떠 만들었다고 하는 부분인데, 영·정조대왕이 쓰던 옥새는 지금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만일 서 교수가 어보(御寶)가 아닌 옥새를 공개한다면 대단한 역사적 자료임에 틀림없다. 반면 서 교수가 견본으로 삼은 영·정조의 옥새 그림 또는 사진을 공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민은 물론 한 나라의 대통령을 기만하는 행위가 된다.

조선의 옥새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감사원 조사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2005년 11~12월 감사원에서 문화재청 등 10개 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문화재 지정 및 관리실태 성과감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옥새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조선왕조 궁중 인장 816개를 조사하고 50여 종의 문헌을 검토한 결과, 조선왕조 옥새 중 국새 13과(인장을 세는 단위)는 모두 분실됐으며, 일반 행정용 옥새는 26과 중 21과가 분실됐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문화재청에서 1971년 11월부터 1985년 9월 사이에 조선왕조 최고의 옥새인 ‘조선국왕지인’ 등 국새 3과와 일반 행정용 옥새 2과, 어보, 궁인 등 여타 인장 25과를 분실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아마 서 교수는 ‘조선어보’란 책에 실린 사진을 참고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는 영조와 정조의 어보 사진이 실려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옥새가 아니라 어보다. 궁중유물전시관에서 펴낸 이 책은 조선의 어보를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은 ‘어보란 임금을 비롯한 왕실의 도장, 곧 인장이다. 다시 말해 왕실의 끊임없는 끈을 나타내는 상징인 것이다. 때문에 이는 종묘에 모셨다. (어보는) 나랏일에 쓰는 여러 공무의 관인인 이른바 국새와는 다른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어보는 의식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옥새와는 차이가 있다. 어보는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거나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에서 예물로 바쳐지는 보존용이다.

어보에는 왕과 비에게 올린, 여러 이름(位號)을 새긴 것에서부터 시호(諡號·왕, 비에게 올리는 행적을 기리는 이름)와 여러 존호(尊號·왕, 비를 칭송하는 이름), 그리고 묘호(廟號·황제, 왕이 죽은 뒤 추증(追贈)된 칭호로 보통 조(祖)·종(宗)을 붙여서 ‘세조(世祖)’ ‘고종(高宗)’ 등과 같이 표현한다), 휘호(徽號·왕비에게 따로 또 올리는 성품을 기리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용은 황제국, 거북은 제후국

서 교수의 주장 가운데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정조의 옥새 손잡이가 용이라고 한 점이다. 조선 역사상 용을 손잡이로 만들어 사용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용은 오직 명나라나 청나라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사대관계에 있는 조선에서는 옥새의 손잡이로 쓸 수 없었다. 용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 비로소 옥새의 손잡이로 등장했다. 용은 황제국의 상징이었고, 거북은 제후국의 상징이었다.

그런데도 서 교수는 용 손잡이로 만든 옥새를 국무총리에게, 거북 손잡이로 만든 옥새를 대통령에게 선사하겠다고 했다. 옥새는 임금과 국가의 상징이며, 이는 엄격한 상징의 격식을 따라야 한다. 용과 거북은 그 상징성에서 상하관계가 명확하다. 용이 거북보다 우위에 있는 상징체계로 볼 때 서 교수는 큰 결례를 범한 것이다.

서 교수는 “왕이 행차할 때 왕이 옥새를 따라가는 거죠. 왕이 일을 볼 때면 꼭 옥새를 앞에 두었어요. 말하자면 옥새의 맑은 기를 받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고 할까요”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의 옥새는 옥으로 만들지 않고 금속으로 주조했기 때문에 옥의 기운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는 얘기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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