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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는 95번 버스가 있다

  • 박미애

파리에는 95번 버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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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바상 공원

파리는 모두 2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파리 중심부인 1구 루브르 박물관을 시작으로 오른쪽으로 달팽이집 모양의 원형을 그려 나가면, 3구인 마레 지역에 닿고, 5구 팡테옹과 대학가를 거쳐 서북쪽의 8구 샹젤리제 거리, 다시 동쪽으로 11구 바스티유 광장과 12구 나숑 광장까지 돌아서면 정남쪽의 13구, 다시 남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전형적인 주택가 14구에서 16구까지 돌아, 정북쪽의 몽마르트르 언덕을 올라가 예술가가 많이 모여 산다는 동쪽의 20구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나는 파리의 젊은 중산층이 가장 많이 모여 산다는 15구에 살았는데, 지금도 집 앞 95번 버스 정류장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늘 버스 창문을 통해 조지 바상 공원을 확인하고 내렸기 때문이다.

95번 버스는 폭트 몽마르트르에서 몽파르나스까지만 가는 단기운행 버스와 방브까지 가는 장기운행 버스, 두 가지가 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면, 방브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것도 모르고 몽파르나스 역에서 하차해 헤맨 적이 있다. 다행히 보르도에서 남편을 보기 위해 파리에 왔다가 95번 버스를 탄 아주머니 덕택에 무사히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버스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몽파르나스의 광활한 사거리에서 다른 편의 정류장을 찾아 다시 방브까지 운행하는 95번 버스를 탔는데, 그때도 어디에서 내리냐는 아주머니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해버렸다. 모르는 게 사실이었으나, 대답하고 나서 나 자신이 사는 집도 모르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파리에는 파리 근교 북서쪽의 블로뉴 숲과 남동쪽의 방센 숲을 비롯해 동네마다 스쿠아라고 하는 아이들의 작은 놀이터에서부터 각기 다른 얼굴과 몸통을 가진 분수들과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찬 큰 공원까지 아름다운 공원이 많다.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인 환경이 파리의 얼굴이었다. 물론 거리마다 쉽게 눈에 띄는 강아지들의 분비물 때문에 원시적인 자연친화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말이다.



15구의 콩벙셩 지하철 역에서 가까운 조지 바상 공원은 원형 분수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위한 인형극이 열리는 기뇰 극장, 6월 음악축제 때면 어김없이 부드럽고 발랄한 선율을 내뿜는 실외 공연장, 갖가지 꽃이며 나무들이 가지런히 각자의 이름표를 들고 서 있는 작은 식물원, 파리에서는 몽마르트르에서나 만나볼 수 있다는 조그마한 포도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빵 굽는 냄새, 아주머니의 미소

손녀에게 선물로 줄 핑크빛 털 스웨터를 뜨는 동네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곳, 브리를 비롯해 이름도 외우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치즈로 찌운 살을 빼기 위해 열심히 뛰었던 곳, 정원 오른쪽의 빨래방에서 빨래를 돌려놓고는 강아지들과 아이들을 구경하던 곳, 열다섯 살에 읽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서른이 되어서 다시 한 번 읽었던 곳이다.

딸기 케이크 위의 하얀 슈크림처럼 달콤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날이면, 분수 위 잔디 쪽에는 자리가 통 나질 않았다. 아이들과 나들이 나온 가족들,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남녀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파리지앵은 햇살을 포도주와 카망베르 치즈만큼이나 사랑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 제조기라 부르는 파리의 겨울은 우기인데다 몹시 길었다. 5월 말이나 되어야 겨울옷을 정리했으니, 실상 여름이라는 단어를 붙여볼 수 있는 건 6월에서 8월뿐이었다. 파리는 따뜻한 나라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 많은 아프리카 식민지가 필요했던 것일까.

공원 뒷문 쪽에는 아름드리 체리 나무가 있었다. 해마다 검붉고 탐스러운 체리가 먹음직스럽게 열렸는데, 한국식으로 몰래 따먹으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써봤지만 훌쭉한 그 키를 넘지 못하고 번번이 아쉬운 실패만 맛봐야 했다. 한국 같았으면 벌써 누군가 수확해갔을지도 모르지만 며칠이고 검붉은 향기는 그대로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 갑자기, 공원 관리인으로 말미암아 그 시리도록 붉은 열매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6월, 파리에서 먹는 검붉은 체리의 쌉쌀하면서 달콤한 그 맛은 평생 잊지 못할 첫사랑과의 첫 키스와도 같았다.

95번 버스 정류장쪽 공원 담 바로 밖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고서적 시장이 열렸다. 그곳에 가면 동화책에서부터 전문서적까지 다양한 고서적을 싼 값에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샤갈이며 고흐의 그림책을 많이 산 곳이다. 흥정이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좋은 관습이었다.

고서적 시장 건너편에는 맛있는 빵집이 하나 있다. 막 포알란이라는 커다란 빵을 만들어내는 집으로 유명했지만, 잠봉과 치즈를 넣어 만든 퍼이잠봉이 특히 나를 유혹했다. 퍼이는 얇은 층의 빵이 나뭇잎처럼 겹겹이 싸여 있는 걸 말한다. 처음에는 발음이 잘 되지 않아서 주문할 때마다 어정쩡하게 입을 떼고는 했는데, 푸근하고 넉넉한 외모의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하게도 발음까지 교정해주곤 했다. 빵 굽는 냄새가 은근하게 풍기는 시간이 되면, 친절한 그 아주머니의 둥근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모든 프랑스 사람이 다 아주머니의 착한 미소를 닮은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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