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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서 노무현까지, 한국의 對중국 외교 변주곡

美·中은 ‘택일’ 아닌 ‘연계’의 대상… ‘양수겸장’의 이중전략 구사해야

  • 정재호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박정희에서 노무현까지, 한국의 對중국 외교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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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유지와 경제 발전이라는 핵심목표가 상당한 수준으로 달성되면 국가이익을 구성하는 셋째 요소, 즉 국격과 자존이라는 명제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한 국가가 국격의 제고라는 비전을 추구하는 순간 앞서 논의했던 두 가지 국가이익-특히 동맹의 유지 및 경제 발전-을 위한 정책수단에 주어지는 중요성은 변할 수밖에 없게 된다. 환언하자면 국격과 자존의 추구가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될 때, 합리적 국가는 대체로 주권의 수호와 독립성의 제고에 보다 높은 가치를 두게 되며 그 결과로 안보 및 경제적 측면에서의 타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이는 곧 기존의 대외관계에 큰 변화를 초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선순위의 변화를 가져오는 변수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한 국가의 전략적 사고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키는 자극과 충격은 대개 두 가지 요인들로부터 온다. 하나는 외부적 요인들로, 냉전의 종식이나 중국의 ‘부상(浮上)’ 같은 전 지구적 전략 환경의 변화와 일본의 ‘우경화’ 같은 지역적 요인을 모두 포함한다. 다른 하나는 내부적 요인으로, 예컨대 한 국가의 민주체제로의 전이, 정치구도의 변환 및 여론의 획기적 변화와 같은 내적인 변수를 지칭한다.

이상에서 논한 틀을 중심으로 박정희 시기부터 노무현 정부까지의 대(對)중국 전략을 긴 호흡으로 되돌아보자.

박정희의 대중외교 - 전략적 사고의 ‘파종(播種)’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국과 한국 간의 전통적 양자관계는 한국(대한민국)과 대만(中華民國), 북한(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과 중국(中華人民共和國) 사이에 형성된 두 쌍의 현대적 양자관계로 재편된다. 곧 이어 발발한 6·25전쟁을 통해 중국은 북한과 소위 ‘혈맹’이라 지칭되는 특별한 관계를 지속했던 반면, 한국과 대만은 각각 미국을 중심축으로 하는 쌍무동맹 체제 안에서 긴밀하고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하에 있던 1950년대 내내 미중관계, 한중관계, 남북한 사이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이었고, 이 때문에 공산치하의 ‘대륙 중국(mainland China)’에 대해 한국이 독자적으로 전략적 사고를 개발할 여지는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남침(南侵)이라는 실재하는 위협에 대한 인식과 전세계를 장악한 냉전체제하에서의 첨예한 이념대립은 한국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여지 자체를 원천봉쇄했던 것이다. 따라서 안보유지와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이익을 위해 미국에 대한 의존이라는 대가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4·19 이후 박정희 정부가 집권한 1960년대에도 한국과 공산 중국 사이에는 내내 적대적인 관계가 지속됐다. 간혹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위원회를 통해 한중 간의 대면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1961년 9월, 두 명의 중국 공군조종사가 AN-2 정찰기를 몰고 한국으로 망명해 왔을 때에도 한국 정부는 대륙 정부와 일절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당시 한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던 대만에 조종사뿐 아니라 항공기까지 넘겨주었다.

반면에 중국 또한 자국의 영해(領海)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종종 한국 어선과 어부들을 최장 12년까지 억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이들의 송환을 위해 중국과 협상할 수 있는 어떠한 외교적 경로나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간혹 중국과 수교하고 있던 유럽 국가들의 도움을 모색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초에 들어 국제전략적 환경에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하는데, 이는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미, 대일관계 정상화에서 잘 드러난다. 동아시아에서 점증해가는 중국의 잠재적 영향력을 인식한 박정희 정부는 공산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와 안정의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한국의 전략적 사고에서 처음으로 중국이 직접적인 변수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비슷한 시기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미 7사단을 한국에서 철수함에 따라 주한미군 전력의 상당한 감축이 이루어졌던 것도 박정희로 하여금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대해 유연한 사고를 갖도록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공개된 ‘대한민국외교문서’에 따르면 1972년 당시 한국 정부의 내부적 원칙은 중국이 먼저 적대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한국 또한 중국에 대하여 적의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 중국은 한국이 가장 중시하던 경제 발전이라는 지상목표에도 큰 도전을 던지고 있었다. 즉 당시 한국 및 대만과 긴밀한 통상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과 미국 기업에 대해 중국 정부가 차별정책을 취했고, 이러한 추세가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에 끼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1972년 한국이 대외통상법 제2조를 수정해 북한과 쿠바를 제외한 모든 공산국가와의 교역을 과감히 허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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