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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9

목마(牧馬)도 목민(牧民)도 순시순천(順時順天) 해야거늘…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목마(牧馬)도 목민(牧民)도 순시순천(順時順天) 해야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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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牧馬)도 목민(牧民)도 순시순천(順時順天) 해야거늘…

1860년, 영·불연합군에게 파괴되거나 소각당한 圓明園 西洋樓의 현장.

원림의 배치는 매우 미술적이다. 피서산장을 크게 궁전, 사원, 원림으로 3분하는데 원림은 다시 호수, 평원, 산악으로 나뉜다. 원림엔 72경(景)이 있는데 그중 31경이 호수에 펼쳐져 있다. 강남의 수향(水鄕)을 북방에 옮겨놓은 그림이다. 거기다 그림은 점점(點點)의 구도로 띄엄띄엄 설계됐다. 이를 중국의 전통 원림에선 분경(分景), 격경(隔景), 츤경(景) 등으로 설명한다. 아무튼 달랑 연당 하나에 섬 하나, 무지개다리 하나인 단순 구조가 아니라 뜨락 밖에 뜨락이요, 산 밖에 산, 그리고 물 안에 물 구조였다. 원림의 구조 그 높고 낮음과 크고 작음을 거느리면서 황제는 호연지기와 사해통일적인 포부를 울울창창하게, 호호탕탕하게 펼쳤을 게다. 회유(懷柔)와 통일이란 정치적 이상을 산과 물로 표현한 것이다.

“저 달에서도 땅놀이하겠지”

연암은 궁전과 사원뿐 아니라 그 넓은 원림에도 족적을 남겼다. 건륭의 만수절, 야외 연회가 열린 만수원(万樹園)에선 황제가 준 여지즙을 마셨고, 황제가 반첸 라마를 위한 연회를 베풀던 날은 담 너머 청음각(淸音閣)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등자 하나 놓고 오리가 횃대에 올라서듯 그렇게 구경했다.

그러나 그 영화 또한 200년을 누리지 못했다. 북경의 원림이 외적의 발굽에 짓밟히고 불에 타버린 뒤, 청나라의 대권이 여인의 손에 넘어가면서 피서산장은 은신의 어두운 동굴이 되었다. 불이 꺼지고 궁궐은 황폐해졌다.

연암의 관측, 특히 천체 관측은 매우 시적인 발상으로 시작됐다. 그 최초의 기록은 8월10일자 일기에 나타난다. 연암이 태학관에서 기풍액(奇豊額)과 함께 깊은 밤 달 구경하는 대목이다. 그날 밤도 달이 찢어지게 환했다. 연암은 달을 보며 저 달 속에도 땅이 있으리라 상상했다. 그 땅에 사람이 있다면 여기 지구의 우리처럼 난간에 기대고 서서 땅 빛이 달에 가득 비추고 있노라고, 우리가 땅에서 달놀이하듯 달에서도 땅놀이하겠지 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상상이다. 이 우주의 구도를 상대적으로 보고 대칭적으로 상상했다. 하늘에 떠 있는 초가집 세 칸이 아니라 천체의 하나로서 땅을 지니고 있겠거니 하며 위성으로 본 셈이다.



연암은 8월13일에 또 기풍액을 만나 달밤을 거닐었다. 태학의 중앙인 명륜당 그 난간을 거닐면서 본격적으로 달을 관측했다. 그날 밤 연암과 기풍액은 땅이 모가 나 있으리라는 ‘지방(地方)설’을 부정하고, ‘지원(地圓)설’ ‘지전(地轉)설’을 주장했는데 그 논증의 전개 또한 몹시 시적이다.

예를 들어 해와 달이 돌고 도는 것을 수레바퀴나 쐐기에 비유한 것이 그렇다. 거기에 지축이 있다는 말이요, 지축은 가만있는데 그 몸뚱이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오른쪽으로 돈다고 했다. 또 땅이 둥글다는 이치와 땅의 아침과 저녁, 그리고 봄과 가을이 바뀌는 까닭을 창 아래 햇살 비추는 자리에 맷돌을 놓고 먹 자욱을 남기는 방법으로 그 둥과 햇살의 전이를 확인했다. 등불 앞에 물레를 두고서는 물레가 돌때 물레바퀴 군데군데 등불이 비치는 것을 확인했다. 창구멍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맷돌에다 표시하면서 ‘지전’을 논증했다. 등불 앞에 물레를 놓고 그 바퀴를 돌리면서 불빛을 받는 물레로 ‘지원’을 논증했다. 천체의 자전과 공전 그 냉엄한 물리를 설명하는 데 맷돌이나 물레 같은 농가의 기구를 활용하고, 햇살이나 먹 자욱 같은 소년적 체험으로 그 변화를 증언한 것이다.

연암은 기풍액에게 ‘만물개원(萬物皆圓)설’을 역설했다. 땅 위의 모든 것은 둥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오해와 착각을 먼저 불식했다. 해와 달이 뜨고 지고, 사계절이 오고 가고 하는 기존의 ‘천원지방(天圓地方)설’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면서 해와 달과 땅은 허공에 둥둥 뜬 별임을 주장했다. ‘일지월등, 부라대공(日地月等, 浮羅大空)’이라고. 이는 물론 연암이 김석문(金錫文·1658~1735)의 ‘삼환부공(三丸浮空)설’을 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적 감흥과 실학적 진취

물론 연암이 천체 관측의 일인자는 아니었다. 그보다 200여 년 앞서 조선 선조 때 조선 실학의 선두인 이수광(李?光·1563~1628)이 1603년 몇 나라로부터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万國全圖)’라는 세계 전도를 조선에 들여오고, 정두원(鄭斗源·1581~?)이 1631년, 후금으로부터 서양의 과학기구나 ‘서양건상도(西洋乾象圖)’ 등을 가져오면서 서양의 천문학과 접촉을 벌인 바 있었다.

조선은 1653년 서양 역서(曆書)를 수용하면서 이제까지 개천(蓋天)설·혼천(渾天)설 등 전통 형이상학적 구조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김석문을 비롯 이익(李瀷), 홍대용(洪大容) 등의 지전설과 지원설이 실학파 학자들에게 유포됐다. 연암은, 그러한 각성이 일기 시작한 18세기 초, 이른바 제왕지학(帝王之學)이라 하는 조선 전통의 천문학에 ‘지동설’이 알려진 시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발견은 다만 김석문이나 홍대용 학설에 대응한 것이 아니라 그만의 시인적 감흥과 실학적 진취성에 따른 전신적 투입이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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