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 세운 이용익과 한양대 세운 김연준은 동향 ● 일본인 교사에 强 대 强으로 맞선 소년, 그러나 대가는 혹독했다 ● 호방했던 延專 시절 국내 최초로 바리톤 발표회 열다 ● 巨富 아버지 지원으로 시작한 육영사업 ● 1960년 한양대생 성동경찰서 난입사건 진상 ● 학생들이 주도한 인민재판에 끌려갔다 빠져나온 총장 ● 고비 때마다 도와주는 사람들… 김연준 人福의 비밀은? ● 박정희와 담판해 의대 설립 ● 대한일보 수재의연금 횡령사건과 윤필용 사건 진실 ● “남의 사람 빼오지 않고, 내 사람은 절대 뺏기지 않는다” ● 박정희 대통령이 준 화해의 선물, 한양대 안산캠퍼스 ● 가곡 ‘청산에 살리라’와 ‘悲歌’짓게 된 이유 ● 60대 이후 3800여 곡, 작곡집 16권 펴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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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재학 시절 그는 육영수 여사를 본 적이 있다. 육 여사의 조카와 동아리를 함께한 인연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육 여사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육 여사는 해마다 수석 졸업자들을 불러 오찬을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의과대를 수석 졸업한 정 교수도 청와대를 방문했다. 청와대 안주인인 육 여사는 조카의 친구인 그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육 여사는 성품이 매우 자상했다. 육 여사가 학생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당시 만 50세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들어왔다. 졸업식 때 보고 두 번째 대면이었는데, 그는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만 24세이던 나는 정말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연회장에 들어서는 박 대통령을 보자 와락 겁이 났다. 마른 대춧빛 혈색의 키 작은 사람이 들어서는데, 한마디로 긴장 덩어리였다. ‘저 정도 인물이니까 목숨 걸고 쿠데타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나를 위압하는 사람을 처음 본 때였다.”
그가 의과대를 졸업한 이듬해(1968) 한양대가 경희대(1967)에 이어 의예과를 신설했다. 이로써 서울에서는 가톨릭의대와 서울대 연세대 우석대(고려대 의대의 전신) 경희대 한양대 의대가 경쟁하는 체제가 형성됐다. 서울대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정 교수는 육 여사가 별세한 1974년까지 군 복무를 대신해 충북도 의료원 과장을 지냈다.
그 무렵 의과대학을 키우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던 만 60세의 김연준 한양대 설립자가 그를 불렀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당시 김연준씨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정 교수는 한양대 의대로 옮길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나 ‘한 번 만나보자’는 생각에 찾아갔다. 그런데 김 설립자를 보는 순간 그는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처럼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과 김연준 설립자는 건방지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사람을 제압했다. 김 설립자가 ‘훌륭해. 근무해’ 하는 한마디에 나는 그대로 한양대에서 일하게 되었다.”
해방 공간인 1945년과 1948년 사이 이 땅에는 많은 사립대학이 생겨났다. 그 대학들은 최근 줄줄이 개교 60년을 맞거나 앞두고 있다. 한양대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1일 김연준이 설립한 ‘동아(東亞)공과학원’을 뿌리로 하므로, 이들 대학보다 6~9년 앞선 역사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