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정년퇴임 앞둔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89년 학생들 요구로 교수 임용… 이제 ‘부르주아 서울대’는 마르크스를 버릴 것인가”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7-12-10 1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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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크스 경제학은 사회주의 건설 이론 아니다”
    • “주류 경제학 경도된 교수진 뜻 꺾을 수 있는 건 학생뿐”
    • “실업·비정규직·가난 모르는 서울대생, 사회비판의식 결여”
    • “‘기업하기 좋은 나라’ 강조해 남은 건 양극화와 비정규직뿐”
    • “마르크스는 휴머니스트…유토피아적 요소는 연구로 극복해야”
    정년퇴임 앞둔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몇차례 언론 보도로 알려졌듯 서울대 경제학부 김수행(金秀行·65) 교수가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임한다. 정년을 맞은 교수가 물러나는 것이야 새삼스러울 것 없지만, 김 교수의 퇴직이 주목받는 것은 그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본론’을 완역한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이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 유일한 마르크스 경제학자이기 때문이다.

    “후임자가 결정됐느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나는 ‘후임’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사람들은 후임이라는 개념 없이 전공 자체부터 새로 정하려 한다”며 서운함을 내비쳤다.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진은 2008학년도에 교수 1명을 신규로 채용하되 대상을 ‘경제학 일반’으로 결정했다.

    김수행 교수는 1961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1967년까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그 이듬해까지 조교 생활을 했다. 1969년 외환은행에 취직,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외환은행 런던지점에서 근무한 게 계기가 돼 은행을 그만두고 영국에 눌러앉아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다. 1982년 10월 귀국해 한신대 교수로 임용됐으나 학내 민주화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1987년에 해임됐다. 이때 떠돌이 시간강사가 된 덕분에 1989년 3월 ‘자본론’ 1권이 번역돼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노사갈등과 공황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긴 했으나 엄연히 ‘비정규직’이던 그를 서울대 교수 자리에 앉힌 건 학생들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생들이 수업거부와 농성을 통해 ‘정치경제학 전공자’ 영입을 요구했던 것.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진보적인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열기가 음지에서 양지로 확산되는 흐름을 탔다.



    마침내 그가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게 1989년 2월이니 그로부터 20년이 채 안돼 서울대의 마르크스 경제학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위상은 어쩌다 이렇게 설 자리를 잃었을까.

    “우리 학계 분위기가 미국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 있어요. 또 다른 이유는 마르크스 경제학 자체를 사회주의와 연결시키는 경향 때문이에요.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과 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걸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이론으로 간주하다 보니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마르크스 경제학의 효용가치가 사라졌다고 단정해버려요. 이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소련에서 발달한 스탈린식 마르크스 경제학을 받아들였어요. 그건 경제 결정론적으로 사회를 바라보기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분석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마르크스 경제학이 외면당한 거예요.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휩쓸어버리니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죠.”

    서울대생의 보수화

    김 교수가 설명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은 이렇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의 이윤추구에 의해 움직이며, 그 이윤은 노동자의 잉여노동이나 노동자로부터의 착취에서 나온다. 따라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갈등과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가 운동한다. 반면 주류 경제학은 모든 걸 시장에 맡긴다. 따라서 노사갈등이나 공황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게 김 교수가 지적하는 주류 경제학의 한계다. 자본주의 현실을 분석하고, 자본주의가 어디로 나아가는지 전망하기 위해선 여전히 마르크스 경제학이 유효하다는 얘기다.

    ▼ 서울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가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국내 대부분의 대학이 서울대를 벤치마킹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울대에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가 없어지거나, 전공한 교수가 사라진다는 게 전국 대학으로 영향을 끼칠까봐 염려스럽습니다.”

    정년퇴임 앞둔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수행 교수를 처음 본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인상이 동네 아저씨 같아 놀란다고 한다.

    ▼ 학생들의 요구로 서울대 교수가 됐는데, 후임도 없이 물러나니 책임감이나 안타까움 같은 게 있을 듯합니다.

    “1989년 2월에 서울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학생들 덕분이에요. 당시 학부 교수회의에선 안 된다고 했거든요. 학생들이 수업 거부하고 농성하니까 결국 교수들이 졌지요. 그런데 지금은 학생운동이 약화됐고, 서울대생의 사고방식도 부르주아화했다고 할까. 마르크스 경제학을 비롯한 비판적 학문에 대해 별 가치를 두지 않고, 공부해보고자 하는 의욕도 약해졌다고 봐야죠. 교수 임용은 학부 교수회의에서 투표로 결정됩니다. 아무래도 채용할 교수의 전공을 정할 때 교수진의 호불호가 크게 작용하지요. 그걸 제어할 수 있는 건 학생들뿐이죠.”

    ▼ 얼마 전 한 조사에 따르면 서울대생 10명 중 4명이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요. 다른 대학들보다 보수성향이 강한 편이라지요.

    “그렇습니다. 돈 있는 집안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는 영향이 큰 것 같아요. 가정에서나 주위에서 실업자, 비정규직, 빈곤, 농민 등을 접해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고요. 그러니 한국 사회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 어떻게 해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됐습니까. 성장배경과 관련이 있습니까.

    “공부할 형편이 못돼서 대구 경북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상업학교에 들어갔어요. 당시 대구에서는 대구상업학교를 나오면 은행 취직이 가장 잘 됐거든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직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입학하고 보니 서울대 상과에 합격하면 대학 4년 내내 장학금이 나오는 제도가 있어서 서울대 상과에 진학했지요. 어릴 적부터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똑똑한 친구들이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가지 못하는 걸 보면서 뭔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죠. 대학에선 동아리 ‘경우회’를 통해 경제학 커리큘럼을 공부하고, 선후배들과 토론하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을 발견했고요.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우리말로 설명해주는 책을 만나볼 수 없어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어로 된 책들을 많이 읽었지요. 그때부터 ‘경제학 비판’에 눈을 뜬 것 같아요. 결국 내가 살아온 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그것을 해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된 거죠.”

    김 교수가 서울대 경제학과에 다니던 시절, 안병직 현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이 전임강사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안 교수로부터 “많이 얻어먹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경우회’엔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장명국 ‘내일신문’ 발행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이 선후배로 얽혀 있었다. 한때 한솥밥을 먹었지만 40여 년이 흐른 지금은 각기 다른 ‘노선’에 서 있다.

    내 인생의 은인

    ▼ 학생에서 은행원으로, 교수로, 노(老)교수로…시간이 흐르면서 마르크스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던가요.

    “그러지 않은 게, 제가 좀 미련한 것 아닌가 싶어요. 제 고등학교 때 별명이 곰입니다, 곰(웃음).”

    김 교수는 자신이 마르크스에 일편단심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아내 덕분”이라고 말한다. 김 교수의 부인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김 교수보다 먼저 외환은행에 들어와 있었다. 두 사람은 이른바 ‘사내 커플’로 인연을 맺어 1969년 9월 결혼했다. 김 교수가 런던지점으로 발령이 나자 부인도 외환은행을 그만두고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금호실업, 삼성건설 런던지사에 다녔다. 김 교수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고부턴 부인이 실질적인 가장이 돼 남편과 세 자녀를 먹여 살렸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랐어요. 서점에 마르크스 책들이 깔려 있고, 학교와 병원은 무료이고, 노동조합은 힘이 세고…. 자본주의의 선진적인 면에 큰 감명을 받았죠. 그런데 1972년 가을에 휴지를 구할 수 없게 됐어요. 자본가들이 삼림과 펄프를 매점·매석한 바람에 휴지가 귀해져서 한 사람에게 두루마리 휴지 한 개씩만 팔았어요. 이런 투기 열풍이 1973년 석유 가격 폭등을 계기로 완전히 파탄에 빠져서 기업이 무너지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실업과 빈곤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죠.

    정년퇴임 앞둔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했을 때, 주류 경제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주류 경제학에서는 시장이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고 모든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기 때문에 공황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고 가르치죠. 하지만 마르크스 경제학은 자본주의에서는 공황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공황에 관한 연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한국에 돌아가서가 문제였죠. 마르크스를 공부했다고 하면 한국에서 받아주는 데가 없을 텐데…. 그때 아내가 ‘이왕 공부하는 거, 좋아하는 걸 연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해줬기에 마르크스 경제학에 몰두할 수 있었어요.”

    그가 신세진 사람이 또 있다.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이다. 김 교수는 외환은행 조사부에서 일하다 재무부로 1년여 파견을 가 있었는데, 그때 재무부 이재국장이 이용만씨였다. 이 전 장관은 그에게 런던에 갈 기회를 주고, 통일혁명당 사건(1968년 신영복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수로부터 북한 서적 2권을 빌려 읽은 혐의로 체포됐으나 기소유예처분됨)에 연루된 탓에 여권 발급이 안 되자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담판을 짓고 여권을 받아줬다. 김 교수가 중·고등학교 시절 테니스 선수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재무부에서 테니스 강습을 했는데, 그때 매일 아침 이 전 장관과 테니스를 치고 같은 차로 출근한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김 교수는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에 관해 일본과 유럽의 경제학자들이 잘못 해석한 측면을 지적하고,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을 제대로 이해할 때 올바로 확립된다는 내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논문 제목은 ‘Theories of Economic Crises: A Critical Appraisal of Some Japanese and European Reformulation.’ 원래 맨 앞에 ‘The Marxist’가 붙어 있었는데, 논문 심사를 목전에 두고 지도교수와 상의한 끝에 수정했다. 귀국했을 때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김 교수는 한동안 사람들이 뭘 전공했냐고 물으면, ‘경제학사’라고 대답하곤 했다.

    “나, 마르크스주의자 맞아요”

    ▼ 논문 제목을 바꾼 건 현실과의 타협인가요.

    “타협이라기보다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으니까, 마르크스 공부했다고 하면 취직이 안 될 테니까, 지도교수와 상의해서 논문 제목을 바꾼 거지요.”

    ▼ 얼마 전 ‘조선일보’ 인터뷰를 보니까, 마르크스주의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셨더군요. 마르크스 경제학을 연구하는 것과, 실천적 운동가로서 마르크스주의자는 좀 다르지 않습니까.

    “전자는 마르크스를 연구해서 마르크스의 분석 방법에 따라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현실운동을 하는 건데, 그 운동이라는 게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지요. 나는 사실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는 방법이 프롤레타리아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의 자본주의 현실을 자꾸 개혁하면, 그게 축적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을 계속 하고 있으니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맞지요.”

    김 교수는 마르크스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의 학술문화제 ‘맑스꼬뮤날레’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여름, 김수행 교수가 쓴 맑스꼬뮤날레 초대글에는 ‘자본주의를 타도합시다’라고 씌어 있다. 자본주의를 고쳐 나가는 것과 자본주의 타도는 분명 다르지 않은가.

    “궁극적으로 타도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자본주의 아닌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려면 자본주의는 타도돼야 하죠. 하지만 무력이나 봉기에 의해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를 잡는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붕괴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사회적·경제적 혁명이라는 건 긴 이행기간이 필요합니다. 재벌이나 자본가가 헤게모니를 놓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로 넘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가 타도돼야 한다는 얘기죠.”

    ▼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방식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았는데요.

    “자본주의를 어떻게 타도해야 한다든가,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해야 한다는 데까지 마르크스 연구가 미치지 않았어요. 그걸 연구한 건 레닌이죠. 실제로 혁명을 했으니까. 자본주의적 잔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점은 레닌이 연구를 많이 했죠. 그런 점에서 앞으로 연구할 게 많아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할 것인가, 평화적으로 넘어가는 방법이 있는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마르크스 이론은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까지만 유용한 것 아닌가요.

    “분석만 하는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새로운 사회로 가려면 자본주의체제가 무너져야 하죠. 물론 무력이나 봉기만이 방법은 아닙니다.”

    사회주의 아닌 새로운 사회

    정년퇴임 앞둔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 교수는 내년 2월 퇴임에 앞서 11월22일 정년기념식을 가졌다.

    ▼ 흔히 마르크스주의는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종언을 고했다고 얘기합니다.

    “소련이나 동구권이 몰락한 것과 마르크스주의는 별개예요. 그쪽은 사실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어떤 한 가지 형태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난 그런 건 없다고 봐요. 내가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표현을 안 쓰고 새로운 사회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와 자본가가 갈등하고 투쟁하면서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런 운동 과정에서 단계 단계마다,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려면 이러이러한 제도가 좋겠구나 하면서 만들어가는 거예요. 자본주의를 타도하자고 하면 ‘그럼 사회주의 하자는 얘기냐’ 하는 반응이 나오는데, 사회주의라든가 정해놓은 게 없어요.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북한이나 소련, 동구권을 지향할 순 없잖아요. 여러 가지를 조합해서 전과 다른 사회로 간다는 의미예요.”

    ▼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같은 표현을 썼습니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단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사회’라고 표현했어요. 사회주의란 표현은 ‘공상에서 과학으로’에서 엥겔스가 처음 썼지요. 엥겔스가 말한 사회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계획경제 같은 게 아니라 자본주의에 억압받던 노동계급이 해방된다는, 해방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어요.”

    김 교수가 책상 서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건넸다. 정년퇴임을 기념해 김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엮은 기념논문집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서울대 출판부)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정형화되지 않은 열린 사회, 더 나은 사회라는 의미에서 제목을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자본론’의 핵심명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산업자본가는 드라큘라와 같이 임금노동자의 노동(즉 피)을 착취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활기를 띠게 된다.”

    10년 전, 기자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이런 표현에 큰 거부감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은연중에 이처럼 자본가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경제발전, 나아가 나라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다. ‘자본론’이 나온 지 어언 140년, 이 같은 프리즘으로 사회를 보는 게 타당할까.

    “드라큘라는, 이윤추구가 생산을 포함한 모든 경제활동의 동인이라고 했을 때 그 이윤이 노동자들로부터 착취한 것이라는 걸 비유적으로 표현한 거죠. 노동강도 강화, 노동시간 연장, 임금 저하 같은 방법으로 이윤을 낸다는 게 자본주의의 기본이고, 그 원칙은 지금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봐요. 그러니까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나 투쟁을 피할 수 없는 거죠. 자본주의의 핵심을 논한 것이기에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IMF 외환위기를 겪은 다음 신자유주의가 급격히 확산되면서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이 심각해졌다고 지적한다. 한국 경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측면이 큰데,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정부가 뒤로 물러나고 시장이 강조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화됐다는 것. 경제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신자유주의를 김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1974~75년 세계 공황과 이후의 장기 불황을 ‘자본주의적 방법’으로 극복하는 사상과 정책으로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다. 자본의 수익률을 높여줌으로써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는데, 시장근본주의를 통해 1945~75년까지 만들어온 복지국가를 해체하는 의미를 지녔다. 세계적으로 볼 때, 영국에서는 1979년 5월부터 1997년 5월까지 집권한 보수당 정부가, 미국에서는 1979년 미국연방준비은행 이사회 의장이 된 볼커와 레이건 공화당 정부(1981~88)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뭐라고 보십니까.

    “빈부격차, 양극화, 빈곤 문제가 대두하는 게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폐해지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경제성장률이 높아졌다는 근거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본의 세계화를 통해 금융 위기가 더 심해졌어요. 이런 이유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은 앞으로 복지국가가 다시 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는 신자유주의가 이뤄놓은 게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걸 증명합니다. 이제껏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는데, 그래서 좋아진 게 뭐가 있습니까. DJ 정권 들어 노동법이 개정돼 대량해고가 가능해졌어요. 대량해고가 합법화되니 기업은 이익이 안 나면 직원을 해고해버립니다. 그러면 기업이 이윤을 보게 돼 있어요. 그렇게 해서 이윤을 많이 내면 재투자하거나 사업을 확장해야 하는데, 대체로 이사들 월급 올려주는 데 썼어요. 요새 이사들 월급 얼마나 많이 받습니까. 노동자들과 비교할 수가 없어요. 자본가의 사적인 부를 증가시켰을 뿐 기업이나 나라경제에 기여한 바는 크지 않습니다.”

    이윤추구 아닌 욕구충족

    ▼ 그러고 보면 외환위기가 우리 국민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듯합니다.

    “새로운 사회의 기본 원리는, 생산의 목적이 이윤추구가 아니라 주민의 필요와 욕구 충족이에요. 그래서 전 사기업도 이윤추구가 아닌,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공공성의 개념을 가지라고 주문합니다. 그러면 기업의 사정이 나빠졌을 때 대량해고가 아닌 노동시간 단축을 선택할 수 있어요. 노동시간을 줄이면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기업의 이윤이 다소 줄 수는 있지만, 이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방법으로 그만큼 좋은 게 없죠. 모두가 직장 다니면서, 좀 덜 먹더라도 다 같이 나눠 먹는 게 더 나은 거 아니냐는 겁니다.”

    ▼ 사람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노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리는 마당에.

    “제 얘기는 그런 쪽으로도 생각을 가져보자는 거예요. 이것만 있는 게 아니라 저것도 있다는 거죠. 프랑스에서도 주 35시간 근무 해봤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걸 논의하고, 시도도 해보는 게 중요하죠. 우리나라가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정의감과 동정심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영국은 1948년에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병원 진료비도 공짜로 만들었어요. 1948년의 영국은 지금 우리보다 경제사정이 훨씬 안 좋은데도 그렇게 했는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본가들이 돈을 많이 벌면 사회가 더 나아질 거라고 믿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됩니다. ‘시장’ 강조하고 ‘경쟁’ 하면 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실상 그렇지 않아요.”

    ▼ 마르크스는 휴머니스트였던 것 같습니다.

    “그럼요. 물론 여기서 휴머니스트란 개념은 경제에서 개인을 분석의 중심으로 둔다는 의미는 아니죠. 인간성을 계발하고, 인간애를 갖고 있다는 의미죠.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노동자해방, 인간해방이에요.”

    ▼ 정치경제학이 발달한 독일과 프랑스가 연이어 보수정권에 손을 들어준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독일과 프랑스는 조금 후퇴한다고 해도 이미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져 있기에, 우리와 비교할 만한 대상은 아니라고 봐요. 다만 영국 노동당이나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회민주당이 자꾸 세력을 잃어가는 이유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노동자나 민중의 요구를 충실하게 받아들여 어떻게든 복지국가 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기에 지지기반을 잃는 거예요. 스웨덴을 보세요. 사회민주당이 계속 집권하고 있잖아요.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서민인데, 그들의 바람대로 하면 왜 집권을 못하겠어요. ‘이러면 선거에서 표를 못 얻지 않을까’ 하면서 당 스스로 자꾸 변해가니까 오히려 표를 잃는 거죠.”

    ▼ 민주노동당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요.

    “정강정책이나 대선공약은 다른 당보다 나은 편인데, 노동자계급조차 다 포섭을 못하고 있는 게 문제예요. 울산에 그렇게 노동자가 많고, 창원도 마찬가지인데 왜 민주노동당 출신 국회의원이 안 나오느냔 말이죠. 당내 정파가 여러 개라도 기본엔 합치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뿔뿔이 갈리니까 문제 아닌가 싶어요. 진보정당이라면 정파를 극복하고 통일성을 확보해야죠. 또 한 가지는, 남북 문제에 서 남북 문제와 서민생활 문제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 앞세워야 할 때, 김정일이 훌륭하다고 하면 표가 안 나와요. 새로운 사회는 김정일의 북한보다 훨씬 나은 사회여야 하는데, 마치 북한 사회가 우리의 모델이라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니까 지지를 못 얻죠.”

    ▼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노동자 의식도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노동자들끼리도 교육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발달해야 합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환경뿐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 실업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서민들로부터 외면당할 거예요. 그런 데 관심을 가져야 국민 다수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민영화만 하면 다 돼나?

    ▼ 보수우파는 시장과 경쟁을, 진보좌파는 규제와 분배를 강조하면서 좌파는 경쟁을 피하는 무능한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어요.

    “노무현 정부가 하나 잘한 게 공기업 민영화를 덜 추진한 거예요. 공기업 민영화를 가장 많이 한 나라가 영국입니다. 민간이 공기업을 사들이는 건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다는 판단에서죠. 전력, 수도, 가스, 철도, 전화 이런 것들은 모두 정부 독점으로 공기업이 관리해왔는데, 독점 자격을 주지 않으면 민간에서 사가겠어요? 정부가 독점할 땐 몇 년마다 한 번씩 치르는 선거가 있어서 함부로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거나 가격을 올리지 못하지만, 민간독점화하면 규제할 방법이 없어요.

    마거릿 대처가 대부분의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나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어요. 서비스 질은 형편없어졌는데 가격은 계속 오른다고 소비자 불만이 커지자 민간독점기업을 규제하는 기구까지 만들었어요. 그런데도 결국 1999년에 런던에서 3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어요. 철도 선로와 신호등에 대한 투자는 소홀히 한 채 이윤을 주주배당으로 나눠 먹은 민영철도회사는 결국 파산하고, 철도는 다시 비영리법인에 인수됐어요. 무작정 시장에 맡기고 경쟁하면 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저도 공기업에 못마땅한 점 많다고 봐요. 고쳐할 게 많습니다. 하지만 민영화만 하면 고질병이 나아질 거란 생각은 맹신이죠. 자본주의가 다가 아니고, 민영화가 유일한 수도 아니에요.”

    김수행 교수는 지난 봄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사회과학대학원’을 열었다. 그는 첫 학기에 이어 2학기에도 ‘자본론’을 강의하고 있다.

    “욕망과 혁명, 역사와 혁명1·2, 자본주의 노동과정1·2, ‘자본론’ 강의, 정치경제학 등 7개 과목이 개설돼 80명이 듣고 있어요. 1학기를 마치고 손익계산을 따져보니 강사료 다 지급하고 적자는 아니더라고요. 3학기에는 경제학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강좌를 개설하려고 해요.”

    현재 수강생 중 대학생은 세 명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교사, 공학도, 언론인 등이라고 한다. 정식으로 석·박사학위를 주려면 대학원대학교로 인가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교사(校舍)도 있어야 하고 정규 교수도 채용해야 하는 등 100억원 가까운 비용이 들어 엄두를 못 낸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비판적인 사회과학에 대한 열망은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며 흐뭇해했다.

    자본주의로 육성된 인간

    ▼ 마르크스에게는 오류가 없었습니까.

    “오류라기보다 자기가 살던 그 사회밖에 못 봤다는 한계가 있죠. 자본론은 기본적으로 독점도 없고 국가도 개입하지 않는 경쟁이론이에요. 독점기업이나 재벌의 등장을 예상치 못했죠. 또 마르크스의 새로운 사회라는 것도 유토피아적 요소가 많아요. 대표적인 게, 새로운 사회로 가려면 사람이 이타적이어야 해요. 이기적이면 사회가 움직이질 않아요. 자본주의적으로 육성된 인간을 어떻게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할지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죠.”

    ▼ 마르크스 경제학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기여하면 좋겠습니까.

    “어느 사회나 좋은 점이 있으면 문제점도 많아요. 그 문제점에 대해 토론하고 개선방법을 논의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터졌을 때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혼란이 올 거예요.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주류 경제학에서는 김정일의 개인성향에 대해 주로 얘기하는데, 그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우리와 전혀 다른 북한의 사회 기반을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분석해야죠. 그런 점에서 비단 경제학자뿐 아니라 정치하는 사람, 행정 관료들도 마르크스 경제학을 알 필요가 있어요.”

    인터뷰를 끝내고 김 교수와 정운영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김 교수는 2005년 운명을 달리한 정운영 선생과 인연이 깊다. 같은 시기 영국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을 공부한 것이며, 한신대에서 함께 쫓겨난 일까지. 정운영 선생은 생전에 김 교수에 대해 “우리 주변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정치경제학을 개척한 선배”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정운영 선생이 ‘중앙일보’로 적을 옮긴 뒤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해졌다.

    “정운영 선생이 변절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거라 충분히 이해하지만, 결과물(신문 칼럼 등)로만 보면 변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서 민중에게 현실을 일깨워주고 싶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됩니까? 여러 요구가 많았을 거예요. 변절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욕할 수가 없어요, 허허. 굉장히 좋은 사람이예요. 깔끔하고, 꼼꼼하고, 내 동생하고 대구시절부터 친구에요. 공부도 많이 했고.”

    김 교수의 말투엔 ‘그 친구가 내 속뜻을 이해할 것’이라는 신뢰 같은 게 묻어났다.

    정운영 선생은 TV토론을 진행한 뒤로 목욕탕에서도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의 유명세를 치렀지만, 운수대통한 쪽은 김 교수가 아닌가 싶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학 진학에 은행 취직, 런던 근무, 아내의 ‘통큰’ 외조, 그리고 학생들 덕분에 서울대 교수까지 됐으니 말이다. 외도 한번 않고 우직하게 ‘비주류’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그렇다. 스스로 “운수 대통했다”고 말하는 김 교수는 자신의 운이 서울대 ‘후임’에게도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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