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미래예측가들의 영업비밀

  •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입력2008-02-04 17: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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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예측가들의 영업비밀

    미래학의 대표주자 앨빈 토플러.(좌) ‘메가트렌드’의 저자 존 나이스비트.(우)

    연초 1~2월, 머리가 맑을 때 책을 펼쳐 들면 상쾌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는가.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지 아니한가. 설레는 가슴엔 미래학 관련 서적이 어울릴 듯하다. 또 눈을 크게 떠서 글로벌 상황을 살피려면 국제 경제를 다룬 책을 읽어야 할 터이다.

    미래학(Future Studies) 하면 가장 먼저 누가 떠오르는가. 앨빈 토플러가 아닐까.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원창엽 옮김, 홍신문화사), ‘미래의 충격’(장을병 옮김, 범우사) 등 세기적인 베스트셀러를 저술했다. 정보화 사회가 도래할 것을 정확히 예견해 통찰력을 인정받았다.

    토플러는 미래학을 기업 경영에 응용했고, 컨설팅과 강연이 주업이 됐다.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고액의 자문료와 강연료를 받는다. 토플러가 2001년 한국에 왔을 때 잠깐 만난 적이 있다. 동아일보 오명 사장을 방문한 토플러는 거물답게 수행원 을 여럿 거느리고 나타났다. 당시 70대 노령인데도 아주 맑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그래야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인지….

    존 나이스비트도 미래학 분야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가끔 한국을 방문해 강연장을 휩쓴다. 전세계적으로 800만권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메가트렌드’(이창혁 옮김, 21세기북스)의 저자이며, 텁수룩한 수염과 소탈한 미소가 트레이드마크다.

    2001년 6월 방한했을 때 필자가 단독 인터뷰했다. 존 나이스비트는 “어릴 때 벽촌에서 자랐기에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마침내 미래학에 몰두하게 됐다”고 했다. 트렌드를 어떻게 예견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엔 “영업 비밀인데…” 하며 싱긋 웃었다.



    “지역신문의 1단짜리 기사도 세심히 읽는다. 짧은 기사라도 새로운 현상이면 기억했다가 다른 지역 신문에서도 그런 일이 보도되는지 살핀다. 그 현상이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면 트렌드 조짐이 아니겠는가.”

    한국 떡잎 알아본 허만 칸

    한국인에게 미래학은 그리 낯설지 않다. 이미 1960년대에 허만 칸이라는 미래학자가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당시는 개발독재시대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따르라’는 식의 통치술을 펼 때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 욕구를 누르기 위해 박 대통령은 “우리도 잘살 수 있다”를 외치며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허만 칸은 한국이 세계에서 주목받는 경제 선진국으로 부상하리라 예견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적극 홍보했다. 대다수 국민은 허만 칸의 예측이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했다. 자본도, 기술도 없는 저개발국 한국이 무슨 수로 선진국이 된단 말인가. 혹시 그 학자가 한국 정부로부터 로비를 받아 터무니없는 논문을 발표한 것은 아닌가. 이런 의구심을 가졌다. 특히 비판적 지식인들은 허만 칸을 사이비 학자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미래학 연구 집단인 로마클럽이 내놓은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가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것도 미래학을 익숙하게 만든 요인이다. 석유자원이 곧 고갈된다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은 이 책은 한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훗날 허만 칸의 예견은 거의 맞았다. 반면 로마클럽의 보고서는 별로 맞지 않았다.

    앨빈 토플러, 존 나이스비트 등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미래학자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들은 ‘학자’라 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 학문적 연구방법론을 통해 미래학을 탐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모습, 미래 현상을 통찰해 에세이로 정리하는 미래예측가라 할 수 있다.

    학문적 방법으로 미래학을 개척한 선구자는 제임스 데이터다. 그는 1967년 앨빈 토플러와 함께 ‘미래협회’를 만들어 미래학이란 학문을 처음으로 정립한 인물이다. 토플러와 달리 데이터는 대학에 남아 연구했다.

    미래예측가들의 영업비밀

    미래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

    데이터는 1980년대에 세계미래연구협회 사무총장으로, 1990년대 초에는 이 협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하와이대 미래학연구소 소장 겸 정치학부 대안(代案)미래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래학의 대부’라 불리는 데이터는 1970년대에 정보와 이미지 사회가 도래할 것으로 예견했다. 1989년에는 북한 노동당 비서였던 황장엽씨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대에서 미래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한국인 제자와 함께 ‘한류(韓流)’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이목을 끌었다.

    제임스 데이터, 윌리엄 하랄

    데이터 교수가 엮은 ‘다가오는 미래’(우태정 옮김, 예문)가 최근 간행됐다. 미국에서 2002년에 나온 책이니 한국어 번역 출판이 늦은 셈이다. 그러나 미래를 꿰뚫어보는 쟁쟁한 미래학자 29명의 논문은 여전히 싱싱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데이터 교수는 ‘미래는 과거에 있다’는 제목의 짧은 논문을 프롤로그로 내세웠다. ‘과거의 기술이 어떻게 인간 행동을 변화시켰는가’를 잘 살피면 미래의 흐름을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변화의 쓰나미’라는 개념도 소개한다. 기술 발전으로 사회가 변화하면 쓰나미처럼 거대한 물결로 가속화된다는 의미다. 21세기 초반 수십년 사이에 변화의 쓰나미가 거세게 밀려올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 실린 조지워싱턴대 윌리엄 하랄 교수(경영학)의 ‘첨단기술시대의 예언가’라는 글도 흥미진진하다. 하랄 교수는 학부에서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하고 공군 장교로 근무한 경력을 지녔다. 엔지니어링 회사인 그루만에 입사해서 미 항공우주국(NASA)이 주문한 달 착륙선을 설계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야를 더욱 넓혀 미래학에 입문했다.

    “정보기술은 이제 지구상에서 가장 큰 힘이며 공산주의의 붕괴, 기업 및 정부의 혁신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앞으로 막강한 기술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미래학에 대한 입문서로는 ‘미래혁명’(신지은 외 지음, 일송북)이 읽을 만하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10명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론을 요약했다. 이 책에도 제임스 데이터 교수가 등장하는데, “2020년엔 꿈과 감성이 매출을 좌우하는 드림 소사이어티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드림 소사이어티 시대에는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상품 안에 담긴 이미지와 스토리, 꿈을 판매한다는 얘기다.

    윌리엄 하랄 교수는 “현재의 인터넷보다 훨씬 편리한 인텔리전트 인터넷이 등장한다”며 “말로 컴퓨터에 명령하며 우리의 생각을 읽어 실행하는 스마트 컴퓨터도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파출부의 진화, 집사 양성학교

    먼 미래가 아닌 향후 몇 년간의 변화를 살피는 트렌드 연구도 흥미롭다.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상에 대한 탐구다.

    ‘HOT trends 40’(나건 김경훈 지음, 한국트렌드연구소)은 화려한 시각물이 듬뿍 담겨 있어 눈길을 끄는 책이다. 새로운 트렌드 40개를 사진과 일러스트레이션을 곁들여 정리했다. 저자인 김경훈 한국트렌드연구소장은 트렌드 연구 분야에서 선구자 노릇을 한 인물이다.

    버틀러, 즉 집사(執事)는 집안의 크고작은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관리자다. 건물 보수 같은 거친 일부터 요리나 스케줄 챙기기 등 비서업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인이다. 선진국에서는 집사 양성학교가 생겼다. 이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다. 이런 트렌드가 한국에서도 조만간 나타나지 않을까. 파출부가 진화한 형태이다. 이 책은 집사 트렌드를 소개하면서 이탈리아 밀라노의 갈레리아에는 세계 정상급 버틀러들이 근무한다고 강조했다.

    외부와 차단된 개인 휴식처인 ‘퍼스널 오아시스’가 등장하는 것도 새로운 트렌드다. 캡슐 안에서 혼자 컴퓨터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오큘러스’라는 제품이 대표적인 사례다. 4만5000달러의 고가라 상품화 가능성이 미지수이긴 하다.

    현재 진행 중인 경제 현상을 파악하려면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를 보면 도움을 얻는다. 이 잡지는 국제 경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짜임새 있는 편집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웅산 테러로 숨진 김재익 전 경제수석이 수십년간 구독한 책이기도 하다. 유족들은 김 수석의 관(棺)에 이 책을 넣었다.

    이코노미스트에서 해마다 연말 무렵 발간하는 새해 경제 전망서는 권위를 인정받는다. ‘이코노미스트 2008 세계대전망’(현대경제연구원 옮김, 한국경제신문)은 세계의 주요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편집장인 대니얼 프랭클린은 서문에서 “2008년에는 미국 대통령선거와 베이징 하계 올림픽, 이 두 이벤트가 큰 줄기를 이룰 것”이라면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자유세계의 리더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한국에서 올해 주목할 점으로는 7월에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철학대회를 꼽았다. 철학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정작 한국에서는 먹고사는 경제 문제가 화두가 되다 보니 철학은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는데….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

    미래예측가들의 영업비밀

    한발 앞서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는 데 힌트를 주는 책.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간하는 세계 경제 전망서. 2007년 큰 화제를 모은 장하준 교수의 책.(왼쪽부터 차례로)

    글로벌 경제 상황을 이해하려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부키)을 읽으면 좋다. 이 책을 펼치면 프롤로그에서부터 눈을 떼기 어려우리라. 한국의 익숙한 사례가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와 함께 줄줄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재직하는 저자 장하준 교수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공개하는 데서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 저자는 1963년 10월7일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밝힌다. 그 무렵에 한국이 얼마나 가난했기에 그런 표현이 나왔을까. 1961년 한국의 연간 1인당 소득은 82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나의 1인당 소득 179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저자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1년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흑백TV와 냉장고를 마련해왔다. 알뜰하게 모은 장학금으로 구입한 소중한 물건이었다. TV에서 생중계하는 스포츠 경기를 보려고 이웃 주민들이 집에 자주 놀러왔다.

    저자가 살아온 45년 사이에 한국의 경제성장과 이로 인한 사회적 변화는 놀랄 만하다. 한국은 최빈국에서 출발해 1인당 소득이 포르투갈과 맞먹는 나라로 성장했다. 텅스텐, 가발 등이 주요 수출품이었으나 이제는 이동전화기, 평면 TV, 자동차 등으로 고도화했다.

    한국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들은 “한국은 안정된 통화 가치와 작은 정부를 갖추고 민영 기업과 자유 무역을 토대로 경제를 운영하며 외국인 투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고 보충 설명한다.

    이런 견해는 애덤 스미스와 그 추종자들의 자유주의 경제학을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으로 흔히 ‘신자유주의 경제학’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한 의도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허구를 파헤치기 위해서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음험한 권모술수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자유경쟁,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선진 강국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기준이라는 것. 영국, 미국도 보호무역 장벽을 높이 쌓았다가 자국 산업이 경쟁력을 갖추자 자유무역의 기치를 높이 든 역사가 있다. 일본, 독일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부자 나라들을 ‘나쁜 사마리아인(Bad Samaritans)’이라고 비유한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착한 사마리아인과 다르다는 것이다.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6세 어린이에게 어른의 규칙을 강요하는 꼴이라고 지적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 등 3대 국제기구를 ‘사악한 삼총사’라 규정했다. 개발도상국에 끊임없이 부당한 기준을 강요하는, ‘나쁜 사마리아인’의 충실한 하수인이라고 비판한다.

    한국 세계화의 현주소

    이 책을 추천한 인사들의 면면을 봐도 책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언어학 석학이었으나 중년 이후엔 사회운동가로 활동해온 노엄 촘스키가 선봉에 섰다. 촘스키는 장하준 교수의 책에 대해 “탄탄한 경제학 이론과 역사적 증거에 기반을 두어 세계 경제를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문명화된 형태로 개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안한다”고 극찬했다. 촘스키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여전히 석학으로 대접받는 데 반해 미국에서는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박사도 “세계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만들어주는 책”이라 상찬한다.

    장 교수의 이 책은 버스를 타지 못한 사람의 논리에 바탕을 뒀다. 한국의 세계화 현주소는 어떤가. 이미 버스를 탄 승객이다. 한국으로서는 WTO 원칙에 따라 자유무역주의가 확산돼야 유리하다.

    장 교수의 다른 저서 ‘쾌도난마, 한국경제’(장하준·정일 지음, 부키)처럼 ‘나쁜 사마리아인들’도 읽을 때는 속이 후련하지만 그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국경제가 이미 선진국 질서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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