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국은 이미 1975년에 월드컵골프대회를 개최한 나라다. 그럼에도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 태국 골프가 일본 골프는 고사하고 한국 골프보다도 뒤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태국 넘버원 골프장’이라는 나바타니에서 라운드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여행을 준비하는 주변 사람들이 무엇보다 비용을 줄이려 궁리하는 것을 자주 봤다. 그러나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떻게 하면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여행을 할 것인지를 제일 먼저 생각한다. 저렴한 비용으로 최대한 많은 것을 얻고 누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자유를 구가하기 위한 최소 비용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반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골프 여행이면서도 늘 혼자만의 여행이 되곤 했다. 페블비치도 그랬고, 오거스타내셔널도 그랬으며, 앨리스터 매켄지가 설계했다는 오클랜드의 티티랑기 골프장을 찾았을 때나, 세인트앤드루스의 올드코스를 갔을 때도 나는 혼자였다. 이번 여행도 그렇게 계획했다. 다만 아내가 함께했다는 것이 좀더 젊을 때 떠난 골프 여행과 다른 점이었다.
아주 오래전, 사법시험 공부를 하면서 책상 머리맡에 ‘평생 동안 가장 자유롭게 생활하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 가장 절제되고 통제되고 구속된 생활을 하자!’는 취지의 글귀를 써붙여놓은 적이 있다. 그러다가 골프를 알게 됐다. 그리고 마이클 머피가 쓴 ‘Golf in the Kingdom’을 읽게 됐다. 특히 마이클 머피가 이 책에서 주인공 시바스 아이언즈에게 ‘골프 규칙의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을 읽고 나자 문득 ‘최대한의 자유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자기구속을 통해 얻어지리라’ 했던 수험생 시절의 생각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골프는 선사(禪寺)이자 뇌옥(牢獄)
…그렇게 넓은 지역에서 펼쳐지는 스포츠의 최후 도달점이 왜 그토록 좁고 속 타는 장소란 말인가. 그러나 실컷 걸어 돌아다닌 끝에 보게 되는, 작고 보잘것없는 구멍보다 훨씬 더 골프의 역설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게 있다. 그것은 참된 골프 애호가라면 누구라도 힘써 지키고 있는, 골프 규칙에 대한 절대복종과 정확한 스코어 기록이다. 골퍼들은 수준이 높아갈수록 골프 규칙을 더욱 존중하려 한다. 최고의 플레이어는 어떤 형태로든 골프 규칙이 침해되는 것을 싫어한다. 과학자는 발견에 따르는 절차를,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지어내는 솜씨를, 선한 사람은 모든 행위의 도덕적 측면을 저마다 중요시하듯 시바스는 골프 규칙과 기량을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골프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징표인 것이다.
시바스가 엄격한 골프 규칙에 철두철미하게 따르는 것은 무엇보다 골프가 선사(禪寺)의 입구임과 동시에 뇌옥(牢獄)이기 때문은 아닐까. 골프는 그것으로부터 탈출해야 할 감옥이 된다. 실내에 있을 때 시바스는 늘 의기소침해 보였다. 그렇지만 그때야말로 그의 영혼은 왕성하게 대화하여 고양되고 몽환의 상태에 이르러 자신이 처한 좁고 고통스러운 공간의 먼 저편까지 날아오른다. 그가 골프 규칙에 완전 복종하는 것에 대해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룰에 매임으로써 자신이 이 좁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갇혀 있는 상황이 극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이곳으로부터 경이적인 초월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치 “칠십(七十)이 종심소욕(從心所欲)이로되 불유구(不踰矩)니라” 했다던 공자의 경지를 이해한 것으로 생각했다. 즉 마음대로 행동하나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취지의 이 말씀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의 경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했고, 그것은 수년간 면벽좌불 수행으로 득도했다는 고승대덕들이 누리는 자유라고 생각했다. 골프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시바스의 태도가 그런 고승대덕들의 수행자세와 흡사하다고 여겼다.
이런 까닭에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모처럼의 여행이, 그런 이들이 누리는 자유에 버금가는 자유를 구가할 수 있어야 하거나 적어도 거기에 이르기 위한 시도는 되어야지, 여행 가이드에게 끌려다니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어느 친구가 권하던 히말라야 트레킹 여행이나 인도 여행은 비록 골프를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언젠가 한번은 시도할 참이다.
첫날 티오프 시간은 아침 7시2분. 새벽 1시가 넘어 여장을 푼 나는 잠자리에 들자마자 다시 일어나 아침식사도 못한 채 로비로 내려와 도어맨에게 택시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택시 한 대가 멈춰섰다. 목적지가 나바타니 골프장이라고 말하고 미터기에 표시되는 요금을 내겠다고 했더니 안 가겠다면서 지나가버렸다. 도어맨이 너무 이른 아침이라 미터 요금으로는 아무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의를 줬다. 어쩔 수 없이 500바트 달라고 하는 것을 300바트로 깎아달라고 했다가 결국 400바트를 주기로 하고 택시를 탔다.
그러나 차를 탈 때 나바타니를 잘 안다고 하던 택시 기사는 7시가 훨씬 넘었는데도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설상가상 기사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태국어를 단 한마디도 못했기에 의사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참다 못해 손짓으로 차를 세우고 다른 택시 기사에게 길을 물으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티오프 시간이 훨씬 지난 8시 가까이 되어서야 ‘1975 Golf World Cub Site’라 씌어진 입간판을 찾았다. 나바타니의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월드컵 골프와 ‘나카무라 사건’
나바타니 골프장은 1953년 캐나다에서 시작된 월드컵골프대회를 개최하기 위해(이 때문에 초창기에는 ‘캐나다컵대회’라고 했다)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라는 골프설계자에게 의뢰해 만든 코스다. 그는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을 리모델링할 때 참여한 인물로, 그보다 훨씬 이전에 강원도 평창의 용평골프장을 설계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1994년 스키장으로 널리 알려진 캐나다 밴쿠버 인근 휘슬러의 샤토휘슬러 골프장에서 라운드를 마친 후 읽은 ‘Golf by Design’이란 책의 저술가로서, 직접 만나 골프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호감을 갖고 있는 설계자다.
나바타니에서 열렸다는 ‘The World Cub of Golf’ 대회를 이야기하자면 일본에서 열린 1957년 대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57년 10월, ‘골프의 올림픽’이라 일컬어지던 월드컵골프대회가 세계 30개국 대표선수 2명씩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대회장으로 선발된 골프장은 사이타마현의 가스미가세키(霞が關)CC. 당시 일본에서 가장 안정된 샷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진 오노 고이치와 한 조를 이룬 나카무라 도라키치는, 우승후보로 지목되던 미국의 샘 스니드, 지미 데마르트 등과 경쟁해 승리함으로써 일본에 영예를 안겼을 뿐 아니라 개인전에서도 우승했다. 1915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나카무라 도라키치는 158cm, 65kg의 작은 체구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집에서 멀지 않은 호도가야CC에서 캐디로 일했다. 월드컵골프대회에서 나카무라가 우승한 것은 ‘뉴욕타임스가 ‘기적!’이라고 쓸 만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였다.
나카무라의 우승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골프 열기가 고조되고 골프장이 우후죽순처럼 건설되는 골프붐이 일었다. 1940년 일본에는 41곳의 골프코스가 있었고, 골프 인구는 약 11만이었다. 그러던 것이 1957년이 지나자 골프장은 116군데, 골프장 이용자수는 연 185만명에 달했다. 1962년에는 골프장이 195곳으로 늘어났고, 1973년에는 103곳, 1974년에는 154곳, 1975년에는 166곳, 1976년에는 135곳의 코스가 조성됐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4년간 매년 100곳 이상 코스가 조성된 것이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빈터에서 나카무라의 폼을 흉내 내는 소동이 벌어졌다. ‘귀족의 전유물’이던 골프가 대중화하는 ‘시민혁명’이 불붙은 것이다.
골프 발전 원동력은 ‘스타’
나바타니 입구에 세워진 입간판과는 별도로, 클럽하우스 로비 기둥에는 ‘Thailand #1’이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다. 두 간판을 보면서, 태국 사람들이 나바타니 코스를 조성한 까닭은 일본의 골프 역사를 답습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한 열망을 실행에 옮긴 나바타니 관계자들은 아마도 태국 골프에 있어서 토인비가 말하는 소위 ‘창조적 소수자(Creative Minority)’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 태국 골프가 일본 골프는 고사하고 한국 골프보다도 뒤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1992년경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신문에 골프 관련 글을 써왔다. 글을 기고한 가장 큰 목적은 골프 대중화에 보탬이 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1993년 ‘문민정부’ 들어 실질적인 골프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에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취지의 글을 쓴 적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요지부동이었다. 골프가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사치성 유희로서 계층 간에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부패의 온상이라는 지도자의 지적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른바 IMF 경제위기를 맞았다. 경제상황을 감안하면 하던 골프도 그만둬야 할 난국에 처한 것이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던 1998년,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다. 그러자 TV에서는 축구나 야구 경기를 중계하듯이 골프 경기를 중계방송하기 시작했다. 그 뒤에 이어진 최경주의 PGA 투어 우승은 한국 골프를 그야말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영국 골프는 올드 톰 모리스와 영 톰 모리스의 뒤를 따라 출현한 숱한 선수에 의해 눈부시게 발전해왔다. 미국 골프도 마찬가지였다. 허버트 워런윈드가 쓴 ‘The Story of American Golf”에 따르면 초창기인 1888년부터 1913년까지는 미국에서도 골프 반대론이 적지 않게 제기된 모양이다. 오늘날 부동의 세계랭킹 1위에 올라 있는 파인밸리 골프장이 조성될 때 10홀을 조성하는 데 2만2000그루의 소나무가 벌채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물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미친 짓”이라고 비난을 퍼부은 지역신문의 기사를 보면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의 골프 반대론을 그대로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 미국 골프도 1920년대 보비 존스와 1960년 초반의 아놀드 파머, 잭 니클라우스 같은 걸출한 선수들이 활약하면서 대중화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타이거 우즈라는 영웅이 등장해 골퍼들은 물론이요 모든 이의 관심을 휘어잡고 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나는 골프 발전의 지름길은 스타 선수의 발굴과 육성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한국은 감히 상상도 못하던 시절인 1975년에 세계적인 골프대회를 개최하고도 태국이 여전히 골프 후진국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직도 걸출한 골프 선수가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통차이 자이디 등 비록 PGA 투어는 아닐지라도 EPGA 투어나 아시안 투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태국 출신 선수들이 눈에 띈다. 그래서 머지않은 장래에 일본과 한국 못지않게 태국 골프가 주목을 받게 될 듯싶다.
‘#1’이라고 쓰인 간판을 지나서 왼쪽을 향해 라커실 입구를 조금 더 지나가니 조촐하게 자리 잡은 스타트하우스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여느 태국 사람과는 달리 얼굴이 유난히 하얗다. 안절부절못하면서 서투른 영어로 “한국에서 왔는데, 택시 기사가 헤매는 바람에 티오프 시간에 늦었으니 양해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이미 연락을 받았노라면서 천천히 티오프를 준비하라고 말했다. 이번 여행의 나바타니 첫날은 이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