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리공원 도산 안창호 묘지터 인근에는 애국지사 유상규(劉相奎·1897~1936)의 무덤이 있다. 도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상해 임시정부에서 도산의 비서로 일한 유상규를 아는 이는 드물다. 도산의 정신적 아들이기도 했던 그는 경성의전 부속병원의 의사로, 독립운동가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불혹의 나이에 타계한 유상규의 자취를 쫓던 필자는 감춰졌던 도산의 유언, 도산과 그의 관계, 알려지지 않은 고인의 업적을 발굴했다.
망우리공원의 태허 유상규 묘와 도산 안창호의 묘지터(원 안).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상해에서 도산을 위해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 그는 귀국해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로 외과에 있는 동안 사퇴 후의 모든 시간을 남을 돕기에 바쳤다.”
이 글은 춘원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웬만한 애국지사라면 그의 글이 남아 있을 터. 그렇다면 왜 이 연보비에 후일 친일 문인으로 낙인찍힌 춘원의 글이 실렸을까. 유상규에 대한 기록을 그만큼 찾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서울시는 망우리묘지의 공원화 작업 때 흥사단에 의뢰해 고인의 글을 받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어쩔 수 없이 춘원의 글을 올렸다 한다. 우리가 유상규라는 이름 석 자를 쉬 접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필자는 고인의 장남 유옹섭(76)씨의 도움으로 그와 관련된 글을 두루 찾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생전에 많은 글을 발표했으나 본명 대신 아호를 필명으로 썼기에 후세인은 그 글의 저자가 고인인지 알 수 없었다. 말은 있었지만 말의 주인을 알 수 없었고, 주인은 있었지만 주인의 말은 사라진 셈. 필자가 찾아낸 ‘주인의 말’은 후술하기로 하고 일단 연보비의 뒷면을 소개하면 이렇다.
찾지 못한 말
태허 유상규의 연보비.
연보비 옆길로 20m쯤 올라가면 고인의 묘가 나온다. 비석의 앞면에는 “愛國志士江陵劉公諱相奎(애국지사강릉유공휘상규)/ 配孺人淸州李氏(배유인청주이씨)”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휘(諱)’는 고인의 이름을 의미하고 ‘유인(孺人)’은 양반이되 벼슬이 없던 사람의 아내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후에 다른 이의 묘를 소개할 때 다시 나오겠지만, 숙부인(淑夫人)은 3품 이상의 당상관, 단인(端人)은 정/종 8품 관리의 부인에게 주는 작위다. 비석의 뒷면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1936년 5월23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태허 유상규의 의학기사와 1935년 동아일보에 실린 그의 건강 강연회 광고(왼쪽).
1990년 고인이 뒤늦게 훈장을 받은 것은 장남 유옹섭씨의 증거자료 제출에 의해 마침내 정부가 그 공적을 인정하게 됐기 때문이다. 옛날 비석은 땅에 묻고 새로운 비석이 세워진 것도 훈장 수여 후의 일이다.
의학을 통한 민족 계몽
도산이 자신의 비서로 있던 유상규에게 급거 귀국을 권고한 것은 그의 독립사상 때문이었다. 유상규는 3·1운동에 참가한 이력 때문에 경성의전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상해로 와 임시정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도산은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이완용 일개인 탓도 아니오, 일본 탓도 아니라 우리가 힘이 없어서였다. 그러하니 나라의 독립은 국민 개개인이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점진적으로 힘을 키워나가는 방향으로 투쟁을 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급진파는 “당장 싸울 인력이 필요한데 무슨 말이냐”며 반대했으나, 도산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도산의 제자 격인 춘원 이광수 또한 나이 27세로 상해에 있을 때 “독립국민의 자격자를 키우라”는 도산의 권고에 따라 귀국해 흥사단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에 나섰다. 춘원은 흥사단의 국내조직으로 수양동우회를 조직했고 도산의 장례를 주관했으며 광복 후에는 기념사업회의 권유로 ‘도산 안창호’를 집필했다. 춘원의 정신적 지주는 도산이었다.
경성의전은 조선총독부 산하 최고의 의학교로 서울대 의대의 전신이다. 유상규는 1916년 3월 경신중학을 11회로 졸업하고 그해 4월에 경성의전에 입학했고, 1919~1924년 휴학 후 1925년 복학해 1927년 3월에 졸업했다. 경성의전 출신 의사로서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1898~?·1921년 졸업, 6·25 때 납북)와 민중병원 설립자 유석창(1900~1972·1928년 졸업) 등이 유명하다.
유상규는 졸업 후 경성의전 부속병원 외과의사 및 학교의 강사로 박사학위를 준비하는 한편, 동아일보사 주최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참석해 조선 민중의 의학적 계몽활동에 열심이었고, 1930년에는 조선의사협회 창설도 주도했다(중외일보, 1930. 2.22). 또한 동우회 잡지 ‘동광(東光)’은 물론, ‘신동아’에 많은 글을 실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본명을 밝히지 않고 ‘태허(太虛)’라는 호로 발표한 글이 많아, 실명으로 실은 의학 관련 기사 외에는 그의 글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이광수는 글로써 민족계몽에 나섰고, 유상규는 의학으로써 민족의 건강을 위한 공중위생 계몽에 나섰다. 폭탄을 던지는 방식의 독립운동도 필요하지만 꾸준하고 점진적인 독립운동도 중요하다고 주장한 도산의 독립사상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 바로 유상규다. 그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왕진에도 열심이었고, 휴가 때도 친구의 병 간호를 할 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丹毒)에 감염돼 세상을 버렸다. 유상규는 죽을 때까지 도산의 뜻을 헌신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그의 장례는 마침 대전에서 출옥해 국내에 체재 중이던 도산이 주관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장례식엔 불법집회로 의심받을 만큼 많은 친지와 동지가 모였으며 그의 은사 오사와 마사루 교수도 ‘슬픔에 떨리는 음성’으로 조사를 낭독했다 한다.
도산 안창호(앞)를 중심으로 오른쪽부터 유상규, 전재순, 김복형
테허가 세상을 떠난 후 부인은 30세 청상과부의 몸으로 삯바느질과 하숙을 치며 어렵게 두 아들을 키웠다. 옹섭씨는 네 살 때 도산과 흥사단원이 함께 찍은 사진 맨 앞줄에 서 있었고, 어머니와 함께 도산의 병 문안을 간 적이 있다. 아마 현존 인물 중 도산을 직접 눈으로 본 유일한 이가 그일 것이다.
옹섭씨가 ‘태허(太虛)’가 곧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기까진 많은 우연이 함께 했다. 그는 고인의 유품을 뒤지던 중 작은 쪽지에서 ‘태허’라는 단어를 발견했지만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서야 그 쪽지가 집으로 찾아온 심훈(沈熏·1901~1936, ‘상록수’의 작가)이 부친 앞으로 남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여러 문헌 속 ‘태허’라는 필명의 글이 모두 부친 유상규의 글이라는 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독립기념관의 도움을 얻어 찾은 부친의 원고와 보관 중인 미발표 원고 일부를 묶어 전기 ‘애국지사 태허 유상규(흥사단)’를 최근 출간했다.
“정치인만이 위인은 아니다”
태허가 남긴 글 중에 눈에 띄는 글이 있다. 1925년 5월 ‘동광’ 창간호부터 1926년 12월 8호에 걸쳐 연재한 ‘방랑의 일편, 특이한 결심을 가지고 상해를 떠나 나가사키, 오사카로 노동생활을 체험하던 작자의 회상기’라는 글이다. 이 연재물은 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겪은 일을 적은 수기 형식의 글로, 당시 일본에 간 조선 노동자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1931년 7월(23호)에 실린 ‘피로 그린 수기 젊은 의사와 삼투사’, 1931년 12월과 1932년 1월(29, 30호)에 쓴 ‘의사평판기’는 당시 의학계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필자는 그의 글을 찾는 과정에서 연보비에 새로 새겨 넣을 만한 문구를 찾아보았다. 정치가나 문필가가 아니라 행동의 지사였던 유상규의 글에는 치밀함은 있어도 정치성은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우리 조선 사람은 위인 혹은 세계적 위인이라면 곧 정치가를 연상한다. 더군다나 근일의 신사조로 인해서 위인과 영웅의 의미를 혼동해서 민중시대에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 위인을 부정하려는 경향까지도 보인다. 이렇게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사상환경 속에서 과학적 위인, 그야말로 인류 영겁에 행복을 주는 위인이 자라나긴 고사하고, 싹트기도 바라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의사평판기’, 1931. 12 ‘동광’ 29호)
‘의사평판기’의 서론 부분에 해당하는 이 글에서 필자는 정치가만이 위인이 아님을 설파한다.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최고의 실력을 연마해 그것이 자기실현에 그치지 않고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자는 모두 위인이라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국내 흥사단 조직인 동우회는 ‘수양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 혐의로 1937년 일제에 의해 검거됐는데, 이때 붙잡힌 도산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병환을 얻어 경성제대부속병원에 입원했다가 1938년 3월10일 60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도산의 시신은 망우리공원 유상규의 묘지 바로 오른쪽 위에 묻혔다.
그러나 지금 망우리묘지를 찾아 유상규의 무덤 오른쪽 위로 올라가면 도산의 묘는 오간 데 없고 묘가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묘지석(墓址石)만 남아 있다. 앞면에 ‘도산 안창호 선생 묘지(墓址)’, 뒷면에는 ‘1973년 11월10일에 이 지점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도산공원 내로 이장’이라고 씌어 있다. 필자는 유상규 관련 자료를 찾다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망우리 묘지에 묻힌 사연을 ‘삼천리’(1938. 5)에서 발견했다.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뒤늦게 밝혀진 도산의 유언
…육십 세를 일기로 봄바람 아직도 찬 3월10일에 서울제대 병원 일실에서 이리하야 도산은 이 세상을 하직했다. 여기에 부기할 것은 도산은 돌아가기 전 며칠 전에 이런 말씀을 하였다. “나 죽거든 내 시체를 고향에 가저가지 말고.” “그러면 엇더케 할래요.” “달리 선산 가튼데도 쓸 생각을 말고.” “서울에다 무더 주오.” “ … ” “공동묘지에다가…” “유상규군이 눕어잇는 그겻 공동묘지에다가 무더주오.” 伯氏와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었다. 유상규란 경성의전 청년 교수로 상해 당시부터 도산의 가장 사랑하든 애제자인데, 그만 연전에 서울서 작고하였다. 그날 장례식은 춘원이 주재하였다.’(1938. 5.1. ‘삼천리’ 제10권 제5호. ‘도산의 임종, 서울 공동묘지에 묻어달라는 일언(一言)이 세상에 끼친 유언’ 중에서) |
망우리공원에 있던 도산 안창호의 묘. 경기중학교 시절 유상규의 장남 유옹섭이 찍은 사진이다.
버려진 도산 묘터
유상규의 장남 옹섭씨는 후에 부친의 자료를 정리하던 중 이 사실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도산의 이장이 추진될 당시만 해도 도산의 이런 유언을 아는 부친 유상규의 동지 세대가 생존하던 때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또 그런 글이 씌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도산의 시신은 자신의 유언이나 희망과는 관계없이 다른 곳으로 이장된 셈이다.
도산과 태허가 혈연의 부자지간과 다름없었음을 알 수 있는 글이 또 하나 있다. 흥사단 동지 장리욱(1895~1983)이 지은 ‘도산의 인격과 생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고 유상규 의사는 도산을 스승으로만이 아니라 분명히 어버이로 모셨다. 도산 앞에서의 행동거지는 물론이지만 도산의 신상 모든 일에 대해서 갖는 유군의 그 세심한 정성은 훌륭한 ‘효자’ 바로 그것이었다. 도산은 동지 유군이 당신을 향해서 갖는 그 정성어린 섬김에 대해서 가슴 깊이 고맙게 느끼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어느 기회에 나는 도산을 모시고 대동강 하류 만경대에까지 나아갔던 일이 있다. 도산은 거기서 그렇게 멀지 않게 바라보이는 조그마한 과수 밭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이것은 유상규 군이 당신을 향해 갖고 있는 그 고마운 마음을 두 집 자녀에게까지 전해주고 싶어서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과수 밭은 유군의 맏아들(옹섭)과 도산의 둘째아들(필선·1912~2001)의 이름으로 보관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허 유상규의 장남 유옹섭씨. 도산 안창호에 대해 새로운 증언을 했다.
도산이 망우리에 묻힌 후 수주일간 양주경찰서는 묘지 입구에서 방문객을 일일이 심문했고, 그 후 1년간이나 묘지기에게 도산의 묘를 묻는 자의 주소와 이름을 적게 했다. 일제는 죽은 도산을 무서워했고, 도산을 찾는 국민의 마음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시하지 않는 지금, 망우리묘지의 선현들을 찾는 국민은 거의 없다. 국민의 정신이 그만큼 빈약해진 것이거나, 나라가 무관심하니 국민도 모른체하는 것이리라. 혹자는 구태여 무덤까지 찾아갈 필요가 있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는 것만큼 보이고 느낀 만큼 발걸음이 닿게 마련이다.
죽은 자의 소원
서울 강남 도산공원의 안창호 동상.
이런 현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다시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 도산의 묘를 지키던 일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묘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 합해지면 무서운 힘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의 망우리를 찾는 일본인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때가 지나면 고인의 묘지(정신)에 관심이 없다고. 도산의 묘터(墓址)는 이렇게 그가 가장 사랑했던 한국민에게서 버림받고 있다.
도산은 그가 원해서 망우리묘지에 묻힌 후 30년 만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장됐다. 그러나 그의 넋만은 강남으로 이장되지 않았다. 죽은 도산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장을 거부했거나 친애하는 유상규도 함께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후세인은? 도산대로를 장식할 도산의 유해가 중요했지, 도산의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도산은 민중과 같이 공동묘지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세상은 산 자들의 것, 고인의 말은 세인의 필요에 따라 인용되고 때로는 묵살된다. 도산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유상규의 묘비가 지금 이토록 쓸쓸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까. 어버이처럼 사랑한 도산의 묘터가 저렇게 방치된 것을 바라보는 고인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애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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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섭씨는 지난해 국가로부터 아버지 유상규 선생을 국립묘지로 이장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지사가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은 당연한 일. 공군 장성 출신인 옹섭씨도 국립묘지에 갈 자격이 있다. 부자가 국립묘지에 나란히 묻힐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부자가 함께 묻히니 좋고, 나라의 관리를 받게 되니 후손들도 여러모로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친의 묘를 당분간 망우리공원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국립묘지로 가게 되면 자신과 후손들은 좋지만, 정신적 부자 사이였던 도산과 태허는 영원히 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후손의 희망이나 편의보다는 도산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비록 후손들이 유상규 선생의 묘를 국립묘지로 이관해도 뭐라 할 순 없지만, 도산의 유언을 알게 된 이상 도산과 태허의 넋까지 갈라놓을 수는 없는 일. 산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데 죽은 사람의 소원조차 무시하는 세태가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