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정부에서 안보정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다.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밀어닥친 북핵 위기와 한미동맹 재조정이라는 양대 과제는 엄청난 도전을 요구했지만, 노 정부는 이를 조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하며 ‘동북아시대’나 ‘동북아균형자론’ 같은 큰 그림에 집중했다. 그러나 상화변화에 맞춰 대북 포용정책을 업그레이드하지 못함에 따라 문제 해결은 하염없이 지연됐고, 한미 간에는 마찰음이 일었다. 내걸었던 ‘큰 그림’도 해프닝으로 귀결됐다.
2003년 8월27일 1차 6자회담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
우선 지난 5년 동안 우리 안보가 더 불안해졌다는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북한의 핵실험과 핵무기 개발로 한국의 안보는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여러 제약 때문에 독자적 핵개발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대응수단도 마땅치 않다. 설상가상으로 한미동맹이 흔들려 안보의 골간이 위태롭게 됐다. 섣부른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추진으로 유사시 미군의 자동적인 전시증원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 측면도 있다. ‘자주국방’이라는 자존심을 지키는 대가치고는 너무나 비싼 경제부담만 짊어지게 됐다.
다음으로 우리 안보가 약화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안전해졌다는 주장을 들어보자. 2차 북핵 위기 발생이나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는 모두 노 정부 출범 전에 일어난 일이다. 지금은 2·13합의, 10·3합의로 북핵 문제가 그런대로 관리되고 있고, 미국의 핵우산 제공으로 북핵 위협은 충분히 억제되고 있다. 무엇보다 2007 남북정상회담과 각종 군사회담으로 군사적 긴장도 크게 완화됐다. 오히려 110억달러의 추가 투입으로 주한미군은 한층 강해졌고, 2020년까지 621조원의 국방비를 투입하도록 예정돼 있는 등 한국군도 전력이 강화됐다.
이렇듯 두 가지 관점에서 상황을 정리해보면 지난 5년간 노무현 정부의 안보정책을 평가하는 몇 개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 즉 북한 위협의 강화 또는 완화와 한미동맹의 악화 여부다. 여기에 노무현 정부가 야심만만하게 추진한 새로운 외교안보 패러다임 구축 노력도 어떤 식으로든 평가를 내려야 할 대상이다.
출발부터 불리했던 안보환경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북핵 문제와 한미동맹 관계는 모두 안정돼 있었다. 1차 북핵 위기는 1994년 10월의 ‘제네바 핵합의’로 봉합된 상태였다. 1998년 대포동미사일 시험발사와 금창리 핵 의혹시설 문제로 한때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합의’는 유지되고 있었다. 탈냉전 이후 추진된 한미동맹 재조정은 1차 북핵 위기의 발발과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중단된 상황이었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막 끝내고 1998년 9월 김정일 체제의 공식 출범을 알린 때까지, 한미동맹은 한반도 방위동맹이라는 냉전시대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노무현 정부는 이미 2차 북핵 위기가 발발한 상황에서 출범했다. 출범 이후에도 북핵 문제는 풀리기는커녕 점점 꼬여만 갔다. 부시 대통령은 이른바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을 취하며 전임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합의한 약속의 이행을 전면 거부했다. 미국은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 “대화는 하되 협상하지 않는다”는 강경 일변도의 ‘악의적 무시’ 정책을 취하며 북한과의 직접 협상을 거부했다.
한미동맹도 노무현 정부 출범 이전부터 삐걱거렸다. 2002년의 여중생 역사(轢死) 사건으로 국내에서는 반미 분위기가 고양됐고,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2001년 9·11테러 이후 새로운 군사변환과 해외미군 재배치계획(GPR)을 추진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003년 3월 이라크전이 발발하면서 주한미군 감축론과 맞물려 한미 간 갈등이 야기됐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는 출발점부터 북핵 문제와 동맹 재조정이라는 양대 안보과제를 풀어야 한다는 짐을 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주어진 상황과 문제에 하나하나 대응하는 대신, 변화한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의 외교안보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거대한 실험을 준비하는 식으로 방향을 잡았다.
‘동북아시대 구상’의 야심
출범 초기부터 노무현 정부가 내세운 거대한 프로젝트는 ‘동북아시대 구상’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노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변방역사 극복론’이 제시되고, 그 연장선에서 ‘동북아시대 구상’이 피력됐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팀 구성원들은 한반도의 평화 없이는 우리 민족의 발전뿐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의 형성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나아가 우리나라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적극적으로 주도함으로써 ‘동북아 중심국가’로 부상한다는 야심만만한 계획도 세웠다.
2003년 8월15일 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따르면, 동북아시대 구상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치욕을 당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협력과 통합의 동북아 신질서’를 만드는 것을 핵심목표로 내세웠다.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 협력을 통해 한국이 ‘변방에서 중심’으로, ‘분열에서 통합’으로, ‘정체에서 도약’으로 향한 전진을 주도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동북아시대 구상은 나름대로 치열한 역사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고, 동북아지역이 갖는 독자적인 의미를 간파했다는 점에서도 평가할 만한 부분이 있다. 과거의 대미(對美) 일변도 외교에서 벗어나 한국의 시각에서 동북아 외교구상을 수립하고자 했다는 점도 분명 새로운 시도라는 의의가 있다. 실제로 2차 북핵 위기와 그에 따른 남·북·미·일·중·러 6자회담 개최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동북아지역의 독자성을 부각시키는 뜻밖의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해프닝으로 끝난 ‘동북아균형자론’
그러나 바꿔 생각해보면, 동북아의 지역성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세계화라는 보편적 추세에 대응전략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차원의 ‘변환(transformation)’과 마찰을 빚음으로써 한미관계를 약화시키기도 했다. 동북아시대 구상은 지역국가들과 협력해 경제와 안보를 포괄하는 지역공동체를 창설함으로써 우리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포괄적 안보 프로젝트로 시작됐지만, 국내 일부세력의 반발과 북핵 문제의 장기화, 동북아공동체의 일원이어야 할 일본과의 외교마찰, 그리고 미국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면서 좌절이 예견되어 있었다.
동북아시대 구상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동북아균형자론이다. 동북아균형자론은 2005년 2월25일 국회 국정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언급한 이후, 3·1절 기념사나 공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에서도 되풀이됐다.
동북아균형자론은 출발부터 개념적 타당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빚어졌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동북아시대 구상의 핵심으로 불리는 이 밑그림은, 세계 유일 패권국인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지속하되 미일동맹을 통해 현상유지를 꾀하는 일본과 새롭게 지역패권을 노리는 중국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자임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실제로 동북아균형자론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왜곡과 ‘다케시마의 날’ 제정,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추진 등 일본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으로 만들어진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과연 미일동맹과 중국의 관계를 냉전기의 미국과 소련처럼 적대관계로만 볼 수 있는지, 중국과 일본 간의 협력 가능성은 없는지, 우리가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유효한 정책수단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동북아균형자론은 미국을 직접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정부 당국자들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한국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면서 한미 갈등의 잠재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설사 일본만을 겨냥한 것이었다 해도 이는 결과적으로 미일동맹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 한미관계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동북아균형자론이 ‘친중반미(親中反美)’의 표출이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긴 했어도 결과적으로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기도를 좌절시키는 데 일정한 기능을 했음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2005년 1월19일 ‘2+2 전략대화 공동선언’을 통해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찬성하다는 견해를 발표했지만, 한국의 격렬한 반대를 포함해 여러 가지 외교적 고려 끝에 결국은 같은 해 4월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아쉬운 동맹 조정 협상
국내외에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동북아균형자론은 2005년 5월31일 노 대통령이 “(동북아균형자론은) 원래부터 일본을 겨냥한 것이었다”는 말로 사실상 철회함으로써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와 함께 노무현 정부가 야심만만하게 추진한 동북아시대 구상의 추진도 동력을 크게 잃었다.
노무현 정부가 야심만만하게 추진한 포괄적 안보 프로젝트인 ‘동북아시대 구상’이 좌절되는 동안, 한국의 전통적 안보전략이던 한미동맹 역시 간단치 않은 산을 넘고 있었다. 동맹 재조정 작업이 탈냉전 직후인 1990년대 초반 추진됐다가 중단되면서 한미관계는 여전히 냉전형 한반도 방위동맹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인 2002년 12월, 한미 국방당국은 1999년부터 실무협의 결과인 ‘한미동맹 미래 공동협의 결과’를 34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 보고했다. 이 협의결과에서 논의된 동맹 조정협상의 큰 틀을 바탕으로 2003년 4월부터 미래동맹정책구상회의(FOTA)와 안보정책구상(SPI) 협의가 시작됐다. 이후 수년 동안 한미 간의 주요 군사현안이던 용산기지 이전, 해외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보, 전시작전권 이양 등은 모두 이 테이블에서 논의됐다. 그 밖에도 한미 양국 사이에는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등지의 한국군 파병이나 개념계획 5029의 작전계획 승격 문제 등의 논란이 있었다.
이 같은 한미 군사현안은 모두 안보와 직결된 예민한 사안이니만큼 국내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용산기지와 관련해 이전비용을 모두 한국 측이 부담키로 한 1990년 합의각서·양해각서 개정 논란, 2003년에 이미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고도 1~2년 뒤 노 대통령이 이를 부인하는 일련의 해프닝, 미국 측 군사변환의 일환으로 추진된 전시작전권 전환을 자주국방의 성과로 포장하려다 되레 보수단체의 반발을 사는 등 일련의 사건으로 노무현 정부는 홍역을 치렀다.
그중에서도 가장 진통이 심했던 것은 이라크 파병 문제였다. 협상과정에서 파병을 미국의 대북정책 변경과 ‘빅딜’하려다 미국의 반발을 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파병을 결정해놓고 자이툰 부대원들의 출국을 쉬쉬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아프간과 이라크에 대한 한국군 파병문제는 노무현 정부를 지지한 진보단체들이 반대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다.
특히 북한 문제를 놓고 한미 간에 이견을 좁히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눈에 띄었다. 북한 급변사태 대응계획을 놓고 한미 군사당국이 작계 승격에 합의한 것을 뒤에 청와대가 뒤엎는 일까지 생겼다. 개념계획 5029의 작계 승격문제는 한미 간에 때 아닌 주권논쟁을 야기하는 등 상상 이상으로 번져나갔지만, 최근 들어 관련 논의가 부활하는 등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신동아’ 2007년 11월호 ‘청와대가 엎은 작계5029, ‘포스트 盧’ 노리고 부활’ 참조).
지난 5년간 군사현안을 둘러싸고 빚어진 한미 간의 이견과 갈등이 모두 한국 책임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한국의 일방적인 대미 안보 의존관계를 고려할 때 협상결과의 유불리만을 놓고 정부의 협상능력을 비난할 수도 없다. 과거 냉전시대의 일방통행 협상방식에 젖어 있던 미 군사당국자들의 책임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무현 정부 들어 FOTA나 SPI회의 같은 자리에 외교통상부 당국자가 참석하는 등 제대로 된 협상의 모양새를 갖춰나가려 애썼다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1990년 용산기지 이전 합의각서처럼 한미 군사당국이 합의해놓은 것을 우리 외교부가 법적, 외교적으로 뒤처리만 하던 관행을 깼다는 것이다.
그러나 협상의 진행과정에 불거져 나온 문제들은 그러한 부분들을 무색케 한 측면이 있다. 최근 수년간 미국과 일본도 안보 문제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당초 전략을 흔들어놓을 정도로 심각한 이견을 빚은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반면 한국의 경우는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요구가 거의 관철되는 형태로 협상이 진행됐는데도, 대부분 갈등양상이 표면화했다.
지난 5년간의 한미동맹 재조정 결과를 미일동맹 재조정 협의 결과와 비교해보면 아주 불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 우려하듯 재조정의 결과가 한국 안보의 약화로 귀결된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다만 미국 측이 수용한다면 북핵 문제의 추이를 지켜보며 전작권 이양시기를 조정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주한미군의 추가감축이 이루어질 경우에 대비해 안보태세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앞서 노무현 정부의 최대 안보 현안이 북핵 문제였고, 그 장기화의 책임은 상당부분 부시 1기 행정부의 대북(對北) ‘악의적 무시’ 정책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이 문제의 해결을 지나치게 낙관했고, 대북정책 전개과정에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핵 위기 상황에 맞게 진화시키지 못했으며, 북핵 문제와 동맹 재조정이라는 양대 과제의 충돌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한 책임은 결코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첫째, 노무현 정부는 북핵 문제의 심각성과 복잡성을 과소평가해 북핵 해결을 시간순서상 모든 국정과제의 맨 앞에 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문제 해결이 오히려 지연되는 결과를 낳았다. 노무현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는 임기 첫해에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기 5년이 다 된 지금까지 북핵 문제가 완전한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핵 문제가 기대만큼 진척되지 않음에 따라 그 해결을 전제로 설계된 동북아시대 구상은 커다란 차질을 빚었다. 또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나 동북아 다자안보 형성과 같은 안보분야의 다른 핵심 국정과제들의 추진도 어렵게 됐다. 이 때문에 대륙과 해양을 잇는 ‘동북아 경제중심’의 꿈 역시 이룰 수 없게 됐고,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부가 2006년 이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크게 방향을 선회하도록 만드는 구실을 했다. 북핵 해결의 지연이 노무현 정부의 초기 전략구상을 무산시킨 셈이다.
진화하지 못한 대북 포용정책
둘째, 북핵 문제가 크게 진전되지 못한 것에는 노무현 정부의 유화적인 대북 자세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제네바 기본합의로 북핵이 어느 정도 관리되던 상황의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일정부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에 비해, 제네바 합의가 깨진 후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은 한 단계 진화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북한 핵개발이 김정일 체제의 유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면 북한이 핵 폐기 프로세스를 지속하도록 하기 위해 국제사회, 6자회담 참가국, 개별국가별로 적절한 대북 ‘압박수단’의 보유가 절실했다.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이 ‘당근’과 ‘채찍’의 두 가지 정책수단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채찍 없는 포용정책은 사실상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일 뿐이다.
북한이 2·13합의에 응한 것도, 따지고 보면 핵실험 직후 유엔안보리 대북결의 1718호에 따른 경제봉쇄 등 제재의 효과가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미 국무부 자문관이었던 로버트 죌릭은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2·13합의가 대북 다자안전보장과 같은 외교전략(diplomatic strategy)과 대북 금융제재나 유엔제재와 같은 방어전략(defensive strategy)의 결합이 효과를 거둔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셋째, 노무현 정부는 ‘남북관계와 한미동맹의 동시발전’을 모토로 내걸며 출범했지만, 북핵 문제와 동맹 재조정이라는 양대 과제를 조화롭게 추진하는 과제에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남북관계를 강조하는 청와대 참모들과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외교부 당국자들의 이견은 종종 ‘자주파 대 동맹파’의 대립으로 언론에 비쳤다.
북핵 문제가 당면한 안보현안이라면 동맹 재조정은 중장기적으로 안보기반을 마련하는 사업이다. 따라서 그 정책적 우선순위를 달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북핵 문제 해결의 정책수단이 제한되어 있고 핵무기에 대한 억제력이 부재한 상태임을 감안하면 한국의 안보 수단은 사실상 미국 핵우산에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일부 청와대 참모들의 태도나 발언은 이 점을 감안해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세 개의 함정
지난 5년간 노무현 정부의 안보정책을 세 가지 기준에서 평가해보자. 새로운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안보체제를 형성하려던 외교안보구상은 실패로 끝났지만, 한미관계는 동맹 재조정과 인프라 구축을 통해 중장기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여전히 어려운 해결과제로 남아 있긴 하지만,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북핵 문제는 잘 관리되고 있는 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무현 정부 5년간의 안보정책은 새로 출범할 이명박 정부에 어떤 교훈을 주는가. ‘욕하면서 따라 배운다’는 말이 있듯, 새 정부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노무현 정부의 ‘과(過)’뿐 아니라 ‘공(功)’도 올바르게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동안에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는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첫째, 이명박 정부는 ‘비핵화 우선’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비핵·개방· 3000 구상’의 추진전략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평화와 병행추진하지 않고 비핵화만 강조하다 보면 자칫 노무현 정부 초기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수 있다. 즉 비핵화에만 매달리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구상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5년 내내 북핵 문제에 발목이 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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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미국 일변도’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동맹의 복원에 역점을 두는 것은 타당하지만 미국의 국익과 한국의 국익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아님도 명심해야 한다. 미일동맹 강화를 노래하며 중국과 각을 세우던 일본도 최근 국익을 위해 ‘중일 밀월시대’로 들어갔다.
셋째, ‘실용외교’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MB 독트린’은 ‘실리외교’를 내세우고 있지만, 노무현 정부 역시 ‘균형적 실용외교’라는 레토릭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의 ‘실용외교’는 종종 원칙의 실종으로 나타났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으로 대한민국은 새 시대를 맞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출범 자체가 한미동맹 복원의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의 안보는 이미 안정적 기반에 올라섰다는 것이다. 어차피 북핵 문제는 한국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국제공조 외에는 길이 없다. ‘동북아시대 구상’을 능가하는 새로운 외교안보 비전을 이명박 정부에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