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우리 문화와 말(馬)

한민족이 말고기 안 먹고 말 무덤 만든 까닭은?

  • 최 홍 작가 doksuri-ch@hanmail.net

    입력2008-02-06 12: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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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에서 드물게 말고기를 먹지 않을 만큼 말은 우리 문화, 의식 깊숙이 관련을 맺고 있다. 설화에 제왕의 출현이나 국가 이변의 상징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전국 도처에 말 무덤이 산재하고, 서낭당에 마상을 모시고 말과 관련된 각종 민속행사를 즐긴다.
    우리 문화와 말(馬)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 옆에 세워진 마조단터 알림표석.(아래 사진)

    요즘은 말을 보려면 경마장이나 승마장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한 시대 전만 해도 말은 교통수단이자 통신수단이었으며 전쟁, 농경, 레크리에이션 등 다방면에 두루 활용됐다. 말은 인간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동물이었다.

    역대 임금은 ‘말의 수는 나라의 부(富)와 직결된다’는 믿음 아래 말을 확보하는 방안에 골몰했다. 조선조 세종은 전국에 말 목장을 확장하라고 지시하고, 강화도 전체를 말 목장으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지금도 산간 오지나 섬에 말 목장 흔적이 있다.

    말은 선조들의 정신세계나 일상적인 의식에도 깊숙이 관련을 맺고 있었다. 가령 전래설화에서 제왕 출현의 징표로 종종 말이 등장한다. 신라 박혁거세 설화의 백마, 고구려 주몽 설화의 기린마(麒麟馬), 동부여 금와왕 설화의 눈물 흘리는 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불운을 예시하는 상징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붉은 말이나 머리에 뿔 달린 말, 머리가 둘인 말 등은 국가에 이변을 초래할 징조로 간주됐다.

    선조들은 말에게 인간과 유사한 영혼이 존재한다고 인정했던 것 같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말 무덤이나 말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 등이 단적인 예다. 이 외에도 선조들은 민간신앙처였던 서낭당에 여러 형태의 마상(馬像)을 모시고 말과 관련된 각종 민속행사를 즐겼다. 대부분 자취를 감췄지만 일부는 현재도 그 맥을 잇고 있다.

    말은 양기와 남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0월 말날(午日)을 택해 장을 담그고 악귀나 병마를 물리치는 벽사(?邪)의 의미로 대문 앞에 말의 피를 뿌리거나(이 풍습이 팥죽을 뿌리는 것으로 변했다고 한다) 말 모양의 부적을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이런 풍속들은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마(馬)문화를 형성했다.



    개고기와 말고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말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말고기를 먹지 않는 유일한 민족일 것이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말고기는 주요 육식 메뉴 다. 제주도나 대도시 변두리 일부에서 식도락가들을 위해 말고기를 다루고 있기는 하나, 이는 예외적인 현상일 뿐이다.

    우리 민족이 원래부터 말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조 초기에는 말고기를 찾는 사람이 많아 말고기 파동이 일어나곤 했다고 한다. 말고기가 궁중과 관아 등 상류층의 주요 기호식품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서민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의 육포처럼 건마육(乾馬肉)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말 밀도살이나 말 도둑이 성행해 조정에서는 대책 마련에 부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말고기 식육을 금지시키고 밀도살을 중죄로 다스려도 수요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우리 문화와 말(馬)

    전남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에 있는 의마총.

    조선조 임금 중에 연산군은 특히 말고기를 즐겼다고 한다. 백마가 정력에 좋다는 속설 때문이었다는데, 특히 노령의 백마를 즐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말고기 선호 풍조는 사라졌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당국에서 지속적으로 단속해 중죄로 다스렸기 때문일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풍속을 법으로만 다스리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필자는 아마도 조선조 중기의 임진왜란이 커다란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말은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한 전공(戰功)을 올린 말에 대한 선조들의 인식이 결정적으로 바뀐 것 같다.

    의마총 설화

    전남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에는 의마총(義馬塚)이라는 말 무덤이 전해온다. 봉분은 허름하고 묘비도 세월에 퇴색했지만 비석 뒤쪽의 선명한 전각 글씨들은 이 무덤에 얽힌 사연을 후세에 알리고 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장흥의 의병장 농재(聾齋) 문기방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을 모아 많은 활약을 펼쳤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고향에서 쉬고 있다가 정유년에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옛 의병들을 모아 진주성으로 향했다. 일행이 순천에 다다랐을 때 순천부사 이복남은 남원성이 위급하니 가서 도우라고 했다. 남원골에 다다르자 관군과 의병들은 낡은 활과 창으로 왜군의 조총에 맞서 비참한 항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의병들이 사기가 저하되어 머뭇거리자, 장군은 전포(戰袍, 장수의 군복)에 혈서로 ‘국지요하옥룡지력진고성리수부’(國志腰下玉龍知力盡孤城裏誰扶, 나라는 힘이 꺾이고 임금은 외로운 이때 누가 나무 그늘에서 편히 있으랴)라 쓰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이에 의병들도 분연히 합세하여 끝까지 항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남원성은 결국 적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장군도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장군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말은 장군의 칼을 물고 며칠을 달려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장군의 죽음을 알고 노복(老僕)을 보내 시신을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해 거두어들인 투구, 전포를 칼과 함께 모셔 초혼장(招魂葬)을 치렀다. 그 후 말은 주인을 잃은 탓인지 먹이도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이에 유족들은 말을 장군의 묘역 부근 양지바른 곳에 묻고 이 비를 세워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렸다…”

    말을 접해본 사람들은 모두 말의 귀소 본능을 인정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부여와 전쟁을 벌일 때 거루라는 신마(神馬)를 빼앗겼는데, 1년 후 거루가 부여 말 100필을 이끌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의마총 설화는 사물까지 입에 물고 찾아온 특별한 경우여서 과장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와 유사한 말 무덤은 전국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장수가 입던 군복이나 잘린 머리를 물고 왔다는 사연도 있다. 가령 전남 강진 황대중 장군의 의마총, 전남 곡성 유팽로 장군의 의마총, 대구 달서구 우배선 장군의 의마총(현재는 의마비만 남아 있다) 등이 그러한 사례다. 배경도 대부분 임진왜란 때다.

    미증유의 대란을 겪으며 이 땅의 민중은 크게 각성하게 되는데, 말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예로부터 큰 공적을 남긴 장군이 죽으면 장군이 타던 말 묘도 만들어주곤 했지만, 임진왜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듯하다.

    세마대와 마진산성

    우리 문화와 말(馬)

    고종의 장례식에 등장한 죽안마(竹鞍馬). 죽안마는 영혼을 하늘로 봉송하기 위한 인조말을 말한다.

    임진왜란 때는 말이 전투에 직접 기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경기도 오산 독산성의 세마대(洗馬臺) 전투다.

    해상의 이순신 장군과 쌍벽을 이루며 육상 전투를 승리로 이끈 권율 장군은 충남 금산의 이치령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북상해 오산의 독산성에 포진했다. 이미 한양으로 진군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우키다 히데이에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왜군은 독산성 아래에 진을 치고 유인책과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아군이 끄떡하지 않자 급기야 성 아래쪽을 포위했다. 산성이 조그만데다 고지대여서 식수가 금방 동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왜군의 판단은 적중해 아군은 물 부족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으나, 권율 장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책을 생각해냈다. 왜군이 보이는 곳에 말들을 끌어다 놓고 말 잔등 위로 쌀을 끼얹게 한 다음, 마치 털에 묻은 물을 털어주듯 솔가지로 말 잔등을 쓸어주게 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말을 씻겨주는 것처럼 보였다.

    성 안에 물이 떨어질 때만을 기다리던 왜군은 식수가 남아돌아 말까지 목욕시키는 광경으로 보고 허탈해져 철수하고 말았다. 아군은 철수하는 적의 후미를 공격해 수많은 왜군을 척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마상과 동제(洞祭)

    마진산성(馬鎭山城)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에 있던 조선시대 산성이다. 임진왜란 때 경기도 방어사와 이천부사를 지냈던 변응성 장군의 전적지로 알려져 있는데, 마진은 말로 진을 쳤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어떻게 진을 쳤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는 게 없다. 다만 아군의 군사행렬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말들로 하여금 산성 주변을 계속 맴돌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지역은 왜군의 제2북상로, 즉 상주-충주-여주-양평을 거쳐 한양 동부에 이르는 길목이어서 산성은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는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었다. 현재도 군부대가 주둔해 있다. 산성 남쪽에 마뜰(‘말들’, 또는 ‘말의 들’에서 비롯된 듯)이란 지명이 있는 것이나, 마진이라는 명칭을 보면 말이 어떤 식으로든 전투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의병들을 모아 번뜩이는 지혜와 유격전으로 왜군에게 치명타를 가했던 홍의장군 곽재우는 말꼬리에 벌통을 매달아 적진으로 내달리게 해 적들을 큰 혼란에 빠뜨려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기도 했다. 경남 창녕군 남지읍에 있는 말무덤산(馬墳山)은 이 말들을 장사 지낸 무덤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임진왜란 당시 말은 전투에 크게 기여했다. 공정하게 평가하고 보상에 인색하지 않은 선조들이기에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어 말고기를 선호하던 풍속이 사라진 게 아니었을까.

    대표적인 민간신앙이던 서낭당은 지금도 산간 오지나 해안, 섬 등에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주로 궁벽한 곳에 서낭당이 남아 있는 것은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영향이 덜 미친 탓도 있겠지만, 근본으론 자연재해에 대한 관념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탓일 것이다.

    당집은 마을을 수호하고 재난을 방지해 마을의 평안과 무병(無病)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현재도 일부 지역에서는 당집을 중심으로 정월대보름에 동제(洞祭)를 지내는데, 당집 안에 신체(神體)로 말을 모셔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쇠나 흙, 자기(瓷器) 등으로 만든 조그만 말들을 단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동해안에서는 인조 말 대신 마신도(馬神圖)라 하여 백마를 그린 그림을 모시기도 한다.

    우리 문화와 말(馬)

    강원도 속초시 외옹치 서낭당에 모셔진 백마도.

    당집에 말을 모셔놓은 것은 선조들이 말을 서낭신을 태워 모셔오는 신승물(神乘物)로 여긴 증거라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지만, 말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 같다. 말이 용이나 호랑이처럼 영험하고 주술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말의 명칭 중에 ‘천마(天馬)’ ‘용마(龍馬)’가 있는 게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동제는 일제가 억제책을 쓰면서 대부분 자취를 감췄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큰 고을의 동제는 임금이 마상(馬像)을 하사했고, 원님이 직접 제관이 되어 제의를 주관했을 만큼 중요시되던 행사였다. 전남 신안군 도초도 고란마을에는 동제가 끝난 후에 죽마제(竹馬祭)라는 민속놀이가 전해지고 있다. 이 동제는 말과 관련된 동제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동제를 매년 정월 보름에 지내고 동제의 절차와 당집이 상당(上堂)과 하당(下堂)으로 구분되는 점 등은 다른 지역과 유사하다. 그런데 상당의 당신(堂神) 중에 마신(馬神)이 있고, 이 마신의 신체를 대나무를 사용해 만들었다.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말의 몸체를 만든 뒤, 꼬리를 덧붙이고 머리는 짚으로 엮어 종이를 덮어 씌웠다. 그 다음 머리 위에 귀를 만들어 붙이고 눈과 코를 그려넣었다.

    죽마제는 하당제를 지낸 후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은 주민들이 농악대를 앞세우고 상당으로 가서 시작한다. 절차는 먼저 동제의 제주(祭主)가 죽마를 탄 마장사(馬將師)에게 제물을 대접하는 내용의 대사를 주고받은 뒤, 마장사가 죽마를 타고 달리면 주민들은 회초리로 말의 머리와 입 부분을 힘차게 때린다. 매를 맞아 주둥이가 터지면 그 해 농사가 잘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마장사는 주민들에게 쫓겨다니다가 마을에서 2km 떨어진 엄감포 포구까지 가게 된다. 이 포구에 다다르면 주민들은 더 이상의 추적을 멈추고, 제물을 차려 마신에게 모든 재액(災厄)을 갖고 나가라고 기원한 후 죽마를 바다에 버렸다.

    마을마다 행해지던 동제는 마을 구성원들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민속놀이 성격을 띠는데, 이 놀이적 성격의 제의로 죽마제를 시행한 점이 특이하다. 한 지역의 제의에 등장하는 신격(神格)은 그 지역의 사회적 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감안하면 옛적 이 지역에서 말의 생육이 활발하게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동제는 일제 강점기 때 사라진 후 현재까지 시행되지 않고 있어 전국적으로도 희귀한 제의의 광경을 접할 수 없는 게 아쉽다.

    신앙유적의 인조마들

    선조들이 만든 인조 마상은 숭배의 대상으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다른 여러 용도로도 등장했다.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 서쪽에 위치한 죽막동(竹幕洞)에는 널리 알려진 수성당(水聖堂)이 있다. 수성당은 이 일대의 바다를 수호하는 수성할미, 혹은 개양할미를 모시기 위한 제의 시설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서쪽 끝자락에 돌출돼 있어 고대에 항로상의 주요 기점이었을 뿐 아니라, 해류의 흐름이 복잡하고 바람도 강하여 해난사고의 위험이 상존해 이런 제의시설이 만들어진 듯하다.

    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이 일대를 발굴조사했는데, 출토된 유물의 다양성과 규모가 백제나 가야의 지도자급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맞먹을 정도였다. 유물들 중에는 말띠드리개(杏葉) 등 말갖춤류(馬具)와 토제마(土製馬)도 있었다. 그런데 이 토제마들은 하나같이 몸통만 있고, 잘린 머리와 사지는 별개로 출토됐다.

    왜 이 말들은 하나같이 몸통으로만 되어 있을까. 이 역시 말의 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다. 수성당에 매장된 토제마는 해신(海神)에게 헌상물로 바쳐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말들은 액(厄)이라 하는데, 이를 바치는 것은 모질고 사나운 운수를 쫓기 위해 행해지던 풍습이라고 한다. 바다에서의 무운을 비는 데 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왜 머리와 사지를 잘라야만 했는지는 잘 납득되지 않는다.

    우리 문화와 말(馬)

    전북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의 토마제.(위) 경남 창녕군 영산면의 문호장 굿 모습. 무당이 말 대신 소를 타고 있다.(아래)

    이런 형태의 마상은 다른 지역에서도 발굴됐다. 강원도 인제군 원통에서 한계령으로 향하는 길의 장수대 부근에 위치한 한계사지(寒溪寺址)에서 발굴된 철마(鐵馬)도 머리 부분과 팔 다리가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한계사는 현재의 백담사 원찰이 되는 사찰이다. 지금은 주춧돌과 석탑만이 남아 있는데, 이 석탑 아래쪽에서 머리와 네 다리가 떨어져 나간 철마상이 발굴된 것이다.

    또한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이성산성(二聖山城)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마상들이 발굴됐다. 이성산은 산이라기보다는 200여m밖에 되지 않는 구릉 수준이지만, 이성(二聖)이라는 이름과 한강과 주변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일찍부터 학자들이 주목한 곳이다. 한강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물적·인적 자원이 풍부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각축장이었다.

    1986년 한양대 박물관에서 1차 발굴을 한 이래 연차적으로 발굴을 시행했다. 발견된 유물들 중에는 토제마와 철마도 있었는데, 이 인조마상들도 다리나 머리 등이 부러뜨려진 상태였다. 발굴된 곳은 일종의 신앙유적으로, 폐기된 건물의 초석(礎石) 부근에 1~1.5m의 커다란 돌들이 세워져 있고 그 주변에 잔돌들이 쌓여 있다. 옛적 시골 고갯마루의 서낭당에서 볼 수 있던 것과 유사한 형태이다. 말 유물은 17마리이지만, 인위적으로 부러뜨려져 있어 유물의 총 개수는 44점이었다. 이 파편들이 두 곳의 신앙유적 아래에 흩뿌려져 있었다.

    앞에서 선조들에게 말이 서낭신을 모셔오는 신승물이거나, 그 자체가 영험적인 존재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왜 신앙 유적에서는 말들을 일부러 부러뜨려 묻어 놓았을까.

    그 유래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옛적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이처럼 부러진 말을 인간 세상의 여러 액을 쫓는 데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특히 마을에 돌림병을 일으키는 신, 즉 행역신(行疫神)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한 의례로도 사용됐다고 한다.

    백마와 철마

    다음으로 산 정상에 묻힌 철마들이 있다. 필자는 자료조사차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갔다가 그곳의 주산인 상라산(象羅山) 정상에서 철마가 발굴됐음을 알게 됐다. 3기에 달하는 철마는 제사유적지에서 다른 제기(祭器)들과 함께 발굴된 것으로 보아 제물로 바쳐진 듯하다. 이 철마들은 온전한 형태가 아니었는데 부식 때문으로 보였다. 원래는 완전한 형태의 철마를 묻었지만 오랜 세월 묻혀 있으면서 다리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 장소에서는 오직 쇠로 만들어진 철마만 있었을 뿐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말은 없었다.

    전남 진도의 철마산 정상에서도 철마가 발굴됐다. 이 산은 원래 적을 감시하는 곳이라 하여 망적산(望敵山)이라 했는데, 정상에 철마를 안치하면서부터 철마산으로 불렸다고 전해온다. 이 곳에서는 보통 크기의 철마들 외에 작은 개만한 크기에 달하는 것도 발굴됐다는데, 일제 강점기 진도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요시다라는 일본인이 가져갔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완전한 형태의 쇠로 만들어진 철마만 있었다.

    전남 영암의 월출산 천황봉의 제사유적에서도 철마가 발굴됐다. 천황봉은 예로부터 하늘에 제를 지냈던 제사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 곳에도 철마가 매장돼 있었다. 이 외에도 서해와 남해 일부 지역에서는 철마산이라는 지명이 종종 발견된다. 주목할 사실은 주로 바다에 인접한 지역에서 이 지명이 전해진다는 점이다. 또한 산 정상에서 철마가 발굴되기도 해서, 이 명칭은 철마를 묻은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러한 지역에서는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말은 없고 철마만이 묻혀 있을까. 이 산들은 바다에 면해 있어 해난사고의 방지와 풍어, 여러 사고로 수중에 떠도는 고혼(孤魂)들의 극락세계 인도 등을 기원하기 위해 중요한 제사가 지내지던 곳이다.

    상라산이 있는 흑산도는 중국으로 향하는 뱃길의 길목이라 제사의 비중이 특히 컸을 것이다. 흑산도에는 신라 말기 해상왕 장보고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그의 해상활동과 관련하여 큰 역할을 담당했던 지점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하루를 더 가면 흑산도에 다다르고, 또 하루를 가서 홍도에 다다른 뒤 중국으로 향했다고 한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단군 왕검의 아들 부루가 중국 하나라 임금 우(禹)에게 홍수 방지대책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이때 우 임금이 백마를 잡아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 제사 방식도 부루가 가르쳐줬을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의 문무왕과 당나라 칙사 유인원, 그리고 의자왕의 아들 융(隆)이 공주의 취리산에서 화친을 맹약하면서 백마를 잡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 후 서로 백마의 피를 입에 바르며 화친을 맹세하고 백마의 시체는 제단 북쪽에 묻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신라 선덕여왕 때에 대신 비담과 염종이 ‘여자임금이라서 정치를 잘 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토벌작전에 나선 김유신이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백마를 잡아 제사지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선조들에게 백마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데 사용한 신성한 제물이었던 셈이다.

    바다에 인접한 산 정상에서 발굴된 철마가 이와 관련 있지 않을까. 즉 하늘에 제사지내는 데 백마 대신 사용된 게 아닐까. 흔치 않은 백마를 제물로 사용하기에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무엇보다도 산 정상까지 백마를 끌고가기가 쉽지 않았다.

    발굴된 인조마들이 하나같이 쇠로 만들어졌다는 게 이러한 추측에 신빙성을 더한다. 요즈음은 흔한 게 철이지만 옛적에는 철이 귀중한 금속이었고 색깔도 흰 빛이었다. 따라서 백마를 나타내는 데 적합한 재료였다.

    고분들에서 종종 발견되는 인조마들도 실상 순장(殉葬) 풍속의 대용품이었다. 원래는 어떤 중요한 인물이 죽으면 그가 타던 말을 함께 묻는 게 관례였으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 습속의 폐해가 너무 커 토제마, 석마 등 인조마로 대체된 것이다

    지난 왕조 시대에 말의 생산과 확충이 국가의 주요 시책이었을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런 제의가 행해졌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제의란 인간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마조제, 말에게 지내는 제사

    마조제(馬祖祭)라는 것이 있었다. 문자 그대로라면 말의 조상신에게 지내던 제사를 뜻한다. 그런데 말과 관련된 조상신은 하나가 아니었다. 말의 조상인 왕마(王馬)를 나타내는 마조, 처음 말을 기른 사람을 의미하는 선목(先牧), 처음 말을 탄 사람을 의미하는 마사(馬社), 말을 해롭게 하는 신을 의미하는 마보(馬步) 등이 있다. 이처럼 구분된 것은 말 자체도 중요하지만 사육방식이나 기승방식, 질병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듯하다.

    말 조상별로 각각 단(壇)을 마련해 제사를 지냈는데, 각 제사와 단의 명칭을 따로 부르기도 했지만 총칭하여 마조제라 했고, 이들의 단도 마조단이라 불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조상신들을 하늘의 별자리와 관련시켰다는 사실이다. 즉 이들을 관장하던 별을 천사성(天駟星)이라 불렀는데, 천사성은 방성(房星)의 다른 이름이었다. 방성은 고대 서양의 별자리 중 전갈좌에 해당하는 별자리로, 4개의 별로 이뤄져 있다.

    어떤 특별한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이 별자리가 4라는 수를 나타내고 있고, 모양이 말과 비슷하다 하여 결부시킨 듯하다. 아무튼 말에게 신격을 부여하고 별자리와 관련시킨 점은 고대인의 삶에 있어 말의 비중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마조단이 있었던 위치는 현재의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이 있는 광장 부근임이 밝혀졌다. 현재 이 곳에는 옛 마조단 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자리에 마조단이 있었던 것은 옛적 이 일대가 말 목장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성수동, 화양동, 자양동, 구의동, 광장동 일대와 북쪽의 송정동, 마장동, 면목동 일대가 모두 말을 사육하던 목장이었다. 그래서 말과 관련된 지명이 여럿 남아 있다.

    특히 뚝섬 일대는 살곶이벌(箭串坪, 태종 이방원이 함흥에 은거해 있던 태조 이성계를 맞으면서 진의 한가운데 기둥을 세워 화살을 피했다는 얘기에서 비롯됨), 동교(東郊), 전교(箭郊) 등으로 불리며 말과 관련된 여러 업무가 행해지기도 했다. 즉 말을 사육하는 것 외에도 기마병들의 훈련장으로 쓰였고, 임금이 가끔씩 사냥을 즐기던 사냥터이기도 했으며, 말과 관련된 여러 행사의 주무대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 오랫동안 경마장이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연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조단의 설치와 제사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추정되지만, 문헌상 기록은 고려사에 처음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오례(五禮)의 절차와 실행을 기록해놓은 ‘춘관통고(春官通考)’와 ‘증보문헌비고’ 등에 수록되어 있다. 제의의 절차가 유교식으로 되어 있어 원래는 중국에서 유래된 게 아닌가 여겨진다.

    조선조에는 태종 때에 예조(禮曹)에서 마조단의 설치 규정을 아뢰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단의 설치는 세종 때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에 설치 규정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 ‘흥인문(興仁門) 밖 사근사리(沙斤寺里)에 마보단, 마조단, 선목단, 마사단이 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마조제를 시행했다는 기록은 영조 때에 처음 보인다. 이때 한양뿐만 아니라 ‘각 고을에도 선목(先牧)의 신위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해 재앙과 여역(?疫)을 물리치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 지방에서도 제사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취는 지금도 충북 옥천과 제주도 등에 남아 있다. 정조와 헌종 때에도 말의 돌림병(馬疫)을 예방하는 등의 목적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마조제는 일제시대 때 산천제, 선농제(先農祭), 선잠제(先蠶祭) 등의 국가 제사와 함께 폐지됐다. 최근 건국대 한국마필산업연구소 주관으로 마조제가 거행되기도 했다. 현재는 물론 차후로도 말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조제는 우리의 오랜 문화적 유산이며, 이를 발굴 복원하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문 호장 굿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는 문 호장(戶長) 굿이 전해온다. 그 연원이 400년 가까이 된다니 조선조 중기부터 이어져온 셈이다. 호장은 아전의 우두머리를 이르는데, 이름은 없이 그저 문(文)이라는 성으로만 알려진 문 호장은 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적인 신인(神人) 성격의 인물이다. 그 굿에 말이 등장한다.

    관찰사가 말을 타고 이 고을을 지나다 갑자기 말 발굽이 떨어지지 않고 멈춰섰다. 사연을 알아본즉 문 호장이라는 인물이 도술을 부려 자기 집 앞에서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 걸어가도록 해놓은 것이었다. 화가 난 관찰사가 그를 잡아다 문초하려 했으나 아무리 곤장을 때리고 칼질을 해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마침내 관찰사가 도리어 용서를 빌었는데, 문 호장은 아직 자기가 나설 때가 아님을 알고 죽기로 작정했던 모양이다. 관찰사에게 자기 겨드랑이 밑을 세 번 치면 죽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사후에도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문 호장 굿은 그를 추모하기 위한 굿이다. 아직 자기가 나설 때가 아니라는 말은 때를 잘못 만났다는 것을, 겨드랑이 밑을 치라는 말은 아기장수 설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개 꺾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에 대한 추모 굿을 벌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른 지역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때를 잘못 만나 보수 세력이나 관권에 희생되고 마는 비운의 민중영웅을 상징한다.

    영산에서는 해마다 단옷날에 호장과 그의 처, 딸, 첩을 모신 4개의 사당에서 추모 굿을 벌이는데, 단오에 행해지는 굿이라고 하여 단오굿, 또는 장굿, 봄굿이라고도 했다. 굿은 문 호장의 가정적인 사연과 영험, 그리고 말을 타고 달리는 행사로 이뤄진다.

    주민들은 음력 4월15일에 호장계 총회를 열어 호장, 보좌역인 수로(首奴), 암무이(女巫), 무부(巫夫)를 선정하고 4월25일부터 준비에 들어간다. 제물을 준비하면서 말 4필을 마련하는데, 이 말들에는 호장과 수로, 암무이로 선정된 사람들과 문 호장의 혼백이 탄다. 문 호장의 혼백이 탈 말은 신마(神馬)라고 하며, 짚을 묶어 한지(韓紙)로 바른 것을 올려놓는다.

    이 굿의 절정은 말 달리기 행사다. 5월3일에는 호장이 첩의 사당인 지성국당에 갈 때 신마를 앞세우는데, 이 때 본처와 첩의 패거리들이 싸우는 연희가 벌어진다. 5월5일 오후에는 ‘열네 바퀴 돌기’라 하여 영산의 지세골에서 딸의 사당인 왕신당까지 약 1km 거리를 신마를 앞세우고 호장, 수로, 암무이가 말을 타고 도는 행사가 벌어진다. 이때 사람들이 회초리로 말 궁둥이를 쳐서 빨리 달리도록 하고 세 사람은 말 잔등 위에서 춤을 추며 돈다. 그런데 말이 안장이 없는 나마(裸馬)여서 때로 잔등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굿은 말로 행사를 치러 왔으나, 차츰 말을 구할 수 없어 소를 탔고, 그 후에는 트럭을 이용하다가 지금은 형태 자체가 상당히 달라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중단됐다가 1960년대에 복원됐으며 전국적으로도 중요한 단오 행사로 꼽히고 있다.

    작두말 타기

    경남 밀양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밀양백중놀이가 전해진다. 중부 이남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레굿 형태의 민속놀이다. 예전에 백중(百中, 음력 7월15일) 무렵이면 3번의 논매기가 끝나게 되어 농민들이 약간이나마 여가를 갖게 되는데, 이때 풍장을 치며 고사를 지내고 위안잔치를 벌이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래 농사일은 머슴들의 몫이어서 이 놀이는 머슴들의 놀이에서 시작됐다.

    백중 무렵에 머슴들은 논, 밭매기를 끝내고 ‘호미씻기’(호미로 하는 일이 마무리됐다는 의미)를 하고, 하루를 머슴들의 날로 잡아 지주가 마련해주는 위로잔치를 벌이며 춤과 토속적인 놀이를 벌였다. 이 놀이는 양반 상놈의 계급이 사라지면서 민중적인 놀이로 정착되었으나 지금도 놀이에는 머슴들의 애환이나 특성이 담겨 있다.

    주민들은 열흘 전부터 대농가의 큰 머슴들 중에서 좌상(座上, 어른 머슴), 무상(務上, 농사의 장원이나 가장 힘센 머슴)을 뽑고, 이 머슴들은 그 해 집안에 경사가 난 집을 중심으로 추렴을 하여 행사의 밑천을 마련하였다. 놀이판은 농신제(農神祭), 작두말타기, 춤판, 뒷놀이로 구성된다.

    농신제는 일종의 유교식 부락제로, 먼저 농신대(農神竿)를 세워 제를 지내며 농신이 강림하게 한 뒤, 민요를 부르면서 원을 지어 빙빙 돌며 춤을 춘다. 본 놀이인 작두말 놀이에 들어가면 지게처럼 생긴 작두말에 좌상과 무상을 태우고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시위를 벌이는데, 이때 째보 양반, 벙어리 양반, 고자 양반 등이 등장하여 양반을 풍자하고 욕을 해대는 놀이판이 벌어진다.

    춤판은 먼저 양반춤을 춘 뒤, 이어 머슴들이 풍물장단에 맞추어 양반을 몰아내고 난쟁이, 중풍잽이, 문둥이, 곱사등이 같은 병신춤을 춘다. 다음에는 밀양에서만 전승되는 범부춤, 오북춤을 춘다. 춤들은 지방색이 짙은 향토 무용으로, 모두 개성과 생명력이 넘쳐 백중놀이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마지막 뒷놀이에서는 모든 놀이꾼과 구경꾼이 한데 어울려 기진맥진할 때까지 춤을 추면서 신명 속으로 빠져드는데, 이러한 도취를 통해 주민들은 공동체 의식을 다지고 삶의 의욕을 새롭게 북돋우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농사를 천하의 으뜸가는 일로 삼아온 농경민족이어서 모든 생활 의례는 물론 신앙이나 민속 등도 농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밀양 지방은 예로부터 농경지가 많고 농사가 잘되어 촌락 공동체로 농경 의식이 발달한 편이었다. 또한 양반, 중인, 천인 등 계급 질서가 엄격한 곳이어서 놀이문화도 다른 지방보다 강한 개성을 띠게 됐다.

    우리 문화와 말(馬)
    최 홍

    1953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 법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수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작품 :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 ‘천년의 비밀 운주사’ ‘베팅333’


    작두말이란 작두(作頭), 즉 ‘우두머리가 되다’라는 어휘와 말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작두말이란 우두머리가 타는 말이라는 뜻인데, 머슴들의 놀이에서 이런 행사가 생긴 것은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옛적에는 말을 탄다는 것이 일정 신분 이상을 의미했으므로 머슴들이 이때만이라도 말을 타고 양반 행세를 해보려는 데서 시작된 듯하다. 좌상과 무상의 머리 위에 씌워진 삿갓 형태의 관(冠)과 옆에서 장대에 꽂아 들고 가는 일산(日傘)의 형상이 이를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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