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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와 말(馬)

한민족이 말고기 안 먹고 말 무덤 만든 까닭은?

  • 최 홍 작가 doksuri-ch@hanmail.net

우리 문화와 말(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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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와 말(馬)

전남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에 있는 의마총.

조선조 임금 중에 연산군은 특히 말고기를 즐겼다고 한다. 백마가 정력에 좋다는 속설 때문이었다는데, 특히 노령의 백마를 즐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말고기 선호 풍조는 사라졌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당국에서 지속적으로 단속해 중죄로 다스렸기 때문일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풍속을 법으로만 다스리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필자는 아마도 조선조 중기의 임진왜란이 커다란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말은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한 전공(戰功)을 올린 말에 대한 선조들의 인식이 결정적으로 바뀐 것 같다.

의마총 설화

전남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에는 의마총(義馬塚)이라는 말 무덤이 전해온다. 봉분은 허름하고 묘비도 세월에 퇴색했지만 비석 뒤쪽의 선명한 전각 글씨들은 이 무덤에 얽힌 사연을 후세에 알리고 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장흥의 의병장 농재(聾齋) 문기방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을 모아 많은 활약을 펼쳤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고향에서 쉬고 있다가 정유년에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옛 의병들을 모아 진주성으로 향했다. 일행이 순천에 다다랐을 때 순천부사 이복남은 남원성이 위급하니 가서 도우라고 했다. 남원골에 다다르자 관군과 의병들은 낡은 활과 창으로 왜군의 조총에 맞서 비참한 항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의병들이 사기가 저하되어 머뭇거리자, 장군은 전포(戰袍, 장수의 군복)에 혈서로 ‘국지요하옥룡지력진고성리수부’(國志腰下玉龍知力盡孤城裏誰扶, 나라는 힘이 꺾이고 임금은 외로운 이때 누가 나무 그늘에서 편히 있으랴)라 쓰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이에 의병들도 분연히 합세하여 끝까지 항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남원성은 결국 적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장군도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장군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말은 장군의 칼을 물고 며칠을 달려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장군의 죽음을 알고 노복(老僕)을 보내 시신을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해 거두어들인 투구, 전포를 칼과 함께 모셔 초혼장(招魂葬)을 치렀다. 그 후 말은 주인을 잃은 탓인지 먹이도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이에 유족들은 말을 장군의 묘역 부근 양지바른 곳에 묻고 이 비를 세워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렸다…”

말을 접해본 사람들은 모두 말의 귀소 본능을 인정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부여와 전쟁을 벌일 때 거루라는 신마(神馬)를 빼앗겼는데, 1년 후 거루가 부여 말 100필을 이끌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의마총 설화는 사물까지 입에 물고 찾아온 특별한 경우여서 과장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와 유사한 말 무덤은 전국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장수가 입던 군복이나 잘린 머리를 물고 왔다는 사연도 있다. 가령 전남 강진 황대중 장군의 의마총, 전남 곡성 유팽로 장군의 의마총, 대구 달서구 우배선 장군의 의마총(현재는 의마비만 남아 있다) 등이 그러한 사례다. 배경도 대부분 임진왜란 때다.

미증유의 대란을 겪으며 이 땅의 민중은 크게 각성하게 되는데, 말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예로부터 큰 공적을 남긴 장군이 죽으면 장군이 타던 말 묘도 만들어주곤 했지만, 임진왜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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