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리공원의 태허 유상규 묘와 도산 안창호의 묘지터(원 안).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상해에서 도산을 위해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 그는 귀국해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로 외과에 있는 동안 사퇴 후의 모든 시간을 남을 돕기에 바쳤다.”
이 글은 춘원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웬만한 애국지사라면 그의 글이 남아 있을 터. 그렇다면 왜 이 연보비에 후일 친일 문인으로 낙인찍힌 춘원의 글이 실렸을까. 유상규에 대한 기록을 그만큼 찾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서울시는 망우리묘지의 공원화 작업 때 흥사단에 의뢰해 고인의 글을 받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어쩔 수 없이 춘원의 글을 올렸다 한다. 우리가 유상규라는 이름 석 자를 쉬 접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필자는 고인의 장남 유옹섭(76)씨의 도움으로 그와 관련된 글을 두루 찾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생전에 많은 글을 발표했으나 본명 대신 아호를 필명으로 썼기에 후세인은 그 글의 저자가 고인인지 알 수 없었다. 말은 있었지만 말의 주인을 알 수 없었고, 주인은 있었지만 주인의 말은 사라진 셈. 필자가 찾아낸 ‘주인의 말’은 후술하기로 하고 일단 연보비의 뒷면을 소개하면 이렇다.
찾지 못한 말

태허 유상규의 연보비.
연보비 옆길로 20m쯤 올라가면 고인의 묘가 나온다. 비석의 앞면에는 “愛國志士江陵劉公諱相奎(애국지사강릉유공휘상규)/ 配孺人淸州李氏(배유인청주이씨)”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휘(諱)’는 고인의 이름을 의미하고 ‘유인(孺人)’은 양반이되 벼슬이 없던 사람의 아내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후에 다른 이의 묘를 소개할 때 다시 나오겠지만, 숙부인(淑夫人)은 3품 이상의 당상관, 단인(端人)은 정/종 8품 관리의 부인에게 주는 작위다. 비석의 뒷면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