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29일 서울을 방문한 북한의 김양건 통전부장(오른쪽)을 안내하는 김만복 국정원장(왼쪽)과 이재정 통일부 장관(가운데).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우리 사회는 평화체제 구축과 통일을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져 있다. 평화체제 구축은 싸우지 말자는 것으로, ‘싸우지 않는 분단을 영속화’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북한의 자발적인 투항이 없는 한 통일은 이뤄질 수 없다. 그런데도 일부 인사들은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자유왕래가 실현되니 통일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궤변을 내놓았다.
여권을 들고 자유왕래하는 것은 두 개 주권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반면 통일은 하나의 주권국가를 만드는 것이니, 극과 극의 차이가 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우리 사회에는 ‘평화체제 구축=통일’로 보는 신드롬이 형성되었다.
김-노 정권이 ‘싸우지 않는 분단’인 평화체제를 추구함으로써, 김정일 정권에는 연명의 기회가 주어졌다. 두 정권은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이유로 남북경협을 추진했는데, 이 경협이 죽어가던 김정일 정권에 ‘생명수’를 제공한 것이다. 남북경협은 북한이 쳐들어 올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돈으로 평화를 산’ 것에 해당한다.
‘MB규어스’한 이명박 한반도觀
이러한 선택은 북한이 공격할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을 때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북한이 공격 의지와 능력이 없는데도 이 정책을 추진했다면 이는 북한의 공갈에 속았음을 의미한다. DJ 정부 출범 초기 우리 사회에서는 북한의 방사포와 노동미사일 위협을 강조하는 분석이 많았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말기엔 북한이 핵실험을 했음에도 김정일이 체제 유지를 위한 방어 수단으로 ‘짝퉁 핵실험’을 했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이제 북한을 우리의 경쟁상대로 보는 사람은 극소수다.
김-노 정부 시절 개성에 건설된 남북경협공단은 우리의 영토 경계선을 북상시킨 것이라는 자화자찬이 있었다. 그러나 개성공단은 북한 땅에 건설된 한국공단이지 한국의 영토가 될 수 없다. 개성공단은 김정일 정권의 연명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도 보수를 자처한 이명박 캠프는 남북경협에 진력하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선거 공약인 ‘나들섬 구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공약은 나들섬으로 명명한 한강 하구의 퇴적지에 여의도 면적의 열 배에 달하는 초대형 경협단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단지에 입주할 수 있는 기업은 저임금을 노리는 중소기업체다. 그러나 이러한 업체는 중국을 거쳐 베트남 등지로 이미 빠져나갔으므로 나들섬공단이 만들어지더라도 입주할 업체가 있을지 의문이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명박 캠프의 남북 경협 구상을 반기는 것은 북한이다. 17대 대통령선거 기간 북한은 이 정책을 내놓은 MB진영을 단 한 번도 비난하지 않았다. 이 기간에 북한이 격렬히 비난한 것은 이회창 후보 진영이다. 올해 북한 언론은 이명박 당선자의 등장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남북경협을 철저히 이행하라는 내용의 공동사설을 실었다. 이는 북한이 ‘이명박 정부도 빨아먹겠다’는 방침을 명확히 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념이나 통일 문제에 관한 한 이명박 진영은 ‘무늬만 보수’다. 경제와 교육·복지 분야에서는 ‘야망 있는’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ambitious를 토대로 한 신조어 ‘MB셔스(야심적이다)’를 낳을 정도로 자유주의자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통일과 안보의 영역에서는 ‘애매한’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ambiguous를 빗대 ‘MB규어스하다(애매하다)’는 신조어를 낳을 정도로 불투명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