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노무현 2003-2008, 빛과 그림자 - 정치

  •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입력2008-02-13 19: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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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낡은 정치 개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당선됐다. 노 대통령이 가장 자신 있어 한 국정 분야가 ‘정치’였지만, ‘노무현식 정치’는 5년 내내 논란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2월4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정치 분야에서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F학점이다.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이명박 후보와 차점자의 530만 표차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 법정을 연상시키는 ‘민의(民意)의 법정’에서 내려진 심판은 ‘쓰나미’와 같은 것이었다.

    ‘민심 쓰나미’는 갑자기 들이닥쳐 노무현호(號)를 단번에 뒤엎어버렸지만 그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의 재·보궐선거와 2006년 지방선거는 2007년 대선 패배의 재앙이 임박했음을 경고했다. 하지만 노 정권은 설마 설마하면서 고치지 않았다.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말이 시중에 화제가 될 정도로 국민이 노 정권의 심연(深淵)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상황에서 정권 관계자들은 석고대죄는커녕 자신들의 진면모가 보수언론에 의해 왜곡됐으므로 스스로 평가를 해보겠다고 ‘참여정부평가포럼’을 만드는 만용까지 부렸다. 국민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참여정부는 글자 그대로 ‘폐족(廢族)’이 됐다. 문제는 재앙이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노 정권을 지탱하던 좌파진보까지 ‘연좌제’에 걸릴 위기에 몰렸다.

    노 정부의 속성을 반추할 만한 우화가 있다. 노부부가 상대방을 업어주면서 한 마디씩 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업으면서 “왜 이렇게 가볍나. 머리가 비고, 가슴이 비고, 정신이 나갔으니 가벼울 수밖에…”라고 말한다. 그러자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업고는 “왜 이리 무겁나. 머리는 돌로 가득 차고, 얼굴에는 철판을 깔고, 강심장에다 간덩이까지 부었으니, 무거울 수밖에 …”라고 응수한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무거움



    국민은 노무현 정부에 대해 국리민복(國利民福)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정치를 기대하기보다는 정부의 존재 그 자체를 견뎌왔다. 집권 386의 무능과 오만, 아마추어리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대통령은 국민 앞에서 대놓고 자신의 불만과 회한을 표출하고 짜증을 내곤 했다. 그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면 더 큰 대형사고를 칠 것 같은 기세였기에 국민은 내놓고 말은 못하고 냉가슴만 앓을 뿐이었다. 국민은 한번은 그 가벼움에 대해, 또 한번은 그 무거움에 대해 한탄하면서 번갈아가며 불만을 토로한다.

    노 정부는 도덕적 우월성과 ‘선출된 권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1700년 전 고대 로마의 황제검투사인 막시무스(Maximus)를 모델로 삼아 자신의 임무와 역할을 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것을 무찌르려고 했다. 막시무스는 원형경기장에서 200번 이상 다른 검투사들과 싸웠고 모두 승리했다. 누가 감히 황제검투사와 겨뤄 이기는 불경(不敬)을 저지를 것인가.

    국정(國政)을 원형경기장으로 본 21세기 한국의 대통령은 처음에는 언론, 다음에는 강남, 이어 검찰, 교육, 보수층, 시장경제와 싸웠으며 종국에는 국민과 맞붙어 싸웠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막시무스와는 달랐다. 노 정부는 비판적 언론이나 야당과의 작은 ‘전투’에서는 더러 이겼지만,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큰 ‘전쟁’에서는 지고 만 것이다.

    조롱하는 리더십

    ‘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노무현 대통령이 2008년 1월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인수위가) 소금을 뿌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는 내용으로 연설하고 있다.

    대통령의 역할과 책무는 점령군의 사령관이 되어 국민을 윽박지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으로 국민의 발을 씻겨주는 데 있다. 노 정부가 이를 중시했다면 보다 절제된 언행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 정권은 “기득권자”니 하며 사회의 중추세력을 낙인찍고 몰아붙였다.

    물론 한국 사회에는 많은 개혁과제가 있으며 지도층은 지금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 문제는 개혁의 방식에 있다. 병원에 가본 사람이라면 흔히 느끼는 일이다.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조롱하거나 희화화하지 않는다. 중병에 걸린 환자일수록 의사의 말은 더 신중하고 더 따뜻하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를 자처한 노 대통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별놈의 보수”라는 말을 내뱉었다. 또 건국과 산업화의 주역을 폄훼하고 조롱했다.

    노무현 정권이 이들을 일본과 미국의 허수아비로 평가절하한 근저에는 ‘설익은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노 정권의 386은 우리의 정신적 자산 속에 ‘저항적 민족주의’ 외에 ‘창조적 민족주의’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한국의 산업화는 “왜 우리도 일본처럼 잘살 수 없을까”라는 창조적 민족주의가 달성해낸 것이다. 386의 눈에는 민족주의가 분출된 기업가 정신의 진수는 보이지 않고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만 보였을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즉각적으로 ‘정치 현장’을 ‘이념 갈등의 장(場)’, ‘국력 소모의 근원’으로 바꿔놓았다. 노 정권하에서 ‘정치자금의 투명화’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것은 정치적 성과로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신문법, 사학법, 과거사법, 국가보안법 등 노 정권의 4대 개혁법 추진은 여야 정쟁이 극단으로 치닫는 도화선이 됐다. 부동산, 기업, 교육, 국방·안보 정책도 이념적으로 접근했다. 임기 5년 동안 국회는 수시로 그 기능이 마비됐고 ‘행정부와 국회’, 심지어 ‘행정부와 여당’이 겉도는 일이 상시적으로 일어났다. 사회 여론은 양분됐다.

    그 덕분에 노 정권은 국회 과반의석을 확보했지만 법제화를 통해 자신의 개혁안을 완수하는 실행력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다. 당정 간의 혼선, 야당과의 불화, 여론 설득(국민 동의) 과정의 생략 등 ‘정치 실패’가 부른 결과였다. 특히 노 정권은 출범 직후인 2003년 초반 터진 대통령 친형 및 측근의 부동산 의혹·불법자금 수수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었으며, 임기 초반임에도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친인척·측근 관리의 실패’에 따른 여론 지지율 하락은 이후 ‘노무현식 정치’의 추동력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노 정권은 임기 중후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과정에서 국민적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전기를 맞았다. 그러나 기존의 우군인 진보세력의 지지를 잃었다. 올라간 지지율은 또다시 터져나온 거친 언행 때문에 하락했다. 중도층과 보수층은 “역시나…”하며 다시 등을 돌렸다. 노 정권의 정치 실패는 정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신뢰성의 실추’에 있다.

    ‘징벌적 어젠다’로 국정운영

    노 대통령과 386측근들에게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르상티망’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격분(激憤)’으로서, 자신이 정치의 주변부에서 소외되고 억압받아왔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감정이다. 그들은 명실공히 국가권력을 장악했음에도 여전히 르상티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상이 뒤집혔음’을 알리고 싶은 욕구로 분출됐다. 그래서 강남, 서울대, 메이저 언론 등 기득권계층을 무너뜨리고 싶어했다.

    한국 사회의 모순 현상을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이를 해결해나갈 문(文)·사(史)·철(哲)의 교양을 갖추지 못한 집권 386은 국정사안들에 ‘징벌적 어젠다’로 접근했다. 자신들의 집권을 건국으로부터 이어지는 바통 터치로 생각하기보다는 단절의 계기로 보았다. 이는 과거사 진상규명과 행정수도 이전으로 나타났다.

    ‘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의 탄생은 ‘노무현식 정치’가 준 청량제였으나 노사모의 세력은 노 대통령 재임 기간 중 크게 위축됐다.

    기능과 목적이 중복된 14개의 과거사위원회에서 시도된 과거사 진상규명은 화해와 통합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건국과 호국 및 산업화세력에 대한 ‘주홍글씨 새기기’가 목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었다. 위헌 시비를 무릅쓰고 강행한 행정수도 이전도 단순한 이전이 아니라 고려의 개경이 조선의 한성으로 바뀐 것에 비견되는 ‘천도(遷都)’의 성격이었다.

    사회의 주류세력을 교체하겠다는 대담한 접근은 곳곳에서 야심만만하게 시도됐는데, 법원이 보수성향으로 이뤄졌다며 진보세력으로 교체를 추진해 소기의 성과를 거뒀고 민주평통에서도 세력의 교체를 완성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아서 슐레진저는 ‘미국 역사의 순환’에서 “미국의 공화제에는 등뼈(backbone)가 있다”고 주장했다. ‘등뼈’는 공화제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경우처럼 어떤 나라든지 공화제를 실시하면 그 나라는 타락하게 되어 ‘참주정치’나 ‘전제정치’ ‘제왕적 대통령제’에 이르게 될 위험을 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두려움을 갖고 나라를 운영해왔다”는 것이 슐레진저의 진단이다.

    정치란 아무리 선정(善政)을 표방해도 고통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를 ‘악마와의 계약’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의사가 오진(誤診)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좋은 의도로 정치를 해도 사고가 터지고 불이익을 당하는 집단이 나오게 마련이다.

    정치적 악명은 폭군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트로이 원정 때 함대를 움직일 바람을 불게하기 위해 자신의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시켜 아내 클리템네스트라를 격분시켰다.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명상록’을 쓸 만큼 지혜로웠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대량 학살한 바 있다. 모든 국가 지도자는 ‘폭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국정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노 정권은 ‘두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권의 국정운영 스타일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대통령이 울분과 격정을 쉴 새 없이 토해내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과 비전 및 정책이 국민 여론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설득의 언어’보다 ‘한(恨)의 언어’를 쏟아냈다. 오스카 와일드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끌고 싶다면, 그들의 뒤를 따르라”고 조언했는데, 노 대통령은 국민의 뒤를 따르기보다 이끌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노 정권은 기업을 냉대하면 기업들이 공장을 외국으로 옮긴다는 것을 몰랐다. 세금을 올리면 소비가 줄어든다는 것도 몰랐다. 법치의 엄숙성도 알지 못했다. 대통령 스스로 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놈의 헌법”이라 했다. 노 대통령은 차점자를 55만 표차로 따돌려 당선된 뒤 유권자의 3분의 1 내지 절반인 보수층을 포기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남은 절반 가운데 절반은 그의 언행에 실망해 그의 곁을 떠났다.

    ‘식량’ 없는 ‘식량정책’

    노무현 정권은 국정 운영의 구체적 성과를 내는 데 미숙함을 보였다. 러시아의 문호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에서 국가사회주의에 대해 “‘식량’도 없고 ‘땔감’도 없는데, ‘식량정책’은 넘치고 ‘땔감정책’도 풍성한 정부”라고 지적했다. 노 정권에서도 ‘국정의 결과’는 미미한데 ‘국정홍보’는 요란했고 복지의 재원은 부족한데 복지정책은 장밋빛이었다. 서민이 거주할 질 좋고 값싼 아파트는 부족한데 아파트 정책이 남발됐다.

    실적 없는 ‘위원회’는 무수히 설립되어 ‘위원회공화국’이 될 지경이었다. 현실의 절박한 문제는 못 보고 미래의 로드맵에만 몰두한 정권, ‘오믈렛’은 만들지 못하면서 ‘달걀’만 무수히 깬 정권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노 정권이 거대담론에 입각한 개혁 의지를 피력해온 것은 실제로는 ‘절벽’ 위를 걸으면서 ‘구름’을 잡는 사회주의 정권 특유의 모습과 같았다. 주택의 분배정의를 실현한다며 양도세를 대폭 올리고 종합부동산세를 신설했지만, 오히려 집값은 껑충 뛰었고 서민의 전세금 부담은 늘어났다. 노 대통령은 한때 “퇴임 후 임대아파트에 들어가 살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교육에 있어서도 평준화의 논리로 공교육 황폐화를 방치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또한 노 정권은 도롱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한 여승의 로맨티시즘에 굴복해 천성산 공사를 지연시켜 2조5000억원의 국고손실을 초래했다.

    노 정권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개혁 피로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치가 민생이나 실생활과는 관련 없는 거대담론에 함몰되어 국민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었던 점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각종 개혁법안은 모두 플라톤적 ‘이데아(idea)’, 즉 ‘이상’에는 강하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시아(ousia)’, 즉 ‘현실’에는 약한 성격을 보여줬다.

    개혁은 필요하지만, 개혁에도 ‘단서조항’이 있음을 모른 것이 화근이었다. 바람직한 실사구시적 목표가 있고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하는 가운데 낡은 질서를 혁파하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였다면, 사람들이 그토록 질색했을 리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노 정권의 개혁은 ‘파괴적 파괴(destructive destruction)’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노 정권의 이 같은 무능은 인사정책에서 비롯됐다. ‘이념’과 ‘코드’가 맞고 또 대선에서 대통령을 지지한 수많은 사람이 장관 등 공직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다보니 청와대가 첫 직장인 참모도 있었다. 정부는 준비된 ‘프로 정신’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이라기보다는 ‘인턴사원’을 훈련시키는 곳처럼 됐고 직업 공무원들은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전락했다.

    노 정권에서는 공무원 수 늘리는 데 절제가 없었다. 그러나 국정의 실패는 단순히 ‘비만정부’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노 정권은 삼류는 이류로, 이류는 일류로, 일류는 초일류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삼류 평준화에 중점을 뒀다. 국가나 사회는 연어처럼 강물을 역류해 상류를 지향해야 한다. 그럼에도 노 정권은 시작부터 하류 지향적이었다. 코드 인사로 민주화투쟁 이외에는 특별한 경력이 없는 386그룹이 정부 요직에 발탁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노 정권은 약자 중심으로 눈높이를 맞추고자 했다. ‘균형’ ‘정의’ ‘평등’ 등의 수식어를 동원했으나 결국 이것은 하향평준화 정책이었다. 사회는 강자와 약자 혹은 부자와 빈자만으로 이루어진 ‘단순계(simple system)’가 아니라 능력, 가능성, 자질 등 다양한 범주로 이뤄진 ‘복잡계(complex system)’인데 노무현식 정책은 이 점을 간과했다.

    ‘하산(下山)의 미학’

    노무현 대통령은 IMF 외환위기를 맞은 김영삼 전 대통령, 세 아들의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점철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비하면 조용하게 임기 후반기를 맞는 편이다. 대신 노 정권은 황혼기에도 권력에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다. 권력자에게는 ‘하산(下山)의 미학’도 중요하다. 마무리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자신의 집권 기간 전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

    노 정권은 임기 1년을 남기고 개헌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기자실 통폐합을 밀어붙였다. 차기 대통령직인수위 구성 후에도 ‘코드 인사’ 논란을 부르는 고위 공무원 임명을 강행했다.

    ‘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박효종

    1947년 서울 출생

    서울대 대학원 국민윤리교육학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서울대 국민윤리학과 교수(정치철학, 정치경제학)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위원

    저서 : ‘네오마르크스주의에 있어 국가의 재조명’ 외 다수.


    노 대통령은 1월4일 경제계 신년 인사회에서 “(인수위가) 구정물 뒤집어씌우거나 소금을 확 뿌리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며 “(인수위가) 계속 소금을 뿌리면 나도 깨지고 상처를 입겠지만 계속 해보자”라고 말했다. 1월9일 청와대 경제점검회의에서는 “우리가 올해 경제운용 방안을 얘기해봤자 말짱 헛방 아니냐”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런 발언이 알려지자 노 정권에 대한 여론은 더욱 싸늘해졌다. “지난해 10월 국립국어원은 신조어 모음집을 발간하면서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을 주는 데가 있다’는 뜻의 ‘놈현(노무현)스럽다’를 기재했었다. 여전히 그런 모습을 봐야 한다니 남은 임기 50일이 길게 느껴진다.”(‘한국일보’ 1월 6일 ‘마지막까지 노무현스럽다’ 기사)

    노 정권은 권력의 유한함에 몸부림치는 것으로 비쳤다. 자신의 철학과 이념이 사라질까봐 안절부절못하는 듯했다. ‘정치의 품위’는 노 정권하에서는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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