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2008년 1월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인수위가) 소금을 뿌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는 내용으로 연설하고 있다.
물론 한국 사회에는 많은 개혁과제가 있으며 지도층은 지금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 문제는 개혁의 방식에 있다. 병원에 가본 사람이라면 흔히 느끼는 일이다.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조롱하거나 희화화하지 않는다. 중병에 걸린 환자일수록 의사의 말은 더 신중하고 더 따뜻하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를 자처한 노 대통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별놈의 보수”라는 말을 내뱉었다. 또 건국과 산업화의 주역을 폄훼하고 조롱했다.
노무현 정권이 이들을 일본과 미국의 허수아비로 평가절하한 근저에는 ‘설익은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노 정권의 386은 우리의 정신적 자산 속에 ‘저항적 민족주의’ 외에 ‘창조적 민족주의’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한국의 산업화는 “왜 우리도 일본처럼 잘살 수 없을까”라는 창조적 민족주의가 달성해낸 것이다. 386의 눈에는 민족주의가 분출된 기업가 정신의 진수는 보이지 않고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만 보였을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즉각적으로 ‘정치 현장’을 ‘이념 갈등의 장(場)’, ‘국력 소모의 근원’으로 바꿔놓았다. 노 정권하에서 ‘정치자금의 투명화’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것은 정치적 성과로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신문법, 사학법, 과거사법, 국가보안법 등 노 정권의 4대 개혁법 추진은 여야 정쟁이 극단으로 치닫는 도화선이 됐다. 부동산, 기업, 교육, 국방·안보 정책도 이념적으로 접근했다. 임기 5년 동안 국회는 수시로 그 기능이 마비됐고 ‘행정부와 국회’, 심지어 ‘행정부와 여당’이 겉도는 일이 상시적으로 일어났다. 사회 여론은 양분됐다.
그 덕분에 노 정권은 국회 과반의석을 확보했지만 법제화를 통해 자신의 개혁안을 완수하는 실행력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다. 당정 간의 혼선, 야당과의 불화, 여론 설득(국민 동의) 과정의 생략 등 ‘정치 실패’가 부른 결과였다. 특히 노 정권은 출범 직후인 2003년 초반 터진 대통령 친형 및 측근의 부동산 의혹·불법자금 수수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었으며, 임기 초반임에도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친인척·측근 관리의 실패’에 따른 여론 지지율 하락은 이후 ‘노무현식 정치’의 추동력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노 정권은 임기 중후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과정에서 국민적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전기를 맞았다. 그러나 기존의 우군인 진보세력의 지지를 잃었다. 올라간 지지율은 또다시 터져나온 거친 언행 때문에 하락했다. 중도층과 보수층은 “역시나…”하며 다시 등을 돌렸다. 노 정권의 정치 실패는 정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신뢰성의 실추’에 있다.
‘징벌적 어젠다’로 국정운영
노 대통령과 386측근들에게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르상티망’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격분(激憤)’으로서, 자신이 정치의 주변부에서 소외되고 억압받아왔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감정이다. 그들은 명실공히 국가권력을 장악했음에도 여전히 르상티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상이 뒤집혔음’을 알리고 싶은 욕구로 분출됐다. 그래서 강남, 서울대, 메이저 언론 등 기득권계층을 무너뜨리고 싶어했다.
한국 사회의 모순 현상을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이를 해결해나갈 문(文)·사(史)·철(哲)의 교양을 갖추지 못한 집권 386은 국정사안들에 ‘징벌적 어젠다’로 접근했다. 자신들의 집권을 건국으로부터 이어지는 바통 터치로 생각하기보다는 단절의 계기로 보았다. 이는 과거사 진상규명과 행정수도 이전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