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호

합법과 일탈, 균형과 변화의 경계인 김아타

해체하고 박제하고 소멸시키며 인간 성찰

  • 정준모 미술비평가,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curatorjj@naver.com

    입력2008-05-07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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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계의 왕따’에서 어느날 갑자기 사진 한 장이 2억원 넘게 팔리는, 뉴욕에서도 주목받는 사진작가이자 설치예술가로 거듭난 김아타. 하지만 그에게 이런 평가는 무의미하다. 그는 처음부터 줄곧 인간의 실존, 그리고 그 모순에 대한 깊이 있는 자기성찰 과정을 렌즈에 담아 왔을 뿐이다.
    합법과 일탈, 균형과 변화의 경계인 김아타

    ▼ 1956년 경남 거제 출생<br>▼ 창원대 기계공학과 졸업<br>▼ ‘올해의 작가상’(1997), 영국 파이든 프레스 선정 ‘세계 100대 사진가’(2002), 제25회 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대표작가(2002), 제4회 이명동사진상(2003)<br>▼ 저서 : ‘ON AIR’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

    서울 로댕갤러리에서 열리는 김아타 개인전(5월25일까지)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젊은층의 발길이 많이 몰린다고 한다. 볼 만한 사진전이 흔치 않은 탓도 있겠지만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에 이렇게 많은 관객이 모이는 건 뜻밖이다.

    ‘김아타 신드롬’을 단순히 이미지에 대한 젊은 관객의 관심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그의 작품이 주는 세련됨, 주제를 다루는 자세, 그리고 이미지 채집지가 외국이라는 점 등 이국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는 다소 버거운 한국(또는 동양)의 전통적 가치와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요소들로 그들이 김아타에 환호하는 까닭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젊은이들은 김아타의 작가적 프로근성을 배우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에서도 통하는 작가로 성공한 선배의 뒤를 이어보려는 희망과 허명의식도 하나의 동인이 됐을 것이다. 또한 사진 한 장이 2억원 이상에 팔린다니 도대체 어떤 사진일까 하는 호기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애써 그의 작업을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던 사진가들의 발길도 이어진다. 새삼 김아타를 다시 발견하고자 하는 그들의 방문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김아타(金我他·52)란 존재가 대중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2006년 11월 KBS ‘지구촌 한국인-젊은 그대’라는 다큐멘터리에 소개되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진경력 20년차 작가였다. 그가 세상에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기까지는 실로 2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왕따’ 자초한 사연



    물론 그의 작업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비평가나 화상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진동네에서는 늘 이단아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이지만 정통 사진 전공자가 아니라는 그의 이력과 사진을 대하는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태도가 사진계에서 ‘왕따’를 자초한 셈이었다.

    간혹 들려오던 그의 독특한 이름이 잊힐 즈음 그는 방송 전파를 타고 등장했다. 그것도 당당하게, 때로는 거만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뉴욕 한복판을 휘젓고 있는 것이었다. 늘 미국 또는 미국사람에게 까닭 모를 콤플렉스를 지닌 한국인들은 자신에 찬 태도로 스태프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현장을 지휘하는, 그래서 마치 뉴욕을 호령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많은 작가가 외국에서의 활동과 성공을 무기로 비로소 한국에서 통했던 것처럼 그도 그렇게 돌아온 셈이다. 하지만 몇 년 또는 몇 달이 지나 풍문으로 전해지던 옛날과는 확실히 달랐다. 21세기 인터넷망으로 세계가 씨줄과 날줄로 그물처럼 얽혀 있는 오늘, 그가 뉴욕에서 거둔 성공은 지금 당장 서울에서 확인 가능한 생생한 뉴스였고, 공중파를 통해 그의 당당한 모습이 방영되면서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그는 ‘뉴욕을 뒤흔든 세계적인 사진 아티스트이자 설치미술가’라는 수식어와 찬사에 휩싸여 귀향했다. 그리고 그의 존재를 뒤늦게 안 언론들은 그의 작품과 작가적 실체에 대한 이해와 접근은 안중에 없이 상찬 일변도의 수사(修辭)만으로 그의 금의환향을 치장했다.

    이런 환호는 그의 처지에서 보면 부질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성장 이면에는 환호나 명성과는 관계없는 인간의 존재와 실존, 그리고 그것들의 모순에 대한 깊이 있는 자기성찰의 과정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이런 자기연마 과정을 통해 도달한 인간과 자연과 존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유 있는 방황

    합법과 일탈, 균형과 변화의 경계인 김아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김아타는 역설을 통해 존재의 가치를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김아타는 1956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김석중인데 2000년 김아타(我他)로 개명했다. 초등학교 교사이던 아버지의 섬세하고 자상한 가르침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사물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그 후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부산으로 이주했지만 여전히 ‘생각이 많은 섬 소년’이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사진 또는 현대미술과는 거리가 먼 ‘산업역군’이 될 뻔했다. 하지만 전공보다는 철학과 문학에 관심을 가졌고, 사진동아리에서 카메라와 함께 대학시절을 보냈다. 이즈음 대부분의 사진 초보자들이 겪는 것처럼 산천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사물과 자연을 피사체에 담았다.

    점차 사람들에게로 이끌리면서 이들의 삶과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1980년대말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갈 즈음 군부독재에 항거하다 삶을 빼앗긴 청년들의 영혼을 달래는 이애주의 춤을 기록함으로써 천상의 예술이 아닌 현실을 기록했다. 그 후 탄광촌을 찾아들어 광부들의 삶을 기록한 ‘탄광일기’를 제작하기도 하고, 서커스단원들과 함께하면서 목숨을 걸고 줄을 타는 그들을 ‘곡마단 일기’라는 작품에 담아내기도 했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운명처럼 선천적 기형을 안고 살아야 했던 아이들도 그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핵의 아이들’). 병원에서 생명의 탄생과정을 기록하기도 하고, 백혈병동에서 소아 백혈암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운명의 아이들을 담은 ‘빙점의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그의 탐구는 꾸준하면서도 다양하게 실천됐다.

    암울했던 1980년대를 터널처럼 거쳐야 했던 그 세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외면할 수 없었던 곳에 눈길을 주고 몸을 아끼지 않고 현장에 뛰어들어 피사체인 인물들과 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그는 점차 인간의 삶과 죽음, 운명과 현실이라는 이분법이 낳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의 형식인 몸보다는 실체인 정신을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정신병동에 들어가 그들을 기록하고 대화하면서 그들의 삶에 매달려보기도 했다. 이때 작품들이 ‘사이코 패스’다.

    하지만 당시 그의 사진은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 현실을 기록하는 사진,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런 방황은 사진작가가 되고자 했을 때 ‘밥 빌어먹는 짓’을 자초하는 아들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를 설득하는 기회를 줬다. 1986년 아버지를 모델로 한 ‘아버지’ 시리즈를 약 4년간 제작하면서 그는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변신을 꿈꾸기 시작한다.

    1989~90년에는 150여 명의 인간문화재를 찾아다니며 그들과 대화하고 대화를 통해 그들의 꼿꼿한 자신감과 존재감을 날 선 칼날처럼 섬뜩하게 담아낸다. 당시 그의 관심이 인간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몸보다는 정신에 무게를 둔 때문이다.

    그는 이런 끝없는 방황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언어를 찾고자 했고 그 과정에 얻은 사진들을 개인전을 통해 끊임없이 발표했다. 이런 일련의 시도는 그를 방황의 종착지로 끌어갔다. 그는 이내 몸과 정신을 서로 떠날 수 없으나, 서로 섞이지도 않는 ‘존재태’로 인식하면서 방황을 끝내고 유랑의 길로 들어선다.

    해체된 인간, 박물이 되다

    그의 방랑은 자신을 찾기 위한 유랑으로 이어졌다. 그는 외부에 대한 인식의 주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고자 1989년엔 ‘자화상’ 시리즈를, 1990년에는 ‘세계-내-존재(In-der-Well-sein)’ 시리즈를 시작했다. 하이데거의 실존적 태도와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생각이 바탕이 된 이 작품들은 어둠 속에서 긴 노출로 사물을 촬영한 것들로 여전히 흑백사진을 통해 구체화됐다.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탐구는 집요하게 지속되면서 새롭게 전이되어 1991년 ‘해체’ 시리즈로 이어졌다. 사진에 대한 이러한 열정, 아니 사진을 통한 인간과 자신에 대한 탐구의지는 ‘온에어 프로젝트(ON-AIR Project)’의 기반이 됐다.

    합법과 일탈, 균형과 변화의 경계인 김아타

    뮤지엄 프로젝트 #149, 니르바나 시리즈, 2001.

    ‘해체’ 시리즈는 씨앗을 뿌리듯 인간의 나신(裸身)들이 대지 위에 흩뿌려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폭력적인 살육의 현장을 떠올리게 하고, 역설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대지를 딛고 올라오는 생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진사적으로 본다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1864~1946)의 이큐발란트와 에드워드 웨스턴(1886~1958)의 즉물사진을 바탕으로 세속의 세계와 신성한 세계의 만남, 과학적인 기계에 의한 새로운 예술형식과 신비한 영지적 인식과의 조화로운 결합을 시도한 마이너 화이트(1908~ 1976)에게 기대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사진들은 콘트라스트가 강조된 것도 아니고 극적인 서정성을 지니지도 않는다. 무덤덤하게 먼 곳을 단순하게 촬영한 것처럼 보인다. 존재로서의 인간은 없고 자연의 일부이거나 자연에 함몰된 채 하나의 풍경을 구성하는 요소로 파편화하면서 비의적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풍경 구성요소로서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그는 해체 시리즈를 스스로 ‘설치(Installation)’라고 규정했다. 이는 결과물로서의 사진보다 찍히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더 중점을 뒀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연출력은 사진계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1995년 그는 흩뿌려졌던 인체들을 사각의 유리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도심이나 불특정 또는 특정장소에 설치한 후 그 상황을 촬영하는 뮤지엄(MUSEUM) 시리즈로 이어갔다. 하나의 오브제로 화한 인체는 ‘해체’ 시리즈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박물관의 유물상자에 담긴 하나의 주체로 현존한다.

    뮤지엄 시리즈

    합법과 일탈, 균형과 변화의 경계인 김아타
    뮤지엄 시리즈는 다시 몇 가지 주제로 나뉘어 진행된다. ‘자연과 인간’ ‘섹스’ 시리즈와 ‘홀로코스트’와 ‘전쟁기념관’ 시리즈, 그리고 ‘니르바나’ 시리즈가 그것이다. 당시 그의 뮤지엄 시리즈는 박제된 인체(?)가 주는 충격과 생경함으로 인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마치 구경거리가 없던 19세기 말 파리 사람들에게 진귀한 볼거리가 돼준, ‘모르그’라 불리던 ‘시체공시소’처럼.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그의 홀로코스트 시리즈는 형상은 드러나 있는 모습이라는 의미에서 이미지의 하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지의 대체적 진실에 익숙한 나머지 형상에 대해서는 어떤 사물의 형상이라고 특정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김아타의 그것은 형상이다. 그래서 사물과 동등한 존재론적 가치를 획득한 자족적이고 독자적인 하나의 형상이 된다.

    전쟁 시리즈는 상이용사들의 형상을 통해 절실하게 전쟁을 기념(?)한다. 단순하게 전쟁의 폭력성만을 보여주려 하지 않고 전쟁의 결과물로 인간의 외형뿐 아니라 내면까지 드러내는, 이미지가 아닌 형상을 시도했다.

    뮤지엄 시리즈의 백미는 역시 ‘니르바나 시리즈’다. 그는 유리상자 안에 삭발한 비구니 스님의 나신을 나란히 앉힌 작품을 발표하면서 불교계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마음의 경계를 깨는 걸림 없는 것’을 잇달아 작품으로 발표했다.

    그는 부처를 ‘마른 똥 막대기’라고 하며 젠 체하는 선승들의 비난을 일축하고 절집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연출해서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이렇게 그는 합법과 일탈이라는 최전선에 자신과 자신의 모델들을 놓는 전략을 택함으로써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그 논쟁의 가식적이고 세속적인 틀을 통해서 다시금 자신의 사진에 눈을 돌리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그는 규제와 규제를 피할 수 있는 부분 사이의 균형을 흐트러뜨리면서 변화를 꾀하는 이미지를 선택해 경계인을 자처한다.

    뮤지엄 프로젝트를 계기로 그의 사진은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다뤄지고 읽히기 시작했고, 2002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그의 사진은 이미 단순한 사전적 의미의 사진이 아닌 퍼포먼스와 현상의 현현이자 대상의 지적, 심리적 상태를 표상하는 하나의 존재가 된 것이다.

    이미지가 아닌 형상으로

    합법과 일탈, 균형과 변화의 경계인 김아타

    김아타의 사진은 특히 미국인들을 매료시켜 작품 가격이 치솟고 있다.

    이후 그는 장노출과 이미지의 중첩이라는 기법을 사용한 ‘ON-AIR’ 시리즈에 접어들었다. 이 시리즈는 다시 만다라와 섹스, DMZ, 얼음, 뉴욕 시리즈로 연결된다. 그는 장노출 기법을 통해 고정된 사물이나 건축물은 남기고 움직이는 모든 것은 움직이는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지게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번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뉴욕을 생생하게 그의 카메라로 박제화한다.

    그러나 박제가 돼야 할 움직이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만 존재로 남는 결과를 얻기 위해 짧게는 1시간, 길게는 24시간 이상을 대상(사물)과 대면해야 한다. 그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지구력과 끈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결과 세상은 마치 영화 세트처럼 텅 빈 채 거리만 남아 있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천안문 광장의 고요 또는 적막은 김아타에 의해 시간 속에서 지워진다. 잊힌다는 것과 지워진다는 것, 그리고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하지만 사라져야 한다. 그는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과 이에 반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사진이라는 익숙한 매체를 통해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결정을 요구한다. 사라질 운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라지지 않기 위해 부질없이 욕망의 바벨탑을 쌓을 것인가를.

    이처럼 장노출 기법을 통해 사라지는 것들의 사라짐을 통해 진실한 존재의 의미를 일깨우려 했다면 디지털 기술을 사용해서 만든 중첩 이미지를 통해 본질의 원형을 파괴했다. 남녀 15쌍의 섹스 장면을 찍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보이도록 만든 사진은 장노출 기법으로 사라진 존재들의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열락의 상태에 빠진 인간들의 교미는 비록 하루라는 짧은 생에도 불구하고 짝을 지어 잊히지 않으려는 하루살이들의 본능적 행동처럼 희화화할 뿐이다.

    또한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자연스러운 이치를 통해 세상 어느 것도 사라짐을 보여준다. 마오쩌둥도 마릴린 먼로도 작가인 김아타도 모두 물이 되어 하나가 된다. 자화상 시리즈에서도 인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은 잃지만 자신의 민족이라는 거대담론에 의해 소멸된 문화인류학적 사진 한 장으로 귀결된다. 현대미술의 거대 화두인 정체성의 문제, 주체와 타자의 문제는 이렇게 교묘하게 위장된 채 실존의 문제로 남는다.

    역설의 변증법

    그의 작품을 ‘역설’과 ‘철학적 사유’라는 진부한 용어와 ‘동양’과 ‘신비주의’로만 읽는 것은 서양인들의 시각일 뿐이다. 그의 작품은 사실 자신의 ‘이미지 트레이닝’으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에게는 낯선 방식일 뿐이다.

    그의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테제는 요즘의 세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하고도 당연한 것이다. 그의 작품이 갖는 힘은 공간을 압도하는 스펙터클한 화면과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를 지키는 시간과 끈기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피사체를 중심으로 한 패닝(Panning) 기법의 역차용과 대각선 구도도 그의 사진을 ‘철학적’이나 ‘역설’이라는 의미를 넘어 사진 그 자체로서 바라보는 즐거움을 준다.

    합법과 일탈, 균형과 변화의 경계인 김아타
    정준모

    1957년 서울 출생

    중앙대 서양화과 졸업, 홍익대 석사 (미술학)

    제1회 광주비엔날레 전문위원, 국립 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덕수궁 미술관장

    現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중앙대·고려대 강사

    논문 : ‘미술품은 땅인가’ ‘제3의 미학, 새로운 출구’ ‘한국의 모던이즘, 모더니즘’ 등


    그의 작품에는 단순하고 명징한 주제가 존재하지만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대하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이나 준비과정에서 많은 스토리가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제작과정의 이런 일상성과 에피소드는 역설적으로 또 다른 흡인력이기도 하다.

    최근의 ‘인다라’ 시리즈에 이르면 그는 역설 그 자체가 된다. 타지마할, 케롤박, 찬드니촉이라는 서로 다른 장소가 밝기만 다를 뿐 하나로 귀결되면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사라진다는 진리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사진의 매력은 사진으로서의 완벽한 존재감과 사진에 담긴 피사체들의 공허함을 통해 뚜렷한 역설의 변증법을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부재하는 피조물들을 통해 사진으로 현존하는 극적인 전이는 그의 사진에서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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