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호

욕망을 봉쇄당한 여자의 일그러진 사랑

훔쳐보고, 자해하고, 파괴하고…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8-05-07 14: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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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자의 해소되지 못한 욕망과 거절당한 사랑은 어떻게 처리될까. 자동차극장에서 남들의 성교를 훔쳐보며 방뇨를 하고(‘피아니스트’), 손톱 밑에 바늘을 넣어 찌르거나 얼굴에 신문을 덮고(‘궁녀’), 자신의 사랑을 외면한 남자의 인생을 파멸시키고(‘어톤먼트’), 황제의 배다른 아들을 유혹해 근친상간을 범하고 그를 부추겨 반란을 도모한다(‘황후화’).
    욕망을 봉쇄당한 여자의 일그러진 사랑

    황후화(왼쪽), 어톤먼트.

    달이 가득 차면 이지러져야 한다. 초승달, 보름달을 거쳐 그믐달로 사위는 달의 순환은 그 원리가 여성과 닮았다. 그래서 달은 전통적으로 여성에 대한 비유이거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차면 기울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욕망의 순조로운 흐름이다. 자궁에 가득 찬 피가 경혈로 쏟아지듯 내면 깊은 곳에 쌓여 있는 욕망은 어딘가로 흘러나와야만 한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간혹 여성의 욕망은 몇몇 호명(呼名)에 의해 오해받거나 거절되고 혹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기도 한다. 그녀들은 때로는 ‘추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때로는 왕의 여자이기 때문에 평생을 억압받으며 살아야 한다. 때로는 봉건시대의 미망인이기 때문에, 더러는 정치적 종교적 이유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 때문에 성욕을 섹스로 풀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그녀들은 감금되고 폐기되어야 했던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소환해 풀어낸다. 사람들은 그것을 도착(倒錯)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론 집착이자 분열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금지나 경계는 가장 강력한 권유”라는 바타이유의 말처럼 현실적 제약과 결핍은 여자의 욕망을 반감시키기는커녕 배가시킨다. 문제는 그들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이 해소될 수 없다는 그 자체에 있다. 그렇다면 해소되지 못한 채 발효된 여성의 욕망은 어떻게 소모되는 것일까. 비우지 못하고 채우기만 해야 하는 여성들, 이 불쌍한 ‘욕망기계’들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여기 한 여자, ‘에리카’는 억압된 욕망에 자기 자신을 수몰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프고, 참혹하게 말이다.

    고통은 나의 힘

    에리카는 불안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온다. 무엇인가 숨기기에 급급한 그녀를 엄마가 몰아세운다. 엄마는 에리카의 가방에서 고가의 원피스를 발견한다. 엄마는 1년만 지나면 쓰레기가 될 유행에 돈을 쏟아 붓는다고 딸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화를 낸다. 흥미로운 것은 딸의 반응이다. 마치 부부싸움을 하듯 에리카는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입힌다. 누가 봐도 이들 모녀는 보편적이지도 정상적이지도 않다.



    노벨상을 수상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는 첫 장면부터 암호처럼 난해하다. 뻣뻣한 옷감으로 온몸을 감싼 여자. 에리카는 과연 그녀에게 욕망이란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해 보인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다보면 한 번쯤 마주칠 법한 평범한 인상의 그녀는 무채색의 옷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하는 짓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녀는 욕실에 들어가 문을 잠근 채 외음부를 면도칼로 그어 상처내고, 남자들이나 들르는 포르노 비디오방에 가서 정액이 묻은 화장지를 주워 냄새 맡는다. 간혹 밤늦은 시간 자동차극장에 가서 남들의 성교를 훔쳐보며 방뇨를 하곤 쫓기듯 도망쳐 나온다. 과연 이 여자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외음부를 칼로 긋고…

    욕망을 봉쇄당한 여자의 일그러진 사랑

    피아니스트

    비밀의 열쇠는 바로 ‘집’에 있다. 아버지가 없는 집 안에서 에리카는 엄마와 단둘이 지낸다. 아니 엄밀히 말해, 한 침대를 나눠 쓴다. 아버지의 빈 자리, 아버지에게 쏟아 부어야 할 사랑과 열정을 모두 딸에게 투사한 어머니는 그녀에게 성공만을 강요한다. 어머니는 딸 에리카를 성욕이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박제하려 한다. 과잉된 애정과 기대를 안고 살아가는 딸에게 사랑은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사치품 중 하나로 취급된다. 사랑은 감정의 과잉이며 엄마로부터 딸을 빼앗아갈 치명적 유혹이기 때문이다.

    일류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엄마의 요구는 언뜻 당연해 보이지만, 한국의 많은 어머니가 그렇듯 실패한 인생의 보상을 딸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한 요구를 통해 딸의 욕망을 통제하려 하는 엄마는 에리카의 이상행동만큼이나 불온하다.

    심각한 것은 스무 살에 끝나도 늦을 이 통제가 에리카에게 마흔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스며드는 욕망을 스스로 단죄하고자 한다. 너무도 당연한 욕망이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을 벌주고 오히려 남자처럼 굴려 한다. 어머니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가 되는 것을 남자처럼 욕망하고 소모하는 것과 착각하는 셈이다. 남자처럼 자위행위를 하고, 남자처럼 핍쇼(peep show)를 보는 그녀는 자신의 욕망이 지닌 조감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 잘못된 지도는 그녀에게 ‘연애’가 다가온 순간 엄청난 오류를 일으킨다.

    다행히도, 아니, 너무나 불행하게도, 누에고치처럼 자기 속에 갇혀 있는 이 여자에게 열렬한 숭배자가 생긴다. 불행일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가 지닌 ‘사랑’이나 ‘연애’에 대한 모든 공식이 죄다 왜곡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제자인 청년은 그녀를 사랑하다고 간증하며 제발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애원한다. 무릇 사랑이란 것도 훈련이 필요한 학습이 아니던가.

    자신에 갇혀 왜곡된 방식의 사랑을 가꿔온 에리카는 이상한 요구들로 가득 찬 편지를 진심보다 먼저 전달한다. 편지 내용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나를 묶고 배를 세게 걷어차줘. 엄마를 꽁꽁 묶어 옷장에 가둬줘. 그리고 엄마가 느낄 수 있는 곳에서 나를 강간해. 코뼈가 부러지도록 때리면서 말이야”와 같은 얘기가 가득 찬 편지는 이미 연서가 아니다.

    상처에서 황홀경 상상

    문제는 시간 차이다. 에리카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그러한 도착적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리카를 사랑한 남자는 이 편지를 묵살한다. 그리고 편지와 함께 그녀에 대한 열정도 지워버린다. 그런데 그때부터 에리카는 남자가 원래 하려고 했던 것, 키스하고 포옹하고 애액을 마시며 서로의 몸을 탐색하는 그런 사랑을 원하게 된다. 남자가 마음을 버리자 그때서야 자신이 원하는 것이 ‘가학’이 아니라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다.

    또다시 문제는 시간 차이다. 남자는 이제 에리카를 사랑하지 않기에 그녀가 편지에 쓴 내용 그대로 실현한다. 그는 ‘진짜’ 그녀의 집으로 쳐들어와 그녀의 엄마를 옷장에 가두고, ‘진짜’ 그녀를 때리고는 강간한다. 그녀가 원한다고 썼던 내용이 모두 이뤄졌지만 남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는 에리카, 그녀의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다. 에리카를 마치 투명인간인 양 지나치는 남자. 에리카는 손에 쥔 칼을 자신의 가슴에 박아 넣는다. 그녀는 욕망을 고통과 교환했듯이 실패한 사랑도 고통으로 보상받고자 한다. 외음부를 면도칼로 긋듯이 그녀는 고통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끼고자 한다. 잘못된 지도가 길을 잃게 하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은닉된 채 한 번도 드러난 적 없는 욕망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이미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정신분석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문신이 자기 몸을 확신하는 마초의 선택이라면 자해는 존재감이 불투명한 히스테릭한 자의 선택이라고 한다. 욕망의 해소가 힘들어질 때, 자꾸만 그 욕망이 깊숙한 곳에 쌓여만 갈 때 고통은 힘이 된다. 오르가슴의 순간 미간을 찡그리는 연인처럼 그렇게 욕망을 봉쇄당한 여자들은 상처에서 황홀경을 상상한다. 이 고통스럽고 황홀한 소모의 시간, 결국 그 욕망은 그녀 스스로를 다치게 한다.

    유실된 에로스, 왜곡된 욕망들

    욕망을 봉쇄당한 여자의 일그러진 사랑

    궁녀

    채우기만 하고 비울 수 없는 여성들이 있다. 깨끗한 피로 채워진 자궁이 매달 경혈을 거듭해야 하고, 그곳에 신성한 아이가 들어설 확률은 0퍼센트다. 욕망도 자궁처럼 차오르지만 해소할 방법도 없다. 수백명의 여자에게 허락된 남자는 단 한 명. 그 한 남자가 ‘나’를 거절한다 해도 ‘나’는 다른 남자를 선택할 수 없다. 결국 죽음의 순간까지 순결하게 지켜질 자궁 하나, 그녀들은 호명되는 순간 욕망을 차압당하고 만다. 그녀들의 이름은 궁녀. 여성이지만 억압만 있을 뿐 욕망의 실체와 만나본 적 없는 불행한 여성들, 그들이 바로 궁녀다.

    김미정 감독의 영화 ‘궁녀’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축시(丑時)가 되자 지밀상궁이 왕과 왕비를 깨워 잠자리에 들라고 고한다. 축시라면 새벽 한 시 즈음, 꾸벅꾸벅 조는 늙은 상궁 곁의 어린 나인은 문틈으로 왕과 왕비의 교접을 훔쳐본다. 신음을 내며 “당신의 씨를, 왕손을 달라”고 호소하는 왕비를 보는 어린 나인의 동공은 커진다. 그들이 나누는 그 무엇, 궁녀들에게 금기인 무엇에 대한 욕망을 직감하는 것이다.

    폭력으로 전이된 성욕

    영화 ‘궁녀’는 평생 궁 안에 갇혀 살아야 했던 궁녀의 도착적 삶을 공포영화의 문법으로 그려낸다. 흥미로운 것은 차단된 욕망이 공포로 해석되는 과정이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궁녀들의 엄계는 시집살이 3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가능성 있는 ‘예비 자궁’일 뿐 성욕은 인정받지 못하는 그녀들은 스스로를 더욱 더 엄한 규칙으로 옭아맨다. 욕망이 강할수록, 허락된 것이 희유할수록 금지는 더욱 엄격해진다. 에리카가 자신의 욕망을 자해로 해소하듯, 그녀들은 에로스를 파괴적 공격성으로 바꾸어 소진한다. 사소한 범죄에 대한 잔인하고 엄청난 징벌들은 스너프 필름(snuff film)에서나 볼 법한 도착적이며 극단적인 성욕과 닮았다.

    차단당한 성욕은 재물에 대한 욕심,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나인에 대한 폭력 등으로 전도된다. 수백명의 나인 중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는 고작 10명 안팎. 나머지 나인들의 삶이란 고단하기 그지없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욕망과 시간을 그녀들은 기이한 집착으로 견뎌나간다. 물건을 훔친 자는 손목을 자르고 처녀성을 잃은 나인은 참형에 처한다.

    왕이라는, 남근(男根)을 가진 유일한 남자,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단 한 남자를 둔 싸움은 치열하다 못해 잔혹하다. 왕의 남근만이 합법적 남근이기에 다른 남근에서 비롯된 생명은 가차 없이 버려진다. 손톱 밑에 바늘을 찔러넣고, 얼굴에 종이를 덮는 형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무시무시한 이데올로기다.

    혈기왕성하고 순결한 여성들을 궁 안에 가둬두는 순간 단 한 남자만을 바라보도록 시선이 고정될 때 도착은 시작되고 불운은 침잠한다. 그것은 가족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남성중심주의의 오랜 비밀이기도 하다. 아무나 아들을 얻을 수 없지만 누구나 아들을 원하는 상태 자체가 일종의 광기이고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 ‘궁녀’는 구중궁궐의 문을 켜켜이 닫아걸어 이 부패한 욕망의 공간을 격리한다.

    수많은 법칙과 금기로 가득 찬 궁녀들의 세계는 자신의 욕망을 폭력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왜곡으로 가득 차 있다. 히스테리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녀들의 증세는 실상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의 욕망은 음탕의 결과가 아니라 자손을 잇고자 선천적으로 내재된, 너무도 근원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욕망이 거절당할 때, 당신을 향한 나의 순정이 외면당할 때 그 에로스는 어디로 갈까. 에로스가 타나토스로 뒤집히는 아이러니, 우리는 이제 거절당한 여자들의 파괴력을 보게 될 것이다.

    거절당한 여자의 파괴력

    영화가 시작되면 소녀 브리오니가 직각보행으로 어딘가 서둘러 가는 모습이 보인다. 단발의 금발머리 소녀 브리오니는 꼭 다문 입술과 야윈 팔이 어딘가 선병질적 인상을 풍긴다. 그녀는 이제 막 생애 첫 번째 희곡을 탈고했다. 사랑과 욕망에 대한 위대한 비극이라고 믿는 그녀. 이 영화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잔혹성을 그리고 있지만 거절당한 여자의 파괴적 에너지를 보여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어톤먼트’(atonement·속죄) 말이다.

    아끼는 장난감을 파괴하듯

    욕망을 봉쇄당한 여자의 일그러진 사랑

    어톤먼트

    브리오니는 첫 번째 연극대본을 완성해 세상의 주인이 된 양 의기양양하다. 그런데 그 순간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가 마주 보는 장면을 목격한다. 환한 햇빛 아래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정원에 서 있는 로비와 세실리아의 자태는 색정적이기 그지없다. 몸에 달라붙는 속옷을 입고 분수에 뛰어드는 세실리아와 그녀의 손을 가로채듯 잡는 로비, 그들의 눈빛은 멀리 있는 브리오니의 체온마저 상승시킨다. 그리고 영악한 브리오니는 깨닫는다. 로비의 저 눈빛은 자신에게는 한 번도 던져주지 않은, 바로 ‘에로스’라는 사실을 말이다.

    브리오니는 엉겨 있는 세실리아와 로비를 보고는 “변태”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그녀는 둘의 행위가 이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야릇한 느낌을 선사했기에 저주한다. 브리오니는 둘의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는 척하지만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원하지만 아직은 할 수 없는 것, 그것을 공유한 두 사람에 대한 질투심은 결국 그 운명을 훼방 놓겠다는 잘못된 ‘연출자’의 각오로 실현된다.

    브리오니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신이 로비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자신이 바라는 사랑을 주지 않아 그를 소유하고 파괴하고 싶어졌다는 것을. 마치 경쟁자가 생겼을 때 소중히 아끼는 장난감을 되레 부숴버리는 못된 아이처럼, 브리오니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로비를 파멸하고 싶어한다.

    어느 날 브리오니는 자신이 물에 빠지면 구해줄 거냐고 로비에게 묻는다. 로비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브리오니는 당돌하게도 물에 빠져 그의 사랑을 시험한다. 이에 대해 로비는 극렬히 화를 내고 돌아선다. 훗날 브리오니는 “그 순간 나는 로비에 대한 사랑을 접었어”라고 말하지만,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브리오니는 그 순간 결코 로비가 자신의 시나리오 안에서 주인공이 되어주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잔인한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혼동한 브리오니는 거절당했다고 믿고 그의 인생에 파괴의 돌멩이를 던진다. 그리고 너무도 장난처럼 허무하게 로비의 생애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브리오니가 거절당한, 치기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황후화’의 그녀, 황후(쿵리)는 조금 더 잔인하고 참혹한 비극을 준비한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을 정치적으로 선택해 공략했음을 알고 있다. 문제는 황제에게는 애초부터 그녀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는 것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경계

    황후는 이제 황제가 이룬 것을 하나씩 무너뜨려 복수하고자 한다. 그녀는 먼저 그가 진정 사랑했던 여자에게서 얻은 아들을 유혹해 치명적인 근친상간을 범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황제에게 누설한다. 두 번째로 그녀는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아들을 부추겨 반란을 도모한다.

    욕망을 봉쇄당한 여자의 일그러진 사랑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고려대·극동대 강사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종합예술대 강사


    황제와 황후의 관계는 정치적 동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황제는 버릴 수밖에 없었던 첫 여자에 대한 갈망을 간직한 채 아내를 멸시하는 한편 황실의 지위를 간직하기 위해 옛 여자를 살해하고자 한다. 황후는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만 한 황제에게 그저 복수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녀에게 욕망은 정치와 정복에 대한 집착으로 치환됐지만 그것은 도착(倒錯)에 가깝다. 잘못된 곳에 도착(到着)한 욕망은 도착(倒錯)일 수밖에 없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욕망의 양가성은 단지 여성에게 국한된 모순이기 이전에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심연이자 아이러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암시하듯 생산되는 에너지는 그만큼의 소비를 요구한다. 소비되지 못할 때, 쌓인 에너지는 결국 두 가지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 상처 입거나 남을 상처 입히는 방향으로 말이다. 순조로운 흐름이 봉쇄될 때 욕망은 고장을 일으킨다. 거절당한 여자들의 고통은 에로스의 아름다운 손길로 타나토스로 뒤바뀌는 경계, 바로 그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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