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후화(왼쪽), 어톤먼트.
그런데 애처롭게도 간혹 여성의 욕망은 몇몇 호명(呼名)에 의해 오해받거나 거절되고 혹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기도 한다. 그녀들은 때로는 ‘추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때로는 왕의 여자이기 때문에 평생을 억압받으며 살아야 한다. 때로는 봉건시대의 미망인이기 때문에, 더러는 정치적 종교적 이유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 때문에 성욕을 섹스로 풀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그녀들은 감금되고 폐기되어야 했던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소환해 풀어낸다. 사람들은 그것을 도착(倒錯)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론 집착이자 분열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금지나 경계는 가장 강력한 권유”라는 바타이유의 말처럼 현실적 제약과 결핍은 여자의 욕망을 반감시키기는커녕 배가시킨다. 문제는 그들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이 해소될 수 없다는 그 자체에 있다. 그렇다면 해소되지 못한 채 발효된 여성의 욕망은 어떻게 소모되는 것일까. 비우지 못하고 채우기만 해야 하는 여성들, 이 불쌍한 ‘욕망기계’들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여기 한 여자, ‘에리카’는 억압된 욕망에 자기 자신을 수몰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프고, 참혹하게 말이다.
▼ 고통은 나의 힘
에리카는 불안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온다. 무엇인가 숨기기에 급급한 그녀를 엄마가 몰아세운다. 엄마는 에리카의 가방에서 고가의 원피스를 발견한다. 엄마는 1년만 지나면 쓰레기가 될 유행에 돈을 쏟아 붓는다고 딸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화를 낸다. 흥미로운 것은 딸의 반응이다. 마치 부부싸움을 하듯 에리카는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입힌다. 누가 봐도 이들 모녀는 보편적이지도 정상적이지도 않다.
노벨상을 수상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는 첫 장면부터 암호처럼 난해하다. 뻣뻣한 옷감으로 온몸을 감싼 여자. 에리카는 과연 그녀에게 욕망이란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해 보인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다보면 한 번쯤 마주칠 법한 평범한 인상의 그녀는 무채색의 옷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하는 짓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녀는 욕실에 들어가 문을 잠근 채 외음부를 면도칼로 그어 상처내고, 남자들이나 들르는 포르노 비디오방에 가서 정액이 묻은 화장지를 주워 냄새 맡는다. 간혹 밤늦은 시간 자동차극장에 가서 남들의 성교를 훔쳐보며 방뇨를 하곤 쫓기듯 도망쳐 나온다. 과연 이 여자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