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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본 한중일 문화인류학 5

중심이냐 주변이냐, 중국 소수민족들의 ‘음식 인권’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민속학 duruju@aks.ac.kr

중심이냐 주변이냐, 중국 소수민족들의 ‘음식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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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 생활로 사라진 ‘생식 DNA’

중심이냐 주변이냐, 중국 소수민족들의 ‘음식 인권’

샹거리라 티베트인이 소유차를 만들고 있다.

1989년에 홍콩의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출판한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은 중국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음식고고학을 연구하는 왕런샹(王仁湘)이란 학자가 ‘중국음식의 역사’를 정리한 대작이다. 이 책은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에 포함된 각 지역과 민족집단(ethnic group)들의 음식 역사를 다뤘다. 역사적 시간대도 선사시대부터 청나라 때까지 거의 1만년에 가깝다. 그가 제시한 다양한 접근 방법 중에 특히 눈에 띄는 점은 20세기 중반까지 조사된 중국 소수민족의 음식 생활을 매우 적절하게 이용한다는 것이다. 가령 선사시대의 고고학 유적에서 나온 음식과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들을 소수민족의 이른바 ‘원시적’ 음식 생활을 통해 유추해 해석해낸다. 구체적으로 그의 설명 방식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불을 발견하기 이전의 선사시대에 생식(生食)을 하는 관습을 이야기하면서, 중국 동북지역인 헤이룽장(黑龍江) 지역에 사는 어룬춘인(鄂倫春人)은 화식을 배운 이후에도 불고기나 삶은 고기를 단지 5~6분만 익혀서 먹는다는 사례를 든다. 전체를 모두 익히면 그들은 오히려 고기 맛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는다.

어룬춘인은 주로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주와 중국의 헤이룽장, 내몽골 지역에 흩어져 산다. 인구가 4000여 명밖에 되지 않는 이들은 주로 사냥을 하면서 살아왔다. 정치적 조직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긴 겨울과 추운 기후 환경에 적응해 나름대로 먹고사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먹을거리를 사냥감에서 얻지는 않았다. 날씨가 따뜻한 여름에는 곡물이나 산나물, 그리고 과일이며 열매를 먹을거리로 삼았다. 사냥은 주로 겨울에 이뤄졌다.

눈이 쌓인 숲 속에서 행하는 겨울 사냥에선 나무가 축축하게 젖어 불을 지피기 어려웠고, 자신들의 임시 거처에도 난방을 거의 하지 못했다. 자연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사냥감들을 그때그때 불에 익혀 먹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영하 20℃에 가까운 온도에서도 갓 잡은 사냥감은 따뜻했다. 이 고기를 간단하게 손질해서 난방용 불에 약간 익혀 먹는 방법은 최선의 조리기술이었다. 이렇게 먹는 고기가 익힌 고기보다 맛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이들은 1950년대 이후 중국 정부의 강제 조치에 의해 이동 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체질로 자리잡은 생식 관습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았다. 다만 정주 생활은 그들의 생활방식을 점차 다른 속성으로 변화시켰고, 정주로 인한 심리적 불안정도 다음 세대로 넘어오면서 안정되기 시작했다. 생식 관습 역시 정주생활 이후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으로 이해됐다. 아무리 한족 학자들이 “그들의 위장은 생으로 음식을 먹는 데 적응되어 있다”고 강조해도 40여 년 동안 정주 생활을 하는 사이 몇천 년 동안 누적돼온 생식의 DNA는 사라져갔다.

오늘날도 어룬춘인 노인들은 한겨울에 취미 삼아 겨울 사냥을 나간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라이터 등 불을 지피고 젖은 나무를 대신해 태울 수 있는 재료들이 있다. 그러니 방송국이나 학자들이 과거의 생활 모습을 보겠다고 하면 연출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더 이상 과거처럼 육식을 날것으로 겨우내 먹지는 않는다. 불에 익힌 고기도 생식만큼 맛이 좋기 때문이다. 더욱이 날이 갈수록 사냥감이 줄어들어 먹을거리를 따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족(夷族)이 이족(彛族) 된 사연

나는 1996년과 1997년에 중국 쓰촨(四川)성 량산(凉山) 이족(彛族) 자치주에서 현지조사를 수행했다. ‘이족’이란 이름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원래 그들 스스로는 ‘롤로(Lolo)’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그 뜻은 ‘검은색을 숭상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던 것은 잘 조직된 중앙집권적 정치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경상남북도 크기의 지역을 20여 개 되는 귀족 가문이 서로 영역을 나눠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 역시 약간씩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해발 2500m가 넘는 오지인 량산은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한족의 지배를 받아본 경험이 전혀 없다. 더욱이 가문별로 경쟁하면서도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서로 연합하는 무사 위주의 집단이었다. 그 때문에 한족들도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지 않는다. 산 위에 띄엄띄엄 귀족 가문들 집이 흩어져 있다. 이로 인해 더욱 한족 통치의 그물망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한족들은 그들을 이족(夷族)이라 불러왔다. 오랑캐 무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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