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호

‘이른 봄, 얼음 밑을 흐르는 물’ 구효서

“헛폼과 무거움에 지쳤어요, 그래서 자유로워졌죠”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입력2008-05-07 19: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구효서는 좀처럼 남에게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다.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 조금 떨어져 있어야 안심되는 마음…. 그래서 외롭지만 조선 민들레처럼 속정은 깊다. 그의 소설도 주인을 닮았다.
    ‘이른 봄, 얼음 밑을 흐르는 물’ 구효서
    구효서(具孝書·50)는 좀처럼 남에게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곁을 준다는 건 정이 많다는 거다. 그런데 구효서는 겉으로는 곁을 잘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속정은 깊은 사람이다.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곁에 잘 가지 않는 사람 정도로 고쳐야겠다.

    그가 곁을 잘 주지 않은 것은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 조금 떨어져 있어야 안심되는 마음…. 그래서 가끔 만날 때마다 간단하게 인사하고 지나가곤 했다. 구효서는 내게만 곁을 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남에게도 그러하다. 나 역시 그렇다.

    작가는 사람에게 곁을 잘 주지 않아 외톨이가 많다. ‘향수’의 작가 쥐스킨트는 사진조차 남기지 않고 끊임없이 도망치는 사람이다. 곁을 주기 싫어서다. 꽃피는 4월에 ‘나가사키 파파’라는 소설을 읽고, 구효서에게 전화해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소설을 읽어서인지 일본 나가사키에서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 싶었지만 일본까지 가기엔 서로 바빴고, 대신 서울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구효서는 오전 10시에 광화문 성곡미술관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밤 10시가 아니라 오전 10시라니, 낭패감이 들었다. 촉촉한 글이 나오려면 밤에 만나 술 한잔 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번에 그를 만나는 건 취미생활이 아니라 일이다. 작가가 새벽에 만나자면 새벽에 나가야지 별수 있나 싶었다.

    부러진 목련 나뭇가지



    오전 10시02분 성곡미술관 앞에 구효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조금 불안했다. 그에겐 휴대전화가 없기 때문이다. 몇십초가 지나도 이렇게 불안하다니, 이미 나는 휴대전화 중독이 되어버렸다. 어서 이 중독을 끊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성곡미술관 안에서 구효서가 걸어 나오면서 활짝 웃었다. 몇 분간 불안했던 마음이 뚝 떨어졌다. 밑을 내려다보니 민들레가 피어 있다.

    조선 민들레처럼 언제나 환한 구효서는 동료 선후배로부터 ‘착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에 대해 험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한 험담 한두 마디는 듣는 법인데, 구효서는 예외다.

    이러한 모습은 오전에 만나자는 그의 성격에서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많은 작가가 아직 잠에서 덜 깨기도 하는 이 시각에 우리는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성곡미술관 앞 ‘커피스트’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창을 통해 실내를 들여다보니, 종업원이 의자를 내고들이면서 정리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악수를 나누고 우리는 광화문 ‘문사철’ 사무실로 올라갔다. 주택 마당에 심은 목련꽃이 봉오리를 내밀고 있었다. 언덕길로 떨어지는 햇살이 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겨우내 숨어 있던(저 생명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꽃 봉오리들이 실눈을 뜨고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쟤들은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는 거야?’

    며칠 전 나무를 실은 트럭들이 왔다갔다하던 길거리에 부러진 목련 나뭇가지가 뒹굴고 있었다. 나무를 옮기다가 꺾어진 것 같다. 제법 굵은 줄기에 목련꽃이 움트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 가지를 길가로 치워놓고 눈여겨두었다.

    ‘문사철’ 회의실 넓은 차창으로 신록의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잠시 마주앉아서 그냥 웃었다. 그간 잘 지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커피를 내리고 문사철 기획위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밖을 보았다. 햇볕은 들어오고 바람은 차단되는 실내에서 나른하게 밖을 내다보는데 아득하게 딴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이라면 그냥 천천히 문을 열고 걸어가 창밖으로 뛰어내린다면, 천리 절벽 아래로 떨어져 꽃으로 피어날 것 같았다. 온 세상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삶이다.

    이런 몽상을 하다가 신작 장편 ‘나가사키 파파’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게 쓴 소설일까.

    “신생 문학 출판사의 의뢰로 쓴 전작장편입니다. 적당한 전작료와 선인세를 받고 4개월가량 집중적으로 쓴 작품이지요.”

    헛폼과 무거움에 지친 세대

    ‘이른 봄, 얼음 밑을 흐르는 물’ 구효서
    이 소설은 젊은 여성을 화자로 했기에 남성 작가가 여성의 처지에서 글을 쓸 때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다. 해가 달의 처지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도 그 순간만은 성(性)을 떠나지 못하는 한계점 안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인간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고, 그 공감대가 화성과 금성에서 온 존재라는 성차이를 뛰어넘는다. 그러한 마음이 쓰고자 하는 이야기에 탄력성과 확장성을 부여한다.

    노인들의 생에 대한 탄력성, 확장성, 그리고 유연성은 성징이 퇴화한 후에 생기는 자연의 선물이기도 하다. 석양처럼 생을 진지하게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나이 탓’ 도 있을 것이다. 착한 사람 구효서도 이제 오십이 됐다.

    “나이 들면서부터랄까? 사회가 요구하는 ‘폼’이 점점 싫어지더군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권위적으로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작가로서는 끝이라는 생각 말이지요. 그래서 이번 소설은 의도적으로 경쾌하게 썼지요.”

    너무 폼을 잡으면 역겹다는 소리다. 마치 갑옷처럼 그 폼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우리 사회에는 많이 있다. 구효서는 우선 자신이라도 그 혐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우리 세대들 말이지요. 이제 오십 언저리에 있는 우리들은 그런 헛폼이랄까 무거움에 지쳐 있어요. 우리 근현대사, 즉 일제시대, 광복, 전쟁,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우리 선배들은 너무 무거운 시대를 짐수레를 끄는 당나귀처럼 살아왔지요. 이런 폼과 무거움이 문단이나 작가들의 태도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됐어요.”

    그런 시간 속에서 구효서는 고요하게 묻는다. “나는 어디에서 왔나.” 구효서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우리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런 물음표를 커피에 타 마시면서 밖을 보니 다시 아득하다. 저 아득한 곳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우리는 거기에서 왔다. 하지만 거기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내가 온 곳은 결국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창 넓은 곳에서 보면 그곳이 아련하게 보인다. 선명하게 보인다.

    “시골에서 칡뿌리 캐먹고 놀던 내가, 아주 잘 놀고 잘 살다가 어쩌다 서울로 올라와 공부한답시고 괜히 헛폼을 잡았던 세월이 보입니다. 문득 나도 모르게 그런 생활에 찌들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내가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지요.”

    이러한 각성은 문학에 대한 자성으로 이어진다. 문학에 대한 진지함을 빌미로 형식, 그 무거움을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달리다 오십이라는 나이가 되니, 이젠 그 형식과 무거움에서 자유스러워지자, 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제 거기에서 놓여나고 싶어요. 그리고 나가사키 파파를 썼지요.”

    그래서일까, 나는 ‘나가사키 파파’를 맨발로 풀밭을 산책하듯 가볍게 읽었다. 스물한 살의 여주인공이 일본에 살고 있다는 친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일본이 배경이고 일본인들이 등장하는 ‘왜색’ 짙은 소설이라는 풍문을 들었지만, 읽고 나니 왜색이든 미색이든 거기에는 색이 없었다. 단지 인간의 결이 아슬아슬하게 새겨져 있을 따름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왜색 운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공간, 시간, 인간이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만나고 헤어질 뿐이다.

    ‘나가사키 파파’

    구효서는 물었다. 왜색이 나쁜가, 빨갱이는 나쁜가, 그냥 나쁘다고만 하지 말고 사회적인 반성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그는 왜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편견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나쁜 걸 나쁘다고 하는데 뭐가 어려운가. 하지만 왜 나쁜지를 알아내기는 어렵다. 그는 왜색을 빌미로 반성을 요구한다. 이 반성은 남북 이데올로기와도 연결된다. 일본인을 ‘쪽바리’라 부르는 선입관을 변함없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일본 물건은 애용하는 사람들,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일본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모든 가면은 본질적으로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시비 좀 걸어줬으면 좋겠어요. 일본에 대한 묘한 저항감이 있는 우리 정서에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일본 소설 같은 ‘나가사키 파파’에 대해 시비를 걸어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없네요. 그냥 소설로 읽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른 봄, 얼음 밑을 흐르는 물’ 구효서
    하지만 누군가 만약 시비를 건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지요, 하하.”

    이 소설은 대한민국 국적의 스물한 살 한유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한유나가 취직한 나가사키 음식점 ‘넥스트 도어’에서 일하는 히데오, 오오카, 쓰쓰이, 기구치가 등장한다. 이러한 인물들 사이에서 한유나는 일본에 있는 친아버지를 찾는다. 20년 넘게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를 버리고 낳아준 아버지를 찾는 젊은 여자. 구효서는 물었다.

    “이게 도대체 뭐죠? 낳아준 아버지를 찾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웃기지 않나요?”

    소설에선 끝까지 두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데,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구효서의 속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반성이랄까, 여성과 남성, 아버지와 어머니, 일반인과 장애인, 메이저와 마이너에 대한 경계 허물기라고나 할까. 결국 아버지를 찾는 한 처녀의 정체성을 통해 잠시 나도 나를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라…, 나는 이 말만 들으면 아득하고 눈물이 난다.

    소멸과 화해

    이성복 시인의 시 구절이던가. ‘너는 내가 떨어뜨린 나뭇잎’이라는 아버지의 말. 시인은 그 시에서 아버지를 어떻게 그렸던가. 자식이 아비를 향해 욕설을 했던 것 같은데. 이성복 시인의 시에 빠져 있던 시절에 친구들끼리 넌 내가 떨어뜨린 나뭇잎이야, 라면서 놀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한유나와 같은 스무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아버지는 요즘 나에게 책으로 자주 찾아온다. 아버지에 대한 소설가는 단연 아사다 지로다. 공교롭게도 ‘나가사키 파파’와 아사다 지로의 소설 ‘슈산 보이’가 비슷한 시기에 출판됐다. 지로를 먼저 읽었고, 구효서를 나중에 읽었다. 마치 바다와 산을 동시에 다녀온 느낌이다. 너무나 다르지만, 같은 아버지를 다루고 있다. 슈산 보이에도 아버지는 없고, 나가사키에도 아버지는 없다. 두 소설의 배경은 다 일본이다. 하나는 한국 작가가 쓰고, 하나는 일본 작가가 쓴다.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구효서를 읽고 나선 밝고 가벼운 마음이 들었고, 지로를 읽고 나선 무섭고 슬펐다.

    이쯤에서 ‘나가사키 파파’의 속내를 들여다보자. 주인공은 20년간 키워준 양아버지를 버리고 (비록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긴 했지만) 자신을 낳아줬다는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간다.

    “성이나 이름이 뭔가 하는 거지요. 이름을 짓는 순간 차별하는 마음, 서로 무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과거 일본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있었지요. 관동 대지진 때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 말입니다. 이게 다 이름, 국적, 혈통이라는 유령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의 말미에는 이런 단락이 나온다. 이것을 이러한 인종주의의 소멸과 인간들의 화해로 보아도 될까.

    ‘열 살 때부터 죽어라 음식만 만들어왔으면서도 지겨운지 모르는 소심한 대꼬챙이 쓰쓰이, 쓰쓰이처럼 얻어맞고 왕따당했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웃다가 웃음이 굳어버린 어린 히데오. 사랑이 뭐라고 30년 넘는 세월을 오로지 한 여성 곁에만 있어온 헐헐헐헐 오오카, 여리디여려 꺾일 것만 같은 숙주나물 사토,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짓지만 죽어도 그곳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아이코, 생기는 것 하나 없이 작은 스쿠터에 물감을 싣고 세상의 온 벽을 찾아 그리고 칠하기만 하는 떠돌이 기구치, 뒤늦게 아버지의 절망에 사로잡혀 사무치는 저 못 말리는 미루 언니…. 그들을 나는 식구라고 말한 걸까. 서로를 조금도 구속하지 않는 그들을, 무슨 유대감으로 식구라 할까.’

    이 독백은 이 소설의 큰 마침표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역시 낳아준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사실. 그 때 한유나는 비로소 ‘아버지’라고 그 사람을 부르고 한 인간을 받아들인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한유나를 통해 구효서는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낡고 거친 감정

    ‘이른 봄, 얼음 밑을 흐르는 물’ 구효서
    이 소설은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씌었지만 결국 한국인들 이야기다. 작가가 한국인이어서 그런 것이다. 등장인물이 일본인들 투성이지만, 결국 그들은 한국 여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목일 뿐이다. 그 길목을 나오면 한국도 일본도 아닌 구효서라는 작가의 세계가 있다. 그 무정부에서 나는 편안하고 즐거웠다.

    하지만 이런 혐의점도 생겼다. 우리 작가들이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인간에 대해 쓰면 어떠했을까. 문학에 대한 논쟁은 부질없다. 읽고 나서 감동을 받았느냐, 세상이 좀 새롭게 보이느냐,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기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요즘 일본 소설이 많이 출판되고 잘 팔린다. 그러니 독자나 작가들이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면서도 괜히 겉으로는 비판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일본과 북한 같은 나라에 대해 지금도 어떤 이들은 지극히 유아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이유가 뭘까.

    “그 대상이 정말 나빠서라기보다는, 우리 공동체의 질서유지를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나 왜색 증오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위로는 북한이고, 아래로는 일본인데, 그걸 나쁘다고 하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지. 이러한 비뚤어진 감정들을 우리 후세들에게는 물려줄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문학이나 문화는 정부가 이끌어가는 정책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빈약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낡고 거친 감정부터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역시 낡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6·25전쟁을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대에 난 전쟁으로 아는 아이들도 있고, 대학에 경찰이 진입한 게 정말이었느냐고 물어보는 대학생들도 있다. 이제는 많이 변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십이 된 구효서의 기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일본 작가들, 만만치 않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 우리 작가들보다 더 크고 넓은 층위를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한 개인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질까, 라는 의구심은 가시지 않는다. 이미 우리나라의 많은 여성이 ‘배용준’보다는 오다기리 조를 더 좋아한다. 오다기리 조의 사진을 책상에 붙여놓은 한 여성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여성은 이런 말을 했다.

    “더 잘생겼고, 연기도 더 잘해요.”

    대답이 아주 쿨하다. 일본인이 아니라, 오다기리 조가 더 멋지다는 생각은 멋지다. 하긴 내가 봐도 그렇다. 마음속에선 조선인으로서 살짝 질투가 나긴 했지만, 언젠가 구효서 소설이 아사다 지로나 하루키보다 더 잘생겼다고 일본인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 그런 거다. 중요한 건, 역시 작품이다. 번잡스러운 생각을 할 시간에 쓰고 또 쓰고 참회하고 반성할 일이다.

    구효서는 순혈주의에 대한 혐의도 두고 있었다. 5000년 단일민족의 자부심에 대한 혐의점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시각으로는 현재의 우리 사회를 바로 볼 수 없다. 외국인 근로자의 아이들은 어쩔 것인가. 지금 농촌에 내려가면 혼혈 아이가 순혈 아이보다 더 많다고도 한다. 프랑스의 빈민폭동은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교육자이자 시인인 도종환 선생도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

    자연에서 다 배우다

    구효서는 자신을 촌놈이라고 소개했다. 아직도 촌이 좋다는 이야기다. 강화도 하접면 창후리가 고향이다. 창후리는 강화도에 놀러 갔다가 한 번쯤은 지나친 지명이다. 지금은 옛 모습을 잃었지만 구효서가 어린 시절인 40년 전쯤에는 조선시대 농사짓던 방식 그대로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박완서 선생의 작품 중에서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에 갔을까’라는 책이 있지요. 정말 다 어디로 갔을까 싶어요.”

    구효서 내면 깊숙이 이 시골 정서가 있다. 시골에서 14년 정도를 살았는데, 그때의 추억만으로도 140년은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고향에 대한 생각을 하면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가 나온다. 몸과 마음에 깊숙이 배어 있는 정서의 외피에는 역시 유신 독재시대의 구호들이 벽보처럼 붙어 있었다.

    ‘이른 봄, 얼음 밑을 흐르는 물’ 구효서
    “큰 건물에는 늘 방공방첩 구호가 붙어 있었지요.”

    그 반공의 산과 들에 아침에 일어나면 하얗게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북에서 대남 선전용으로 살포한 ‘삐라’가 널려 있었다. 산과 들에 하얗게 내린 삐라를 거두어 나무토막처럼 아궁이에 태워 사용할 정도였다.

    이 삐라가 세상에 대한 촌사람들의 정보였다. 고향에 라디오나 TV는 없었지만, 북에서 보내오는 삐라를 통해서 ‘정인숙 사건’이나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웃었다. 작가로 살든 아니든 정말 중요한 것을 구효서는 시골에서 배웠다. 그 고향을 기억하면서 흐뭇해하는 작가의 맑은 표정이 보기 좋았다.

    환한 추억이 얼굴을 밝게 만들었다. 당시 학교엔 도서관도 따로 없었다. 복도를 막아 만든 자료실에 동화책이 있었지만, 아이들이며 마을이 책 읽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구효서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놀기 좋아하는 아이였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면서 놀고 놀고 또 놀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 그의 자전적인 산문집인 ‘인생은 지나간다’를 본다.

    ‘나는 책이 많은 내 아이들보다 더 많은 걸 안다. 아이들은 작약과 모란과 양귀비를 구분할 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제비꽃 중에도 서울제비꽃과 낚시제비꽃과 콩제비꽃, 아욱제비꽃, 왜주걱제비꽃, 남산제비꽃, 호접제비꽃, 동근잎제비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잘도 구분한다.’

    “어머니가 마흔에 절 나았어요. 늦둥이로 자라서 좋은 점은 부모님이 일을 별로 시키지 않는다는 거지요. 하지만 동네 아이들과 소 먹이고, 꼴 베는 일은 어린아이들에겐 노동이면서 동시에 놀이였지요. 아버지가 아이의 몸에 맞는 작은 지게를 만들어준 적이 있는데, 거기에 볏짚 따위를 지고 어른들을 따라다니던 기억이 나네요.”

    말뚝 모내기

    모내기철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조리 동원됐다고 한다. 그는 ‘말뚝 모내기’를 아느냐고 물었다. 모내기 자체를 잘 모르는 내가 말뚝 모내기를 알 리 없다. 말뚝으로 논에 구멍을 내고 모를 내는 방식이란다.

    소설가들이 소설 쓰는 일도 이 말뚝 모내기를 닮았다. 어느 누가 보드라운 흙과 찰랑거리는 물이 고여 있는 논에 모를 내듯 글을 쓸까 싶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말뚝으로 구멍을 내고 모를 내듯이, 한 자 한 자 독자의 마음에 모심듯 글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소설가다.

    당시 마을 전봇대에 ‘건답직파’라는 글귀가 써 있었다고 했다. 비가 오지 않아 마른 논에 직접 파종을 하라는 뜻으로 비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는 농부들의 치열한 정신이다. 어린 시절에 구효서는 건답직파를 자주 했다고 한다.

    봄이 와 산에 올라가면 한눈에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구별할 능력이 있다고 했다. 하긴 제비꽃을 그렇게 세세하게 구분할 정도라면 나물과 버섯을 구별하는 능력은 더할 것이다.

    “아마도 먹을 것이 없어서인 것 같기도 해요. 요즘 아이들이야 먹을 것이 차고 넘치지만, 그 시절 시골에서는 산과 들에서 군것질거리를 직접 해결해야 했지요.”

    산딸기, 싱아, 삐리, 찔레, 칡, 개암을 비롯한 산에 난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것들이야 그냥 따서 먹으면 되는데 칡은 달랐다. 거대한 칡을 캐려면 아이들이 칡뿌리 앞에 모여 간단한 회의를 거쳐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캐야 칡뿌리를 들어낼 수 있는지 나름 수학적인, 물리학적인 방법을 연구한다. 그 와중에 의견이 달라 다투기도 한다. 그리고 조율하고 합의한 다음에 칡 캐기 작업에 들어간다.

    그 아이들의 주머니에는 작은 칼이 있었다고 했다. 시장에서 산 것이 아니라 낫의 끄트머리 쇳조각을 나무에 대고 헝겊으로 동여맨 간이 주머니칼은 아이들의 필수품이었다. 그것으로 나물도 캐고 칡도 캔다. 지금 아이들은 연필이나 사과도 칼로 잘 깎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아이들은 이러한 식물 말고도 뱀과 개구리 껍질까지 그 칼로 벗겨 먹었다. 식물에서 얻을 수 없는 동물성 단백질은 주로 뱀과 개구리를 통해 얻었다.

    “그때 아이들의 손은 무척 여물었어요. 새총이나 돛단배 같은 장난감도 직접 만들어서 놀았으니까요. 그 아이들의 개암같이 단단하고 여문 손길을 나도 가졌고, 지금 그 손으로 소설을 쓰고 있네요. 돈과 먹을 게 부족했지만, 그 부족함이 뭔가를 만들게 한 것 같기도 하고.”

    미꾸라지를 잡을 때는 논 근처에 있는 웅덩이를 찾았다. 그 웅덩이의 진흙을 퍼내고 숨어 있는 미꾸라지를 잡아 국을 끓여 먹었다. 미꾸라지를 통째로 삶아내는 추어탕을 먹었으니 한참 자라는 아이들의 기운은 펄펄 살았다. 경칩 이전의 개구리를 ‘입이 덜 떨어진 개구리’라고 불렀다 한다. 겨울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기에 경칩 이전의 개구리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그래서 먹이도 먹지 않아 내장이 깨끗해서 잡으면 그대로 먹었다고 한다. 경칩 이후의 개구리는 파리와 같은 먹이를 먹기에 주로 뒷다리를 먹었다고 한다.

    “개구리를 잡아 허리를 밟고 다리 한쪽을 잡고선 천천히 잡아당기면 껍질이 홀라당 벗겨지지요. 새하얀 개구리 다리를 불에 구우면 개구리 다리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아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이 느껴지지요. 생명감인데, 그 장면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잔인성은 한 동물과 한 동물의 잔인성입니다. 아이라는 동물과 개구리라는 동물 사이에 벌어지는 잔인성이지요. 거기에 인격을 부여할 필요는 없지요. 우리는 먹어야 했으니까.”

    입이 덜 떨어진 개구리

    그것뿐만 아니다. 시쳇말로 ‘초딩’들이 닭서리를 해서 닭 목을 따 구워 먹었으니, 이건 정말 보통 간이 큰 게 아니다 싶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구효서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장미 정원이나 예쁜 옆집 여자아이, 피아노, 아이스크림, 그리고 한없이 펼쳐진 바다 정도다. 구효서에 비한다면 추상적이고 간지러운 추억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천천히 듣고, 탁자에 떨어지는 햇살을 보니 그런 공부가 또 어디 있나 싶다. 그때 마음과 몸에 새겨진 결이 바로 오늘 구효서를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구효서의 어린 시절 14년은 앞으로 140년의 문학적 자양분이 될 것 같다.

    “그런 시골이 제가 서울로 올라올 즈음에 급격하게 변하더군요. 새마을운동 탓도 있고, 지금은 그 모습을 찾기 힘들지요. 아득한 옛일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무명을 짜는 어머니가 있고, 나무 하러 다니던 아이들이 있고, 새벽에 아궁이에 불을 때던 따뜻한 공간이 있지요. 고향은 저의 모성인 셈이지요. 지금 생각하니 그 시절처럼 훌륭하고 완벽한 책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추억은 소설을 쓸 때에 자연스럽게 손끝에서 배어나온다. 식물도감을 찾지 않아도 우리 산하의 꽃들이 저절로 원고지에 피어오른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쓴다. 그때의 정서가 삶의 실용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구효서의 대단한 재산이고 보물이다.

    “저와 가족들이 살아온 지난했던 시절이지요. 누나가 많아서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런 기억들이 문득문득 소설이 되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언제 소설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을까 싶다. 책을 접하지 않고 문학의 길에 들어선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이 바로 소설의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쟁 체험과도 비슷하다. 젊은이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면 그곳에서 문학 공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사람을 보고, 전쟁을 봤을 것이다.

    잘 여문 손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이나, 고 박영한 선생의 ‘머나먼 쏭바강’ 역시 한 사람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그 텍스트를 그대로 종이 위에 옮긴 것이다. 하긴 황석영 선생은 총알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공포 속에서 이곳에서 나를 살려준다면 정말 열심히 소설 쓰겠다고 온갖 신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구효서도 문학에 대해 관심을 조금 가졌다. 하지만 문학보다는 미술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했다. 시각이 발달해서인지 눈썰미가 있어 한번 본 것은 그대로 그려내곤 했다. 그림 그리기를 통해 화가나 만화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니 훗날 우리는 화가 구효서의 전시회에 초대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은 늘 불만이지만, 그림은 그렇지 않아요.”

    그건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프로 작가로서 소설을 대하는 태도와 아마추어로서 그림을 그리는 자세는 다르다.

    그의 진지함은 소걸음같이 뚜벅뚜벅 걸어온 문학에 있다.

    “오랫동안 소설을 썼는데 늘 아쉬워요. 천재가 아니라서 그런 거죠. 천재들은 금방 이뤄내는 걸, 저 같은 둔재는 뭐 하나 이루려면 평생 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몰두하고 매진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있어요. 저 자신을 그렇게 위로합니다. 간혹 이런 생각으로 저를 위안하기도 합니다. 아마 내가 그림을 그렸으면 일찍 성공하고 망했을 것이다…, 하하.”

    그에겐 잘 여문 손이 있다. 어린 시절 칼을 지니고 산과 들을 헤매던 바로 그 손의 힘이 문학의 기운을 받은 것은 고교 2학년부터다. 이른바 작품으로서의 문학, 그것은 한문선생님이 강의하던 작문시간에 나오기 시작했다. 장작불에 구워지는 개구리 뒷다리의 경련이다.

    “선생님이 과제로 원고지 15매 써오라고 하면 150매를 썼고, 시 1편을 쓰라고 하면 5편을 쓰던 시절이었어요. 작문시간은 저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하지만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학과공부는 소원했고 작문에 몰두하기 시작했어요.”

    신춘문예 열병

    이 습작기에 700매짜리 소설도 쓴다. 문예반이나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지 않고 혼자서 놀기 좋아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문예반과 비문예반이 있었다고 한다. 구효서는 비문예반 출신인데 비슷한 성향의 아이가 7명 모여 시동인지인 ‘난필지변’을 만들었다.

    난필지변, 괴발개발 쓴 글에 대한 변명이라는 뜻인데, 아이들 생각치고는 괜찮다. 그리고 동인들은 서로 호를 지어 불러줬다고 한다. 구효서는 ‘빙수’라는 호를 얻었다. ‘조춘빙하수(이른 봄 얼음 밑에 물이 흐르다)’에서 따온 것이다. 빙수 구효서는 이 시절 촌스러운 문학청년들의 통과의례인 천재시인 이상의 세례를 받게 된다.

    “시인 이상은 문학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는데,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상의 시, 산문, 전집을 읽으면서 흠뻑 빠졌죠. 친구 어머니가 이상의 독자였지요. 얼마나 멋있게 보였는지 몰라요. 사춘기 시절 친구 어머니를 속으로 사모하기도 했습니다.”

    1978년에 군대에 갔다. 병영시인 시절이다. 중대원들에게 구식 인쇄기계인 ‘가리방’으로 시집을 만들어줄 정도였다. 이제는 문학이라는 늪에 빠져 든 것이다.

    “군대에서 초병으로 근무하면서 쓴 시들이 있었어요. 총 한 자루 들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면서 쓴 시들이지요. 제대할 때 그 시집 한 권만 들고 나왔습니다.”

    대학에서 구효서는 ‘임자’를 만난다. 시인 김요섭 선생의 시간에 ‘얼굴’에 대한 글쓰기를 과제로 내줬는데, 구효서는 원고지에 얼굴이라는 글자만을 반복해서 15매를 채워서 제출했다고 한다. 건방지고 어이없는 행동이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짧은 수필을 한 편 제출했는데, 어느 날 선생이 구효서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거, 소설로 다시 써보라.”

    작가가 되려는 생각은 아직 여물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선생의 권유로 쓴 단편소설이 교지에 실렸고, 그때부터 선생이 쓰라면 쓰는 착한 학생이 되었다. 쓴 소설들은 신문에 연재가 되기도 했다.

    뒤돌아보면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은 때가 있다. 구효서는 자신의 소설이 활자화되면서부터 슬슬 작가로서의 꿈을 꾸게 됐고,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했다. 해마다 겨울철이 되면 신춘문예 병을 앓았고, 당선이 안 될 거라고 마음을 다스렸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편물이나 전화를 기다렸다.

    막상 등단한다고 해도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와는 다른 게 문학고시다. 문단의 등단은 어린아이를 거친 벌판에 풀어놓는 것이다. 여러 번 낙선하는 추운 겨울을 보내고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운영하던 ‘한국문학’지에 취직해 근무하면서 이름만 알고 있던 작가들을 만났고, 그해 겨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최종심에 오른 두 편 중에 떨어진 작품이 바로 이순원의 작품이다. 이들은 이러한 악연으로 만나 지금까지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다.

    절망은 사람을 단련시킨다

    “이상한 일이지요. 등단하고 나니까 두려움이 몰려오면서, 그동안 내가 소설공부를 안 한 것 같다는 성찰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뒤늦게 소설작법이라는 책도 사서 볼 정도였지요. 그러니까 진짜 작가공부는 등단하고 나서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구효서는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디’로 문단에 이름을 걸었다. 그리고 20년 넘는 세월을 걸어왔다. 그동안 창작집 ‘노을은 다시 뜨는가’ ‘시계가 걸려 있던 자리’ 등과 장편소설 ‘라디오 라디오’ 등을 착하고 성실하게 써내어, 고정 독자를 확보한 전업 작가로 살고 있다.

    1994년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고 10년 동안 잠잠하다가, 2005년에는 이효석문학상, 2006년에는 황순원문학상, 2007년에는 한무숙문학상과 허균문학상을 수상했다. 문단이나 독자에게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이다.

    이 정도 경력이면 어깨와 목에 힘이 들어갈 만하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를 할 때, 먼저 헛폼 잡는 짓을 경계하는 말로 시작했다. 경직되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작가에 비해 조용하고 덜 유명한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문단이라지만 그런대로 가십거리가 있다. 구효서는 그런 자리에서 조용히 비켜나 있다. 요란한 베스트셀러도 없다. 이혼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작가가 좋다. 이런 작가는 인간에 대한 생각이 깊다. 그는 외로움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1988년에 등단했으니 이제 20년의 세월을 문단의 변두리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점점 드는 생각이, 그 변두리마저 이제는 떠나고 싶다.

    조용하고 점잖은 동네인데도 그렇다. 인간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명분이나 이름만 가지고 잔대가리 굴리는 인간들도 꼴보기 싫고, 작품이 무슨 펀드 투자나 되는 것처럼 수상경력이나 판매부수로 폼 잡고 건방지게 구는 인간들도 신물난다. 문학하는 인간들이 정치인처럼 보일 때 나는 그만 절망한다. 하지만 그 절망은 사람을 단련시킨다. 절망의 자리가 웅덩이처럼 깊어지면 거기엔 구효서가 어린 시절에 잡아먹었다는 미꾸라지라도 살 것이다.

    뿌리와 같은 존재

    구효서는 요즘 자택과 가까운 곳에 있는 남양주 작업실에서 4년째 지내고 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에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방송매체에는 자주 등장한다. 어찌 보면 혼자 숨어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방송을 한다는 게 어울리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일로 보면 문제는 다르다. 방송이나 강의를 일로 하는 것이다. 일은 신성하다.

    구효서는 말솜씨가 좋다. 그는 문화, 책 관련 방송을 진행한 방송인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이 득실거리는 방송가에서 진행자로 살아남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방송 쪽에서 보기에 진행솜씨도 좋고, 얼굴도 되고, 문인으로서의 명성이 있으니 필요한 인물이기도 할 것이다. 요즘엔 어떤 방송을 하나 싶어 물어봤더니 방송을 아예 접었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 방송을 하지 않을 것 같다.

    “길든다고나 할까. 방송을 하면 일정한 수입이 생기는데 말이죠.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기다리게 돼요. 월급처럼 들어오는 돈이 있으니 아무래도 긴장감이 떨어지고요. 그러다 보면 작품을 대하는 태도도 게을러져요. 그리고 방송을 하다 보니까 묘하게 엮이는 게 있어요. 그쪽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난 방송 체질이 아니다’였지요. 이번 봄방송 개편 철에 두 군데에서 제의가 들어왔는데 다 거절했어요.”

    지난달에 인터뷰한 조경란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도 작품을 쓰기 위해서 방송 출연을 거절했다고 했다. 작가는 뿌리와 같은 존재이기에 활짝 핀 꽃과 같이 화려한 방송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다음 약속이 있다면서 일어나는 구효서. 작업실에서 한번 나올 때 이런저런 약속을 잡아둔 모양이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밖으로 나돌면 한 줄 한 줄 문장은 줄어든다. 설령 한 자를 쓰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게 작가의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구효서는 다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해줬다.

    다음 작품은 음악에 대한 소설이 나올 것 같다. 시공간이 넓고 긴 소설이다. 바로크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서사구조를 꾸미고 있었다. 전문자료도 많이 찾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던지는 게, 두꺼운 소설을 쓸 것 같다.

    그날 저녁에 나는 언덕길에 떨어져 있던 목련 나뭇가지를 차에 실었다. 이제 막 꽃망울이 돋아나는 모습을 보니 땅에 심든, 화분에 담든 해야겠다. 저렇게 찬란한 생명이 쓰레기처럼 길거리에 뒹굴게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목련 나뭇가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둠을 배경으로 환하게 핀 밤 목련을 보았다. 별도 없는 밤하늘이 찬란하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