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호

철학의 새 천년,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되다

“도망쳐라, 동지여! 낡은 세계가 너를 뒤쫓고 있다”

  • 정재영 철학 저술가 seoulforum@naver.com

    입력2008-05-08 12:0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68운동 40돌을 맞아 전세계적으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상상력에 권력을’ ‘지루함은 반혁명이다’ ‘행복이야말로 새로운 이념이다’ 같은 발랄한 구호를 들고 나온 68운동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그 가치를 발하고 있다. 또한 생태 노동 문화 여성 등 다양한 영역의 사회운동이 더욱 활발해질 수 있는 토대가 됐다. 68세대는 “TV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한때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폭스바겐도 갖고 있지만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그런 것들을 위해 싸우던 삶이 쓰레기 같다고도 했다. 그들은 인류의 행복과 진보를 약속한 근대라는 이름의 신화에 돌을 던졌다. 그러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 패러다임을 낳았다.
    철학의 새 천년,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되다

    독일 베를린대 교정에 나붙은 68운동 40주년 기념 포스터와 헤겔 동상. 위쪽은 68운동 당시 파리 시내 중심가의 시위 현장.

    낭테르 대학 운동장에 차를 세운다. 이곳이 파리 철학여행의 출발점이다. 낭테르 대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 파리 서부 낭테르라는 곳에 있다. 지금의 공식 명칭은 ‘파리 10대학’.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낭테르 대학이라 부른다. 학교 옆 전철역 이름도 ‘낭테르 대학’이다.

    왜 여기에서 여행을 시작하는가. 현대 사회의 흐름을 바꾼 하나의 사건이 이 대학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세계를 한 바퀴 돈 1968년 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낭테르 대학이다.

    큰 기대는 하지 말자. 솔직하게 말해서 낭테르 대학에는 볼거리가 별로 없다. 명성이 높은 곳도 아니고, 역사가 오랜 대학도 아니다. 캠퍼스가 아름답지도 않다. 과장을 좀 섞자면, 파리에서 이렇게 못생긴 곳도 드물다. 본때 없이 큰 운동장과 공장 같은 학교 건물이 전부다. 이 대학 안내 책자를 보면, 자랑거리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이 두세 가지쯤 된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대학이라는 것이 그 하나다.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을 갖고 있으며, 스포츠 시설이 뛰어나다는 것이 그 다음쯤 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학의 자랑거리감은 아닌 것 같다.

    운동장에서 돌멩이를 하나 집어서 힘껏 던져본다. 포물선 궤적을 그리며 떨어진다. 1968년 봄, 이 운동장에는 돌멩이와 최루탄이 난무했다.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학교를 찾은 교육부 장관은 ‘올림픽 규격 수영장’에 내던져졌다. 68운동의 시작이었다. 경찰 당국이 낭테르 대학을 봉쇄하자 시위대는 파리 시내로 무대를 옮겼다. 지금은 파리4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소르본 대학이 새로운 시위 본부가 됐다. 노동자들이 시위에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당시 기록을 보면 100만명을 넘는 숫자라고 적혀 있다.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쌓고 투석전을 벌였다. 지금은 아주 익숙한 장면이다. 1980년대 치열한 민주화 가두시위를 경험한 우리 눈으로 보면 더 그렇다.

    가벼운 의문이 고개를 든다. 이 평범한 시위가 왜 그렇게 유명해졌는가. 도대체 이 시위가 어떻게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말인가.



    ‘서른 넘은 사람과는 얘기하지 말라’

    68운동은 이전의 사회운동 또는 사회혁명과는 달리 그 주장이 선명하지 않다. 시위에 등장한 구호는 어지럽고 산만하다. ‘자유 평등 박애’로 요약되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공화국 건설’을 요구한 1848년 유럽 시민혁명, ‘자본주의 타도와 사회주의 건설’로 정리되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분명한 주장을 68운동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그 무엇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점거한다.” “지루함은 반혁명이다.” “상상력에 권력을” “행복은 살 수 없다. 그것을 훔쳐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행복이야말로 새로운 이념이다.”…. 68시위에 등장한 구호 몇 가지다. 이것이 시위 구호인가. 마치 요즈음 TV 광고 카피 같지 않은가.

    물론 엄숙한 이념이 없어도, 체계화된 주장이 없어도 시위는 일어날 수 있다. 때로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배고픔에 굶주릴 때 특히 그렇다. 아니, 대부분의 혁명은 굶주림에서 시작한다. “빵을 달라”는 절박한 욕구보다 더 큰 폭발력을 가진 사회적 힘은 없다. 그러나 68운동은 굶주림과는 거리가 멀다. 68운동에 참여한 한 노동자의 주장은 이를 웅변한다.

    철학의 새 천년,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되다

    68운동 당시 시위대는 혁명가 체 게바라(사진)를 연호했다.

    “1936년 이후 나는 임금 인상을 위해 투쟁했다. 내 아버지도 임금 인상을 위해 투쟁했다. 이제 나는 TV와 냉장고, 그리고 폭스바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 보스와는 타협하지 말라. 보스를 추방하라.”

    그렇다. 68운동에서는 거룩한 이념만 없는 것이 아니라, 빵을 달라는 눈물겨운 이야기도 없다. 그래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는 1789년 대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쓴웃음 자아내는 이야기도, 1848년 시민혁명을 시대 배경으로 한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처럼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살이를 한 가슴 아픈 사연도 1968년의 드라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68시위의 불을 점화한 것은 빵이 아니었다. 시위의 불씨를 지핀 것은 엉뚱하게도 남녀 성별로 나눠진 학생 기숙사를 없애라는 요구였다.

    철부지들. 이건 미쳤군. 기성세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낭테르 대학은 68운동 이후 ‘미친 낭테르(Nanterre, la folle)’라는 별칭이 붙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 대학생들과 배부른 노동자들이 어우러진 난장판, 이것이 기성세대의 눈에 비친 68운동이었다.

    시위대는 거꾸로 생각했다. 정말 미친 것은 낡은 세계의 틀 속에 갇혀, 그 하찮은 체제 가치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성세대 아닌가. 그래서 시위대는 외쳤다. “나이 서른이 넘은 사람과는 이야기하지도 말라.” “도망쳐라, 동지여! 낡은 세계가 너를 뒤쫓고 있다.”

    시위대는 “체”(체 게바라)와 “마오”(마오쩌둥)를 연호했다. “체 체 체” “마오 마오 마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남미 혁명에 온몸을 던진 체 게바라, 중국 문화혁명을 기획한 마오쩌둥 등이 68운동의 아이콘이었다. ‘빨강 낭테르(Nanterre, la rouge)’라는 또 하나의 형용어가 낭테르 대학에 붙게 됐다. 여기서 빨강은 공산주의를 뜻한다.

    68운동이 좌파혁명의 색조를 띤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좌파 이데올로기를 신념체계로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좌파가 가진 저항정신을 사랑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마치 체 게바라의 형형한 눈빛과 불꽃같은 이미지가 좋아서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요즈음 젊은이들처럼.

    68시위에는 이런 구호도 있다. “공산당을 떠날 때는 당신이 공산당에 왔을 때처럼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 뒤 떠나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루초 경향의 마르크시스트다.” 전자는 공산당(코뮤니스트 파티)을 별장 파티에 비유해서 패러디한 것이고, 후자는 공산당 선언을 한 카를 마르크스가 아닌 뉴욕 출신의 코미디언 그루초 마르크스를 등장시켜 마르크시즘을 비튼 것이다. 시위 구호가 아니라 마치 한바탕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68운동에 우호적 시각을 가진 앙드레 글뤼크만은 68운동을 신좌파운동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시위대는 낡은 세계에 대한 ‘이의제기’의 표시로 돌멩이를 던졌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문제는 그 돌멩이가 정확하게 낡은 세계의 무엇을 겨냥했는가 하는 점이다.

    ‘무늬만 민주주의’ 겨냥

    모든 사회운동은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 68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68운동같이 세계를 한 바퀴 돈 운동이라면 더 복합적이다. 단일 코드로 움직인 사회운동이었다면 세계적 반향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68운동을 권위주의에 저항한 반정부운동으로 해석하는 흐름이 있다. 사실이다. 시위대의 돌멩이는 권위주의적 드골 정부를 겨냥했다. 프랑스의 전쟁 영웅 드골은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드골은 이듬해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야 했다.

    이런 해석은 독일과 미국의 68운동에서 더 설득력을 갖는다.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처음으로 학생들이 가두시위에 나섰다는 독일 68운동은 권위주의 정부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의 성격이 강하다. 독일에서는 나치 독일 잔재의 청산, 베트남전쟁 반대, 정부 통제의 언론 조작 철폐, 대학 개혁 등이 시위의 전면에 강하게 부각됐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반전 운동과 함께 그해 4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로 대학 캠퍼스가 이미 들끓고 있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불어온 바람은 이 뜨거운 가마솥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철학의 새 천년,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되다

    68운동의 진원지인 파리 낭테르 대학 교정.

    동유럽으로 가면 민주화 운동 성격이 더 뚜렷해진다. 서구 언론의 보도로 널리 알려진 체코 ‘프라하의 봄’,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하나였던 크로아티아에서 피어난 ‘크로아티아의 봄’은 전체주의 성격을 띤 공산 정부에 저항한 동구 68 민주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멕시코에서는 ‘틀라텔레코(Tlatelel- co)의 밤’으로 불리는 비극이 일어났다. 집권 제도혁명당 군부가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 시위대에 총을 난사한 것이다. 1968년 멕시코 하계 올림픽 개막 열흘 전이었다. 정부 발표는 4명 사망에 20명 부상. 수십년 동안 이 학살은 쉬쉬하며 입에서 입으로만 떠돌아다녔다. 소문에 따르면 사망자만 수천명에 이른다고 했다. 뒤늦게 밝혀진 사망자 수는 200명에서 300명 사이. 마치 1980년 광주를 보는 듯하다.

    영국 역사학자 홉스봄이 지적한 대로 68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세계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회 격변이었다. 그 세계사적 격변의 원동력은 좌와 우의 이념을 떠나 권위주의 또는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 요구였다. 이 점에서 68운동은 무늬뿐인 민주주의로 위장한 낡은 세계에 돌멩이를 던진 것이다. 사이비 민주주의의 가면을 폭로한 것이다. 그 낡은 세계에서 소외된 흑인, 여성, 그리고 그 밖의 사회적 소수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점에서 68운동은 이전에 일어난 사회운동과 다르지 않다. 특히 정치적 맥락에서 볼 때, 68운동은 과거와의 단절이 발견되지 않는다. 인간 존엄에 기초해서 사회적 소수의 인권을 외쳤고,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폭로했다. 그리고 강대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도사린 제국주의적 성향을 고발했다. 최루탄과 곤봉, 심지어 총탄까지 동원된 벌거벗은 폭력 앞에 시위는 진압됐다.

    ‘근대 설계도’ 키워드는 이성

    시위가 멈춘 지 한 세대가 흐른 지금, 역사의 눈으로 되돌아보면 승자와 패자의 명암은 바뀌었다. 권위주의 정부는 이미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탱크를 앞세워 ‘프라하의 봄’을 짓밟은 소련-동구 공산주의 블록은 지난 세기말 맥없이 무너졌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었고 베트남은 통일됐다.

    여성과 흑인, 그리고 그 밖의 사회적 소수에 대한 권리는 68운동을 계기로 크게 신장됐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소외됐던 제3세계의 비중이 커진 것도 68운동 이후의 일이다. 완전한 성공은 아니지만, 68운동이 제기한 기존 사회에 대한 이의제기는 충분히 받아들여진 셈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68운동 이야기는 끝인가. 아니다.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아니,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이다. 한 시대가 종막을 고하고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징후로서의 68운동과 그 후폭풍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이 우리가 파리 철학여행을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간추려서 미리 말하자면, 그것은 ‘근대’ 또는 ‘근대성(modernity)’으로도 불리는 역사의 한 시대가 마감되고, 아직은 무엇이라 규정하기 힘든, 그래서 편의상 ‘근대 이후에 온 것(postmodernity)’이라고 부르는 새 시대의 징후가 68운동을 계기로 포착됐다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우리는 서구 근대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계몽주의 등 그 성격을 달리하는 사회문화운동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사회 교과서를 통해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가 근대를 지탱하는 두 가지 축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이 근대 시기에 유럽인들은 시민혁명을 통해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웠다. 생산력 증대를 위한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피와 땀의 산물이었다. 유럽에서 시작한 근대는 20세기 들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세기에는 근대화와 산업화가 국가 경영의 화두였다.

    이처럼 근대는 그 시작과 성격이 분명하다. 그러면 근대의 끝은 어디인가. 어느 지점이 근대의 종착역인가. 근대를 설계한 기획자들은 그 마지막 단계를 상정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근대의 설계도는 하얀 백지(tabula rasa)에서 시작한다. 이전 시대를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백지로 만든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근대는 그 이전 시대인 중세를 철저히 부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근대의 눈으로 본 중세는 깜깜한 암흑의 시대다. 그 암흑을 벗기고 새로 태어난 근대는 새로운 계몽의 시대다. 그러나 근대를 설계한 기획자들은 근대의 설계도가 근대 이후의 시대에 또 하나의 백지 취급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아예 상정하지 않았다.

    철학의 새 천년,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되다

    68세대에 큰 영향을 준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을 하나로 묶어버렸다.

    근대 설계도에서 키워드는 단연 이성이다. 이성은 진리를 밝히는 빛으로 간주됐다. 이 빛은 세계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다고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생각했다. 이 시기에 탄생한 근대 과학이 이런 믿음을 가속화했다. 이성의 빛이 자연을 비출 때 자연과학이 태어난 것처럼 이성의 빛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비출 때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의 모든 비밀은 밝혀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역사 발전과 인류의 행복을 약속한 이 야심찬 기획은 흔히 ‘근대 프로젝트(Moder- nity Project)’, 또는 ‘계몽 프로젝트(Enlightenment Project)’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과연 근대 프로젝트는 성공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근대 프로젝트의 결과물로서 지금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내려야 한다. 여러분은 과학이 세계의 비밀을 풀었다고 생각하는가. 과학이 인간의 비밀을 얼마나 밝혀냈다고 보는가. 인류 사회는 과연 진보했는가. 그리고 지금 당신은 행복한가.

    1968년 5월 파리로 되돌아가자. 68세대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다. 집에는 TV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한때 그렇게 갖고 싶었던 폭스바겐 자동차도 갖고 있지만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그런 것들을 위해 싸웠던 삶이 쓰레기 같다고도 했다.

    “책은 덜 읽고, 삶은 더 생생하게”

    1960년대 서구 사회는 높은 경제성장률과 낮은 실업률을 기록한 황금 시기였다. 소득은 크게 늘었고, 사회는 안정기에 들어섰다. 대학 문이 넓어지고 대학생 수도 크게 늘었다. 68세대는 근대 프로젝트의 혜택을 크게 받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낭테르 대학 학생들이 만약 한 세대 전에 태어났다면 그들 중 절반이 넘는 사람은 대학에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전후 프랑스 대학생 숫자는 3배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학생들은 “책은 덜 읽고, 삶은 더 생생하게”를 구호로 외쳤다. 근대 프로젝트 설계자들과는 달리 학생들은 앎과 삶이 상관관계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경제 상황은 크게 좋아졌다. 특히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독일의 경제부흥은 눈부셨다. 그러나 독일 68세대는 그것을 역사의 진보로 보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잔재를 덮어버린 대가로 얻은 역사의 퇴행으로 여겼다.

    이렇게 볼 때 68운동은 단순히 인류의 행복과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권위주의 정부에 돌멩이를 던진 것이 아니다. 68운동의 돌멩이가 겨냥한 것은 바로 인류의 행복과 역사의 발전을 약속한 근대라는 이름의 신화다. 68시위에서 낙서와 포스터, 패러디와 아이러니 등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 것은 엄숙한 근대 프로젝트를 조롱한 것이다.

    나는 68운동에서, 특히 파리 68운동에서 근대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하고자 하는 힘과 근대 프로젝트를 조롱하고 폐기하려는 힘을 동시에 발견한다. 이것을 나는 68운동의 이중성(duality)이라고 부르고 싶다. 68운동에는 두 개의 얼굴, 즉 모더니티의 얼굴과 포스트모더니티의 얼굴이 공존한다.

    68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철학자로 거론되는 아도르노는 근대 프로젝트가 미몽을 깨뜨린 계몽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 자체가 미몽이고 주술이라는 점을 설파했다. 그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동료인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에서 밝힌 메시지다.

    “지식은 곧 권력”

    근대 프로젝트를 주관한 이성이 도마 에 올랐다. 아도르노는 이성을 비판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으로 구분했다. 이성은 그 본질에 있어서 비판성을 생명으로 한다. 그러나 근대에서 이성은 비판적 이성으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했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 양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비극이었다. 잃어버린 비판성을 되찾는 것, 곧 비판적 이성을 복원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보았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견해는 흔히 ‘비판이론’이라고 불린다.

    아도르노와 함께 68세대에게 큰 영향을 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근대 프로젝트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핵심 개념들을 실종시키거나 물구나무서기를 시켜버렸다. 그는 지식과 권력을 한 묶음으로 묶어버렸다. 진리와 힘을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버렸다. ‘아는 게 힘’이라는 프란시스 베이컨 식의 계몽이 아니다. 진리가 결국은 권력을 누르고 승리한다는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지식체계와 권력체계는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곧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고, 그 역 또한 같다. 지식과 권력은 같은 현상을 부르는 각각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이 푸코의 지식/권력 개념이다.

    철학의 새 천년,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되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어떻게 세상을 나타낼 수 있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당연히 푸코는 근대 프로젝트에서 숭고하게 생각한 진리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또 당연하게도 진리와 쌍둥이 관계처럼 여기는 객관적 사실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 대신 그 사실에 관해 말하고 쓴 담론(discourse)에 주목한다. 그 담론에 담긴 사물이나 사건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변형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예컨대 광기(狂氣), 감옥, 성(性)에 대한 관념 등이 특정 시기에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출처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연구를 보통 계보학이라고 한다. 19세기 말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많이 쓴 방식이다.

    하나의 담론에서 여러 진술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진술)들은 같은 대상을 가리키고 있다. 같은 스타일을 띠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전략… 하나의 공동 제도… 또는 정치적 입장과 패턴을 담고 있다.” 이렇게 각각의 진술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형식을 푸코는 ‘담론 구성’이라고 불렀다.

    이게 무슨 말인가. 보통 담론이란 말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보통 몇 개의 진술이 모여서 하나의 담론을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진술들은 그 담론을 구성하는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한 예를 들자면 “서양 철학사 책”에서 “동양철학이 최고다”라는 담론은 구성되기 힘들다.

    따라서 담론을 분석한다는 것은 담론이 형성되는 방식을 분석하는 것이고, 그 담론을 형성하는 사회를 분석하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담론의 생산은 어떤 사회에서나 통제되고, 선택되고, 조직되고, 다수에 의해 재분배된다. 즉 담론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권력이 개입한다. 따라서 담론 생산을 허용하고 분배하는 권력관계가 곧 진리체계가 되는 것이다.

    “언어는 세계의 그림”

    근대의 기획에는 하나의 대전제가 있었다.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었다. 진리는 너와 나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진리라고 믿는 사실도 진리가 아닐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도 진리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진리는 주체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믿음이었다. 비슷하게 근대 기획자는, 진리는 언어와는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믿었다. 진리는 그것을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든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담론 분석에서는 이 전제가 뒤집혀 있다.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힘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진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언어 밖의 세계가 아니라 언어 간의 관계인 담론 분석에서 결정됐다.

    푸코가 말하는 담론 개념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놀이(language games)’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언어놀이 개념은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을 통해야 이해가 쉽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큰 관심은 ‘언어가 어떻게 세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하는 문제였다. 이 질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답이 바로 그림 이론이다. 그것은 “언어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그림이며, 그러한 한에 있어서 언어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에 대한 관계에서 언어의 사용으로 관심이 이동했다. 언어의 의미도 언어와 사물의 상응에 있는 것이라 그 사용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놀이에 비유해 언어놀이라고 불렀다. 그는 “무수한 언어놀이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그림 이론은 그 무수한 언어놀이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을 분석하는 철학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하는 철학으로 무게 중심이 바뀐 이 일련의 흐름을 흔히 ‘언어학적 전회(Linguistic Turn)’라고 한다. 이것은 근대 기획자의 대전제를 뒤집는 것이었다.

    근대 프로젝트에서 세계를 밝히는 빛이던 핵심 이념들은 빛을 잃었다. 이성은 그 앞에 ‘서양 이성’ ‘근대 이성’이라는 모자를 쓰게 됐다. 서양이라는 특정 공간, 근대라는 특정 시대에서 한정되어 빛을 발했다는 뜻이다. 남성과 백인, 그리고 부르주아 이익에만 봉사해왔다는 꼬리표도 이성에 따라다니는 비판이다.

    하나의 보편 규칙은 불가능

    철학의 새 천년,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되다

    1968년 5월 파리 시위 당시 등장한 포스터들.

    진리 개념도 약화됐다. 근대 프로젝트에서 진리의 개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너와 나의 견해와는 관계없이 엄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리는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 바깥에, 또는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바깥(out there)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언어학적 전회 이후 진리는 우리가 말하는 언어 안으로 들어왔다. 진리는 인간의 인식 바깥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구성된 텍스트 안에서 구성되는 것이 됐다. 진리라는 용어는 진정성이라는 용어로 슬금슬금 대치되기 시작했다.

    너와 나의 주관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객관적(objective) 진리는 너와 나의 주관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주체 관련적(intersubjective) 진리로 바뀌고, 너에게도 통하고 나에게도 통하고 그 누구에게도 마땅히 통해야 하는 보편적(universal) 진리는 너와 내가 믿는 것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관용하면서 그 다양성을 즐기라는 톨레랑스 정신으로 강조됐다.

    과학은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안내하는 믿음직한 안내자가 더는 아니었다. 단지 지식체계의 하나일 따름이다. 푸코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하나의 과학담론일 뿐이며,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하나의 과학 언어놀이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은 미신보다 더 우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더 열등하지도 않은 하나의 담론, 또는 언어놀이일 따름이다. 아니, 과학철학자 파이어아벤트의 견해를 빌린다면, 과학은 미신보다 못하다. 오만하고 시끄럽고 더 독선적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상대주의는 철학이 반드시 피해나가야 할 함정이었다. 상대주의자라는 말은 철학자에게 큰 모욕이었다. 그러나 리처드 로티는 충고한다. 이제 철학자들은 더 이상 상대주의자라는 평가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근대 프로젝트에 이의를 제기한 이런 담론을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으로 부르기로 하자. 여기서 ‘부르기로 하자’고 동의를 구한 까닭은 여기에 등장시킨 철학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철학을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라고 부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 가운데 누구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유일한 예외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라는 책을 쓴 리오타르다. 그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 대신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철학사전을 들추더라도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라는 항목은 빠짐없이 들어 있다. 묘한 일이다. 방아쇠를 당기지도 않았는데 사람은 쓰러진 격인가.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거대 설화(meta-narrative)에 대한 불신’으로 규정한다. 거대 설화는 역사의 진보에 관한 이야기, 과학에 의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 절대 자유가 가능하다는 이야기같이 거대한 이념체계를 지닌 이야기를 뜻한다. 우리가 앞에서 근대 프로젝트라고 명명한 것으로 이해하면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거대 설화는 전형적인 근대의 특징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엔 더 이상 이런 거대 설화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이런 거대 설화는 그 이야기의 보편성을 입증하기 위해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르다. 가치체계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욕구가 다르다. 다른 가치 체계를 하나의 공통된 잣대로 잴 수 없다. 다른 문화를 하나의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욕망의 체계를 너에게 온전하게 전달할 수도 없다. 리오타르는 이 점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 그리고 언어놀이 사이에는 공약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공통 잣대가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언어놀이 사이에 공통된 것을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지 몇 개의 언어놀이를 알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개의 언어놀이를 안다는 것이 언어놀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을 확보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수없는 언어놀이를 포괄하는 하나의 보편 규칙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또 하나의 언어놀이를 다른 언어놀이로 온전하게 번역할 수도 없다. 좀 딱딱한 말로 표현하자면, 언어놀이 사이에는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 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수학에서 분수 약분을 생각해보자. 약분을 할 때, 우리는 분자에 있는 숫자 A와 분모에 있는 숫자 B의 공약수를 찾는다. 그리고 공약수 중에서 가장 큰 수, 곧 최대공약수로 분자 A와 분모 B를 나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A가 2 이고 B가 3이라면? 두 숫자 사이에서 공약수를 찾기는 불가능하다. 무리수와 유리수는 수리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A와 B는 공약이 불가능하다.

    새 패러다임이 나타나는 원리

    철학의 새 천년,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되다

    파리 낭테르 대학 전철역.

    공약불가능성이라는 말을 철학에 도입한 이는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이다. 그는 두 개의 패러다임 사이에는 공약수가 없다고 했다. 패러다임은 요즈음엔 한 시대의 가치관, 또는 한 시대의 이념체계를 뜻하는 시사용어로 많이 쓰이지만, 쿤은 패러다임을 한 시대의 지배적인 과학적 인식의 총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무리수를 유리수로 옮길 수 없고, 유리수를 무리수로 옮길 수 없듯이 한 시대의 패러다임은 다른 시대의 패러다임 용어로 옮길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패러다임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패러다임도 있을 수 없다. 쿤은 이것을 ‘패러다임의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between paradigms)’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쿤이 그의 주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시한 사례를 요약한 것이다.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한 이론에는 프톨레미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있다. 프톨레미의 천동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과학이론체계이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과학이론체계다. 그런데 하나의 이론체계를 다른 이론체계의 용어를 동원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 두 이론체계에는 공약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오랫동안 프톨레미 천동설은 천체 운동을 설명하는 과학 이론이었다. 그러나 근대과학은 프톨레미 천동설을 폐기하고,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프톨레미 천동설이 틀렸고,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다. 프톨레미 천동설은 너무 복잡하고,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은 단순명료했기 때문이다.

    과학의 역사를 볼 때, 한 시대의 패러다임에 기초한 과학이론은 그 이론체계에 어긋나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그 이론체계를 보완하기 위해서 점점 복잡해진다. 그와 함께 과학 공동체의 불만도 점점 커진다. 그 위기가 절정에 이르면 마침내 그 패러다임은 무너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난다.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프톨레미 천동설이 무너지고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언어놀이 개념을 쿤이 말한 공약불가능성 개념과 접합했다. 언어놀이 사이에는 공약수가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사실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언어놀이 사이에는 공통 규칙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마치 가족의 얼굴이 서로 닮은 것처럼.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이라고 불렀다.

    리오타르가 말한 언어놀이 사이에는 공약수가 없다는 주장이 옳다고 하자. 그러면 하나의 언어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다른 언어놀이를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가. 표현을 좀 바꾸자. A라는 삶의 형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B라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는가(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놀이는 곧 삶의 형식을 말한다). 다시 표현을 바꾸자. A라는 문화에서 사는 사람은 어떻게 B라는 문화에서 사는 사람과 교류해야 하는가(삶의 형식은 문화를 뜻한다).

    리오타르는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강제로 일치를 요구하는 테러다. 다름에서 오는 갈등과 충돌은 당연하다. 리오타르는 여기서 ‘디퍼랑드(differend)’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그는 ‘다름에서 오는 분쟁’이라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한다.

    ‘다름에서 오는 분쟁’

    ‘분쟁’이라고 번역하면 좀 밋밋하고, ‘이쟁(異爭)’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는 분명하되 좀 뻣뻣하다. 디퍼랑드는 각각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는 참여자들 간에 공약불가능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분쟁을 말한다.

    언어놀이 A를 하고 있는 갑과 언어놀이 B를 하고 있는 을이 만난다. 갑과 을은 모두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갑과 을의 불만이 쌓인다. 그 불만마저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어렵다. 분쟁과 갈등이 일어난다.

    A와 B의 게임 규칙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갑과 을의 불만은 쌓이지만, 그 불만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물론 너도 나에게 마찬가지 불만을 갖고 있다. 너의 불만도 나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난다. 이견에서 나오는 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규칙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근대 시기에는 A와 B를 포괄하는 게임 규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A, B, C, D, E… 전체 게임을 포괄하는 게임 규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보편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보편 규칙을 강요하지 말라.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허위이고, 테러다. 진리는 전체에 있지 않다. 진리는 국지적이다. 리오타르는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하나의 언어놀이 속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가. 무엇보다도 언어놀이 사이에 소통할 수 없는 벽이 가로 막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의사를 소통하는가.

    리오타르는 감수성을 이야기한다. 다름을 이성을 통해서 이해하지 말고, 감수성을 통해 느끼라는 것이다. 그것이 타자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이다. 또 리오타르는 관용을 이야기한다. 디퍼랑드는 분쟁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지만, 실제로 현실화한 것은 아니다. 그 분쟁을 터뜨리는 것은 타자에게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나치 독일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다름을 관용해야 한다. 아니, 그 다양성을 위해 축배를 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다.

    한때 서구 사회가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근대의 희망찬 메시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돌아본다. 근대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이었던가. 아니면 재앙을 예고한 악몽에 불과했는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막내, 위르겐 하버마스는 근대 프로젝트를 변호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근대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프로젝트다. ‘실패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근대화 프로젝트’-이것은 하버마스가 아도르노상을 받던 1980년 시상식장에서 행한 연설 제목이다.

    근대 가치 변호한 하버마스

    하버마스는 근대가 하나의 신화라는 아도르노의 지적에 동의한다. 이성이 도구화했다는 진단에도 동의한다. 이 때문에 이성이 기획한 계몽의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그러나 근대 프로젝트를 쓰레기통에 통째로 집어넣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버마스는 근대가 전근대(pre-modernity)에 비해 개혁적이고 건강하다고 보았다. 그는 아직도 세계 곳곳에 전근대적 야만이 독버섯처럼 남아 있다고 봤다. 근대 프로젝트가 지닌 개혁적 추동력을 교묘하게 멈춰 세워보려는 새로운 보수주의를 경계했다. 아직은 근대 프로젝트의 방점을 찍을 때가 아니라고 하버마스는 생각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진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 세워진 사변 철학에서나 꿈꾸는 목표다. 하버마스는 형이상학을 배격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기초로 아직 끝내지 못한 계몽의 프로젝트를 완수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버마스는 이성의 의사소통적 측면을 실패한 근대 프로젝트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주춧돌로 삼았다. 하버마스는 이성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형이상학 세계에서 끄집어내서,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생활 세계로 소환했다. 따라서 하버마스가 말하는 이성은 시간과 공간 축을 벗어난 곳에 있는 사변적 이성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문맥화한(contextualized) 이성이다. 역사 공간에서 제약을 받는(historized) 이성이다. 이것을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이성’ 또는 ‘의사소통적 행위’라고 불렀다. 이 생활 세계로 던져진 이성을 단서로 하버마스는 너와 나의 생각, 너와 나의 행위에서 보편성을 모색하고자 했다.

    리오타르는 언어놀이는 서로 공약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성으로 풀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달리 생각했다. 언어놀이는 섬처럼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어놀이를 상호교통하게 하는 소통구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단절된 소통구조를 연결하는 열쇠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리오타르는 보편성을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모든 진술은 언어놀이 안에서만 타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하버마스는 달랐다. 모든 언어놀이가 국지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인정했다. 모든 언어놀이를 조망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지점이 없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보편적 정당성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될 수는 없다. 한편으로는 진공 상태의 공간을 상정하는 형이상학적 독단에 빠지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특정 시간과 공간의 산물로 한정하는 상대주의적 오류에 빠지지도 않는 보편적 진리가 가능하다고 하버마스는 생각했다.

    하버마스가 주장한 의사소통 이론은 이런 점에서 근대 프로젝트를 다시 소환한 것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두 부류의 적과 싸운다. 첫째는 계몽의 프로젝트를 설계한 형이상학에 근거한 당초의 기획자들이다. 하버마스는 이성을 형이상학에서 끌어내려, 생활 영역으로 앉혀놓기 위해 싸운다. 그 다음은 근대 프로젝트를 폐기처분하려는 포스트모던 계열 철학이다. 그는 근대 질서의 핵심인 합리성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릴 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소통구조가 단절되는 위험성을 봤던 것이다.

    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티 공존

    이제 낭테르 대학을 떠날 때다. 차는 학교 운동장에 세워두고 지하철로 시내로 들어갈 생각이다. 그게 편하다. 살인적으로 비싼 파리 주차비를 공짜로 해결하겠다는 속셈도 있다. 일단 파리 신도시 라데팡스(La Defence)로 갈 생각이다. 공장같이 세워진 낭테르 대학에선 기능을 중시하는 모더니즘 건축물에서 일어난 포스트모던의 반역을 느낄 수 있지만, 라데팡스에서는 근대의 편리한 기능과 포스트모던 상상력이 주는 즐거움을 같이 누릴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퍼뜨린 건축 공부에 좋을 것이다. 이후는 라데팡스에서 메트로 1호선을 타고,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 그리고 루브르궁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어떨까. 이 여정은 시간을 거슬러 근대 여행으로 제격이다. 파리는 마치 시계열로 배열된 도시 같다는 생각을 한다.

    철학의 새 천년,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되다
    정재영

    1957년 서울 출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영국 워릭대 석·박사(철학)

    現 도서출판 풀빛 기획위원, 유럽 도시를 여행하며 생각의 역사를 탐사하는 서양철학사 집필 중

    저서 :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Social Reality and Human Understanding)’


    “우리의 언어는 오래된 도시로 볼 수 있다. 즉 골목길과 광장, 오래된 집과 새집, 그리고 상이한 시기에 증축된 부분을 가진 집으로 이뤄진 하나의 미로.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곧고 규칙적인 거리와 획일적인 집을 가진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 -‘철학 논구’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가 가진 모호함을 뜯어고치면 철학의 거짓 문제를 허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젊은 비트겐슈타인이었다면 위와 같은 단상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도시 개조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오래된 도시를 그냥 관조할 뿐이다. 미로도, 획일적인 집도, 골목길도 뜯어고칠 대상이 아니라, 모두 도시의 한 구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갑자기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의 논쟁이 덧없다는 느낌이 든다. 모더니티든, 포스트모더니티든, 결국 도시의 한 구석에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우리는 이 오래된 도시의 새로운 변두리를 겨우 봤을 뿐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