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호

무통 vs 라피트

치열하게 따낸 1등급 vs 우아하게 유지된 1등급

  • 조정용│와인평론가 고려대 강사 cliffcho@hanmail.net

    입력2009-02-04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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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피트와 무통만큼 팽팽한 라이벌 관계도 드물다. 본래 한집안 출신으로 메독의 1등급 양조장을 각각 소유한 이래 150년 가까이 경쟁해왔다. 이들 와인은 품질과 가격에서 절대 명성을 자랑하며,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의 소비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무통 vs 라피트

    샤토 무통 로쉴드의 셀러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메독(Medoc)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샤토 라피트 로쉴드(Chteau Lafite-Rothschild, 이하 라피트)와 샤토 무통 로쉴드(Chateau Mouton Rothschild, 이하 무통) 두 양조장은 경쟁이 심하다. 19세기 중반 각각 양조장을 소유한 이래 질투와 반목으로 점철된 시기도 있었고, 냉소를 주고받은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서 유서 깊은 대립과 시기, 질투도 그 양상이 숱하게 변해왔다.

    영국의 와인잡지 ‘디캔터(Decanter)’ 2009 신년호에 유례없는 글이 실렸다. 두 양조장의 주인장을 동시에 취재한 기사가 실린 것이다. 같은 할아버지의 6대손인 라피트의 에릭 드 로쉴드와 무통의 필리핀 드 로쉴드가 나란히 앉아 인터뷰에 응했다. 메독의 포이약 마을 북단에 위치한 라피트와 무통의 경계 지점을 조명한 사진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경계의 좁다란 밭길을 걸으며 유쾌하게 웃는다. 대립 구도가 친밀 관계로 변화된 듯 보인다. ‘독점 기사’가 8쪽에 걸쳐 계속된다.

    약 150년 전에 기존의 샤토를 매입해 이름을 바꾸고 새바람을 불어넣었던 보르도 최고의 와인 양조장 라피트와 무통. 세대가 바뀌었다지만 주인장 역시 샤토의 역사를 닮아 백발이 성성하다. 포도밭과 양조장은 싱그럽기만 하다. 문득 “난 그저 짧은 인생 동안 양조장을 지키는 청지기에 불과하다”고 말한 한 양조장 주인이 생각난다.

    무통 vs 라피트

    무통(우) 라피트(좌)

    유대계 큰손 로쉴드 가문

    로쉴드 가문은 오랜 세월 유럽의 금융시장과 세계 와인시장을 쥐락펴락했다. 이 가문에서 처음 샤토를 구입한 건 1853년. 샤토 브랑 무통을 매입한 나타니엘 로쉴드는 양조장 이름에 자신의 성을 집어넣어 샤토 무통 로쉴드로 바꿨다. 지롱드 강 하류에 위치한 포이약 마을은 중세부터 와인의 요충지였다. 오늘날 와인세계에서 유명한 메독에서도 포이약은 가장 유명하다. 왜냐하면 메독의 1등급 와인이 고작 다섯인데, 그중 세 개가 포이약에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반복된 침식과 분열로 강 하류에 축적된 광물 자원은 포도나무 생육에 탁월한 조건을 조성했다. 석회암층과 그 위의 이회토(석회 점토 모래가 섞인 퇴적물)층, 그리고 그 위에 형성된 자갈 토양으로 인해 미묘한 맛이 뿌리에 전달되며, 그 뿌리의 배수에도 특별한 기운을 보탠다. 이런 탁월한 테르와르(terroir·토질, 토양, 강수량, 일조량 등의 환경적 조건)를 갖춘 포이약에서 라피트와 무통은 단연 그 품질이 돋보인다.



    1855년, 그러니까 샤토를 구입한 지 2년 뒤에 파리에서 연락이 왔다. 나폴레옹 3세가 만국박람회의 성공을 기원하며 와인의 품계를 정할 예정이라는 전갈이었다. 행정적인 일이었음에도 빠른 속도로 처리돼 무통에게 곧 결과가 당도했다. 요지는 이랬다.

    ‘메독에 속한 수많은 양조장 가운데 품질과 명성 그리고 가격을 기준으로 우수한 양조장의 등급을 정하기로 한다. 이 등급은 최고 등급 1등급부터 5등급까지로 구분한다. 무통은 2등급에 속하며, 1등급에는 라피트(당시에는 양조장 이름이 그냥 샤토 라피트였다.), 마고, 라투르, 오브리옹이 해당한다.’

    무통의 주인장 나타니엘 로쉴드는 충격에 빠졌다. 유대인으로서 독일을 빠져나와 영국에 자리를 잡고, 은행업으로 크게 성공한 그는 자신의 와인이 1등급일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1855 등급제정문서’를 보면 1등급에는 라피트, 2등급에는 무통이 각각 첫 줄에 씌어 있다. 허망한 마음을 담은 그의 시 한 편은 이 양조장의 파란만장한 에피소드 중 단연 톱으로 꼽힌다.

    ‘나는 1등이 아닐지 모른다/하지만 2등은 되지 않겠다/나는 무통이다’

    1등급이 아니란 말에 상심이 컸던 샤토 무통의 분위기와 달리 오솔길 건너편에 자리 잡은 샤토 라피트는 잔칫집 분위기였다. 주인장은 손님을 대접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무통 vs 라피트

    피카소 작품으로 장식된 무통의 1973년 빈티지 라벨.

    1868년에 이 샤토 라피트를 로쉴드 가문의 또 다른 일원이 구입했다. 제임스 로쉴드다. 제임스는 샤토를 구입하자마자 사촌 나타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성을 따서 양조장 이름을 샤토 라피트 로쉴드로 바꿨다. 제임스는 샤토를 손에 넣기 위해 사촌 나타니엘보다 훨씬 많은 돈을 쏟아 부었다. 마찬가지로 독일을 떠나와 프랑스에 자리 잡은 제임스는 보르도 최고의 양조장을 소유하는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단번에 1등급 와인을 소유한 제임스의 만족감과 대조적으로 나타니엘은 마음이 쓰렸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다’는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나타니엘은 ‘13년이나 더 일찍 포도원의 소중함을 깨달았는데 왜 나는 2등급이고, 사촌은 1등급일까?’ 푸념했다.

    무통, 샤토 병입(甁入) 선구자

    절치부심하는 무통도, 자족하는 라피트도 세월을 비켜갈 수는 없다. 양조장과 포도원은 그대로지만 책임자가 바뀌고, 주인장도 바뀐다. 시대가 바뀌고 새 주인의 새로운 스타일이 등장한다.

    1922년의 일이다. 무통의 젊은 피 필립 드 로쉴드는 약관의 나이에 양조장을 계승했다. 그는 파리에 거점을 두고 가끔씩 보르도에 내려오던 관행을 깨고, 아예 보르도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고는 소원(疎遠)했던 1등급 양조장과의 관계를 호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생각에 무통은 1등급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게 마땅했다. 그래서 1등급 양조장 4곳의 대표와 어울리는 사교모임 ‘오인회’를 만들었다. 쾌활한 성격에 문학과 예술을 즐기던 그의 적극적인 면모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필립은 와인 품질의 완벽성에 눈을 뜨고, 종래의 와인 판매 방식을 바꿨다. 기존의 판매 방식은 오늘날과 달랐다. 필립 이전에는 와인을 통에 담아 팔았다. 양조 과정이 끝나면 숙성과 상관없이 즉각 와인을 통에 담아 팔았던 것이다. 중개인은 자신의 창고에 와인을 쌓아두고 일정 기간 숙성한 다음에 병에 담아 소비자에게 팔았다. 그러니 와인의 숙성은 샤토가 아니라 중개상에 달려 있었다.

    와인의 숙성은 통 숙성과 병 숙성으로 구분된다. 병 숙성은 응당 소비자 몫이다. 스스로 개봉할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소비자 선택사항이다. 통 숙성은 창고의 조건에 달렸다. 좋은 창고를 가진 중개상은 샤토만큼이나 품질 관리에 신경 쓴다. 하지만 모든 중개상이 그랬던 건 아니다.

    필립은 기존의 판매 방식을 바꿔 통 숙성을 마친 와인을 병에 담아 팔 것을 고안했다. 발효시키고 숙성하고 일정 기간 샤토에서 와인을 저장한 다음에야 비로소 병에 담았다. 그리고 라벨에 이렇게 인쇄했다. ‘Mis en boutteilles au Chateau’ 이를 영어로 옮기면 ‘Put into bottle at Chateau’ 즉 샤토에서 병입(甁入)했다는 의미다. 1924년 빈티지부터 샤토 무통 로쉴드는 와인을 병에 담아 팔았다. 무통은 품질을 위해 관련 비용을 모두 감수했다. 와인을 통으로 숙성하려면 넓은 창고가 필요했다. 또 병에 담는 데 필요한 도구가 있어야 했고, 그와 더불어 일손도 추가되어야 했다. 우수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비용과 시설을 투자한 것이다. 이로써 무통은 샤토 병입의 선구자가 되었다. 보르도 와인뿐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등의 와인도 대부분 양조장 병입을 시행하고 있다.

    100점 만점에 100점, ‘1945년’

    1945년은 무통 역사상 최고의 품질을 빚어낸 빈티지로 꼽힌다. 1945년이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다. 포도밭 농부들이 괭이나 삽 대신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 있었던 때다. 포도밭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던 시기였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1945년은 20세기 최고의 빈티지다. 포도 한 송이 한 송이가 다 잘 익었다. 아니 포도 한 알 한 알이 다 잘 여물었다. 하늘의 축복이었다. 필립은 돋보이는 풍족한 빈티지를 축하하고, 또 승전을 기념할 목적으로 새로운 라벨 도안을 의뢰했다. 과감히 예술가에게 디자인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아티스트 라벨은 오늘날 무통 와인 마케팅의 핵심이다. 매년 어느 작가의 어떤 그림이 선정될지 관심을 불러 모은다.

    필립이 헌정한 작가 명단은 쟁쟁한 예술가로 가득하다. 그가 가문의 오랜 숙원이던 등급 상향에 성공한 1973년 빈티지에는 당대 최고의 작가 피카소의 작품이 채택됐다. 앤디 워홀, 타피에스, 미로 등의 작품도 등장했다. 일본 작가도 두 사람이나 참여했다. 아쉽게도 한국 작가는 아직까지 선택된 적이 없다. 언젠가 김환기 혹은 남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무통의 아트 마케팅은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차용되고 있다. 호주 리우윈 에스테이트(Leeuwin Estate)라든지 미국 켄우드(Kenwood)의 아트시리즈가 그렇다. 이들은 스토리를 생산하는 이런 마케팅으로 와인 컬렉터들을 자극한다. 셀러에 무통 1945부터 현재까지의 빈티지들을 모은다. 뭔가 흥미를 느끼면 그것으로 세트를 구성하려는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대목이다.

    무통 vs 라피트

    샤토 라피트 로쉴드 건물.

    1945년 무통은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완벽한 와인’이라는 평과 함께 100점 만점에 100점을 받았다. ‘디캔터’가 얼마 전 선정한 ‘죽기 전에 마셔볼 와인명세’에도 당당히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와인 선물거래, ‘엉 프리메르’

    무통을 방문하면 체계화된 홍보와 마케팅 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응대를 위한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오랜 세월 그 분야에 종사해온 담당자의 안내를 받는다. 예술에 대한 애호로 가득한 박물관에 들어서면 이국적인 다양한 컬렉션을 관람할 수 있다. 별로 꾸미지 않은 라피트와 대조적이다. 1등급의 여유와 2등급의 분발로 이해해야 할까.

    필립이 의욕적으로 조직한 ‘오인회’가 1953년에 깨지고 말았다. 라피트 주인장이 무통의 1등급 야망을 더는 지켜보고 싶지 않아 무통을 단체에서 빼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촌으로부터 배척당한 무통은 등급 향상의 야망을 더욱 뜨겁게 불태웠다.

    무통과 라피트의 경쟁은 사실 품질에 대한 경쟁보다 출시 가격 경쟁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여기서 보르도 시장의 특이한 거래 방식인 ‘엉 프리메르(En Primeur)’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르도 특급 와인은 통 숙성을 보통 18개월 이상 한다. 포도를 짜서 발효시키고 숙성한 다음 병에 담아 소비자에게 판매하기까지 어림잡아 2년 이상 소요된다. 그러니 샤토에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판매대금이 빨리 결제돼야 양조장 운영이 순조로울 테니 말이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보르도 와인은 미리 팔렸다. 대금을 미리 받고, 와인을 나중에 주는 것이다. 일종의 선물거래인 셈. 상인이 배추 값을 봄에 치르고, 가을에야 수확해가는 거나 마찬가지 방식이다. 농사꾼은 돈을 미리 받아 좋고, 상인은 싸게 살 수 있으니 좋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식이다.

    이듬해 봄이 되면 직전 빈티지의 출시 가격이 나온다. 샤토와 중개상들이 의논해 결정하는데, 라피트와 무통은 상대의 가격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무통은 2등급이면서도 늘 라피트와 비슷하게 때로는 더 비싸게 출시하려고 애썼으며, 라피트는 무통을 따돌릴 방책을 고민했다. 빈티지에 따라 품질이 결정되지만, 빈티지는 광활한 지역에 동일하게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무통과 라피트의 빈티지는 해마다 다른 결과를 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로버트 파커의 평가점수를 빈티지별로 비교해보면, 파커는 대체로 라피트의 손을 들어줬다. 1등급의 야망을 불태우는 무통과, 이를 막으려는 라피트 사이의 갈등은 계속됐다. 그러다 1961년에 잠깐 휴전하기도 했다. 현재 무통의 주인장인 필리핀 드 로쉴드가 시집가는 날이었다. 그리고 1973년 마침내 라피트가 반대를 철회함에 따라 무통의 등급 상향이 결정됐다. 자신이 가문에서 막내라는 데 착안해 ‘무통 카데(Cadet·둘째 혹은 막내)’라는 이름의 브랜드 와인을 만들기도 한 필립은 1등급이 결정되자 이런 시를 읊었다. ‘나는 1등급이다/나는 2등급이었지/무통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할아버지가 읊조렸던 실망의 시와 구별되는 자신감 넘치는 시다.

    젊음의 비결, 라피트

    무통과 라피트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일꾼들이 대를 이어 일한다는 사실이다. 라피트 중에는 5대째 일하는 가족도 있다. 특히 라피트는 매년 성탄절이면 직원들에게 성탄절 보너스를 지급한다. 가족당 6병의 라피트를 부상으로 주는 것. 지난해에는 2005년 빈티지 3병과 1997년 빈티지 3병을 선사했다. 우리 돈으로 치면 1000만원을 웃도는 고가(高價)다.

    라피트는 ‘라 피트(La fite)’를 붙여 쓴 것으로, 피트(fite)는 영어의 마운드(mound), 솟아오른 언덕을 뜻한다. 포이약에서도 가장 높이 솟아 있기 때문이다. 평지가 대부분인 메독에서 해발고도 27m는 상당하다. 실제로 메독의 와인도로 D2를 차로 달리다 보면 단조로운 평지가 이어지는데 라피트 주위로 오르막이 형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무통 vs 라피트

    무통의 주인장 필리핀(왼쪽)과 라피트의 주인장 에릭.

    1755년 리슐리외공이 프랑스 지엔 지방을 통치하고 파리에 돌아왔을 때 60세였다. 그의 알현을 받은 루이 15세는 리슐리외공의 놀라운 젊음이 ‘라피트’ 와인 덕분이라는 보고를 받고, 라피트를 왕실 와인으로 선택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라피트의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에 반한 독일 장군의 욕심도 이 와인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에 히틀러의 충복이던 괴링 원수는 라피트를 무척 애호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후계자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유대인 소유지인 샤토 라피트 로쉴드를 빼앗으려고 했다. 이 사실을 알아챈 프랑스 정부는 해당 전 재산을 국유화했다. 이로 인해 히틀러는 유대인 재산이라는 명분으로 라피트를 강탈할 수 없었다.

    라피트 로쉴드의 라벨은 작고 단순하며 우아하다. 와인 맛 또한 대체로 가볍고 부드럽고 섬세하다. 이런 특징은 무통과 견줄 때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하나, 긴 와인 수명은 라피트의 독보적인 자랑이다.

    자갈 토양으로 유명한 라피트는 더운 날에 진가를 발휘한다. 2003년 타오르던 해에도 최상의 와인을 생산한 것만 봐도 그렇다. 라피트는 무통보다 훨씬 나긋나긋하고 유순하다. 질감면에서는 포이약의 무통이나 라투르보다 두텁다고 할 수 없지만, 사실 두터움은 라피트가 추구하는 성질이 아니다. 미세함, 섬세함, 우아함을 중요시할 뿐이다.

    예술 애호는 공히 즐긴다. 라피트 역시 예술을 후원한다. 주로 색감 좋은 페인팅을 라벨로 차용한 무통과 달리 라피트는 흑백사진을 애호한다. 양조장 직원들의 노동을 근엄한 톤으로 표현한 미국 사진가 리처드 애브동의 작품들이 샤토 곳곳에 걸려 있다.

    경쟁은 계속된다

    1973년 이후로 사촌 모두 1등급이 되고부터 등급 전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경쟁이 끝난 건 아니다. 출시가격 경쟁이 계속됐고, 글로벌 경쟁으로 이어졌다. 비로소 품질 경쟁이 본격화한 것이다. 칠레 등 새로운 산지에 양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두 양조장은 품질 경쟁에 박차를 가한다. 미국에는 무통이 먼저 진출했지만, 칠레에서는 라피트가 앞섰다.

    1999년 12월31일 밤에 무통의 주인장 필리핀이 라피트의 주인장 에릭을 초대해 1899년을 대접했다. 바로 다음날 에릭이 필리핀을 초대해서는 1799년을 대접했다. 여전히 팽팽하게 경쟁하는 라이벌인가? 언론에서 취재한 내용을 보면 로쉴드 가족의 세찬 경쟁이야말로 그들이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는 원동력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을 접할 수 있다. 갈등이 힘을 만들고 그 힘이 성공을 불러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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