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호

원색의 화가 최동열

뉴욕을 놀라게 했던 무학(無學)의 예술가, 날 선 뜨거움으로 돌아오다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0-07-01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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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트 빌리지의 샛별
    • 납화에 빠진 괴짜
    • 야생마가 열어준 화가의 길
    • “사는 대로 그리고, 그린 대로 산다”
    원색의 화가 최동열
    최동열(60)의 도록을 펼쳤다. 빨강과 노랑, 초록과 보라. 강렬한 원색이 쏟아질듯 들어와 눈에 박힌다. ‘dancing urns and nocturnal city(춤추는 항아리와 밤의 도시)’라는 유화에 시선을 맞췄다. 여체(女體)처럼 유려한 항아리의 곡선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내다보이는 작품이다. 색채는 물론 선명하다. 온통 새빨갛게 칠해진 방 안에 샛노란 항아리가 놓여 있고, 밖으로는 보랏빛 밤이 출렁거린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 서 있는 빌딩들은 약에라도 취한 듯 비틀거리며 새빨갛게 웃고 있다. ‘밖이 보이는 안.’ 최동열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연작의 주제다.

    최동열이라는 이름은 익숙하면서 낯설다. 그가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건 1987년. ‘뉴욕이 주목한 한국 화가’라는 수식어를 붙인 채였다. 그는 1970년대 후반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서 촉망받는 화가로 급부상했다. 이 명성을 바탕으로 한 최동열의 한국 데뷔가 얼마나 화려했던지, 몇 년 후 겨우 40대 작가의 자서전이 출간됐을 정도다. 한국서 자란 청년이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화가로 성공하는 입지전적인 스토리였다.

    이후 최동열은 몇 번 더 고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이 작품을 구입했을 만큼 꽤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명성과 영광이 계속된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그는 ‘괴짜’ 화가로 언론에 등장했다. ‘본능파’라고 불리며 거칠고 강렬한 날(生)그림으로 주목받던 그가 납화(蠟畵), 도화(陶畵) 등 새로운 장르에 몰두하면서 생긴 일이다. 최동열은 밀랍그림인 납화를 그리기 위해 안료에 벌집을 넣고 녹여 직접 물감을 만들었고, 도화 작업을 할 때는 한국에 작업실을 마련해 손수 도자기를 구웠다. 그 사이 점점 ‘촉망받는 화가’에서 예술계의 방외인(方外人)으로 변해갔다.

    최동열의 귀환

    6월 오랜만에 서울에서 최동열의 유화전이 열렸다. 채도 높은 원색으로 둘러싸인 갤러리에서 화가를 만났다. 노동으로 단련된 듯한 군살 없는 몸매, 햇볕에 그을린 갈색 얼굴. 그는 뉴욕을 사로잡은 천재 예술가도, 한 세계에 빠지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괴짜도 아닌, 사람 좋은 농부처럼 보였다. 실제로 미국 서부 한 시골 마을에서 라벤더 농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직접 재배한 라벤더는 주로 시애틀에 내다 판다. 시장에 나갈 때는 꼭 넥타이를 맨다고, 그래서 단골들이 ‘젠틀맨 파머(gentleman farmer·신사 농사꾼)’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말하며 소리 내 웃는데, 눈꼬리가 선량하게 휘어졌다. 코요테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잠들고, 새 소리에 잠을 깨는 ‘깡촌’에서 최동열은 농사짓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그림을 그렸다. 30년 전, 세계를 매혹시킨 유화였다.



    ▼ 그동안 납화, 도화 작업을 주로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납화는 색깔을 다양하게 쓸 수 있어 재미있었어요. 안료를 뜨겁게 녹여서 그린 다음, 색이 마르면 긁어내지요. 그 위에 다른 색을 칠하고 마르면 또다시 긁어내 덧칠해요. 납화를 하면서 색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도화를 하면서는 구도 잡는 걸 익혔어요. 작은 도판 안에 작품 하나를 다 넣어야 하니까 배치, 균형 같은 걸 많이 생각했죠.”

    ▼ 직접 물감을 만들고 도자기를 구워가며 작업한다고 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납화용 물감이 다양하지 않거든요. 직접 만드는 게 최선이죠. 도화도 도자에 따라 작품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공부도 하고 실험도 했어요.”

    ▼ 그러다 다시 유화의 세계로 돌아오셨네요.

    “다시, 그렇죠. 옛날에는 유화로 큰 작품을 많이 했어요. 이번 전시가 그때 스타일입니다. 저는 한 번도 ‘납화만 하겠다’ ‘도화만 하겠다’ 한 적이 없어요. 다 과정이었죠. 이번 전시 보고 예전보다 그림이 좋아졌다고 하는 사람이 많데요. 색상은 선명해지고, 라인도 섬세해졌다고.”

    ▼ 그동안 이리로 돌아오기 위한 공부를 하셨다는 말씀인가요?

    “원래 모든 작업이 다 공부죠. 말년 작품이 좋은 화가가 많아요. 평생 실험했던 걸 쏟아 부으니까. 제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번 작품 보고 괜찮은 30대 화가가 나온 줄 알았다고 합디다. 그런 얘기 들으면 멀리 돌아왔지만 잘한 일이다 싶죠.”

    변호삿집 맏손자

    원색의 화가 최동열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원색의 작품 사이에 선 최동열 작가.

    사실 최동열을 유명하게 만든 키워드는 ‘뉴욕파’ 외에 하나 더 있다. ‘무학(無學)’이다. 그가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은 귀국전 이래로 전시 때마다 따라붙는 수식어다. 최동열 본인도 자신이 어떻게 화가가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파란만장한 삶의 가운데서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최동열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한 최진의 맏손자다. 최진은 조선 출신 변호사들이 조직한 우리나라 최초의 법률가 단체 ‘경성제2변호사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인물. 1951년 최동열은 서울 인사동 99칸 한옥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전쟁통에 할아버지 최진이 납북되고 집안이 몰락하면서 피란지 부산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경기중학교에 입학할 만큼 공부를 잘했던 소년의 꿈은 ‘가문의 복원’이었다.

    “이승만 박사가 롤 모델이었죠. 경기고, 서울대,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뒤 대통령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제와 돌아보면 그게 본인의 꿈이었는지, 가족들의 꿈이었는지 헷갈린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던 삶의 행로였던 건 분명하다. 원대한 꿈은 경기고 입학시험에 떨어지면서 비틀어졌다. 하늘 같은 자존심에 재수도, 다른 학교 진학도 성에 차지 않았다. 검정고시를 치러 15세에 대학생이 됐지만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답답하고 좀이 쑤셨다. 숨구멍으로 택한 것이 전쟁이었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불쑥 베트남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끝을 보았다. 성마르게 반항이나 하던 명문가 출신 도련님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우리는 하면 잘하니까. 아예 안 하면 모를까, 일단 시작하면 대충 하는 게 없어요. 그때의 잔인성이라는 건 상상을 초월하죠.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돌아보니 그게 죄였다’ 이런 건 용서받을 수 있어요. 난 그게 아니라 다 알면서 스스로 결정해서 ‘나는 하겠다. 이왕 하는 거 잘하겠다’ 해서 했거든요.”

    그는 해병 첩보부대(HID)에서 꽤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말하듯 ‘잘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난폭하고 잔인해졌을 것이다. 그 상처는 오래갔다. 귀국 후 마음을 잡지 못하다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유도 사범으로 취직해 영주권을 받은 뒤 부모도, 형제도 없는 곳에서 제대로 방황했다. 바텐더, 술집 기도, 막노동.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했다. 싸움, 마약, 섹스에 탐닉했다….

    날뛰는 야생마

    누구에게나 자신의 체험은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다. 고통도, 기쁨도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최동열의 기억 역시 그럴 것이다. 어쨌든 그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영민한 시절을 거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거친 삶의 복판으로 뛰어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터뷰 도중 곧잘 “내가 그래도 경기 출신인데”라고 말했고, “OOO OOO가 다 동기생이에요”라고 명사들을 거명하기도 했다. “나는 뭐든 잘하는 방법을 안다”고도 했다. 그 자존심만이 그 시절 그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었을 게다. 1974년 도미 후 닥치는 대로 살던 최동열은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고 무작정 찾아간 뉴올리언스에서 또 하나, 기대어 쉴 것을 발견했다. 그림이었다.

    “어느 날 아파트 발코니에서 엘디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붓글씨를 연습하고 있었다. 갑자기 반 고흐와 폴 고갱을 동경하던 어린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정육점으로 가서 고기를 싸는 종이를 한 통 샀다. 길이가 자그마치 100m나 되었다. 이 종이를 발코니에 주욱 펴놓고 ‘뛰는 말’을 5, 6회의 붓놀림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100m나 되는 종이에 계속 말을 그려 나가다 한 1000마리쯤 채워졌나 싶을 때,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한 획으로 주욱 말 한 마리를 그려냈다. 말 그림을 시작으로 나는 홀연히 미술세계에 입문했다.”

    자서전 ‘돌아온 회전목마’의 한 부분이다. 엘디는 그가 뉴올리언스의 한 카페에서 만난 미국인이다. 텍사스주립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녀는 작업을 위해 그 도시에 와 있었다. 첫 만남에서 ‘통한다’는 걸 알게 된 두 사람은 다음 날 바로 동거에 들어갔고, 엘디의 삶은 최동열에게 ‘그림 그리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했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한 획으로 주욱 그린 말 한 마리’로 그는 졸지에 화가가 된다. 카페에 그림을 거니 사람들이 작가 대우를 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자존심 하나로 떠돌던 그가 처음으로 움켜쥔 ‘실체’, 그것이 바로 그림이었다.

    원색의 화가 최동열
    ‘안 하면 모를까, 일단 하면 제대로 하는’ 그는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미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화가들의 삶은 알았다. 제 귀를 잘라버린 고흐처럼, 그렇게 뜨겁게 살아야 했다. 지프를 몰고 엘디와 함께 삶의 극한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 히말라야, 인도, 아프리카 곳곳까지 세계를 헤매고 다녔다. 작품에 표현하는 자연의 색과 향을 그는 책이 아닌 현장을 통해 익혔다. 거칠고 뜨거운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마침 1980년대 중반 뉴욕 이스트 빌리지는 신표현주의가 득세하는 참이었다. 입체감이나 원근법을 무시한, 투박하지만 강렬한 그의 작품은 주목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야생 화가들의 방목장’ 같던 당시 뉴욕에서 ‘야생마’ 같은 그의 작품은 정규 교육의 재갈을 문 이들이 결코 시도할 수 없는 파격으로 눈길을 끌었다.

    밖이 보이는 안

    이번 전시작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노랑, 빨강, 초록, 보라의 강렬한 대비는 이미 그때부터 그의 서명(署名)과도 같은 스타일로 굳어졌다. 자신의 체험보다 더 ‘쎈’ 작업을 통해 그는 조금씩 좌절과 공포의 상처를 치유했다고 털어놓았다.

    ▼ 특히 호평 받은 작품이 있나요.

    “지금 제 침실에 걸려 있는 ‘Pig‘s pain(돼지의 고통)’이 떠오르네요. 멕시코에서 나와 엘디가 키우던 돼지의 도살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 보는 사람마다 걸작이라고 했지요.”

    아쉽게도 이 작품은 직접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동열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수도 시설이 없는 멕시코 사막지대에 살던 시절, 그들은 돼지 몇 마리를 사서 우리를 만들고 그곳을 화장실로 썼다. 제주도의 변소와 비슷한 시스템이다.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려니 식구처럼 지낸 돼지들의 처리가 문제였다. 도리 없이 돼지잡이들을 불러 처분하기로 했다. 혈기 왕성한 도살꾼들은 올 때부터 이미 신이 나 있었다. 한 명은 돼지를 몰고, 다른 한 명은 붙잡아 눕히는데, 돼지가 비명을 지를수록 살기가 등등해졌다.

    “저는 베트남에 있었으니까 그 느낌을 알죠. 신이 나서 찌르는 그들의 눈빛. 그걸 보는 순간 과거의 공포가 생생히 살아났어요. 캔버스에 선인장 조각을 붙이고 오일을 발라 돼지우리처럼 거칠고 번들거리게 만든 뒤 그림을 그렸죠. 이 작품은 정말 쎄요. 이 이상 쎈 걸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배경은 역시 선명한 노란색이라고 했다. 돼지의 피는 아마 더욱 선명한 빨간색으로 칠했을 것이다.

    “대담할 정도로 거리낌 없는 원색의 구사, 굵은 선과 명암법을 거부하는 면 처리,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구도, 야성의 분위기.”

    미술평론가 윤범모가 설명하는 최동열 작품의 특징이다. 멕시코 사막 한복판에서 그는 이처럼 펄펄 끓는 잔인함을 직면하는 작업을 했다. 예의 ‘밖이 보이는 안’ 시리즈를 시작한 곳도 멕시코다. 이번엔 유카탄 정글에 움막을 치고 살던 시절의 일이다. 최동열은 집 안과 밖이 명확히 갈라지지 않는 묘한 분위기에 매료됐다. 천 하나로 이뤄진 주거 공간의 특성상 내부는 자연스레 외부와 연결되고, 문을 열지 않아도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안에서 밖을 바라다본다는 경계만큼은 허물어지지 않은 채 선명했다. 안과 밖이 더불어 있으면서도 명확하게 구별되는 작품은 이렇게 탄생했다. 최동열은 몇 년 후 뉴욕으로 돌아가 밤거리를 걸으며 이 주제를 좀 더 확장시켰다. 환하고 따뜻한 집 안과 어둡고 차가운 밤 풍경의 대비다.

    이후 그의 작품 속에서 방은 보통 실팍한 몸피의 여성이 누드로 앉아 있는 공간이 된다. 당당히 허리를 곧추세운 주인공은 고개를 돌려 방과 맞닿아 있는 밤의 도시(nocturnal city)를 내다본다. 처음 언급한 ‘dancing urns and nocturnal city’에서 둥그런 항아리가 여성의 나체를 대신하는 것처럼 작품마다 조금씩 변주가 일어나긴 하지만, 환한 실내와 어두운 도시의 대비, 그 중심을 이루는 단단한 주체의 어울림은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패턴이다.

    유목민의 삶

    ▼ 방 안에 앉은 여성이 밖을 내다보는 연작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안과 밖은 다르다는 거죠. 가끔 ‘그 사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죠. 저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려요.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뭐든지 할 수 있지 않나, 이게 내 생각이에요. 나는 그를 이해할 수도, 바꿀 수도 없어요. 방 안에서 거리를 내다보듯, 그저 바라볼 수 있을 뿐이죠. 제 그림 속에서 방 밖의 세상은 방 안과 완전히 달라요. 어둡고 차갑고, 건물들은 비틀거려요. 하지만 방 안의 여성은 두려워하지 않죠. 허리를 딱 펴고 내다봐요. 색상이 밝으니까 사람들이 예쁜 그림이라고 속는 것 같은데, 실은 이거 무서운 얘기예요. 여전히 ‘쎈’ 그림이죠.”

    원색의 화가 최동열

    도화에 열중하던 시절 완성한 작품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균형 잡힌 구도를 공부했다.

    ▼ 뭐가 ‘쎄다’는 거죠?

    “두려움에 직면하는 부분이요. 다름을 피하지 않고요. 제가 그린 작품 중에는 심지어 여자가 아예 밤거리로 걸어 나가는 것도 있어요. 여전히 나체인 채로. 나는 그 작업을 하면서 ‘이거 너무 나가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거 보고도 그저 예쁘다고만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아는 사람들은 알죠. 그래서 좋아하고요.”

    ‘밖이 보이는 안’의 구성은 쉽지 않다. 완전히 분리된 두 공간을 조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안은 안대로, 밖은 밖대로 개성을 유지하도록 배치하면, 둘 사이의 부조화가 ‘두려움과 떨림’을 일으키며 화폭에 짜릿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정반합으로 이뤄지는 새로운 조화다. 그는 이런 미술적인 재미도 연작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설명했다.

    최동열은 1972년 베트남전쟁에 뛰어든 뒤 오래도록 ‘정주’하지 않고 살았다. 한 지역에 머물렀다가 이내 짐을 꾸려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는 걸 반복했다. 화구와 캠핑도구, 지프 한 대 외엔 가진 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힘들고 지칠 때 돌아갈 ‘본거지’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밖이 보이는 안’ 연작은 이런 삶을 통해 ‘두려움과 떨림’을 체화시켜온 경험에서 탄생한 것인지 모른다.

    “약한 것은 악(惡)한 것”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최동열이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 시애틀 북쪽 올림픽반도의 시골 마을에 정착해 농부로 살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농부만큼 땅에 묶여 있는 존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사이 작업을 위해 뉴욕, 서울, 경기도 이천 등지를 오가긴 했어도 그에게 라벤더 농장은 늘 ‘돌아갈 공간’, 즉 본거지였다. 그렇게 시골에 정착해 있는 동안, 그는 유화에 거리를 두고 도화와 납화에 매달렸다. 동시에 미술계에서 조금씩 잊혀갔다. “어떻게 된 일이냐”는 질문에 최동열은 조금은 쑥스러운 듯 변명을 내놓았다. ‘자녀 양육’을 했다는 것이다. 최동열은 엘디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최근 미국서 대학을 졸업한 이솔양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그는 유목민의 자유 대신 정주민의 안정을 선택했다. 딸을 위해. 인터뷰 내내 거칠 것 없이 자신만만하던 그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다듬었다.

    “조심할 게 많았어요. 혹시라도 지나다니다 내가 누구를 때리면, 그래서 감옥에라도 들어가면 애는 어떻게 되나. 이런 사소한 생각들이 나를 옭아맸죠. 이젠 홀가분해요. 요새는 기분 나면 한 방 날릴까 싶은 생각을 해요. 딱 30대의 나로 돌아온 거죠.”

    최동열이 1980년대 중반, 뜨겁던 시절의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된 건 되찾은 자유 덕분이다. 그렇다고 지난 10여 년을 ‘잃어버린 시간’으로 여기고 싶지는 않다. 그 세월을 지내는 동안 거칠던 붓 터치는 부드러워졌고, ‘색상이 선명해지고, 라인도 섬세해졌다’는 평을 들을 만큼 그림 기법은 성숙했다. 그의 말마따나 실험과 공부의 시간이었다. 신난(辛難)한 삶의 힘으로 일찌감치 예술가로서 정점을 찍은 그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진짜 그림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는다고 말했다. 서울 전시는 ‘최동열이 돌아왔다’는 걸 보여주는 무대였다. 그는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청년 시절 끓었던 피를 다시 데워 ‘더 쎄고 강해지기 위해’ 조만간 새로운 공간으로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

    ▼ 이제는 ‘쎈 것’ 말고 다른 작품을 해도 되지 않나요.

    “아니요. 좋은 그림은 쎄야 돼요. 약한 건 세상에 악(惡)을 만들 뿐이죠.”

    ▼ ‘약한 것이 악을 만든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약한 자는 혼자 서지 못하잖아요. 비슷한 이들끼리 무리를 짓고, 패를 짜서 강한 자를 억누르려고 하죠. 스스로 강해져야만 다른 사람을 짓누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어요. 창조하려는 사람은 강해야 해요. 그래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있죠.”

    그는 ‘밖이 보이는 안’ 연작의 여성들이 아름다운 건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벌거벗은 채로도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바깥과 직면할 수 있는, 나아가 그 모습 그대로 뚜벅뚜벅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강함’은 평생 그가 갈구해온 ‘쎈 것’의 요체다. 그는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과 경쟁하기 위해 앞으로 더 강해지겠다고 했다.

    “나는 사는 대로 그리고, 그린 대로 산다”고 말하는 최동열은 이번 전시를 통해 작은 화폭을 꽉 채우던 작업에서 벗어나 다시 뜨겁고 거친 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곧 시작될 여행에서 돌아온 그가 어떤 작품을 들고 나타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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