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동열이라는 이름은 익숙하면서 낯설다. 그가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건 1987년. ‘뉴욕이 주목한 한국 화가’라는 수식어를 붙인 채였다. 그는 1970년대 후반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서 촉망받는 화가로 급부상했다. 이 명성을 바탕으로 한 최동열의 한국 데뷔가 얼마나 화려했던지, 몇 년 후 겨우 40대 작가의 자서전이 출간됐을 정도다. 한국서 자란 청년이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화가로 성공하는 입지전적인 스토리였다.
이후 최동열은 몇 번 더 고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이 작품을 구입했을 만큼 꽤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명성과 영광이 계속된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그는 ‘괴짜’ 화가로 언론에 등장했다. ‘본능파’라고 불리며 거칠고 강렬한 날(生)그림으로 주목받던 그가 납화(蠟畵), 도화(陶畵) 등 새로운 장르에 몰두하면서 생긴 일이다. 최동열은 밀랍그림인 납화를 그리기 위해 안료에 벌집을 넣고 녹여 직접 물감을 만들었고, 도화 작업을 할 때는 한국에 작업실을 마련해 손수 도자기를 구웠다. 그 사이 점점 ‘촉망받는 화가’에서 예술계의 방외인(方外人)으로 변해갔다.
최동열의 귀환
6월 오랜만에 서울에서 최동열의 유화전이 열렸다. 채도 높은 원색으로 둘러싸인 갤러리에서 화가를 만났다. 노동으로 단련된 듯한 군살 없는 몸매, 햇볕에 그을린 갈색 얼굴. 그는 뉴욕을 사로잡은 천재 예술가도, 한 세계에 빠지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괴짜도 아닌, 사람 좋은 농부처럼 보였다. 실제로 미국 서부 한 시골 마을에서 라벤더 농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직접 재배한 라벤더는 주로 시애틀에 내다 판다. 시장에 나갈 때는 꼭 넥타이를 맨다고, 그래서 단골들이 ‘젠틀맨 파머(gentleman farmer·신사 농사꾼)’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말하며 소리 내 웃는데, 눈꼬리가 선량하게 휘어졌다. 코요테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잠들고, 새 소리에 잠을 깨는 ‘깡촌’에서 최동열은 농사짓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그림을 그렸다. 30년 전, 세계를 매혹시킨 유화였다.
▼ 그동안 납화, 도화 작업을 주로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납화는 색깔을 다양하게 쓸 수 있어 재미있었어요. 안료를 뜨겁게 녹여서 그린 다음, 색이 마르면 긁어내지요. 그 위에 다른 색을 칠하고 마르면 또다시 긁어내 덧칠해요. 납화를 하면서 색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도화를 하면서는 구도 잡는 걸 익혔어요. 작은 도판 안에 작품 하나를 다 넣어야 하니까 배치, 균형 같은 걸 많이 생각했죠.”
▼ 직접 물감을 만들고 도자기를 구워가며 작업한다고 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납화용 물감이 다양하지 않거든요. 직접 만드는 게 최선이죠. 도화도 도자에 따라 작품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공부도 하고 실험도 했어요.”
▼ 그러다 다시 유화의 세계로 돌아오셨네요.
“다시, 그렇죠. 옛날에는 유화로 큰 작품을 많이 했어요. 이번 전시가 그때 스타일입니다. 저는 한 번도 ‘납화만 하겠다’ ‘도화만 하겠다’ 한 적이 없어요. 다 과정이었죠. 이번 전시 보고 예전보다 그림이 좋아졌다고 하는 사람이 많데요. 색상은 선명해지고, 라인도 섬세해졌다고.”
▼ 그동안 이리로 돌아오기 위한 공부를 하셨다는 말씀인가요?
“원래 모든 작업이 다 공부죠. 말년 작품이 좋은 화가가 많아요. 평생 실험했던 걸 쏟아 부으니까. 제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번 작품 보고 괜찮은 30대 화가가 나온 줄 알았다고 합디다. 그런 얘기 들으면 멀리 돌아왔지만 잘한 일이다 싶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