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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유학생의 영국 일기 ⑦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

  •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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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사과정 1년차가 끝나가니 지난 한 해 동안의 ‘프로그레시브 리뷰(Progressive review)’를 작성해 내라는 e메일이 학교에서 날아왔다. 그 메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우리 세 식구의 ‘잉글리시 프로그레시브 리뷰’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쉽게 말하면 우리 가족의 ‘영어 성적표’다. 수우미양가로 점수를 매기면 어떻게 될까.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

성인과 어린이 사이에 영어 습득의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건 체험적으로 증명된다.

희원이: 수, 희찬이: 우, 엄마(나): 미

내가 매긴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점수는 ‘미’도 과분하고 ‘양’정도가 맞겠지만 그래도 엄마로서의 체면이 있으니, 그리고 나름 고군분투한 점을 참작해서 ‘미’정도는 줘야 할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이들은 일취월장, 어른은 제자리걸음’을 한 지난 10개월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극성 엄마나 치맛바람 같은 거와는 영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희찬이는 친구들이 학원버스 타고 영어학원 갈 때 자전거 타고 놀면서 시간을 보내다 영국에 왔다. 사실 내가 거창한 교육철학이 있어서 아이를 학원 안 보내고 놀린 것은 아니었다. 희찬이가 아파트 단지 안을 뛰어다니면서 잠자리 잡고 송사리 구경하다 영국에 온 이유는 단순히 이 녀석이 엄마 말도 학원 선생님 말도 안 들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누가 시키든 안 하는 게 희찬이의 주 특기였다.

사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희찬이에게 영어만은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다. 나는 스물아홉 살에 런던의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영어 때문에 참 많이 고생하고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그건 영국과 미국의 대학에서 3년간 박사후 과정(Post-doctor)을 보낸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우리 부부의 영어 실력은 외국에서 좀 산 사람들치고는 영 한심한 수준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건 다 안 해도 된다, 그러나 영어만큼은 열심히 하자”고 아이를 다그쳤지만 희찬이는 영어를 싫어하다 못해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2년 넘게 매일 저녁마다 아이와 영어 애니메이션을 보았지만 아이는 2년 동안 본 그 많은 애니메이션을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혹시‘이 아이가 영어에 대해서는 구제불능 지진아가 아닐까?’하는 검은 의혹이 마음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희찬이가 영국에서 간 첫 번째 학교인 세인트 피터스 스쿨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외국인 특별학급으로 옮겨갔을 때 불안한 의혹은 현실로 드러나는 듯싶었다.



희찬이의 영어성적 ‘우’

그렇게 희찬이는 영국에서 첫 6개월을 힘들게 보냈다.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영어는 못 알아들었고, 못 알아들으니 말을 하지도 못했다. 어쩌다 놀이터에서 희원이 친구 엄마를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물론 영어로) 희찬이는 일부러 한국말로 심술을 부려댔다. “엄마, 심심해 죽겠어.” “엄마, 왜 영어만 하는 거야? 한국말 좀 해”(이 녀석아, 영국 아줌마랑 이야기하는 중인데 한국말 하라고?) “엄마, 희원이가 나랑 안 놀아, 엄마가 놀아줘” 이런 식으로 강짜를 부리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심각하게 이 녀석을 한국으로 되돌려 보내야 하나 하고 고민했더랬다.

그런데 한 6개월쯤 지났을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희찬이가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월쯤의 일로 기억한다. 글래스고에서 가장 큰 박물관인 ‘캘빈그로브 뮤지엄’에 아이들을 데려갔다. 토요일이라서 각종 행사가 박물관 내에서 많이 열렸다. 희찬이는 오후 3시에 열리는 ‘멸종 위기 새들에 대한 토크’를 듣고 싶어했다. 스코틀랜드의 야생조류 보호 모임 자원봉사자가 야생 동물들에 대해 어린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행사였다. 나는 속으로 또 통역해줘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라고 했다. 3시에 친절한 자원봉사자 청년이 나와서 열 명쯤 되는 아이에게 알바트로스, 바다거북, 부엉이 등 각종 동물들이 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지, 이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재미있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희찬이가 그 청년의 말을 알아들었다. 심지어 묻는 말에 대답까지 했다. 청년이 올빼미가 어디에 살 것 같으냐고 묻자 희찬이는 손을 들고 ‘숲(Forest)’이라고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희찬이는 바로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올빼미는 어두운 곳을 좋아하니까요(Because owls like dark place).” 한 마디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내게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세상에, 희찬이가 영어를 하는구나!

그 후로 한 달, 또 한 달이 지나면서 희찬이의 영어실력은 눈에 보이게 늘기 시작했다. 외국인 특별학급에서 무슨 요술이라도 부린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나 읽기 싫어하던 영어 문장도 조금씩 읽게 되었다. 8개월이 지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영어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어책을 읽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나자 또래의 영국 아이들이 읽는 책과 비슷한 수준의 책까지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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