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호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

  •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0-07-06 12: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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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사과정 1년차가 끝나가니 지난 한 해 동안의 ‘프로그레시브 리뷰(Progressive review)’를 작성해 내라는 e메일이 학교에서 날아왔다. 그 메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우리 세 식구의 ‘잉글리시 프로그레시브 리뷰’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쉽게 말하면 우리 가족의 ‘영어 성적표’다. 수우미양가로 점수를 매기면 어떻게 될까.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

    성인과 어린이 사이에 영어 습득의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건 체험적으로 증명된다.

    희원이: 수, 희찬이: 우, 엄마(나): 미

    내가 매긴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점수는 ‘미’도 과분하고 ‘양’정도가 맞겠지만 그래도 엄마로서의 체면이 있으니, 그리고 나름 고군분투한 점을 참작해서 ‘미’정도는 줘야 할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이들은 일취월장, 어른은 제자리걸음’을 한 지난 10개월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극성 엄마나 치맛바람 같은 거와는 영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희찬이는 친구들이 학원버스 타고 영어학원 갈 때 자전거 타고 놀면서 시간을 보내다 영국에 왔다. 사실 내가 거창한 교육철학이 있어서 아이를 학원 안 보내고 놀린 것은 아니었다. 희찬이가 아파트 단지 안을 뛰어다니면서 잠자리 잡고 송사리 구경하다 영국에 온 이유는 단순히 이 녀석이 엄마 말도 학원 선생님 말도 안 들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누가 시키든 안 하는 게 희찬이의 주 특기였다.

    사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희찬이에게 영어만은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다. 나는 스물아홉 살에 런던의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영어 때문에 참 많이 고생하고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그건 영국과 미국의 대학에서 3년간 박사후 과정(Post-doctor)을 보낸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우리 부부의 영어 실력은 외국에서 좀 산 사람들치고는 영 한심한 수준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건 다 안 해도 된다, 그러나 영어만큼은 열심히 하자”고 아이를 다그쳤지만 희찬이는 영어를 싫어하다 못해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2년 넘게 매일 저녁마다 아이와 영어 애니메이션을 보았지만 아이는 2년 동안 본 그 많은 애니메이션을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혹시‘이 아이가 영어에 대해서는 구제불능 지진아가 아닐까?’하는 검은 의혹이 마음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희찬이가 영국에서 간 첫 번째 학교인 세인트 피터스 스쿨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외국인 특별학급으로 옮겨갔을 때 불안한 의혹은 현실로 드러나는 듯싶었다.



    희찬이의 영어성적 ‘우’

    그렇게 희찬이는 영국에서 첫 6개월을 힘들게 보냈다.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영어는 못 알아들었고, 못 알아들으니 말을 하지도 못했다. 어쩌다 놀이터에서 희원이 친구 엄마를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물론 영어로) 희찬이는 일부러 한국말로 심술을 부려댔다. “엄마, 심심해 죽겠어.” “엄마, 왜 영어만 하는 거야? 한국말 좀 해”(이 녀석아, 영국 아줌마랑 이야기하는 중인데 한국말 하라고?) “엄마, 희원이가 나랑 안 놀아, 엄마가 놀아줘” 이런 식으로 강짜를 부리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심각하게 이 녀석을 한국으로 되돌려 보내야 하나 하고 고민했더랬다.

    그런데 한 6개월쯤 지났을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희찬이가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월쯤의 일로 기억한다. 글래스고에서 가장 큰 박물관인 ‘캘빈그로브 뮤지엄’에 아이들을 데려갔다. 토요일이라서 각종 행사가 박물관 내에서 많이 열렸다. 희찬이는 오후 3시에 열리는 ‘멸종 위기 새들에 대한 토크’를 듣고 싶어했다. 스코틀랜드의 야생조류 보호 모임 자원봉사자가 야생 동물들에 대해 어린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행사였다. 나는 속으로 또 통역해줘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라고 했다. 3시에 친절한 자원봉사자 청년이 나와서 열 명쯤 되는 아이에게 알바트로스, 바다거북, 부엉이 등 각종 동물들이 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지, 이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재미있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희찬이가 그 청년의 말을 알아들었다. 심지어 묻는 말에 대답까지 했다. 청년이 올빼미가 어디에 살 것 같으냐고 묻자 희찬이는 손을 들고 ‘숲(Forest)’이라고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희찬이는 바로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올빼미는 어두운 곳을 좋아하니까요(Because owls like dark place).” 한 마디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내게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세상에, 희찬이가 영어를 하는구나!

    그 후로 한 달, 또 한 달이 지나면서 희찬이의 영어실력은 눈에 보이게 늘기 시작했다. 외국인 특별학급에서 무슨 요술이라도 부린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나 읽기 싫어하던 영어 문장도 조금씩 읽게 되었다. 8개월이 지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영어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어책을 읽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나자 또래의 영국 아이들이 읽는 책과 비슷한 수준의 책까지 읽게 되었다.

    BBC 드라마의 마법

    희찬이의 영어 실력이 부쩍 는 데는 사실 계기가 있었다. 희찬이는 ‘닥터 후(Doctor Who)’라는 BBC TV의 드라마 시리즈를 광적으로 좋아한다. 이 시리즈를 매주 토요일 빼놓지 않고 보는 것은 물론이고, 어린이용 닥터 후 잡지를 매주 사서 내용을 다 외울 정도로 본다. 그 와중에 자연히 영어 실력이 늘어난 것이다. 한번은 학교에서 윈스턴 처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희찬이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총리를 맡아 영국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정치가이자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라고 줄줄 대답했단다. 선생님이 놀라시면서 “우와, 희찬이가 방학 때 ‘블레넘 궁전’(옥스퍼드 인근에 있는 처칠의 생가)에 다녀오더니 처칠에 대해 많이 배웠구나” 하고 칭찬해 주자 희찬이는 정직하게도 “아니에요. 지난주 ‘닥터 후’에 처칠이 나왔어요. 그래서 알게 된 건데요”하고 대답했다. 어이가 없어진 선생님은 “희찬, 넌 어떻게 모든 지식을 다 ‘닥터 후’에서 배우니?”라며 웃으셨단다. 장래 희망마저 ‘노벨상 받는 과학자’에서 ‘닥터 후 등장인물’로 바뀐 희찬이는 ‘닥터 후’덕분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영어를 배워버렸다. 한국에서 3년 가까이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쓰며 고군분투했던 희찬이의 영어 고민이 영국에 온 지 9개월 만에 해결된 셈이다.

    희찬이가 영어를 배우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뼈아픈 사실은 ‘영어는 영어권 국가에 와서 배우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희찬이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대부분 시도해보았던 것 같다. 세 살 무렵부터 각종 영어 강좌에 데리고 다녔고, 일곱 살 때부터 유명한 영어학원에 다니게 했고, 영어 애니메이션도 2년 넘게 매일 저녁마다 봤다. 그러나 희찬이는 한국을 떠날 때까지 알파벳을 읽는 이상의 영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런 아이가 영국에 와서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영어로 책을 읽고 영어로 말하고 영국 친구들을 사귀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그렇게나 어렵던 영어가 영국에서 이렇게나 쉽게 되다니, 언어의 세계는 참으로 복잡하면서도 냉정한 것이다.

    며칠 전, 햇빛이 좋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글래스고 식물원에 놀러갔다. 식물원 주위에는 주차할 장소가 없어서 제법 멀리 차를 세워놓고 식물원에 걸어가야만 했다. 한나절 신나게 놀다 오후 5시쯤 되어 주차해놓은 골목으로 되돌아갈 때였다. 어럽쇼, 차가 보이질 않았다. 앗, 차가 없어졌나 봐! 나는 놀란 토끼 모양으로 후다닥 골목을 뛰어갔다. 다행히도 길을 돌아가니 주차된 차가 보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나를 따라 뛰어온 희원이가 이렇게 말했다. “Mom, did you think someone drove your car? (엄마, 누가 엄마 차 몰고 간 줄 알았어?)”나는 새삼스럽게 내 손을 붙든 희원이를 돌아보며 한국말로 대답했다. “응, 엄마 차 없어진 줄 알았어.” 그러자 희원이는 또 이렇게 말했다. “Look. your car is over there (봐, 엄마 차 저기 있잖아).”

    영어를 먼저 떠올리는 아이

    내가 놀란 것은 단순히 희원이가 제법 긴 문장의 영어를 말해서가 아니었다. 그 순간 희원이는 ‘자연스럽게’영어가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래서 그 문장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뛰어가는 엄마를 따라잡은 희원이의 머리에는 “엄마, 누가 엄마 차 몰고 간 줄 알았어?”가 아니라 “Mom, did you think someone drove your car?”라는 영어 문장이 먼저 생성된 것이었다. 나는 놀란 동시에 이 아이가 이러다 한국말을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희원이의 영어실력을 내가 좀 훔쳐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저렇게 영어문장이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면 교수님과의 튜토리얼 때 그렇게나 고전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희원이는 하루가 다르게 영어가 느는 대신, 그와 엇비슷한 속도로 한국말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집에서 늘 한국말을 쓰니 말 자체는 잘하지만 문제는 읽기 실력이다. 나는 매일 저녁 희찬이에게는 영어 책을, 희원이에게는 우리말 책을 읽도록 시킨다. 희찬이의 영어 책 읽는 수준은 매일매일 조금씩 늘고 있다. 그러나 희원이의 한국어 읽기 수준은 늘 제자리걸음에 가깝다. 한국에 있을 때 희원이는 받침이 없는 한글을 읽는 정도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받침 있는 글자는 잘 읽지 못한다. 희원이는 한국 나이로 이제 여섯 살이다. 아마 한국에서 여섯 살이 되도록 한글을 제대로 못 읽는 아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희찬이가 한국에서 영어 공부에 영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희원이는 한국어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

    영어로 연구 결과를 설명하고 질의 응답까지 해야 하는 프레젠테이션은 늦깍이 유학생에게 가장 힘든 도전 가운데 하나다.

    희원이를 볼 때마다 두 가지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희원이의 영어는 또래의 영국 아이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제법 어려운 표현도 척척 할 뿐 아니라 발음도 친구들과 똑같다(사실 나는 가끔 희원이의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잘못 알아듣는다). 그러나 한국어 책 읽기는 어려워하는, 아니 아예 한국어 책을 읽지 않으려 하는 아이를 보면서 내 마음은 그리 개운치 않다. 나와 희찬이에게 영어가 장벽이라면, 희원이에게는 이제 모국어인 한국어가 장벽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희원이를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 지난 5월 말, 학과에서 박사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리서치 세미나가 열렸다. 내가 다니는 글래스고 대학의 ‘문화정책연구센터(Centre for Cultural Policy Research)는 학생들이 ‘TFTS’라고 부르는 미디어학과(Television, Film and Theatre Studies) 안에 소속된 작은 연구소다. 문화정책연구센터는 흔히 ‘CCPR’이라고 부른다. 이번 세미나는 ‘TFTS’와 ‘CCPR’ 학생들이 지난 1년간 어떤 연구를 했는지 발표하고 평가를 받는 자리였다.

    프리 토킹 30분의 아찔함

    애당초 나는 세미나에 참가할 생각이 없었다. 세미나 참가자는 20분간 자기의 연구내용을 발표하고 10분간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데 솔직히 영어로만 진행되는 그 30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교수님들도 딱히 참가하라 마라 언급이 없어서(지난번에 썼던 것처럼 영국의 박사과정에서 모든 것은 ‘It′s up to you.’ 즉 학생 스스로의 결정에 달려 있다) 에이 난 아직 1년 차인데 내년에 하지 뭐, 하고 참가등록 마감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세미나를 2주쯤 앞두고서 2년차 선배에게서 “그래도 참가하는 게 좋을 걸? 교수님들도 다 와서 보시고 학년말 평가에도 반영된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부랴부랴 세미나 운영위원에게 “늦었지만 나도 참가시켜줘”라고 읍소하다시피 해 간신히 참가 자격을 얻었다.

    자, 이제는 싫든 좋든 영어로 30분이라는 시간을 감당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이 세미나 이전까지 본격적으로 영어 발표를 해본 경험이 없었다. 학기 초인 지난해 9월 ‘프레젠테이션 워크숍’에서 5분간 영어 발표를 연습한 적은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연습’이었고 이젠 진짜 ‘실전’인 것이다.

    사실 영어 말하기는 나의 오랜 콤플렉스다. 나는 극도로 소심한 A형인데, 경험적으로 보자면 A형은 B형이나 AB형보다 영어 말하기를 더 어려워한다. A형 특유의 소심함과 완벽주의가 겹쳐져서 영어를 해야 할 때는 필요 이상의 긴장 모드를 스스로 조성하고, 그 긴장 모드로 인해 제대로 말을 마치지도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한번은 박사과정 세미나에서 교수님께 질문을 하다 엄청 버벅거린 적이 있다. 세미나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에 앤디에게 “왜 나는 너랑 이야기할 때는 그럭저럭 하는데 세미나에서 질문할 땐 그 모양일까?”하고 물었더니 앤디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나도 사실 묻진 않았지만 그게 항상 궁금했어.” ‘오, 앤디, 넌 내 ‘구루’잖아. 그게 구루가 해줄 대답이냐고!’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앤디가 다시 말했다, “연습해. 영국 학생들도 튜토리얼 들어가기 전에 연습한다고, 너도 그렇게 해봐, 연습하면 아무래도 좀 나아질 거 아냐.”

    걱정하는 와중에도 세미나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왔다. 박사 2년차인 태국 친구 파이에게 “지난해에 너 세미나 할 때는 어땠어?” 하고 물으니 발표 전날 불안해서 한 잠도 못 잔 탓에 어떻게 발표했는지 기억조차 안 난단다. 세미나 순서를 보니 이틀간 열리는 세미나에서 하필이면 나는 첫날 첫 조에 속해 있었다. 세 명씩 조를 짜서 한 시간 30분 동안 발표와 질문을 하는데 내가 맨처음 조로 발표하게 된 것이다. “아, 정말 재수 없어! 어떻게 첫날의 첫 조냐고!” 내가 투덜대자 파이가 “무슨 소리야, 그게 훨씬 잘된 거야. 2년차 3년차들이 빵빵한 연구실적 발표하고 나면 1년차는 주눅 들어서 제대로 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럴듯도 하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않겠는가.

    나의 영어 성적표 ‘미’

    20분 발표에 맞춰서 스무 장의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고 발표 전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20분간의 발표 내용을 녹음기 돌리듯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학생들 앞에 서면 머릿속이 새하얘질 걸 예상해서 손에 든 프린트에 아예 “Before going to the next topic (다음 주제로 가기에 앞서서)…” 같은 중간 중간 할 말까지 몽땅 메모했다. 아직 머리가 녹슬지 않아선지, 아니면 파워포인트라는 효과적인 커닝페이퍼 덕분인지 서너 시간을 내리 연습했더니 발표 내용이 토씨 하나 안 빼놓고 술술 외워졌다. 그래, 이렇게 다 외워버리면 되는구나! 어처구니없는 방법일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드디어 발표 당일이 왔다. 나를 포함한 첫 조 세 명이 발표를 하는데 나는 그 세 명 중 마지막 순서였다. 그런데 먼저 발표하는 두 명을 곁눈질로 훔쳐보니 어럽쇼, 이 녀석들 역시 파들파들 떨면서 준비해 온 페이퍼를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우습게도 영국 학생들이 긴장해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란 말도 있잖아. 사실 20분간의 내용을 통째로 다 외우고 있으니 떨릴 이유도 별로 없었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기 전에 “솔직히 말씀드릴 점이 있어요. 이번 세미나가 저의 첫 번째 영어 프레젠테이션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프랑스 학생들 앞에서 불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괴로운 상황을 상상하시면서(영국 학교의 제1외국어는 프랑스어다.) 제가 좀 불명확한 표현을 쓰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배짱 좋게 말해버렸다. 학생들은 와그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무난하게 ‘미디어와 민주주의’라는 주제의 발표를 끝마쳤다. 이후에 이어진 질문들도 그럭저럭 대답할 수 있었다. 첫 조의 발표가 끝난 후, 지도교수인 필립과 질리언이 “그만하면 1년차치고 잘했다” “내용 전달이 잘 됐고 파워포인트의 구성도 좋았다”는 칭찬을 해주셨다. 교수님들의 평가를 들으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나는 웃으면서 “내년에는 더 잘할게요”라고 대답했다.

    내년에는 더 잘할 수 있을까? 글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내게 영어는 여전히 엄청나게 높은 장벽이다. 여기서 1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영어뉴스를 듣고 영어로 전화를 하거나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영어는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외국인치고는 잘한다’는 정도의 영어 실력으로 영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영어는 공부 그 자체가 아니라 공부를 위한 수단일 뿐인데 그 수단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어떻게 박사 논문이라는 먼 길을 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Step by step

    영국에 오기 전부터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영어 라이팅(Writing)만은 잘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공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과 계통에서는 외국인 박사과정 학생들이 강의할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영어논문이나 영어페이퍼는 외국인이든 영국인이든 박사과정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해야 하는 과제다. 그래서 나름 라이팅만은 열심히 공부하고 영국에 왔지만, 여전히 영어로 페이퍼 쓰기는 악전고투라고 할 만큼 어렵다. 영어 라이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일단 머릿속에 영어로 개념이 떠올라야 하는데(희원이처럼 말이다) 나는 늘 우리말로 개념이 먼저 떠오른다. 그걸 영어로 번역하다보니 초보자 수준의 라이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온종일 참고문헌들을 뒤적여가며 페이퍼를 쓴 후 써놓은 내용들을 보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제는 영어를 배우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된 걸까, 1년 내내 매일매일 페이퍼를 쓰고 또 썼는데 왜 이렇게 발전이 없는 걸까 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은 뒤죽박죽 복잡해진다. 차를 타고 가다 지루해지면 “엄마, 이제 다 왔어?”가 아니라 “Mom, are we nearly there?”하고 묻는 희원이를 보면 왜 아이와 어른의 영어습득 능력은 이렇게나 다른지 좀 억울해지기도 한다.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
    전원경

    1970년 출생

    연세대, 런던 시티대 대학원(석사) 졸업

    월간 ‘객석’, ‘주간동아’ 기자

    저서 :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 ‘역사가 된 남자’ 등

    現 영국 글래스고대 문화정책 전공 박사과정 재학 중




    아무튼 대학원 심포지엄을 마치고 나니 내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언젠가는 더 긴 세미나도 능숙하게 진행하고, 영어로 강의도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영어 속담 중에 내가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다. “Step by step one goes far.” 우리말로 하자면 ‘한 걸음씩 걷는 사람이 결국은 멀리 간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걸음씩 걸어가면 언젠가는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와! 내가 이렇게나 멀리 왔구나!’하고 스스로 감탄할 날이 분명 오지 않을까. 영어뿐만이 아니라 고향에서 이토록 멀리 떠나온 내 삶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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