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호

‘사이’의 존재들을 향한 공포와 매혹

드라큘라 vs 프랑켄슈타인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0-07-06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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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당신이 이해 못할지라도
    • 존재하는 사물들이 있다는 것을
    •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소.
    •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 어떤 이들은 보고 있다는 것도
    • 생각하지 않고 있소.
    • -브람 스토커, ‘드라큘라’ 중에서
    ‘사이’의 존재들을 향한 공포와 매혹

    드라큘라는 강렬한 공포뿐 아니라 은밀한 성적 매력도 갖고 있다.

    어린 시절 TV에서 봤던 가장 무서운 영화의 주인공은 드라큘라였다. 공포의 못난이 사탄의 인형 처키도, ‘여고괴담’의 소녀 귀신들도 무섭긴 했지만 드라큘라에 대적할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덧니가 송곳니처럼 뾰족하게 돋아나는 친구들은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고, 겁 많은 여자아이들을 골려주는 데 재미 붙인 개구쟁이 소년들은 어설프게 드라큘라 흉내를 내며 놀이터를 울음바다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다른 괴물들의 그저 무시무시한 외모만으로는 드라큘라만이 자아낼 수 있는 생생한 공포를 따라갈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드라큘라의 공포는 다른 괴물들처럼 주로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촉각적’이거나 ‘후각적’인 것이었다. 주로 시각적인 공포에 호소하는 여타의 괴물들과 달리 오감을 총체적으로 자극하는 매력적인 괴물이었다. 드라큘라가 나오는 영화가 끝날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목덜미 주변을 어루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 날카로운 이빨로 하필이면 연약한 목덜미를 물어뜯다니, 얼마나 끔찍하게 고통스러울까. 게다가 드라큘라가 입맛을 다시곤 하는 그 비릿한 피 냄새란 상상만 해도 어질어질했다. 루시의 목에 남은 드라큘라의 선명한 이빨 자국은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온몸의 피를 단숨에 들이켤 듯 탐욕스러운 드라큘라의 식욕이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드라큘라가 나오는 수많은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이거나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다. 뭔가 이상했다. 어른들은 뭔가 은밀한 것, 뭔가 폭력적인 것을 숨기기를 좋아하는데. 나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드라큘라의 에로틱한 매력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남성들에게 인기폭발이었던 루시가 드라큘라에게 목을 물린 후 몽유병 환자처럼 밤마다 그를 찾아나서는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마치 드라큘라에게 목을 물어뜯기기를 자발적으로 원하는 듯한 루시의 목마른 표정은 사춘기 소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드라큘라와 관련된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양산되는 것은 단지 서늘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성적 매력 때문일 것이다. 다른 괴물들이 결코 드라큘라의 매력지수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매력적인 괴물을 어떻게 마늘이나 십자가 따위로 퇴치할 수 있겠는가.

    무서울수록 더욱 매혹적인

    드라큘라는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있소.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도, 그리고 독일, 프랑스, 인도에도…. 우리에겐 너무나도 먼 곳인 중국에조차 있고, 그곳 사람들은 이 시간에도 그를 무서워하고 있소…. 흡혈귀는 계속 살아남고,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죽는 법이 없소.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드라큘라는 그 피를 먹고 사니까.



    -브람 스토커, ‘드라큘라’ 중에서

    드라큘라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저절로’ 뇌리에 각인되는 존재였다면, 프랑켄슈타인은 저 악명 높은 공포의 대명사로서 사회적 위치에 비해 제대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알고 보니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의 스토리를 보존한 채 영화로 개작되기보다는 원작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변형시킨 상태에서 유통된 경우가 많았다. 우선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이었고, 괴물은 언제나 ‘그 악마’ 또는 ‘그것’으로 불릴 뿐이다. 한번도 이름을 불리지 못한 괴물의 슬픔은 인간의 입장에서 삭제되기 딱 좋은 내용이었던 것은 아닐까.

    게다가 원작의 프랑켄슈타인이 매우 지적 수준이 높고 화술이 뛰어났으며 매력적인 감수성을 지닌 존재였다는 것은 소설을 제대로 읽어야만 알 수 있을 정도다. ‘프랑켄슈타인’의 부제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점도, ‘프랑켄슈타인’의 저자가 시인의 아내이자 아름다운 여성 작가였다는 점도, 원작을 직접 접해보지 않는 한 알기 어렵다. 즉 ‘프랑켄슈타인’은 드높은 명성에 비해 여전히 베일에 싸인, 비밀의 텍스트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처럼,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은 인간의 힘으로 생명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전이된다. 박사는 자신의 인생을 바쳐 남녀의 성적 결합 없이 생명을 창조하는 방법을 개발했지만, 인간의 시체에서 뽑아낸 각종 잔해를 조합해 만든 괴물은 결정적으로 너무 ‘끔찍한 외모’를 지닌 생명체였다. 박사는 태어난 아기를 안아보거나 이름을 붙여주기는커녕, ‘괴물-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냅다 도망친다. 그로부터 ‘아버지’를 찾기 위한 괴물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괴물은 인간의 가족을 몰래 엿보며 그들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독학으로 마스터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한다.

    인간을 향한 분노

    ‘사이’의 존재들을 향한 공포와 매혹

    영화 ‘영 프랑켄슈타인’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신체 장기를 이용해 괴물을 만드는 장면.

    인간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면, 인간의 학문과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외모만 보고 도망치거나 공격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극히 ‘정상적인’ 예상은 빗나가고 만다. 사람들은 그의 ‘말’ 따위는 전혀 들어주지 않는다. 그의 겉모습을 보자마자 겁 많은 사람들은 줄행랑을 치고, 조금 용감한 사람은 잔인한 린치를 가하며, 다소 소심한 사람들은 멀리서 무기가 될 만한 물건들을 던진다. 그는 세상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고, 세상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절감하고 비로소 진짜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짜 괴물이 되기 전에 한 번만 아버지를 만나 부탁하고 싶다. 나와 똑같은, 나를 꼭 닮은, 나의 연인을 만들어달라고. 나의 외모 때문에 나를 타박하지 않을, 나의 ‘짝꿍’을 하나만 만들어준다면, 나를 저주하고 나를 추방한 이 세상 전체를 용서하고 조용히 은둔할 것이라고. 하지만 마침내 만난 ‘아버지’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척하다가, 그를 닮은 ‘괴물-암컷’이 태어나려는 순간, ‘그녀’를 갈가리 찢어발기고 만다. 괴물-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창조주인 인간에게 품었던 마지막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어떤 남자건 가슴에 품을 아내가 있고, 어떤 짐승이건 자기 짝이 있는데, 나만 혼자 살라는 것이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부탁한 소원이 이뤄지지 않자 드디어‘그것’은 ‘아버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향한 분노를 제대로 표출하기 시작한다. 프랑켄슈타인이 사랑하는 존재들을 파괴하는 것, 그의 ‘편’이라 믿었던 존재들을 하나씩 이 세상에서 삭제하는 것. 그것이 괴물이 생각한 ‘복수’의 방식이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의 공통점은 단지 그들이 가장 인기 있는 공포물의 주인공이라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드라큘라를 ‘분석’하기 위해 동원된 방법과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하기 위한 방법은 모두 ‘과학’이었다. 즉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은 모두 ‘과학의 승리와 과학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문제적 인물이다. 드라큘라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각종 과학적 도구를 동원하는 사람들에게 반 헬싱은 말한다.

    “우리의 과학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문제라네. 과학은 설명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면 아예 설명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

    드라큘라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반 헬싱 일행이 사용한 것이 첨단 과학무기가 아니라 십자가와 마늘이었다는 것, 드라큘라를 처단하기 위해 동원된 무기도 총이 아니라 칼이었다는 점은 현대 과학이 드라큘라를 실제로 저지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증명한다.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면서 ‘논리’라는 거대한 환상을 믿는 인간의 이성을 풍자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드라큘라는 인간인가 비인간인가, 드라큘라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에 논리적으로만 대답할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인가 괴물인가,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의 승리인가 과학의 실패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도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드라큘라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 죽었지만 살아 있는 존재이며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이면서도 괴물이고, 과학의 승리와 실패를 동시에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도 아니고 살아 있는 자도 아닌 존재, 저승의 계단을 드나들면서 밤이나 낮이나 저승에서 나와 사람들 곁에 머무는 존재, 증오와 사랑, 선과 악 같은 대립적인 것을 합하는 존재, 모든 규칙을 위반하는 존재, 구세주이자 지옥의 사자, 죽음 속에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주장하는 검은 그리스도, 어두운 힘을 발산하는 존재, 배고픔과 목마름을 지닌 괴물 같은 존재, 공포와 죽음의 갈망을 지닌 존재, 고독을 두려워하는 존재.

    -콜로드 르쿠퇴, ‘뱀파이어의 역사’ 중에서

    ‘사이’의 존재들을 향한 공포와 매혹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드라큘라’의 한 장면.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의 또 다른 공통점은 그들 또한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에게 배척당하지 않고,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인간 세계를 향한 입장권’을 끊어주지 않는다. 인간을 질투하지만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은 복제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은 수많은 SF영화의 문화적 기원이기도 하다.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의 결정적인 공통점은 그들이 인간의 지식과 문화를 갈망한다는 점이다. 조나단은 드라큘라의 방대한 서재를 둘러보며 놀란다. 역사, 지리, 정치, 법학 등 ‘영국식 라이프스타일에 관련된 모든 것’을 보여주는 영어로 인쇄된 책과 잡지, 신문들로 가득 차 있는 드라큘라의 서재. 드라큘라는 “이 책들을 통해 ‘당신들의 위대한 영국’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드라큘라는 런던의 북적이는 거리를 보통 사람들처럼 쏘다니고 싶고, 지금의 영국을 있게 만든 모든 것을 인간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교육받은 중산층인 조나단의 영어를 모방하고자 하고, 기득권 내로 영입되기 위해 ‘영국식 억양’을 포함한 표준어를 습득하려고도 한다. 자신의 조국에서는 귀족이지만 타국인 영국에서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드라큘라의 슬픔은 프랑켄슈타인의 고독처럼 대중화되지 않은 ‘비-인간’의 고통이다.

    여기서 나는 귀족이오.…보통 사람들은 모두 다 날 알고 있고 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요. 그러나 낯선 고장에 몸 붙여 사는 식객은 보잘것없는 존재요.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보살펴주지도 않소. 나는 이방인처럼 보이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 보이고 싶소. …난 여태까지 주인이었고 앞으로도 주인으로 남아 있을 거요. 적어도 그 누구든 나를 소유할 수는 없소.

    -브람 스토커, ‘드라큘라’ 중에서

    인간 옆에 살면서 인간에게 ‘공존’을 요구하지만 결코 허락받을 수 없는 존재들. 인간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단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처럼’ 될까봐일 수 있다. 우리 자신이 그들을 닮고 싶은 욕망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은 우리 안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좀처럼 꺼내보기 싫어하는 암울한 분신일지도 모른다. 우리 안의 괴물을 단지 삭제하고 억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괴물을 때로는 똑바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 안의 괴물은 더 이상 ‘적’이기를 그치고 우리 안의 창조적 타인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않을까.

    인간을 닮은 괴물

    나는 나의 출생과 창조자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내게는 돈도 친구도 재산 따위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소. 게다가 나는 소름 끼치도록 흉측하고 역겨운 모습을 하고 있었소. 심지어 본성도 인간과 달랐소. 나는 인간보다 민첩하고 더욱 거친 음식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소. 극한 더위와 추위에도 몸에 큰 상처 없이 견딜 수 있었고 체구는 인간보다 훨씬 더 컸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나와 같은 존재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소. 그렇다면 나는, 모든 인간이 달아나려고 회피하려 하는 괴물, 이 세상의 오점이란 말인가?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들에게 ‘인간과 다른’ 면보다는 인간과 비슷한 면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는 인간에게 전혀 없는 특성들을 보여주는 존재들이 아니라 인간의 장점과 단점을 극대화하는 존재들인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는 인간의 마력과 인간의 슬픔과 인간의 고통을 극대화한 존재들이기에,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우리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증언하기에, 더욱 두렵고 그리하여 더욱 매혹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드라큘라가 매년 여름 다시 돌아오는 이유도, 창조주와 피조물,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다채로운 프랑켄슈타인의 후손이 매년 새로운 SF영화로 변신해 다시 돌아오는 이유도 바로 이 ‘공포’보다 더 큰 ‘매혹’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매우 비슷하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들’에 대한 공포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퇴치해도, 아무리 죽여 없애도, 우리 안의 드라큘라, 우리 안의 프랑켄슈타인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들은 ‘우리’를 삭제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더욱 극대화한,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어두운 내면을 실천하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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