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대리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느림의 숲길’
백담사를 자주 드나드는 불자나 설악산을 계절마다 찾는 산악인에게, 용대리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계곡 길은 결코 멀거나 지루하지 않다. 굽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광이 펼쳐지고, 아름다운 숲, 깊이와 폭이 제각각인 계곡이 순간순간 나타나며, 물빛의 푸른 정도가 수시로 바뀌는 담(潭)이 어우러진 계곡 길은 절집이나 산을 찾는 사람들만을 위한 하늘의 축복이었다. 어느 곳에서도 쉬 찾을 수 없는 긴 들머리 숲길은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풍광을 선사했기에 그 길이 지루하기보다는 오히려 걷는 사람만이 특권을 누리는 것 같아 즐거웠다. 특히 활엽수들로 이루어진 계곡 길의 신록과 단풍은 걸음품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교통편이 없던 시절에 계곡 길의 마지막 모퉁이쯤에 있었던 백담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샛길도 잊을 수 없다. 오늘날과 달리, 계곡을 건너지 않고 산모퉁이 능선을 넘어 무금선원이 자리 잡은 곳으로 바로 내려서는 샛길은 환상적이었다. 지금처럼 당우(堂宇)가 많지 않고, 고갯마루 능선에서 내려다보면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수호신장 모양으로 고졸한 백담사를 감싸고 선 모습이 신비스러움과 함께 고고한 기상을 뿜어냈다.
옛 추억을 더듬어 백담사를 찾은 지난 몇 년 동안,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 샛길을 가늠해보고자 몇 번이나 눈길을 보냈지만, 샛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백담사와 용대리를 왕복하는 교통편이 생기고, 절집 동편에 선원 건물이 앉혀지고, 또 이곳에 머물렀던 전직 대통령의 신변보호를 위해 샛길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은 되지만, 옛길에 대한 추억은 더 강한 그리움으로 변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내설악을 드나들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은 꽤 많은 이가 백담사와 용대리를 이어주는 버스 편을 이용하지 않고, 즐겁게 걷는다는 점이다. 버스가 운행을 시작하기 전인 이른 아침시간이나 운행을 마친 뒤인 오후 6시 이후에 특히 가족 단위 방문객이나 동호인들이 계곡과 숲을 느긋하게 걷는 모습이 부러웠다. 하루하루 속도전에 내몰리고 있는 우리네 삶에서 자신의 능력에 맞게 자신의 운행속도로 자연을 관조하며 그 미묘한 변화까지 느끼면서 걷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더욱 그랬다.
백담사(百潭寺)는 자장율사가 647년(진덕여왕 1년)에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한 한계사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한계사로 창건된 후, 10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라 불리다가 1772년(영조 51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백담사 사적기에는 1783년(정조 7년) 최봉과 운담이 백담사로 개칭했음을 밝히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러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면서부터 백담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6·25전쟁 때 소실됐다가 1957년부터 법당, 법화실, 화엄실, 나한전, 관음전, 산신각 등이 재건되었고, 근래에 이르러 만해와 관련된 기념관, 교육관, 연구관, 수련원, 도서관과 함께 기초선원인 무금선원이 건립되었다. 백담사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 제1182호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있다. 절 이름(寺名)과 관련해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집까지 크고 작은 담(潭)이 100개째 있는 곳에 절을 세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에 이르는 ‘미소의 숲길’
백담사에서 영시암(永矢庵)까지 3.5㎞는 봉정암에 이르는 11㎞의 여정 중에 가장 편한 구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수렴동계곡을 괄괄거리면서 흘러내려오는 물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기도 하지만, 계곡 옆으로 난 목책로를 따라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걷는 즐거움은 다른 절집에서는 쉬 경험할 수 없다. 울창한 숲길 사이로 난 평지와 다름없는 길을 느긋한 마음으로 음미하듯 걸으면,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만나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이 길을 ‘미소의 숲길’이라고 명명했다.
지난해 7월에 봉정암을 오르면서 경험하고, 얼마 전인 5월 하순에 이 길을 다시 찾았을 때 또 한번 경험한 아름다운 미소를 잊을 수 없다. 봉정암에서 새벽기도를 마친 불자들이 6시쯤, 미역국에 담긴 밥 한 덩이와 서너 조각의 오이김치로 아침 공양을 마친 후, 주먹밥을 배급받아 11㎞의 하산 길을 나서는 것이 적멸보궁을 찾는 순례자들의 일반적인 일정이다. 그래서 영시암 부근은 기도를 마치고 하산 중인 순례자들과, 기도를 위해 봉정암으로 오르는 불자들을 만나는 장소가 되기 쉽다. 오르든 내리든 방향에 관계없이, 모든 순례자의 얼굴에는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미소가 가득했다. 특히 하산 길의 순례자들 얼굴에 가득 번진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간밤의 철야기도가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왕복 20여 ㎞의 순례 길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산 길의 불자들에게서 확인한 미소는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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