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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 절집 숲에서 놀다 ⑦

백담사에서 봉정암에 이르는 순례자의 숲길

  •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백담사에서 봉정암에 이르는 순례자의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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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시암에서 오세암에 이르는 ‘사색의 숲길’

백담사에서 봉정암에 이르는 순례자의 숲길

오세암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전나무 노거수.

백담사에서 시작한 봉정암 길은 영시암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갈래는 수렴동대피소를 거쳐 구곡담계곡 길을 따라 봉정암으로 오르는 길이고, 다른 한 갈래는 오세암을 거쳐 3~4개의 산허리를 넘고, 또 3~4개의 계곡을 건너 봉정암에 오르는 길이다. 적멸보궁을 찾는 순례자들은 물론이고 등산객들도 대부분 수렴동대피소를 거쳐 구곡담계곡 길을 따라 봉정암에 오르는데, 오세암에서 봉정암으로 오르는 코스가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영시암에서 오세암에 이르는 숲길은 인적이 많지 않다. 아니 인적이 드물다고 해야 할 만큼 적막하다. 영시암에서 오세암 가는 숲길은 그래서 혼자 생각하면서 걷기에 좋다. 삼보일배를 하던 처사처럼, 나 자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 제 스스로를 돌아보기 좋은 숲길이다. 그래서 나는 영시암에서 오세암에 이르는 숲길을 ‘사색의 숲길’이라 명명해봤다.

이 길은 마등령으로 이어져 신흥사로 넘어가지만, 다른 한편으론 봉정암으로 오르는 길로 갈라진다. 오세암까지는 완만한 경사길이 계속되는데,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전나무와 신갈나무, 단풍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노거수(老巨樹)를 만나면 나무 앞에서 거친 숨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어 하늘로 솟아 있는 거대한 덩치를 가늠해본 다음, 사방을 덮고 있는 잎들을 둘러보면 즐겁다.

이 숲길은 과거 설악산을 찾았던 옛 선인들과 대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멀리 신라의 자장율사는 물론이고,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거닐던 숲길임을 인식하면, 2.5㎞의 짧은 숲길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노산이 설악산을 답파하면서 남긴 기행문 ‘설악행각’에 실린 글에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유상(遺像) 이본(二本) 앞에 마음의 고개를 몇 번이나 조아립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1930년대만 해도 암자에 매월당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었음을 미루어볼 때, 오세암과 매월당의 인연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오세암은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관음암(觀音庵)에서 유래됐다. 오세암이란 암자의 명칭은 관음설화를 담고 있어 흥미롭다. 관음암을 중건(1643)한 설정(雪淨)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어느 해 가을, 겨울 양식을 구하러 양양에 다녀와야만 했다. 길을 떠나기 전에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4세 된 조카에게 관세음보살을 찾으면 보살펴줄 것이라 이른 후 길을 떠났다. 그러나 장을 보고 신흥사에 도착했을 때 밤새 내린 폭설로 마등령을 넘어올 수 없었다. 눈이 녹은 이듬해 3월에 돌아오니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조카가 목탁을 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해가 바뀌어 다섯 살이 된 동자가 관음의 신력(神力)으로 살아난 것을 기리고자 그때부터 오세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노산은 ‘설악행각’에서 “오세(암)의 일컬음이 혹은 오세신동의 견성한 곳이라 해서 오세라고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절 조사(祖師) 스님들의 기록을 보면 과연 ‘오세조사’란 이가 있기는 했으나 혹시 사실일 수도 있겠고, 또 혹은 말하되 매월당 선생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는데 일찍이 그를 일러 ‘오세신동’이라고 일컬어왔던 것이므로 이곳을 ‘오세’라고 했다는 것인바 두 가지 말이 모두 문헌에는 없는 것인즉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치 않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오세암과 매월당의 깊은 인연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매월당이 남긴 시는 500년 전의 설악과 오세암의 옛 모습을 전하고 있다.

저물 무렵(晩意)

천 봉우리 만 골짜기 그 너머로(萬壑千峰外)

한 조각 구름 밑 새가 돌아오누나(孤雲獨鳥還)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此年居是寺)

다음해는 어느 산 향해 떠나갈거나(來歲向何山)

바람 차니 솔 그림자 창에 어리고(風息松窓靜)

향 스러져 스님의 방 하도 고요해(香銷禪室閑)

진작에 이 세상 다 끊어버리니(此生吾己斷)

내 발자취 물과 구름 사이 남아있으리(樓迹水雲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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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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