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집단가출’ 중년 남성 14인의 요절복통 요트여행기

1m ‘깡패문어’와의 死鬪 특공대가 공수한 ‘마라도 자장면’

  •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

    입력2010-08-23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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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 요트에 몸을 싣고 1년 넘게 ‘바다의 백두대간’을 탐험한 14명의 사내가 있다.
    • 요트 한 번 타본 적 없는 초짜들은 백상아리의 위협에 맞서고, 강풍과 싸우며 뱃사람으로 거듭났다.
    •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요트여행처럼 럭셔리하진 않지만, 낭만과 꿈이 가득했던 그들의 파란만장한 모험.
    ‘집단가출’ 중년 남성 14인의 요절복통 요트여행기

    ‘전남 신안군 우이도에서 해안의 모래톱에 배가 얹히는 사고가 발생해 좌초한 집단가출호.

    “여기는 해경 0호선, 북위 000도, 동경 000도에서 서남서 방향 7노트로 운항 중인 선박은 응답바랍니다.”

    인천 옹진군 승봉도 부근 항로를 지날 무렵, 초여름 산들바람에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을 하는 배를 발견한 해경이 무슨 일인가 싶어 호출했다. 항해 중 초단파(VHF) 교신은 진지해야 한다. 더구나 상대가 해상의 치안을 책임지는 해경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호출을 받은 배가 응답을 위해 무전기 마이크에 대고 배 이름을 말하는 순간, 다음과 같이 반응이 왔다. “집단… 뭐라고요?” 건너편에서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흘리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상대편이 들은 배 이름은 ‘집단가출호’였다.

    선체 옆에 커다랗게 새겨진 배 이름은 항해 내내 배꼽 잡는 웃음거리가 됐고, 의사소통을 교란시켰다. 배 이름을 댈 때마다 처음엔 상대방이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사람들 반응에 민망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집단가출 7개월째로 접어든 8차 항해 때는 진해 해양레포츠스쿨에 커다랗게 내걸린 ‘허영만 화백의 집단가출호 환영’이라는 현수막을 보고도 무덤덤했다.

    ‘집단가출호’의 탄생



    생뚱맞은 이름의 요트를 타고 1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매회 2박3일의 파란만장한 모험에 나섰던 집단가출자들은 평균연령이 44세인 중년남자 14명이었다. 사춘기 10대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가출모의는 뒤에 집단가출호 선주이자 선장이 된 만화가 허영만(63) 화백과 산치과 송영복(47) 원장, 기자 출신의 목수 송철웅(47)씨가 술잔을 기울이던 인사동 술집에서 이뤄졌다. 그때가 2008년 12월이었다.

    “산엔 백두대간, 섬엔 올레길, 드넓은 바다엔 무슨 길이 없을까? 이번엔 바람으로 가는 돛단배를 타고 바다의 백두대간을 가는 거 어때? 서해에서 남해를 돌아 국토의 막내 독도까지.”

    어린 시절 꿈 얘기를 나누며 한창 술자리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허 화백이 불쑥 말을 꺼냈다. 이 무렵 그는 세일링 요트에 입문한 지 3년째로 그동안 한강에서 훈련하다 2008년 여름 처음으로 경기도 화성 전곡항에서 바다 세일링을 시작했다. 고향이 전남 여수 바닷가인 그는 유년시절부터 ‘언젠가 돛단배로 우리 바다를 돌아보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형님 나이에 우물쭈물할 시간 없어요.”(송철웅)

    “나는 요트 사법고시가 있다면 패스하고 남을 만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믿으세요.” (송영복)

    그동안 요트를 배우며 한강을 벗어나지 못한 송 원장은 바다로 나가고 싶은 간절한 열망으로 열심히 맞장구쳤다. 곧바로 배 이름이 결정됐다. 가출하는 각오가 아니면 독도까지 머나먼 바닷길을 갈 수 없다는 뜻에서 허 화백이 ‘집단가출호’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날 술자리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산악인 박영석(47) 대장도 “파도와 싸우며 바람을 타고 독도까지, 그거 좋은데요” 하며 거들었다. 오기와 도전욕구에 불타는 초짜들이 의기투합하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곧바로 집단가출호에 승선시킬 가출선원의 ‘징집’이 시작됐다. 가출 모의 주동자 세 사람과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혀 있는 멤버들이 속속 합류했다.

    요트 제작·수리 전문 회사를 경영하는 홍선표(30)씨는 요트선수 출신이라 전문가로 영입됐다. 홍씨는 “선수 시절 레이스 출전 때 2박3일 정도 항해를 나간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1년에 걸쳐 항해에 나선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원래는 요트를 타는 그의 누나가 송철웅씨의 징집 표적이었지만, 사정이 있어 합류하지 못한 누나 대신 얼떨결에 홍씨가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처음엔 멤버 중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드넓은 바다 위에서 좁은 배 안에 여러 명이 타고 북적대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다보니 금방 친해지더라”고 털어놓았다.

    ‘집단가출’ 중년 남성 14인의 요절복통 요트여행기

    집단가출호’ 대원들의 유니폼은 “죄수복 같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홍선표씨를 비롯해 한국스카이다이빙협회 전 회장이자 스쿠버다이빙 마스터다이버 자격증 소지자인 김상덕(52)씨, 11월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4연패 도전을 눈앞에 둔 국가대표 요트선수 정성안(39)씨는 핵심대원으로 징집된 케이스다. 세 사람은 요트 경험이 전혀 없거나 일천한 초짜들로 구성된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였다.

    안산 시화공단에서 고분자소재부품 제조업체를 경영하는 김상덕씨는 삼고초려 끝에 모신 멤버다. 스쿠버다이빙에 능한 데다 요트 모항(母港)이 김씨가 사는 안산과 가까운 곳에 있어 언제든 필요할 때 손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출모의 주동자와 특별 케이스로 징집된 사람들 외에 집단가출호에 동승을 희망하는 멤버들이 속속 합류하면서 2009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항해 훈련에 들어갔다. 첫 항해를 앞둔 4개월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지 못한 여러 명이 떨어져나갔다. 그 과정을 거쳐 정예멤버 리스트가 완성되고 각자의 역할이 주어졌다. 허영만 선장을 필두로 노스페이스 상무 정상욱(54·부선장), 사진작가 이정식(54·엔진·전자장비), 김상덕(돛대), 송영복(키), 송철웅(항로), 박영석(요리), 보험사 FC 김성선(40·정찰), 정성안(팀코치), 건축가 이진원(37·시트), 고층빌딩 유리창닦이 임대식(37·정찰), 다큐멘터리 PD 이상헌(37·항해 다큐 제작), 카메라맨 김기철(31·동영상 촬영), 홍선표(요트 유지보수) 대원이 최초 출항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돌돔 같은 마린룩 유니폼

    ‘집단가출’ 중년 남성 14인의 요절복통 요트여행기

    쌀과 기본 양념 외에 식량을 현지 조달했던 ‘집단가출호’ 대원들.

    대원들 사이에 “우리 배는 자동차로 치면 중고 페라리 한 대 가격 정도는 된다”며 애지중지 대접받던 집단가출호는 실은 선령이 15년이나 된 몹시 낡은 배였다. 처음 배를 본 대원들은 항해용 전자장비도 없고 엔진 상태도 심각한 배의 처참한 몰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세계 요트디자인계의 거장 브루스 파가 디자인한 Farr40모델로 한때 레이스에서 명성을 떨쳤다는 사실이 위안이 됐다. 출항을 앞두고 몇몇 대원은 본격적인 배 수리에 매달렸고 또 다른 세 명은 요트조종면허에 도전했다.

    이진원씨는 “지난 1년간의 항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라이선스를 딴 것”이라고 뿌듯해 했다. 사법고시생을 방불케 하는 열정으로 요트 항해 이론 공부에 열정을 쏟았던 송영복 원장은 바쁜 병원 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면허 따기에 도전해 성공했다. 송철웅씨는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은 시험 준비 한 달 만에 이론과 실기시험을 통과했다. 그게 첫 출항 불과 2주 전이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본격 출항을 앞두고 요트의 성능과 안전을 점검하기 위한 테스트 세일링에 나섰다. 이날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집단가출 남자들의 전국일주 도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게스트로 승선했다. 경기도는 국제보트쇼와 코리아매치컵 세계요트대회를 홍보하기 위해 집단가출호의 항해를 후원했고, SK텔레콤은 1억원을 들여 요트와 항해에 필요한 통신장비시설 일체를 지원해주었다. 이외에 LG와 더 노스페이스(영원무역)도 항해를 후원했다.

    무엇보다 대원들을 기쁘게 한 후원기업은 노스페이스였다. 이곳에 상무로 근무 중인 정상욱 부선장의 배려로 대원들은 각자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요트복을 선물로 받았다. 정 부선장은 검정색과 붉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마린룩 의류도 단체복으로 대원들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단체복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꼭 죄수복 같다” “돌돔 같다”는 놀림을 받았다.

    지난해 6월5일 낮 12시,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집단가출호가 돛을 올리고 모항인 전곡항의 비좁은 수로를 빠져나가 바다로 미끄러지듯 항해를 시작했다. 바다는 잔잔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집 나간 사춘기 아들을 잡으러 다닐 나이에 집단가출을 감행한 중년남자들의 가슴도 꿈과 환상, 낭만으로 한없이 부풀었다.

    집단가출호의 첫 기항지인 인천 굴업도는 환상적인 풍경과 함께 마을이장이 요리해준, 난생처음 먹어보는 물텀벙(아귀)백숙의 기막힌 맛으로 대원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첫 기항지는 백령도였다. 하지만 당시 북한 핵개발과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남북 간의 갈등으로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할 때여서 어쩔 수 없이 백령도를 포기해야 했다.

    모기떼의 습격

    이튿날 상륙한 선갑도는 무인도로 모기의 천국이었다. 밤이 되자 모기떼의 예상치 못한 습격이 시작됐다. 모기가 얼마나 독한지 얇은 옷은 입어도 소용이 없었다. 주삿바늘 같은 모기 주둥이가 옷 속을 뚫고 들어왔다. 침낭에 들어가서 숨쉬기 위해 내놓은 얼굴도 무차별로 공격당했다. 다음은 송철웅씨의 회상이다.

    “견문발검(見蚊拔劍)이라고, 칼이 아니라 대포라도 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대원들한테 무인도에 가져갈 세 가지를 꼽으라면 첫째는 모기장, 둘째는 모기향, 셋째는 모기약일 것이다.”

    섬에서 악몽 같은 하룻밤을 보낸 대원들이 가장 궁금해 한 건 ‘우리가 무인도에 상륙하기 전엔 모기들이 대체 뭘 먹고 살았을까’였다.

    선갑도에서의 고난은 모기로 그치지 않았다. 한밤중에 다른 어선과 집단가출호의 닻줄이 서로 엉키며 충돌위기를 맞았다. 행여 요트 선체가 깨질까봐 다급한 마음에 송영복, 이진원, 홍선표씨가 급히 고무보트를 타고 나가 작업 끝에 엉킨 줄을 풀었다. 기왕 나간 김에 그들은 요트에서 잠을 청했다. 섬 해변에서 비박을 하던 나머지 대원들은 새벽녘 내린 비로 침낭이 젖자 잠이 깨 밖으로 나왔다. 다시 시작된 모기떼의 공격을 피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100여 m 떨어진 요트에서 잠자는 대원들을 깨워 섬을 탈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가량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렀지만 기척이 없자 평소 침착한 성격의 이정식씨가 구호를 통일하자고 했다.

    “사람 살려!”

    비에 젖은 몰골로 모기를 피하려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중년남자들의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실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송철웅씨는 “처참한 지경이었다. 특히 모기에 취약한 김성선 대원은 조류에 떠밀려와 해변에 박혀 있는 녹슨 드럼통을 발견하고는 코펠로 필사적으로 두드렸다. 요트에 있는 사람들이 깼을 때는 코펠이 완전히 찌그러진 상태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김성선씨는 나중에 “바다로 뛰어들어 배까지 헤엄쳐 갈까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수영을 전혀 못하는 ‘맥주병’이었던 김성선씨가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차 항해 때 상륙한 서해 격렬비열도에서 임대식, 김성선씨는 달빛 아래 진풍경을 연출했다. 김씨가 볼일을 보기 위해 잠깐 엉덩이를 노출한 사이 모기떼의 공격을 당한 것. 수십 마리의 벌에 쏘인 것처럼 살이 부풀어 올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임씨는 김씨의 엉덩이에 물파스를 발라줬다.

    모기 때문에 난생 처음 피부과를 찾은 사람은 3차 항해부터 동영상 촬영팀에 합류한 이상헌씨였다. 원인 제공자는 후배 카메라맨 김기철씨. 김씨는 여관을 알아보던 이씨에게 “뒤늦게 합류했으니 대원들과 서먹함을 없애려면 똑같이 비박을 해야 한다”며 극구 여관 잠을 만류했다.

    화장실 폭발사건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이상헌씨는 넋을 놓은 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모기에 대해 사전정보가 없었던 그는 밤새 침낭 밖으로 맨얼굴을 드러낸 채 잠을 잤고, 드센 어청도 모기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송철웅씨는 “‘대원들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웅성거리는 소릴 듣고 잠에서 깼을 땐 그가 누군지 몰랐다. 얼굴이 너무 심하게 퉁퉁 부어올라 눈과 코가 거의 파묻힐 지경이었다”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그 사건으로 이씨는 한동안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회사동료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길 꺼렸다. 전철이나 버스에서는 주위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그를 피했다.

    “거울을 보면 내가 놀랄 정도니까 딴 사람들이 날 피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가려운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씨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병원으로 직행한 이유였다.

    모기 때문에 뭍에서의 ‘볼일’이 전투를 방불케 했다면, 항해 도중 흔들리는 요트 위에서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쳐야 했다. ‘헤드(head)’라 불리는 요트 화장실은 사용 전후 밸브와 펌프를 조작해야 하는 등 사용법이 좀 복잡하다. 아니나 다를까. 2차 항해 때 격렬비열도에서 파수도로 향하던 도중 화장실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이진원씨가 밸브를 여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오물이 용암 분출하듯 솟구쳐 오른 것이다. 밸브 조작 실패와 뜨거운 열기가 폭발 원인이었다. 너무 황당하고 놀란 나머지 이씨는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 일로 남은 항해 기간 내내 대원들은 가능하면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생리적 현상을 참고 또 참았다.

    고삐 풀린 철부지

    지난해 7월 초, 충남 태안군 외도에서 오천항으로 가는 뱃길에 여유가 생기자 초도 부근에서 항해 도중 물에 빠지는 사고에 대비한 구조 훈련 ‘MOB(Man Over Board)’를 실시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위해 실제로 바다에 빠질 사람이 필요하다”는 허영만 선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원자 네 명이 앞다퉈 물로 뛰어들었다.

    동작 빠른 자원자들의 속셈은 훈련보다 잿밥에 있었다. ‘이참에 시원하게 바다수영이나 즐기자’는 심산이었다. 몇 시간에 걸친 한여름 항해는 더위 때문에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고 바람조차 한 점 없는 날이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몸속 수분이 모조리 증발하는 느낌이다. 더구나 비좁은 요트에 땡볕을 피할 그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날 자원자였던 송철웅씨는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훈련 후일담을 들려줬다.

    “그날 한 시간 가까이 수영을 즐기다 나왔는데 나중에 소청도와 을왕리 부근에서 상어가 발견됐다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바다에 뛰어들었던 대원들 모두 기절할 뻔했다. 바다에 출몰했던 상어는 식인상어로 악명 높은 백상아리였고 몸길이는 5m가 넘었다. 을왕리는 우리가 수영한 초도와 불과 100㎞ 거린데 상어의 먹이활동 영역을 감안하면 우린 백상아리와 함께 수영장에서 헤엄친 꼴이었다.”

    평소 사회생활할 때는 직업과 나이 탓에 점잔을 빼던 사람들이 일단 가출해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순간, 체면을 팽개치고 고삐 풀린 철부지처럼 돌변했다. 지난해 8월 중순, 요트가 목포 삼학도 마리나에 도착하자 “일사병에 걸릴 것 같다”며 투덜대던 김상덕, 송영복, 이진원, 홍선표씨가 쏜살같이 마리나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높이 7m의 난간에서 공중제비로 바다에 몸을 날린 그들은 30대와 50대의 나이를 무색케 했다.

    지난해 10월 제주 화순항에서 아침을 맞이한 대원들이 비박지를 정리하면서 전날 저녁 한치를 튀겼던 식용유를 빈 페트병에 담았다. 그게 하필 상표까지 멀쩡히 붙어 있던 제주 감귤 주스병이었다. 색깔까지 주스와 절묘하게 닮은 식용유를 맨 처음 들이켠 사람은 김상덕씨였다. 혼자 기름을 ‘원샷’한 게 억울했던 김씨는 그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 뚜껑을 얌전히 닫은 주스병을 뱃전에 올려놓았다. 그의 장난기에 걸려들어 당한 사람은 이정식, 홍선표씨였다.

    기름주스 사건을 일으킨 주범 한치는 전날 요트 경주에서 획득한 우승 상품이었다. 목포에서 제주 도두항까지 때 아닌 요트 레이스가 벌어졌다. 요트 동호인이라면 누구나 손꼽아 기다리던 목포~제주 요트 레이스가 신종플루 때문에 무산되자 집단가출호 외에 3척의 요트가 참가해 친선 경주를 펼쳤다.

    ‘집단가출’ 중년 남성 14인의 요절복통 요트여행기
    요트를 탄 지 6개월밖에 안된 신참의 수가 절반을 넘었던 집단가출호에서는 허 선장의 지시 아래 대원들이 콩 튀듯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일천한 경험 탓에 일사불란함과 팀워크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이때까지도 윈치(winch·돛을 올리고 내릴 때 쓰는 도르래)에 줄을 거꾸로 감는 대원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은 국가대표 요트선수인 정성안씨로부터 항해 짬짬이 레이스 세일링 기술을 배웠다는 점이다. 허무하게 취소된 레이스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던 집단가출호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들떠 죽기 살기로 덤볐다. 그 덕분에 우승은 그들의 차지가 됐다. 대원들은 냉동 한치 박스를 품에 안고 의기양양 V자를 그리며 기념촬영을 했다.

    ‘멀미왕’ 박영석?

    화순항은 우리나라 최남단 섬 마라도 턱 밑에 있는 어촌 항구다. 마라도 상륙을 앞두고 대원들은 휴대전화 광고로 유명해진 ‘마라도 자장면’을 먹을 생각에 한껏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그날따라 파도가 거칠어 날카로운 화산암과 암초로 둘러싸인 마라도 선착장에 접안하는 것은 위험천만했다. 절대로 자장면을 포기할 수 없었던 대원들은 특공대를 조직해 고무보트를 이용한 상륙작전을 펼쳤다.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는 여주인을 졸라 자장면 12그릇을 얻기까지 30분이 걸렸다. 그동안 마라도 산책길에 나선 대원들 휴대전화가 차례로 불이 났다.

    “왜 이리 늦어? 혹시 자리 잡고 앉아 탕수육에 배갈 마시는 거 아냐?”(정상욱)

    “형, 배고파서 쓰러지겠어요. 죽을 것 같아요.”(임대식)

    드디어 기다리던 자장면이 도착하자 요트에 있던 대원들이 만세를 불렀다.

    갓 잡은 생선, 식량보급을 책임진 김상덕, 송영복씨가 수중에서 따온 성게, 전복 등으로 항해 때마다 대원들은 먹는 즐거움을 누렸다. 항해 도중 만난 어선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수산물을 건네주는 등 넉넉한 바다 인심까지 덤으로 누릴 기회도 많았다.

    식도락의 호사 뒤에 따라오는 뱃멀미는 거의 모든 대원을 괴롭혔다. 비상탈출용으로 요트 뒤에 매달고 다니던 고무보트는 ‘멀미선’이라는 애꿎은 별칭을 얻게 됐다. 항해 때마다 붙이는 멀미약으로 귀 밑을 도배해 ‘멀미왕’으로 불린 김성선씨는 멀미선 으뜸 선원이었다. 거의 모든 대원이 멀미선 승선 경험이 있지만 그중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대원은 박영석씨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른 산악인이 뱃멀미로 녹초가 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본 정상욱 부선장이 혀를 끌끌 찼다. “평소 높은 데만 있다가 낮은 데 와서 그런가?”

    바다로 가출한 이들의 하루는 단조롭게 흘렀다. 육지와 달리 딱히 갈 곳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일하다 먹고 놀고 자는 게 전부였다. 심심찮게 벌어지는 해프닝과 돌발 상황도 여유와 낭만으로 웃어넘기던 집단가출호 대원들의 혼을 쏙 뺀 사건이 발생한 건 2009년 마지막 항해에서였다.

    여수반도 남단 소리도 선착장에 정박시킨 요트 선실에서 잠을 자던 송철웅씨를 깨운 건 부숴버릴 기세로 배를 두드려대던 파도와 음산하게 윙윙 울부짖는 바람소리였다. 잠결에 갑판 위로 기어 나오자 몸을 가누기도 힘든 강풍이 몰아쳤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밤사이 선착장으로 떠밀려온 요트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선착장과 요트의 거리는 불과 10m였고, 충돌 일보직전의 위급한 상황이었다. “배가 밀린다. 당장 일어나!”

    선실에서 함께 잠을 자던 송영복, 정성안, 홍선표씨가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왔다. 당장 해야 할 일은 선미(船尾)와 선착장을 연결해둔 로프를 끊는 일이었다. 송철웅씨가 다급히 구명조끼에 달린 칼을 찾아 로프를 끊자 예상대로 배가 밀리는 방향이 바뀌어 충돌위기는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트를 고정해둔 닻이 완전히 빠져 있어 배는 또다시 내항 쪽으로 밀려갔다. 배와 함께 일엽편주(一葉片舟) 신세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던 대원들의 몸에 어느 순간 ‘퉁’하는 둔탁한 충격이 전해졌다. 기어이 항구 안쪽 수심이 낮은 곳까지 밀려온 배가 그대로 얹혀버린 것이다.

    ‘잔인한 팀닥터’와 ‘초식이’

    ‘집단가출’ 중년 남성 14인의 요절복통 요트여행기

    집단가출호 대원들은 “독도 땅을 밟지 못한 게 아쉽다”며 조만간 다시 승선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충격과 함께 호되게 넘어진 송영복씨의 입술이 터지고 앞니가 부러졌다. 집요한 폭풍과 파도는 계속해서 배를 암벽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요트 위 대원들이 살아남을 길은 단 하나. 다행히 그때까지 배 뒤에 매달려 있던 고무보트를 타고 40m 거리의 선착장 뒤 바지선으로 가서 로프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목숨을 건 사투가 될 게 뻔한 상황에서 선뜻 몸을 내맡기긴 쉽지 않았다. 아주 짧은 침묵 뒤 정성안, 홍선표씨가 로프 뭉치를 들고 고무보트로 뛰어내렸다. 힘겨운 싸움 끝에 바지선으로 기어 올라간 두 사람은 마침내 요트를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때서야 송영복씨가 비상약품함을 뒤져 진통제 한 알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앞니가 부러진 상태라 약보다 마취제 주사로 진통을 더 빨리 가라앉힐 수 있었지만 그는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갖고 있던 마취제 주사를 쓰지 않았다. 소리도에는 병원이 없었다. 이 일로 그는 ‘잔인한 팀닥터’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송영복씨의 낚싯줄에 대형 만새기가 걸렸다. 갑판 위로 끌어올려진 만새기의 힘이 어찌나 센지 격렬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윈치핸들(winch handle)을 집어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만새기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지켜보던 모든 대원은 충격적인 장면에 잠시 말을 잃었다.

    한번은 허 선장의 손가락에 낚싯바늘이 박히는 사고가 있었다. 미늘까지 깊숙이 박힌 탓에 그대로 잡아당겨 뽑아내면 주변 살까지 찢겨나갈 상황이었다. 대원들이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타난 송영복씨는 상처를 살피더니 옆에서 말릴 틈도 없이 그대로 바늘을 잡아 빼버렸다. 두 사건을 경험한 대원들은 ‘적어도 배에서는 절대로 다치면 안 되겠구나’ 하고 몸조심을 했다.

    만새기 사건에서 특히 충격을 받은 건 생선과 고기를 일절 입에 대지 않고 풀만 먹어 ‘초식이’라는 별명이 붙은 임대식씨였다. 오랜 세월 암벽등반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와 근육을 자랑하는 그는 생김새와 달리 마음이 여렸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대원들에게 “그날 엄청 무서웠다. 영화 ‘넘버 쓰리’에 나오는 재떨이(송강호 분)가 떠올랐다”고 고백했다.

    5월 초, 마지막 항해에서 벌어진 ‘깡패문어’ 소동에서도 그의 여린 마음씨와 식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독도 상륙을 끝으로 집단 가출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기로 한 대원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울릉도 저동항에서 출항을 기다렸다. 하지만 험한 날씨 탓에 울릉도 남동쪽 바다의 너울이 몹시 사나웠다. 바람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동안 김상덕씨가 항구 앞 후미진 곳을 찾아 수중촬영에 들어갔다. 파도가 없는 곳을 찾아 입수했던 그는 예상보다 빨리 다급하게 수면 위로 부상했다. 손에는 엄청난 크기의 문어가 들려 있었다.

    다음은 김상덕씨의 회상이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촬영 중 문어가 갑자기 카메라로 달려들어 처음엔 그냥 밀쳐냈다. 그런데 기를 쓰고 달려들어 호흡기를 붙들고 늘어지는 바람에 입에 물고 있던 호흡기가 빠져버렸다. 예비용 호흡기를 찾아 물었는데도 계속 달려들기에 큰일나겠다 싶어 문어를 잡고 바로 물 위로 올라왔다. 나중에 수중촬영 장면을 재생해보니 위험했던 상황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깡패문어’는 전체 길이가 1m를 넘는데다, 한 손으로 들기에도 버거운 무게였다. 경험 많은 다이버가 아니었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대원들 사이에 포획된 문어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김상덕씨는 “괘씸하긴 하지만 별일 없었으니 그냥 보내주자”고 했다. 옆에 있던 임대식씨도 놓아주라며 적극 거들었다. 하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때 이진원씨가 “형님의 원수를 갚게 해달라”며 문어를 들고 재빨리 선실로 사라졌다.

    임대식씨가 김성선씨 외에 일면식도 없던 중년남자들 틈에 끼어 가출을 감행하게 된 건 첫 항해를 앞두고 요트 청소를 도와줬기 때문이다. 임씨는 “성선이 형이 전화를 걸어와 요트 청소를 해달라기에 두 번인가 도와줬다. 그걸로 끝내려고 했는데 다른 대원들이 같이 가자는 바람에 얼결에 따라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집단가출 모의 주동자 중 한 명인 송철웅씨는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오래 견디는 인내력,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인간성을 대원 ‘징집’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다.

    난공불락의 요새, 독도

    파도가 잠잠해진 틈을 타 독도를 향해 출발한 집단가출호 대원들은 섬 주변만 맴돌다 끝내 상륙에 실패했다. 바위 절벽에 부딪히는 거대한 파도로 인해 독도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돼 있었다. 울릉도를 떠난 집단가출호는 장장 27시간의 논스톱 항해 끝에 삼척항으로 되돌아왔다. 1년간 거친 바람과 거센 파도, 뜨거운 태양과 싸운 중년남자들의 집단가출도 이곳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독도 상륙을 자축하기 위해 챙겨간 샴페인은 그날 밤 노숙 장소로 정한 삼척항의 모퉁이에서 개봉됐다. 이날 밤 그들은 집단가출 항해 동안 경험한 무용담을 쏟아내며 저마다의 추억에 잠기느라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10대 청소년의 로망이 가출이라면 중년남자들의 로망은 일상탈출과 요트다. 팍팍한 사회생활에 시달리고 머리 굵은 자식들의 반항과 아내의 바가지를 겪다보면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집단가출호 대원들의 첫 항해와 별이 총총한 해변에서의 첫 야영은 일상탈출과 요트 항해에 대한 남자들의 환상을 채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보고 요트 항해에 대한 환상에 빠졌다”는 이진원씨의 고백처럼 화려하고 로맨틱한 요트 항해는 어디까지나 외국영화에 나오는 얘기에 불과했다.

    “난 말이야, 요트 타면 와인도 우아하게 마시고 편안하게 책도 읽을 수 있고, 뭐 그럴 줄 알았어. 근데 이거 갈수록 개고생이네? 굶고 젖고 잠 못 자고….”(허영만 선장)

    “저는 요트 사면 예쁜 여자는 덤으로 따라오는 줄 알았어요. 잡지에 나오는 요트 사진 보면 다 그렇던데.”(이진원)

    “우리가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는 줄 남들이 알까? 다들 무슨 호화 크루즈 여행인 걸로 생각하더라고.”(정상욱 부선장)

    송철웅씨는 “엔진을 쓰지 않는 세일링 요트 항해는 중노동이다. 공짜 에너지인 바람을 활용해서 달리는데, 세상에 공짜란 없다. 공짜 에너지를 쓰기 위해서는 사람이 그만큼 힘들게 일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오랫동안 등산과 트래킹, 캠핑을 즐기며 산사나이로 지낸 대부분의 대원들은 1년 만에 바닷바람에 검게 그을린 뱃사람 티를 물씬 풍겼다.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지 못한 게 아쉽다” “남편 없이 혼자 직장 생활하랴 식당일 돌보랴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하다”며 뒤늦게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던 사람들이 “또 가출을 감행할 거냐”고 묻자 한목소리로 답했다.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가출)이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독도 땅을 밟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두고두고 가시지 않는다”는 그들은 조만간 다시 집단가출호에 승선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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