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9월2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전현직 최고 권력자들이 건국 60주년 기념 초대형 뮤지컬 ‘부흥의 길’을 관람한 뒤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 왼쪽부터 허궈창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권력서열 8위), 시진핑 국가부주석(6위), 자칭린 전국정협 주석(4위),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2위), 후진타오 국가주석(1위), 장쩌민 전 국가주석, 원자바오 총리(3위), 리창춘 상무위원(5위), 리커창 부총리(7위), 저우융캉 상무위원(9위).
리 부총리의 평소 신조는 신초(愼初·시작할 때처럼 신중하고), 신미(愼微·작은 일에도 신중하며), 신독(愼獨·혼자 있을 때도 삼가고 경계하며), 신욕(愼欲·물욕을 내지 않는다)이다. 주변 인사들은 그를 ‘능력이 출중해 일을 잘하면서도 성과를 자랑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즐기는 관리’라고 평한다.
2006년 가을 제16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 개막 직전 그를 2시간 동안 인터뷰한 홍콩 ‘다궁(大公)보’ 기자는 “그는 인문지식의 기초가 탄탄했다.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말했다. 또 “인터뷰 기사가 나가기 전에 좀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충실히 기록했으면 됐지 내가 볼 필요는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전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대인관계가 뛰어나며 학구파로 불린다. 논문 장학금이나 원고료를 받으면 동료들과 식사를 하거나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두텁게 했다고 홍콩에서 발간된 ‘중공(中共) 제5세대(第五代)’는 전했다.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에서 중국 지도부 인사 가운데 그를 따라올 자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부하를 혹사하면서 일을 시키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랴오닝성의 고위 간부는 “리 서기는 일벌레 스타일이지만, 그렇다고 주말에 간부를 불러 모아 회의를 열지 않았다”고 했다.
일을 할 때는 조리가 있고 질서정연했다. 아랫사람을 질책할 때는 절대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걸핏하면 밤늦게, 혹은 주말에도 아랫사람을 호출해 호통을 치거나 가욋일을 시키는 것으로 소문난 보시라이(薄熙來·61) 충칭(重慶)시 서기와 정반대다. 그래서인지 주변 인사 가운데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04년 3월 랴오닝성장을 마치고 상무부장으로 영전하는 보시라이의 이임식엔 랴오닝 성 간부들이 대거 불참했다. 같은 해 12월 리커창이 허난성 당 서기를 마치고 떠날 때는 관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오랫동안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그가 여러 차례 일어나 그만하라고 손짓을 하고 나서야 박수가 그칠 정도였다. 그는 대중을 상대로 연설할 때는 주로 원고 없이 즉석에서 했다. 하지만 몇 십 분의 연설에서도 정확한 숫자가 수없이 튀어나와 청중을 놀라게 했다.
리커창은 청빈한 삶을 즐겼다. 공무와 관련된 연회가 아니면 정중히 거절했다. 별 일이 없으면 대부분 비서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2006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현지 관리들이 보낸 선물을 완곡하게 거절해 돌려보냈다. 부친의 장례는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이 간소했다.
그는 대학시절 자유파 지식인들과 잘 어울렸다. 그와 함께 베이징대 법학과에서 공부한 유명 법학자 장밍안(姜明安) 베이징대 교수는 “리커창은 민주법치 관념이 매우 강했다”며 “주위 동료와의 관계가 좋고 사상 역시 매우 자유분방했다”고 전했다.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중국을 떠나 반체제 인사가 된 그의 대학 동기 왕쥔타오(王軍濤)도 “리커창은 예리한 말재주와 재능, 지혜를 갖춘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리커창이 ‘벼슬에 대한 욕망(官·#54510;)’이 강하며 정계로 진출한 이후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가 대학을 졸업한 뒤 공청단의 중앙서기처 서기 겸 전국청년(靑聯)의 부주석으로 있을 때는 크게 달라진 행태를 보였다. 톈안먼 사태 한 달 전인 1989년 5월 그는 여러 차례 학생 지도부에 “학교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 그러면서 학생 지도부와 대화하려는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를 비판했다. 대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덩샤오핑(鄧小平), 양상쿤(楊尙昆), 리펑(李鵬)의 입장을 시종일관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