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더러운 게 인간의 정이라더니….
-드라마 ‘구미호’ 중에서

과거 구미호는 퇴치해야 하는 ‘끔찍한 타자’였다. 그러나 최근엔 연민과 공감을 자아내는, 우리와 매우 닮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 서성이는 경계적 존재, 구미호와 여우누이. 그녀들은 인간의 유혹자로 나타났다가 인간이 그들에게 마음을 내주는 순간 공격자로 돌변하고 인간이 그 공격에 대응하는 비책을 찾아내는 순간, 처참한 희생양으로 사라져간다. 그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고, 멀리하기엔 너무나 매력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매년 여름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구미호 이야기. 여기에 ‘구미호의 딸’로서 여우누이의 캐릭터가 더해졌다.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서로 다른 고전 캐릭터가 하나의 콘텐츠에서 만나 상호텍스트성을 발휘하는 흥미로운 사례다. 본래 구미호 이야기와 여우누이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이야기이지만, 남성의 배신으로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와 그녀의 딸로 태어나 ‘원치 않는’ 구미호로 성장해가는 여우누이의 이야기는 ‘합체’되어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구미호 설화와 여우누이 설화는 각 지방에서 서로 다른 맥락으로 구전되어왔고 다양한 이본(異本)이 존재한다. 고전의 과감한 재해석과 리메이크가 대중문화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 고전의 ‘재해석’ 자체가 새로운 창조적인 이본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로써 구미호와 여우누이 이야기는, 그 누구의 창조물로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는 열린 텍스트가 된다.
구미호와 여우누이 이야기는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위협적인 여성의 힘을 통제하고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곤 했지만, 21세기의 구미호와 여우누이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횡단하는 경계적 존재로서 주목받는다. 즉 구미호와 여우누이가 ‘치명적인 여성, 위험한 여성’에 대한 경계와 추방의 서사였을 때는 구미호의 ‘여성성’이 주목받았지만, 그녀들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랑과 연민의 주체로 떠오르는 지금 그녀들은 SF 영화의 인조인간이나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고뇌하는 늑대인간에 더욱 가까운 존재가 된다. 21세기 구미호와 여우누이는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저 ‘인간이 되고 싶다’고 외치던 존재, ‘인간 이하의 존재’로 그려지던 과거의 구미호와 여우누이는 이제 인간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존재, 즉 인간의 ‘성립조건’을 다시 묻게 하는 존재로 탈바꿈한 것이다. 구미호와 여우누이 설화는 문자 텍스트로 규정될 수 없는 구전문학이기에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 ‘버전 업’되면서 ‘새로운 고전’으로 형성되는 흥미로운 텍스트다. 고전이 단지 다시 읽히고 리메이크되는 것이 아니라 고전 자체가 스스로 변형되는 새로운 창작의 현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최고 인기 캐릭터였으며,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설화의 주인공인 구미호는 21세기에 들어 어떤 문화적 의미로 재해석/재창조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