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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시대의 클래식 캐릭터 ⑭

한국형 호러(horror)물의 끊임없는 귀환과 진화

구미호 vs 여우누이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한국형 호러(horror)물의 끊임없는 귀환과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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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한과 복수를 꿈꾸는 여우 vs 추방과 퇴치를 꿈꾸는 인간

구산댁을 첩으로 들이는 것은 괜찮습니다. 허나 양녀라니요? 우리가 딸이 없습니까, 아들이 없습니까. 누구의 씨인 줄도 모르는 연이를 어찌 양녀로 삼습니까.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 중에서

한국형 호러(horror)물의 끊임없는 귀환과 진화

‘구미호 : 여우누이뎐’의 주인공 한은정. 이 드라마는 구미호 설화와 여우누이 설화를 합체하고 구미호의 ‘계급성’을 문제 삼음으로써 구미호 리메이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여우누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외부에서 잘못 들어온 계집, 혹은 잘못 태어난 여자아이가 집안을 망치니 경계하라’는 내용으로 해석되곤 했다. 구미호 혹은 여우누이처럼 위협적인 여성을 제거하는 것은 오라버니 혹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구미호 설화에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에 대한 공동체의 경계심, 아무리 매력적인 여성이라도 가부장제의 질서를 위협한다면 ‘처치’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 사이에서 서성이던 구미호와 여우누이는 설화의 끝자락에서는 언제나 죽거나 사라짐으로써 ‘욕망의 대가’를 치른다. 구미호가 지닌 욕망의 핵심이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라면 여우누이의 욕망은 ‘인간의 탈을 쓴 채 인간을 위협하는 여우’의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구미호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의 테마는 결국 인간사회와는 섞일 수 없는 구미호의 비극적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구미호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서 서성이다 결국 ‘비인간’의 세계로 추방되어야 했다.



21세기에 들어 더욱 과감한 개작과정을 거친 구미호 관련 콘텐츠에서는 구미호를 통한 알레고리적 효과에 주목한다. 구미호를 말하지만, 결국 구미호 ‘이상’의 것을 말하고자 하는 텍스트가 늘어난 것이다. 드라마 ‘구미호 외전’이나 ‘호녀’ 이후 더욱 과감한 원작의 변형과정을 거친 구미호 서사는 단지 ‘옛날이야기’를 넘어 ‘지금-우리’의 절박한 사회문제를 은유하는 서사로 변형되고 있다. 특히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구미호 설화와 여우누이 설화를 합체하고, 구미호의 ‘계급성’을 문제 삼음으로써 구미호 리메이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수십 년간 반복돼온 ‘전설의 고향’에서 가난한 떠꺼머리총각의 아내로 살면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현모양처형 구미호’. 2010년, 기존의 어떤 드라마에서보다도 더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구미호는 대가댁의 ‘후처’로 들어가면서 새로운 계급적 환경에 처하게 된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 자신이 천년 묵은 구미호임을 알고 있는 ‘구산댁’과 달리 여우누이 ‘연이’는 자신이 여우의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것을 모른다. 인간의 나이로 열 살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여우가 될 것이니, 그때까지는 이 엄청난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은 구산댁. 구미호를 목격한 비밀을 10년 동안 지키기로 약속한 남편의 배신으로 결국 인간이 되지 못하자, 다시는 그 어떤 인간도 믿지 않겠다고 결심한 구미호. 그러나 그녀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준 인간 윤두수에게 사랑을 느낀다. 점점 여우의 야생적 본능을 깨닫는 딸 연이조차 반가(班家)의 자제 정규 도령과 사랑에 빠지자 구산댁은 ‘구미호’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더 큰 혼란을 느낀다. 구미호와 인간이 결합하여 더욱 ‘인간적인’ 형질을 지닌 딸 연이와 구미호 자신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결정적으로 윤두수는 구미호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그녀를 후처로 맞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딸 초옥의 불치병을 낫게 하기 위해 구미호의 딸 연이의 간을 희생제물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윤두수는 구산댁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고, ‘내 울타리로 들어오너라’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윤두수라는 이 강력한 가부장이 통제하는 ‘울타리’ 자체가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본처와는 딸 하나를 두고 있고, 첫 번째 후실과는 두 아들을 낳았으며, 이제 ‘누구의 씨인 줄도 모르는’ 연이를 데려온 구산댁이 두 번째 후실이 된 것이다. 윤두수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 되기 위해 이 세 여인은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인다. 게다가 친딸 초옥은 오랜 병마와 싸우며 극도로 히스테리한 소녀가 되었고, 연이를 아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광기어린 질투심을 느낀다. 윤두수가 철저히 ‘관리’해야 하는 여성이 무려 다섯 명으로 늘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후처인 구산댁과 딸 연이를 향한 온 집안 식구들의 경계심은 윤두수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자신의 딸’ 초옥을 살리기 위해 ‘타인의 딸’ 연이를 죽이기로 결심한 윤두수와 그의 본처는 시시각각 구산댁과 연이의 생존을 위협하며 ‘구미호의 비밀’에 점점 가까이 다가선다. 이렇게 구미호 설화는 ‘가족’의 테마를 중심으로 끌어들이면서 ‘가족의 울타리’에 포섭되지 못하는 여성들의 피비린내 나는 생존의 드라마로 탈바꿈했다. 구미호는 인간에게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이나마 갈구하지만, 구미호를 형식적인 가족으로 받아들인 인간들은 구미호 모녀를 ‘인간 이하’로 대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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