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문에서 대조루로 오르는 숲길.
산성에 얽힌 단군과 관련된 전설과 조선왕실의 사고수호사찰이라는 특별한 임무 덕분에 이 절집에는 격동의 세월을 이겨낸 숲이 있고, 절집 건물의 중축과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500~600년 묵은 노거수들과 함께 전해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전등사를 철마다 찾게 만드는 이유다.
전등사를 찾으면 절집 숲을 순례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그 첫 절차는 식당으로 번잡한 동문거리보다는 한적한 남문으로 진입하면서 초입의 들머리 소나무 숲을 살피는 일이다. 다른 절집에 견주어 들머리 솔숲은 볼품없지만, 지난 40여 년 동안의 압축성장기에 작은 면적이나마 솔숲의 형태를 지켜낸 것에 고마워해야 할 형편이다. 그래서 절집을 찾을 때마다 살아남은 행운을 축복하며, 앞으로도 멋있게 살아가도록 소나무에게 축원한다. 다행스럽게도 인천시가 숲 가꾸기 예산을 들여 남문과 동문 주변의 소나무 숲 10ha를 가꾼다고 하니 앞으로도 이 솔숲을 더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산성에서 바라보는 풍광
남문을 들어서서는 왼편 부도전 소나무 숲을 잠시 거닐다가 종해루 옆으로 난 성곽 길을 따라 서문 쪽으로 오르는 것이 나의 절집 숲 순례의 다음 순서다. 서문 쪽으로 오르는 성곽 길은 경사가 급하기에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인적이 드문 성곽 길을 올라서면 동쪽과 남쪽은 물론이고 저 멀리 북쪽으로도 툭 트인 광활한 풍광이 나타난다. 그중에 인상적인 것은 김포반도와 강화도를 갈라놓은 염하(鹽河)라 부르는 강화해협이다. 짧은 걸음품으로 이처럼 광활한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삼랑산성의 이 성곽 길 걷기를 즐긴다.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랑산성은 삼국시대 토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롭게 쌓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삼랑산성은 타 지역의 산성과는 달리, 성내에는 오직 전등사만 있기 때문에 역사성과 희귀성을 함께 간직한 산성으로 유명하다. 산성의 전체 길이는 2.3km로 높낮이의 편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쉽게 올라 일주를 할 수 있다.
산성의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22m인 정족산(鼎足山) 정상(그래서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이며,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안부(鞍部)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자리 잡고 있다. 지세를 이용해 성벽이 꺾여 도는 10여 곳에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곡성(曲城) 형태도 간직하고 있다.
남문과 서문 사이에 난 성곽 길 산책 중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마니산과 전등사를 조망하는 일이다. 마니산은 서문 부근 어느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지만, 전등사를 조망하기 좋은 장소는 남문과 서문 사이의 성곽 길 중, 가장 높은 지점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벼랑바위다. 내 카메라의 gps 좌표에 북위 37도37초7881, 동경 126도29초0019로 찍힌 이곳에선 삼랑산성 전체는 물론이고, 산성 속에 파묻힌 절집과 10여 년 전에 복원한 정족산사고까지 한눈에 넣을 수 있다. 절집마당을 지키고 선 400년생 느티나무의 당당한 모습과 대조루(對潮樓) 옆의 우람한 단풍나무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안목이 있으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