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전등사의 명상 숲

‘나’를 벗어버리고 ‘나’를 놓아버리게 하는 곳

  •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입력2010-09-02 13: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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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성에 얽힌 단군과 관련된 전설이 있고 조선왕실의 사고(史庫)수호사찰이었던 전등사.
    • 삼랑산성 안에 자리 잡아 산문이나 일주문이 없는 독특한 절집인 전등사에는 격동의 세월을 이겨낸 숲길이 있고 600년 된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특히 단풍철이 되면 노란색과 갈색 단풍으로 별천지를 이루는 활엽수 숲이 일품이다.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서어나무, 느티나무, 고로쇠나무, 엄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황갈색 풍광은 계절의 정취를 즐기고자 길을 나선 이들에게 자연이 안겨주는 멋진 선물이다.
    전등사의 명상 숲

    남문에서 대조루로 오르는 숲길.

    이땅 어느 절집인들 터 잡은 곳에 의미가 없으랴만, 어디 전등사만 할까. 전등사는 독특한 절집이다. 산성 안에 절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등사에는 산문이나 일주문이 없다. 대신 종해루(宗海樓)란 이름을 가진 남문(南門)과 누각이 없는 동문(東門)이 절집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단군 왕검이 세 아들(부루, 부소, 부여)에게 봉우리 하나씩 성을 쌓게 하여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삼랑산성 안에 자리 잡은 절집의 위치도 유별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정족산사고’를 지킨 조선왕실 종찰로서의 사격(寺格)도 이채롭다. 사고수호사찰(史庫守護寺刹)은 전등사와 함께 월정사(오대산사고), 안국사(적성산사고), 각화사(태백산사고)뿐이기 때문이다.

    산성에 얽힌 단군과 관련된 전설과 조선왕실의 사고수호사찰이라는 특별한 임무 덕분에 이 절집에는 격동의 세월을 이겨낸 숲이 있고, 절집 건물의 중축과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500~600년 묵은 노거수들과 함께 전해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전등사를 철마다 찾게 만드는 이유다.

    전등사를 찾으면 절집 숲을 순례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그 첫 절차는 식당으로 번잡한 동문거리보다는 한적한 남문으로 진입하면서 초입의 들머리 소나무 숲을 살피는 일이다. 다른 절집에 견주어 들머리 솔숲은 볼품없지만, 지난 40여 년 동안의 압축성장기에 작은 면적이나마 솔숲의 형태를 지켜낸 것에 고마워해야 할 형편이다. 그래서 절집을 찾을 때마다 살아남은 행운을 축복하며, 앞으로도 멋있게 살아가도록 소나무에게 축원한다. 다행스럽게도 인천시가 숲 가꾸기 예산을 들여 남문과 동문 주변의 소나무 숲 10ha를 가꾼다고 하니 앞으로도 이 솔숲을 더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산성에서 바라보는 풍광

    남문을 들어서서는 왼편 부도전 소나무 숲을 잠시 거닐다가 종해루 옆으로 난 성곽 길을 따라 서문 쪽으로 오르는 것이 나의 절집 숲 순례의 다음 순서다. 서문 쪽으로 오르는 성곽 길은 경사가 급하기에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인적이 드문 성곽 길을 올라서면 동쪽과 남쪽은 물론이고 저 멀리 북쪽으로도 툭 트인 광활한 풍광이 나타난다. 그중에 인상적인 것은 김포반도와 강화도를 갈라놓은 염하(鹽河)라 부르는 강화해협이다. 짧은 걸음품으로 이처럼 광활한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삼랑산성의 이 성곽 길 걷기를 즐긴다.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랑산성은 삼국시대 토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롭게 쌓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삼랑산성은 타 지역의 산성과는 달리, 성내에는 오직 전등사만 있기 때문에 역사성과 희귀성을 함께 간직한 산성으로 유명하다. 산성의 전체 길이는 2.3km로 높낮이의 편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쉽게 올라 일주를 할 수 있다.

    산성의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22m인 정족산(鼎足山) 정상(그래서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이며,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안부(鞍部)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자리 잡고 있다. 지세를 이용해 성벽이 꺾여 도는 10여 곳에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곡성(曲城) 형태도 간직하고 있다.

    남문과 서문 사이에 난 성곽 길 산책 중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마니산과 전등사를 조망하는 일이다. 마니산은 서문 부근 어느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지만, 전등사를 조망하기 좋은 장소는 남문과 서문 사이의 성곽 길 중, 가장 높은 지점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벼랑바위다. 내 카메라의 gps 좌표에 북위 37도37초7881, 동경 126도29초0019로 찍힌 이곳에선 삼랑산성 전체는 물론이고, 산성 속에 파묻힌 절집과 10여 년 전에 복원한 정족산사고까지 한눈에 넣을 수 있다. 절집마당을 지키고 선 400년생 느티나무의 당당한 모습과 대조루(對潮樓) 옆의 우람한 단풍나무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안목이 있으면 더 좋다.

    서문 쪽으로 내려서는 성곽 길의 경사는 급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경사 길을 조금 오르면 북문이 나온다. 해질 무렵에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정족산 정상 부근에서 서해의 낙조를 감상하고 동문으로 내려서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해질 녘이 아니면 북문에서 사고 쪽으로 내려선 후, 사고 안에서 대문을 그림액자 삼아 주변 풍광을 감상하는 순서가 나의 대체적인 절집 숲의 순례방법이다.

    정족산사고를 지키는 소나무들

    전등사의 명상 숲

    남문에서 서문으로 향하는 성곽 길에서 바라본 전등사.

    정족산사고는 임진왜란의 산물이다. 한양의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 ·성주(星州)의 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전주(全州)사고의 ‘실록’만이 전란으로부터 온전히 보전되었다.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는데, 1653년 마니산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들이 실화로 불타게 되자, 새로이 정족산성 안에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을 짓고, 1678년에 남은 역대 ‘실록’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면서부터 정족산사고는 업무를 시작했다.

    정족산사고에 보관되었던 서책들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규장각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겨져 관리되었고,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사고 건물은 1910년대 이후 헐렸지만,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1929년에 발간된 ‘조선사찰31본산’에는 ‘절집에서 사고는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고 밝히고 있다. 전등사에 사고가 복원된 것은 1999년으로, 대조루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의 현판도 복원된 이들 건물에 다시 달게 되었다.

    어떤 끌림 때문인지 몰라도 전등사를 찾으면 나는 가능한 한 이 사고를 찾는다. 절집 경내가 넓지 않은 것도 한 이유지만, 사고가 품고 있는 역사성에 끌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고 주변에는 수십 그루의 소나무가 사고를 호위하는 형상으로 서 있다. 이 소나무들은 낙락장송은 아닐지라도 사고가 조선왕조의 역사를 지켜낸 곳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늘 새롭게 다가온다. 한적한 시간에 절집을 찾으면 대부분 사고에는 사람이 없다. 툭 트인 배경과 사고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을 한참 쳐다보면 근세 백년의 지난한 세월을 견뎌낸 절집의 저력과 함께 제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사고의 대문을 액자 삼아 바깥 풍경을 감상해보면 침묵 속에서도 세월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사고 안에서 눈높이를 낮추어 대문 밖을 바라보면 대문지붕의 처마선 바로 밑 중앙에는 굽은 두 그루의 소나무가 춤추듯 나란히 뻗어 있고, 그 오른편에 한 그루, 그 왼편에 굵은 두 그루의 소나무가 마치 그림처럼 화면을 멋지게 분할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강화반도와 해협이 액자의 중간쯤에 나타나며, 산성의 양 능선이 중앙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전등사를 찾을 때마다 한참 동안 이 풍광을 혼자서 아껴가며 즐긴다.

    전등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381년(소수림왕 11년)에 아도(阿道)화상이 창건한 진종사(眞宗寺)에서 유래한 절집이다. 고려시대에 여러 차례 수리 중건되었고,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도 중수되었다. 전등사(傳燈寺)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사명(寺名)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는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문화재로는 대웅전(보물 제178호), 약사전(보물 제179호), 범종(보물 제393호)이 있으며, 대웅전 추녀 끝의 나부상(裸婦像)과 은행을 맺지 않는 오래된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이 유명하다.

    대웅전 추녀 끝의 나부상

    전등사의 명상 숲

    600년 묵은 전등사의 은행나무.

    남문에서 북문을 거쳐 사고지에 이른 나의 숲 순례 행각은 삼성각과 명부전과 약사전과 향로각을 거쳐 대웅전에 다다른다. 전등사 대웅전은 숲과 나무라는 실존적 관점에서 산림학도의 관심을 끄는 곳이다. 1749년 영조임금이 왕실의 종찰(宗刹)을 중건하는 데 필요한 목재를 시주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목재가 어느 곳에서 운반되어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을 샅샅이 훑었지만 아쉽게도 소나무 산지에 관한 어떤 내용도 찾을 수 없었다. 왕실의 종찰을 축조하는 데 사용된 소나무 산지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찾는 일은 소나무와 관련된 옛 이용 관행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임업사적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대웅전의 나부상은 전등사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을 만큼 전등사의 판타지로 유명하다. ‘절의 중건에 참여한 도편수가 절을 짓는 동안 아랫마을 주모와 정이 들었다. 그래서 노임으로 받은 돈까지 주모에게 맡겨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주모는 불사가 끝나기 전에 도편수의 순정을 배반하고 맡겨놓은 돈을 챙겨 달아나버렸다. 이에 상심한 도편수는 절 지붕의 처마 들보에 자신을 배반한 주모의 형상을 한 나부상을 만들어 끼워 넣어 날마다 독경소리를 들으면서 참회하게 하였다’는 게 나부상에 관한 전설이다. 전등사 주지를 한때 역임했던 고은 시인은 이 나부상에 얽힌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시로 풀고 있다.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전등사의 명상 숲

    동문 부근의 숲길.

    절집에서는 추녀 끝의 조각상을 나부상이라고 주장하지만, 허균 선생이 저술한 책 ‘사찰 100미 100선’에서는 나부상이 아니고 나찰상이라고 밝히고 있어서 흥미롭다. 허균 선생은 그 증거로 북서쪽(성문 방향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에 있는 인물상의 파란 눈동자를 들고 있다. 조각상의 파란 눈동자는 불교의 다른 신중 계통의 인물상에서 볼 수 없는 나찰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법주사 팔상전 추녀 밑의 나찰상을 예로 들면서 여인상은 나부상이 아닌 외호신의 하나인 나찰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절집에서는 이런 다른 해석조차 더 반길지 모를 일이다. 그런 논쟁이 많으면 많을수록 전등사는 사람들 입에 더 많이 오르내릴 테니까. 나부상이면 어떻고 나찰상이면 어떠랴. 나부상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절집 마당의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오늘도 변함없이 그늘을 만들어 사람을 끌어 모으고 있다. 절집을 찾는 많은 이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400년 묵은 느티나무에 눈길을 준 후, 대조루를 거쳐 600년생 은행나무를 만나러 윤장대로 향한다.

    대조루는 대웅전을 오르는 문루의 역할을 하며 2층 문루 처마 밑에 전등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앞면은 2층 건물로 그 풍채가 아담하나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1층 한옥의 형태다. 대조루에는 목은(牧隱) 이색의 시가(詩歌)가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막신 산길 산길 끌며 청아한 맛 즐기는데/ 전등사의 늙은 스님 내 갈길을 알려준다

    창틈으로 보인 뫼는 하늘가에 닿아있고/ 누각 아래 부는 긴 바람 물결되어 여울지네

    별자리들 아득하게 왕 별 속에 파묻혔고/ 안개둘린 삼랑성에 자그맣게 보이누나

    정화공주 발원 깃대 누가 다시 세워주랴/ 먼지 찌든 벽 글 보니 길손 가슴 아프구려

    (‘조선사찰 31본산’에서)

    600년생 은행나무가 느낀 역사의 무게

    전등사의 은행나무는 600세가 넘은 나무로, 키가 30m, 가슴 높이의 줄기둘레는 8m에 달한다. 원래 이 나무는 암나무로, 매년 많은 양의 열매(은행)를 맺었다고 한다. 조선조 말엽에 조정에선 은행 공출을 지시했는데, 그 양이 실제 이 은행나무가 맺는 은행의 양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전등사에 부과된 공출량을 채우고자 스님들은 주변의 은행나무들을 찾아다니며 은행을 털었지만 그 물량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단다. 그래서 스님들은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아예 열매를 맺지 않는 수나무로 변하도록 기도를 올렸고, 스님들의 기도 덕분인지 몰라도 이후, 전등사의 은행나무들은 은행을 더 이상 수확할 수 없는 수나무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 전설의 내용이다.

    어느 해 가을, 윤장대 옆의 600년생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잎을 떨어뜨리며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은 절집의 지난 600년 세월을 지켜본 생명체는 바로 이 나무뿐이라는 자각이었다. 은행나무가 이 절집에 자리 잡게 된 정확한 사연을 아는 이는 없다. 그 옛날 절집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은행 수확을 목적으로 심었을지도, 또는 조선의 건국을 기념해 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 보호수로 지정해 각별하게 보살피는 이유도 다른 곳에서 쉬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나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의 입장에서 지난 세월을 한번 곱씹어봤다. 600여 년이란 나무나이를 역사에 대입해보니 조선의 개국년(1392년)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나무의 나이에 따라 절집의 지난 세월을 시기별로 한번 조망해보니 대단했다. 이 은행나무가 222세가 되었을 때(1614년), 절집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화재 현장을 지켜보기도 했고, 229세(1621년)엔 불탄 잿더미 속에서 다시 옛 모습으로 되살아난 복원 현장에 환호했을 것이다. 그 당시 중건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덕분에 오늘날도 사람들의 입에 변함없이 오르내리는 대웅전 추녀 끝 네 귀퉁이의 나부상과 목수 사이에 얽힌 이야기의 진위를 정확히 알고 있을 듯하지만,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전등사의 은행나무는 이 절집의 사격(寺格)이 한순간에 변하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286세 되던 해(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사고(史庫)가 새롭게 들어서는 광경을 보았고, 315세 되던 해(1707년)에는 왕실의 문서를 보관하는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의 소임이 주어지는 현장도 함께했다. 어디 절집의 성쇠만 지켜보았을까? 은행나무 나이 334세(1726년) 되던 해에는 영조임금이 이 절집으로 행차하는 엄숙한 광경을 곁눈질할 수 있었고, 나이 474세(1866년)되던 해엔 프랑스 군대가 성내로 쳐들어오는 약탈의 현장도 지켜봤다. 나이 479세(1871년, 고종 1년) 되었을 땐, 전쟁에 대비한 무기보관소 포량고(砲糧庫)가 들어섰으며, 이듬해에는 산성 수비군의 주둔지인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가 설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이 508세(1910년) 되었을 땐, 일제의 관료들이 정족산사고에서 300년 이상 지켜왔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문서들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기는 모습도 내려다보면서 나라 잃은 서러움도 함께 느꼈을 것이다. 600년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은행나무가 경험했던 일들은 풀어놓고 보니, 절집 한 모퉁이에 서 있는 나무라는 생명체가 지닌 역사적 무게에 다시금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남문과 동문 통행로 주변의 숲

    은행나무가 부근에 몇백년째 터 잡아 살고 있는 윤장대는 남문과 동문 통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래서 남문을 통하든 동문을 통하든 대부분의 방문객은 이 윤장대 옆을 지나서 전등사에 이른다. 남문으로 오르는 방문객들은 활엽수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윤장대를 거쳐 대조루 밑을 지나서 전등사에 이르기에 남문에서 대조루에 이르는 숲길의 아름다움을 놓칠 수 없다. 절집을 고대하고 남문을 들어선 방문객은 절집 대신에 오직 울창한 숲만 가득 펼쳐진 광경과 마주친다. 다른 절집의 들머리 숲처럼, 이 숲길도 전등사의 들머리 숲이라 할 수 있다. 이 숲길은 단풍철이 되면 노란색과 갈색 단풍으로 별천지를 이루는 활엽수 숲이 일품이다.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서어나무, 느티나무, 고로쇠나무, 엄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황갈색의 풍광은 계절의 정취를 즐기고자 길을 나선 이들에게 자연이 안겨주는 멋진 선물이다. 10월말부터 11월말까지 계속되는 이 단풍의 하모니를 놓치면 후회할 것이다.

    동문은 아치형으로 이루어진 홍예문이다. 장터 모양 번잡한 상점을 거친 후, 조금 어두컴컴한 터널 같은 홍예문을 벗어나면 눈앞에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동문을 거쳐 성안으로 딱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는 조금 전에 지나왔던 저잣거리와는 전혀 딴판의 녹색 세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가 동문 통로를 애용하는지도 모른다. 홍예문은 바로 성속(聖俗)을 확연하게 구분해주는 경계라 할 수 있다. 남문에서 진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동문으로 진입해도 울창한 숲에 가려서 가까이 있는 절집이 없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들도록 절집을 앉힌 조상들의 안목이 새삼 부럽다.

    동문 부근에서 내가 즐겨 찾는 순례 길은 동문에서 남문으로 향하는 성곽 길이다. 이 성곽 길은 주변에 노송이 울창하고, 또 굽이쳐 도는 곡성(曲城)의 형태를 따라 성곽 길을 걸을 수 있어서 정겹다. 이 일대의 솔숲은 전등사 대웅전 뒤편의 솔숲과 함께 가장 굵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기에 차분하게 생각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나는 잠시라도 솔밭에 퍼질러 앉아 내 삶을 되돌아본다. 내가 솔밭에서 느긋하게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면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삶의 방향을 정리하는 이유는 숲이 명상에 효과적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숲과 명상

    전등사의 숲 순례가 끝난 후, 숲을 통한 명상에 얽힌 궁금증을 풀고자 전등사에서 숲 명상 체험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원우스님을 찾았지만, 스님께선 서산 부석사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어렵게 연락처를 수소문해 스님께 숲과 명상의 관계를 전화로 물었다.

    “불교는 숲의 종교입니다. 부처님의 탄생과 수행, 득도와 열반이 모두 숲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동양의 문화는 숲이 우리에게 생명의 기운을 제공한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템플스테이의 목적이 산사에 묵으면서 사찰의 불교문화와 자연환경을 느끼며,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만들어진 불교 체험 프로그램이기에 숲은 그러한 목적에 가장 적합한 체험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숲 체험은 수행을 돕는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숲의 기능에 대한 원우스님의 설명은 이어졌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현대인은 특히 숲에 있을 때, 몸의 활력이 증진되고, 머리가 맑아져서 지혜로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이가 드신 분들의 경우, 숲을 접하면 내면세계로 침잠해볼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숲 체험 프로그램을 포함시킨 것입니다. 숲은 인간에게 좋은 기운을 보내주는 호법신장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명상과 숲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나의 채근에 스님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명상은 나의 삶에 녹아 있는 욕심, 존재, 욕망 같은 것들을 거두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나’가 없는데, 우리는 ‘내 가족’‘내 명예’ ‘내 재산’과 같이 끊임없이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사대(四大)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인연의 법칙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서 나타나는 한시적인 생명체이기에 본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를 무의 종교라 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숲과 명상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스님의 말씀은 거침이 없었다. “숲은 인연의 법칙이 재현되는 좋은 현장입니다. 숲은 일 년 사시사철 시시각각 한순간도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싹이 돋고 꽃이 피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숲의 모습은 사대오온에 따라 변해가는 우리의 삶이 담겨 있는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숲이 바로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는 현장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전등사의 명상 숲
    全 瑛 宇

    1951년 경남 마산 출생

    고려대 임학과 졸업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석사, 박사

    現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저서: ‘숲과 한국문화’ ‘나무와 숲이 있었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숲 보기 읽기 담기’ ‘한국의 명품 소나무’ 외 다수


    심리학에서는 명상과 참선을 ‘주의를 집중하는 노력’으로 정의하고 있다. 명상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면역력이 증가되는 신체적인 반응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명상에서 중요한 것은 조용한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때, 소음을 막아주는 커튼 역할을 하는 절집 숲은 명상하기 좋은 곳임에 틀림없다. 명상 수행에 정진하는 수행자들의 절집이 숲 속에 파묻혀 있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 절집 숲의 숨은 의미를 찾고자 길을 나선 나의 시도는 원우스님의 설명으로 보다 명료해졌다. ‘나’를 벗어버리는 과정, ‘나’를 놓아버리는 과정이 명상이며, 항상 변화하는 숲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의 참 모습도 반추할 수 있다는 비유는 신선했다. 절집 숲과 명상의 관계란 바로 절집 숲의 정신적 기능에 대한 답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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