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와 함께 춤을>, 캔버스에 아크릴, 91×73㎝, 2005, 황주리 作
지진이나 태풍처럼 천재지변에 의해 죽음을 맞는 일은 너무 허망하다. 슬퍼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하긴 허망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
얼마 전의 일이다. 화랑을 경영하는, 어머니의 오랜 친구 한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입원했다가 별 이상이 없어서 곧 퇴원했다고 했다. 다음날 갑자기 나빠져서 다시 입원, 급작스러운 괴사현상이 일어나면서 한 시간도 안 되어 돌아가셨다.
그날 밤 문상을 간 나는 늘 아줌마라고 부르던 그분의 영정을 바라보며 처연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재작년인가 전시차 같이 외국에 나갔을 때 내가 찍은 사진들이 하도 근사하게 나와 e메일로 보내드려야지 생각만 하면서 보내지 못했다.
그뿐인가? 올여름 그리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돌아가면 와인을 좋아하는 아줌마에게 와인 한 병 들고 꼭 찾아가야지 했더랬다. 날 때부터 나를 보아온 아줌마와 나의 인연은 사실 깊다면 참 깊었다. 어릴 적 아줌마에 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때쯤인 것 같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 옥구슬이 굴러갈 것 같은 목소리, 작고 통통한 몸매와 주름 하나 없는 그녀의 얼굴은 팔십이 다 될 때까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외모만 그런 게 아니라 마음도 감각도 어느 젊은 사람보다 훨씬 젊었다. 인터넷이 이 나라에 처음 상륙했을 때, 적지 않은 나이로 인터넷을 배우기 시작했던 놀라운 분이었다. 그 통통한 몸매에도 옷을 입는 감각이 어찌나 뛰어난지, 외국에 나가서도 멋진 한복을 입고 자태를 뽐내며 걸어갈라치면 온 사람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그 뿐인가? 이 세상의 신기하고 맛있는 음식은 다 아줌마와 처음 먹어본 것들이다. 어릴 적 미8군 안에 들어가 처음 먹어본 피자가 그랬고, 파스타가 그랬다. 그래도 아줌마는 이 세상에서 김치와 고추장과 흰 쌀밥을 제일 좋아했다.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쌀밥이라도 나오면 가지고 갔던 김치와 고추장을 꺼내 먹으며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화가가 된 나와 화랑을 경영하는 아줌마는 운명적으로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화가로 데뷔한 곳이 바로 그분이 경영하던 통의동에 있는 ‘진 화랑’이다. 전시를 같이 다니면서, 혹은 뉴욕에 있는 내 스튜디오에서 같이 밤을 지새우면서 나는 늘 그분의 연인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나 사랑하면 비극으로 끝난다고 말하던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이제 그분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가 화가로 성장하면서 사실 우리 사이는 많이 소원해졌다. 아마도 아줌마는 나 때문에 섭섭한 일이 많았던가 보다. 다 키워놓으니까 다른 화랑들에서 전시를 하는 게 늘 섭섭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올여름 여행길에 갑자기 와인을 좋아하는 아줌마가 머릿속에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와인 한 병 들고 가 회포 한번 풀지 못하고, 나는 영안실에서 그녀의 영정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