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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 한호 수교 50주년 - 호주의 재발견

김진수 시드니 총영사

“문화·인적 교류 늘려 정서적 유대 강화하겠다”

  • 윤필립 시인, 호주전문 저널리스트

김진수 시드니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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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 시드니 총영사

김진수 시드니 총영사.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건너편에 고풍스러운 동네 록스(The Rocks)가 있다. 바위에 세워진 동네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1788년 1월26일 백인들이 들어와서 만든 첫 동네다. 그런 연유로 록스에 있는 모든 것은 호주에서 가장 오래됐다. 가장 오래된 우체국·경찰서·호텔·은행·선술집도 다 록스에 있다. 오늘의 시드니는 결국 록스가 확장돼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과 호주가 외교적으로 첫 인연을 맺은 도시가 시드니다. 1953년 3월25일 김훈 초대 총영사가 시드니에 도착해서 공관을 개설했다. 당시 외무부 공식문서에 따르면 공관 인원은 두 명이었다. 김훈 총영사와 오길영 영사. 58년 전의 일이다.

1961년 10월31일 마침내 대한민국과 호주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동안 10월30일로 알려졌던 정확한 한호 수교 날짜는 10월31일이다. 시드니총영사관에 보관 중인 외무부 공문에서 확인된 내용이다. 결국 2011년 10월31일이 한호 수교 50주년 기념일인 셈이다.



수교 50주년 맞아 한국문화원 개원



김진수 시드니 총영사

시드니라는 도시가 시작된 록스 지역의 시장.

대한민국 외교부는 총영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면서 총영사관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두 나라 사이에 특별한 현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역량도 미미했고 호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숫자도 수백 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962년 2월16일 이동환 대사가 부임하면서 주(駐)호주 대한민국 대사관의 업무가 시작됐다. 대사관이 캔버라로 이전한 1966년 2월까지 만 4년 동안 시드니에 대사관이 설치된 셈이다. 주재국의 수도에 대사관을 설치하는 국제관례에 어긋난 조치였는데 당시 여러 나라가 시드니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캔버라가 워낙 외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조태용 대사가 17번째 대한민국 대사로 부임했다. 당초 조 대사를 인터뷰할 예정이었으나 업무파악 중이었고, 한호 외교관계 수립 당시 대사관이 시드니에 소재했다는 점을 감안해 김진수 총영사를 만나 한호 수교 50년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다음은 김 총영사와의 일문일답이다.

▼ 1961년 10월31일 한국-호주 두 나라가 외교 각서를 교환하면서 정식 외교관계가 시작됐습니다. 한호 수교 50주년을 맞아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때마침 제가 재임하는 기간에 한국과 호주가 수교를 맺은 지 50년이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한국과 호주는 혈맹관계를 이어온 우방국으로서 수교 이래 반세기 동안 정치, 경제, 지역 안보 분야에서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왔습니다. 수교 50주년을 맞는 2011년에는 시드니 한국문화원이 설립됨으로써 문화·인적 교류가 더욱 증대돼 양국 간 정서적 유대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진수 시드니 총영사

시드니에 총영사관을 설치한다는 내용이 담긴 당시 외무부 공문.

▼ 50년 전 시드니에 한국대사관이 설치됐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는지요?

“실제 주시드니 총영사관은 6·25전쟁 직후인 1953년에 설치됐기 때문에 역사가 무척 오랜 공관입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재외공관을 10개 처에 설치했는데, 그 다음으로 6·25전쟁을 통해 물심양면으로 원조해온 우방 호주의 제1 경제도시인 시드니에 총영사관을 설치하기로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초대 총영사는 김훈인데 이분은 상공부 장관을 지낸 뒤 대한석탄공사 총재로 있다가 시드니로 오게 됐습니다.

총영사관은 양국 국교수립을 계기로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가 1966년 2월 캔버라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주시드니 공관은 잠시 문을 닫았지만 경제·동포업무 등 측면에서 시드니의 중요성을 감안해 1970년 6월 총영사관이 재설치됩니다.”

‘무슨 방법이든지 한국을 똑바로 소개하고자…’

▼ 50년 전에는 한국의 국력이 약했고 양국 간의 현안도 많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실제적인 현실은 어땠는지요?

“당시 양국 관계는 지금처럼 정치·경제·문화·인적교류 등 여러 방면에서 규모가 크거나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정치적 동맹 관계의 확인이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문서를 보면 ‘호주 인구 950만명에게 무슨 방법이든지 한국을 똑바로 소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나와 있는데 이는 자유민주 진영의 우방으로서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 서방국가 중에서 드물게 호주에는 북한대사관이 존재했습니다. 북한대사관에 얽힌 얘기를 들으신 적이 있는지요.

“호주는 1974년 7월 북한과 수교에 합의했으나 이듬해 10월 외교관계를 동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2000년 5월 수교 재개에 합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은 2002년 5월 수도 캔버라에 대사관을 개설했으나 경제난으로 인해 공관 운영 자금을 감당할 수 없어 2008년 2월 대사관을 철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이 캔버라 주재 대사관을 철수한 배경에 대해 2003년 4월에 발생한 ‘마약운반선 봉수호 억류사건’ 이후 호주 당국의 북한대사관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엄격해져 정상적인 공관 활동이 어려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현재 북한대사관이 철수했음에도 주한 호주대사가 주북한 대사를 겸임, 수시로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과의 외교활동을 수행하고 있어 북한 문제에 대한 호주의 관심은 계속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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