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48회 신동아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

  • 김중식

    입력2012-10-19 1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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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9월 15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끝인 것 같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렵게 지금까지 끌고 왔지만 더 이상 여력이 없다. 넉 달 가까이 밀린 자재·장비·외주대금. 이달 말이면 지급해야 할 어음과 노무비. 또다시 직원 급여를 미루고 어음을 먼저 막고, 근로자 노무비는 10월 15일에 기성을 수령한 후 지급해야 하는가? 그럼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현금을 지급해야 하는 거래처에는 또 며칠만 연기해달라고 어떻게 사정하나?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 자금을 맡고 있는 나로서는 한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는 부도가 너무 두렵다. 그보다 사장님 마음은 오죽할까?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다. 명함에 찍혀 있는 내 직책과 이름. 재무팀 이사. 김중식. 회사 자금을 관리하고 담당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기에 부도에 직면한 지금 무언가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만 더 이상 대책도 능력도 없다. 꼭 나의 잘못은 아니지만, 회사는 지금 부도를 목전에 두고 있다.

    2010년 9월 30일

    월급날이다. 8일 전인 9월 22일은 추석이었다. 매번 명절이면 직원을 위한 선물을 마련했고, 지난해 추석에는 회사 형편이 어렵긴 해도 참치 선물세트를 마련해 나누어줬다. 하지만 올해는 회사에서 준비한 선물이 없다. 설날 직원 선물 준비를 하느니 마느니 하다가 ‘한 푼이라도 아껴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선물을 지급하지 않았다. 설날보다 사정이 더 안 좋아진 추석에 회사에서 선물이 나오리라고 기대한 직원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추석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직원도 없고, 선물을 담당하는 총무부 직원도 아예 품의를 올리지 않았다. 마치 명절이 없는 것처럼 다들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2008년 발생한 국제 금융위기가 대한민국 내에서만 먹고살아가는 우리 같은 전문건설회사와 도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직원들은 2008년 금융위기 후 ‘월급만 꼬박꼬박 나와도 좋은 회사’라는 이야기를 수시로 하고 다녔다. 물론 금융위기가 발생했든 안 했든 전문건설회사는 항상 어려웠고 동종 회사 역시 우리 회사와 마찬가지기에 회사를 옮긴들 달라질 게 없다. 비슷한 월급에 비슷한 복지에 비슷한 회사 사정까지. 회사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똑같다. 아마 추석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비슷할 것이다. 사정이 어렵기는 다른 회사나 우리 회사나 마찬가지라는 것. 다른 회사도 추석 선물을 주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위안이다.

    오후 3시경 사장실에서 호출을 받았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뻔히 짐작이 간다.

    “김 이사, 오늘은 급여가 못 나가니 직원들 동요 없도록 잘 얘기 좀 해.”

    “대략 언제쯤 지급 예정이라고 할까요?”

    “김 이사가 사정을 더 잘 알잖아…. 솔직히 모르지.”

    “15일쯤 지급될 거라고 전달하겠습니다.”

    “…….”

    10월 15일은 공사 기성금 수금일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10월 15일에 돈이 들어온다 해도, 어음을 막기에도 부족하다는 것을. 사장님은 또 어디선가 돈을 빌려와야 할 것이다. 직원 급여를 지급할 돈이 아니라 부도 직전의 어음을 메울 자금을….

    지방에 있는 현장소장들에게 전화를 했다. 기성 수금일인 15일에 급여가 나갈 것 같으니 직원 동요가 없도록 잘 전달해달라고 했다. 현장소장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별말이 없다. 지난해부터 급여가 수시로 지연 지급되곤 했다. 매월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보름, 심지어는 두 달까지 밀린 적도 있다. 그렇기에 급여가 늦게 나와도 큰 동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다른 회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9월은 추석이 있는 달이라 그런지 유달리 신경이 쓰인다. 별다른 행사가 없는 평월과는 다르다.

    건설 회사를 다니는 남자들은 대개 자존심이 강하다. 굶을지언정 집에 없는 티를 못 내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현금서비스라도 받아 추석 명절에 차례상도 차리고 아이들 용돈도 줬을 것이다.

    우리 회사는 교량을 시공한다. 인천대교나 광안대교 같은 장대(長大)교량을 만든다. 교량 시공 회사는 많지 않다. 고가의 관련 장비를 갖추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고급 인력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다섯 개 정도인데, 그중 네 개는 외국의 모회사가 지분을 50% 이상 갖고 있는 외국계 회사다. 우리 회사 역시 교량 시공에 관한 기술적 공법 라이선스는 외국에서 도입했고, 매년 로열티를 주고 있다. 하지만 라이선스를 제공한 외국 회사가 가진 지분은 없다. 외국 모회사의 지분이 없는 만큼, 상대적으로 경영이 자유롭다. 다른 회사는 입찰이나 각종 계약 시 모회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10년 전만 해도 교량 시공의 경우 어쩌다 한두 건 수의계약을 따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 다섯 개 회사가 거의 모든 공사를 도맡아 했다. 또 이 다섯 개 회사는 교량공사 외에 다른 공사는 손을 대지 않았다. 회사의 모든 수익은 교량공사를 통해서만 얻었다. 그러나 사회 인프라의 완성과 함께 토목의 시대가 끝나고, IT와 정보화로 한국 경제의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교량 공사의 수익성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비극

    우선 물량이 없었다. 중앙고속도로, 서해안 고속도로,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 경부고속철도 등 굵직굵직한 대규모 국책사업이 대부분 마무리됐다. 다섯 개의 회사가 심한 경쟁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일감을 확보할 수 있던 시대는 끝나버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량 사업의 수익성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다른 분야를 시공하던 회사까지 마구잡이로 뛰어들었다. 어차피 그쪽도 수주 물량이 급감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기술력만 있으면 수익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교량사업 쪽을 블루오션으로 판단하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건설업은 사람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업이다. 새로 교량시공업에 뛰어든 업체는 급여를 기존 회사보다 조금 높여 제시하며 하나둘 직원을 빼갔다. 기존 교량 시공 회사들은 직원의 이직을 막기 위해 급여를 인상해줄 수밖에 없었다. 2006년과 2007년, 2년 동안 직원 연봉은 평균 20~30% 정도 상승했다. 그러나 수익성은 수주 물량의 급감과 마구잡이로 교량 시공사업에 뛰어든 여러 회사의 출혈 경쟁 때문에 급속히 악화됐다.

    교량 시공에 관한 한 노하우를 갖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 도저히 저 가격으로는 시공할 수 없는 현실인데도, 막 교량사업에 뛰어 든 회사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게다가 원도급사는 입찰에 저가를 제시하는 회사를 오히려 반기고 이용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회사의 수익성은 점점 나빠져갔고, 우리 회사를 비롯한 동종업계 전체가 서서히 수익성 악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외국의 모회사가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는 우리 회사와 처지가 달랐다. 기존에는 입찰이나 계약 등에서 제한을 받기 때문에 모회사가 있는 것이 단점이었지만, 수익성이 악화된 뒤에는 모회사가 원군이 됐다. 모회사는 기술력은 있되 시공력은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시공 능력을 갖고 있는 한국의 자회사가 문을 닫는 것을 원치 않는다. 위기를 넘기게끔 자금을 지원해줬다. 우리 회사는 손 벌릴 곳이 없다. 모든 것을 오로지 우리 힘으로 해내야 했다. 불행이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도 모른다.

    뒤로 밀리는 급여

    2010년 10월 15일

    10시에 임원회의를 했다. 재무이사인 나는 당연히 참석한다. 회의가 없어도 요즘 거의 매일 수시로 사장님과 독대하며 의논을 한다. 당연하지만 오늘의 주제 역시 자금난일 것이다. 사장실에 들어가니 모든 임원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앉아 있다. 모두 나만 쳐다본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할 말도 없고 별로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김 이사, 오늘 자금 수지는 어때?”

    불쑥 사장님이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1억5000만 원이 모자랍니다.”

    “1억5000만 원이라면 직원 급여까지 포함한 건가?”

    현장담당 전무가 말을 꺼낸다. 당연한 것이지만, 직원 급여는 생각한 적도 없다.

    “아닙니다. 오늘 어음 막을 자금과 근로자 노임뿐입니다.”

    “아니? 왜 오늘 어음을 막지? 월말이 교환일 아닌가?”

    “원래 저희가 3개월 어음을 발행했는데, 예상 기성을 대비해보니 3개월 어음으로 안 될 것 같아 15일을 더 끊어서 오늘 돌아오는 어음이 있습니다.”

    “그럼 오늘 직원 급여는 못 주는 건가?”

    “예.”

    내 대답을 끝으로 현장담당 전무와의 얘기는 끝이 났다.

    “다른 데서 좀 돌리고 급여를 지급할 방법은 없나?”

    “1억5000만 원도 어음대금과 근로자 노무비 중 부족한 액수만 집계한 금액입니다. 다른 것은 또 미뤘습니다!”

    사장님도 직원에게 급여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라, 급여를 줄 방법은 없는지 또 묻는다. 하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다. 당장 부도를 면하려면, 일단 돌아오는 어음을 막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사장님의 개인부동산을 담보로 급전 사채를 구하는 방법 밖에 없다.

    “박 전무, 전 사장한테 1억5000만 원 얘기해 봐.”

    “예.”

    구조조정 전문가

    지난번 권 사장이 소개해준 유능한 양반과 달리 이번에는 사장님이 직접 손님 한 분을 모시고 왔다. 그러더니 모든 임원을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사장님이 소개한 사람은 기업 구조조정 전문가라고 한다. 기업 구조조정에도 전문가가 있나 싶지만, 자칭 구조조정의 전문가라는 분의 열변이 이어졌다.

    “바쁜 와중에 저의 소개를 할 틈이 없습니다. 제가 여기 계신 사장님께 대략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결론인즉 이미 부도는 기정사실로 예정돼 있고, 다들 포기하신 분위기인데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고, 무너지는 와중에도 솟아날 구멍은 있으며, 어딘가에 우리 회사에 돈을 투자해줄 투자자는 반드시 있습니다.”

    구조조정 전문가는 서 사장이다. 볼보 승용차를 타고 왔지만 차의 광택이나 편의장치를 보니 엄청나게 낡은 것 같고, 뭐가 초조한지 수시로 시계를 보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왠지 먼젓번 유능했던 분처럼 역시 신뢰가 가지 않는다. 다만 먼젓번 유능한 분과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 유능한 분은 오자마자 요구사항이 많았지만, 서 사장이라는 분은 모든 것이 완결된 후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겠다고 했다는 점이다. 그 외에 말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라든지, 수시로 피우는 담배 때문에 풍겨나는 찌든 냄새는 앞서의 유능한 분과 별 차이가 없다. 말 많은 인간치고 뭐 제대로 하는 인간이 없다는데, 이 양반도 말이 너무 많다. 나의 바람은 서 사장이 하는 말처럼 자기가 했던 말을 조금이라도 지켜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어차피 모든 것이 다 끝난 뒤 가져가겠다고 했으니, 부도를 막고 회사를 정상화시켜만 준다면 뭘 가져가도 아깝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 사장이 얘기하는 회사 구조조정 방식은 이렇다. “내가 투자자를 데리고 오겠다. 그 대신 몇 가지 사항을 회사에서 먼저 지켜달라.” 그 몇 가지 사항은 이렇다.

    1. 결의의 뜻으로 모든 직원의 사표를 받아달라. 그리고 재입사로 처리하겠다.

    2. 사장님은 회사에 대한 모든 지분을 투자자에게 넘기고 투자자에게 대표이사의 명의까지 넘겨달라. 대신 회사가 살아나면 사장님에게 49%의 지분을 챙겨주겠다.

    3. 회사 양도양수 약정서 작성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이전에 발생한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현 사장님이 지고, 이후에 발생하는 모든 상황은 본인과 투자자가 지겠다.

    4. 투자자한테서 투자를 받고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임직원의 급여는 지급이 안 될 것이다. 이 기간은 3~6개월가량 걸릴 것이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 때문에 나는 서 사장에게 왜 직원의 사표를 받아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서 사장은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데, 기존 직원에 대한 급여 및 퇴직금 부담이 있으면 어느 투자자가 투자를 하겠느냐고 한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임직원의 밀린 급여와 퇴직금은 22억 원 정도다. 대표이사는 임직원의 급여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한다. 당연히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을 해보면 이렇다. 만일 회사가 부도가 나면 임직원은 3개월치 임금과 3년치 퇴직금에 대해 노동부에서 체당금(替當金)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회사를 살리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로 사표를 냈다가 회사가 망하기라도 하면 이조차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어차피 부도가 예정돼 있는 회사인지라 2번과 3번의 요구조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아니 회사만 정상화된다면 지분이고 뭐고 다 넘기는 것이 홀가분하게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길이었기에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임직원의 사표를 받아 제출하는 것은 문제가 됐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사장님은 각 현장소장을 모두 불러 모아 회의를 했다. 먼저 재무팀 이사인 내가 회사 사정에 대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얘기해주었다.

    “회사 사정상 이달 말 부도는 현실이 될 것 같다. 회사가 보유한 자금이 없다.”

    회사 사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겠지만, 내 입에서 ‘부도’라는 단어가 나오자 다들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원의 동요를 의식해 단 한 번도 부도란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다음에는 사장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1번과 4번 항에 대해서는 본인이 할 이야기가 없다. 직원의 의견에 따르고 그 결과를 토대로 서 사장과 협의하겠다.”

    사장님은 얘기를 마친 후 직원끼리 회의를 하라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직원들끼리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곧 의견은 하나로 정리됐다. 우리도 회사에 애정이 있는 만큼 회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급여를 지급받지 못하는 것도 다 수긍한다. 3~6개월간의 기간이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다. 다만 임직원의 사직서만큼은 어렵다.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전적인 협조를 할 테니 아무런 걱정 말고 회사 정상화에 힘써달라는 것이었다.

    직원들의 의견에 사장님은 고맙다고 했다. 회사가 정상화만 된다면 사장님은 자신이 짊어진 채무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직원들이 별다른 이견 없이 협조해주기로 한 것 아닌가? 사장님은 곧 서 사장을 불렀고, 서 사장은 밤 9시가 다 돼 회사에 왔다. 서 사장에게 사장님은 회사의 입장과 직원의 의견을 전달했다.

    별 무리 없이 진행되고 이르면 오늘 마무리가 될 줄 알았는데 언뜻 느낀 서 사장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서 사장은 직원의 전원 사직이 전제되지 않으면, 투자자가 자금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장님이 할 이야기지만 직원의 자격으로 내가 얘기했다.

    “지금 상황에서 체당금을 포기하고 사직서를 쓸 직원은 없다. 직원이 사직서를 쓴 것과 동일하게 업무에 전적으로 협조를 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는 양해해줄 수 있지 않은가? 아니, 양해가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

    서 사장은 나의 얘기를 들은 후 투자자한테 얘기해보고 알려주겠다며, 회사를 나갔다. 사장님의 입장에선 직원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게 해 어떻게든 회사를 넘기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같은 직원의 입장에 있는 나로서는 그렇게 하자고 할 수 없었다. 자발적인 사직은 정말 회사가 살아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행위다. 회사의 주인이 바뀌는 마당에 사직서를 제출하면 어찌 될 것인가. 걱정일 수 있겠지만 직원은 전원 사직하고 사장님은 모든 지분을 넘긴 후에 서 사장이 돌변해 우리를 내쫓고, 회사의 얼마 안 남은 자산일망정 팔아먹는다면 대책이 없다.

    밤 12시가 다 되어간다. 자포자기의 심정이다. 모든 것을 잊고 싶다. 내일 또다시 자금 결제와 거래처의 압박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터진다. 나도 그냥 내 밀린 급여와 퇴직금만 받게 된다면 미련 없이 떠나고 싶다.

    서 사장의 본심은 무엇일까? 직원들의 사직서가 없으면 안 된다고 계속 고집을 피운다. 하지만 직원들도 양보가 없다. 오히려 반문한다. 왜 꼭 사직서가 필요한지 묻는다. 전적인 협조도 약속하고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급여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하는데 왜 꼭 사직서가 필요한가. 나도 마찬가지로 의문이 든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서 사장은 자꾸 시간이 없다며 사장님을 재촉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직원들은 요지부동이다. 사장님도 똥줄이 탄다. 나에게 직원들의 사직서를 받아주면 안 되겠냐고 몇 번이나 돌려서 얘기했지만, 나 스스로도 왜 사직서가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설득할 수 있을까?

    서 사장의 의도는 우연찮게 밝혀졌다. 다른 회사 경리부장을 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이 서 사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통해 서 사장에 대한 스토리를 들었다. 서 사장은 코스닥 상장 부문에선 좀 유명한 사람이다. 껍데기뿐인 회사를 무슨 방법을 쓰든지 코스닥에 상장시킨 후 회사로 들어오는 자금 중 일부를 커미션으로 받아먹는 좀 이름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즉 현재까지의 모든 책임질 일은 사장님에게 떠넘긴 후 다른 회사와 합병하게 한 뒤 회사의 실적을 이용해 코스닥에 등록하든 회사를 팔아먹든 둘 중 하나를 할 것이라고 한다. 당연히 직원이 모두 그만둬야 껍데기뿐인 회사를 만드는 데 수월할 것이라고 한다. 그 후에 팔아먹기도 쉽고…. 친구가 더 충격적인 얘기를 한다. “아마 너희 사장이 그 서 사장과 짜고 뒤로 몇 푼 챙기고자 하는 속셈일지도 모른다”고. 사장이 개입돼 있지 않으면 이런 식의 회사 구조조정은 어렵다고 한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서 사장은 어차피 우리 회사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우리 회사가 갖고 있는 교량 관련 특허와 기술을 이용해 다른 회사와 합병 후 상장을 시키든지 아니면 다른 회사에 팔아 자금을 빼서 빠지겠다는 것 아닌가? 사실 나는 코스닥 상장이니 뭐니 하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 그리고 서 사장이 회사의 자금 담당임원인 나와 무언가 의논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기에 서 사장의 속셈을 자세히 이해하기는 정말 힘들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나 서 사장도 우리 회사를 살릴 계획은 없다는 점이다. 본인의 이익을 위해 마지막 남은 회사의 단물이라도 빨아먹기 위해 여기에 왔을 뿐이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서 사장과 사장님이 모종의 공모를 했는지 아니면 사장님이 마지막까지 헛발질을 하는 것인지다.

    자수성가형 기업인의 몰락

    2010년 11월 25일

    자금회의 시간에 뜬금없이 사장님이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이 있다면, 딸이 초등학교 시절 - 아마 1980년대였을 것이다- 눈썰매를 타러 가기로 약속을 해놓고 무슨 일인가가 생겨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오랜 시간 그것이 사장님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나보다. 고향 충남 서산에서 아무 연고도 기반도 없는 서울에 올라와 연매출 600억 원의 회사를 만들기까지, 사장님은 얼마나 노력을 했겠는가? 본인보다 한참 어린 기사급 직원에게까지 굽실거리며 영업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겠는가? 눈썰매든 뭐든, 그전이나 그 후나 사장님이 가족과 어디를 놀러가거나 여가를 함께한 적은 없다고 한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다. 경제적으로 가족에게 보상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아버지의 역할은 했다고 자부했지만, 이제는 그마저 물거품이 돼버렸다. 사장님에게 남은 것은 막대한 채무를 짊어진 실패한 빚꾸러기라는 꼬리표요, 부인과 자식에게 전세 아파트 한 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불쌍한 아버지일 뿐이다.

    2010년 11월 26일

    예고된 부도를 앞두고 일부 직원을 중심으로 고용부에 체당금 신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체당금이라는 것은 고용부가 회사를 대신해 근로자에게 최근 3개월치 임금과 3년치 퇴직금을 지급하고 회사에 대해서는 구상권을 갖는, 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다. 물론 부도가 나도 남은 돈이 많아 급여와 퇴직금을 모두 지급할 여력을 가진 회사이거나, 아니면 자산이나 설비가 많은 제조업체 경우에는 굳이 체당금을 신청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자산을 매각해 직원의 밀린 급여와 퇴직금을 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설회사의 경우는 다르다. 부도가 나는 순간 회사에 자산이 하나도 없다. 부동산 자산을 가진 속칭 1군 업체라면 좀 다르지만, 이 경우에는 부도보다 회생 신청을 택한다. 전문건설업체의 경우 거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산이 없다. 그래서 당연히 고용부에 체당금을 신청해 받아야 한다.

    회사가 부도난 후에는 직원이 모이거나 출근하기 어려울 수 있기에 부도 전에 미리 체당금 신청 서류 등을 준비해놓겠다는 것이다. 체당금 신청을 위해 노무법인을 다녀오고 고용부를 다녀오느라 분주하다. 3개월치 임금과 3년치 퇴직금이라고는 하지만 지급한도가 있기 때문에 많지는 않다. 임금과 퇴직금을 합쳐 30대는 1440만 원, 40대는 1560만 원이 최대 지급액이다. 회사 부도 후 파산승인이 떨어져야만 이 돈을 받을 수 있다.

    오후에는 체당금 신청을 위해 근로자 대표를 선임하는 투표를 했다. 사장님과 나, 그리고 임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아직 회사가 부도난 것도 아닌데 회생도 아닌 파산 신청을 준비하는 직원들이 보기 싫었다. 직원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씁쓸했다. 사장님도 하루 종일 방문을 닫아두고 있다. 마음이 복잡한가보다.

    근로자 대표는 서로 자기가 하겠다는 다툼 끝에 공무부 김 차장이 맡기로 했다. 기술부, 관리부, 공무 및 영업부 3개 파벌이 서로 근로자 대표를 맡겠다고 했는데 일단 회사 관리에 책임이 있는 관리부가 1차로 나가떨어졌다. 회사를 이 꼴로 만든 주범이 관리부라는 것이다. 기술부와 공무 및 영업부가 붙었는데, 그나마 현장에 강재(鋼材) 같은 현금성 자재가 있고 그동안 현장 관리를 맡아온 공무 및 영업부에서 근로자 대표를 맡기로 했다. 최종적으로는 공무부 김 차장이 근로자 대표로 선임됐다.

    근로자 대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름 막강한 권한이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회사자산에 대해 근로자 대표가 관리한다는 직원의 동의를 받았다. 자산을 매각할 때도 근로자 대표가 주관해 매각한다. 회사의 자산은 실질적으로 사장님 것이건만 근로자 대표는 근로자 것이라고 벌써부터 주장한다.

    사장님이 피땀 흘려 가꾼 회사는 어디로 가고, 근로자 대표가 사장 행세를 한다. 나한테 오더니 회사의 잔여시재를 보여달라고 한다. 일단은 거부하고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보여주라고 하신다. 사내에서는 벌써 공무 김 차장이 한몫 잡았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회사의 주인은 아직 사장님이건만 근로자 대표는 파산관재인이 회사를 관리하러 오기 전까지 모든 것은 자기와 의논하라고 한다. 혹시 사장님이 돈이라도 가져가지 않는지 눈에 불을 켜고 있다.

    만인의 생존 경쟁

    2010년 11월 27일

    오전 자금 관련 회의를 마치자마자 부장 2명이 사장님을 찾아왔다. 그리고 사장님에게 한 이야기를 요약한즉, 공장에 지금 납품을 준비 중인 15억 원 상당의 강재가 있는데 그걸 본인들에게 달라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원자재로 받은 강재를 가공해서 납품하면 약 25억 원을 받을 수 있으니, 부도난 뒤 그냥 빼앗기지 않도록 다른 장소로 옮겨가서 그것이라도 챙기자는 것이다. 납품 후 25억 원을 받게 되면 18억 원은 직원이 나누어 쓰고, 7억 원은 보증을 선 두 관리부 임원에게 주겠다고 한다. 나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공장에 강재가 있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는데, 그것을 빼돌리면 사장님의 횡령이자 사해행위(詐害行爲·채무자의 악의의 재산 감소 행위)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2명의 부장은 막무가내였다. 도저히 설득이 되지 않았다. “사장님이 건물을 팔아서라도 직원들 퇴직금 다 준다고 했는데 지금 해줄 수 없지 않으냐. 그러니 그거라도 내놓으라”고 계속 강요했다.

    결국 몇 시간의 실랑이 끝에 사장님은 보증을 선 두 임원에게서 7억 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구두로 받고 자재를 빼가라고 양도했다. 공장에 있던 15억 원 상당의 강재는 마치 미리 준비나 한 듯 바로 차가 와서 싣고 갔다.

    하지만 곧장 문제가 터졌다. 강재를 옮겨간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강재를 납품한 회사에서 우리가 옮겨놓은 강재를 한 무리의 용역을 동원해 가져가버렸다는 것이다. 강재는 이미 납품된 것이기에 회사 것이다. 강재를 납품한 사장은 부도 후 채권단을 구성해 정산을 받으면 된다. 물론 현실적으로 강재 관련 채권은 회수가 불가능할 것이다. 어찌됐든 강재 회사 사장은 자기네 물건이라며 강재를 지키는 우리 직원의 제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용역을 동원해 가져가버렸다. 빼앗긴 강재와 함께 직원이 가져가야 할 몫도, 두 분 임원의 보증 해결방안도 모두 날아가버렸다. 소송을 하면 강재를 다시 받아올 수도 있겠으나 지금 상황에서 소송을 통해 강재를 찾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강재는 어느 정도 값을 받을 수 있으니, 파산 과정에서 자산으로 매각했다면 직원에게 다만 몇 백만 원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제3의 장소로 옮겼다가 빼앗기는 통에 이제는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게 됐다.

    그런데 다시 소문이 들렸다. 2명의 부장이 강재회사 사장과 짜고 강재를 넘겨준 뒤 대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두 분 임원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7억 원을 받으면 그걸로 선급금을 갚고 계약 보증에 대해서는 형편을 봐달라고 사정을 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두 임원의 모든 꿈은 깨져버렸다. 여러 가지 루머와 소문에 대해 2명의 부장은 한마디할 법도 한데 약속이나 한 듯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문이 돈 다음 날부터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

    2010년 11월 30일

    예상도 하고, 마음의 준비도 했다. 채권자가 회사로 몰려들어 집기비품을 집어던지거나, 사장님의 멱살을 잡는 상상도 해보았다. 오후 3시경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어음을 막을 돈이 준비됐느냐고 묻는다. 준비가 안 됐다고 대답했다. 그럼 오늘 1차 부도는 어쩔 수 없지만 내일까지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것도 어렵다고 했다. 은행에서 알았다고 한다. 나의 대답을 시작으로 회사 부도는 시작됐다.

    저녁 8시가 되자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은행에서는 어음 대금이 입금 안 되면 어음을 교환해갈 업체에 문자 통보를 한다. 그것이 1차 부도다. 걸려오는 전화의 발신자를 확인해본다. 거래처의 현장 직원까지 계속 전화를 한다. 아마 직원들은 ‘오늘도 어떻게 어음을 막았겠지’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두 회사의 부도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회사의 임원 누구도 구체적인 날짜를 얘기해준 사람은 없다. 그저 어렵다고만 했을 뿐이다. 체당금 서류를 준비한 직원들도 이렇게 쉽게, 그리고 허망하게 부도가 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다음 날 금융감독원 공시에 당좌거래 중지로 우리 회사 이름이 떴다. 대표이사의 이름과 회사명 그리고 당좌거래 중지라는 문구 한 줄. 이것으로 부도는 확정됐다.

    TV에서 보던 부도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내심 걱정했던, 채권자가 쳐들어와 난리를 치는 일은 없었다. 간간이 전화가 와서 어떻게 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회생신청을 하느냐, 아니면 그냥 파산하느냐고 묻기에 우리는 파산을 할 거라고 대답해주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게 나을 거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어차피 자산이 없는 전문건설업체는 회생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도 한다.



    2010년 12월 2일

    부도가 난 지 이틀째지만 아직 회사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직원도 대부분 그대로 나온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거나 회사 밑에 있는 당구장에 가서 당구를 치곤 한다. 나는 갑자기 일이 없어졌다. 매일매일 이런저런 전화와 호소, 하소연에 시달리던 일이 사라졌다. 부도는 났지만 회사 생활은 뭐가 바뀐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어제도 돈이 없고 오늘도 돈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돌아선 직원들

    2010년 12월 5일

    부도 후 체불된 임금과 관련해 진정 취하서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체당금을 받으려면 먼저 고용부에 진정을 해야 하는데, 체당금을 받고 난 뒤 진정 낸 것에 대해 취하서를 제출해야만 체불임금과 관련해 사장님이 처벌을 받지 않는다. 내가 주관해 양식을 준비하고 취하서를 작성해달라고 용지를 돌렸다. 직원 50% 정도는 순순히 해준다 했는데, 일부 직원이 취하서 작성과 제출을 거부했다. 요는 사장님에게 우리 몰래 숨겨둔 돈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 번 건물 팔고 남은 돈 있지 않으냐. 그것 말고도 비자금이 있을 테니 다 내놓아라. 그래야만 취하서를 작성해주겠다”고 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임금 체불액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구속을 당할 수 있다. 아직 못 받은 취하서 숫자만 보면 위험 수위다.

    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어떻게 아셨는지 그냥 내버려두라고 한다. “다 내 잘못이니 들어가게 되면 그냥 살고 나오면 된다”고 한다. 안 써주려는 직원에게 괜히 그런 것으로 스트레스를 주거나, 안 좋은 소리를 듣기보다 들어가 사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이라고도 한다. 하긴 안 써준다는 직원을 움직일 방법은 전혀 없다. 그들과 나 모두 피해자요, 여차하면 사장님을 고발해야 할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사장님은 불쌍했고, 사장님을 도울 방법이 없는 난 사장님에게도 직원에게도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입장이다.

    2010년 12월 10일

    계약보증과 선급금 보증서 발급과 관련해 연대보증을 섰던 박 전무가 급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박 전무 때문에 집을 날리게 된 사모님이 “이 집은 내가 벌어서 샀다. 그런데 당신 잘못으로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으니 이혼을 하고 집을 내 명의로 바꿔달라”고 하신 모양이다. 박 전무가 무슨 낯이 있어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위장이혼으로 의심하면 보증회사에서 가압류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으니 사모님과 협의해 그냥 집을 파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사모님도 교사로 소득이 적지 않으니, 이혼은 하되 집을 판 돈으로 다른 곳에 다시 집을 사는 게 나을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그것은 사모님이 원치 않는다고 했다. 교사생활을 하시면서 번 수입의 대부분을 모아서 힘들게 장만한 집이라며 “나는 이 집에서 끝까지 살 거야”라고 하셨다고 한다. 보증을 선 것 때문에 박 전무도 이혼을 당했다.

    이혼 사유 중 가장 많은 것이 경제적인 사정이라고 하던데 사장님과 박 전무의 이혼소식을 들으니 한편으로 나는 보증을 안 선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 박 전무에게는 더욱 미안한 마음도 든다.

    직원들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한 개라도 더 챙기기 시작했다. 먼저 돈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사라졌다. 뭐든지 집에 가져간다. 빔 프로젝트, CAD 소프트웨어, 하다못해 프린터 잉크까지 모두 가져갔다. 심지어는 사장님 방에 있는 인터넷 공유기가 없어져서 싼것으로 다시 하나 사왔다. 출력을 하려고 해도 종이가 없다. 다 가져갔다. 종이컵까지 다 가져가서 커피조차 마실 수 없다. 퇴근하면서 집으로 법인차를 가져간 후 다음 날은 버스를 타고 온다. 리스차이기 때문에 리스회사에 반납해야 한다고 얘기해도 가져오지 않는다. 탈 만큼 타고 빼앗기면 그만이란다.

    하나라도 눈에 띄는 것은 먼저 챙기는 사람이 임자다. 사무실은 점차 쓰레기장으로 변해간다. 필요 없는 것은 버리고 그나마 쓸 만한 것은 가져간다. 주말에는 직원 중 한 명이 몰래 나와 사무실에 있는 석유난로를 가져갔다. 월요일에 나온 몇몇 직원은 추위에 떨면서도 난로를 가져간 직원을 두둔한다. “쓸 데가 있으니 가져갔겠지”라며 서로서로 이해해준다. 청소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사무실 곳곳에 폐기한 서류 뭉치와 쓰레기가 널려 있다. 챙길 것을 다 챙긴 직원은 마지막으로 자기가 쓰던 컴퓨터를 가지고 집에 간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는 나오지 않는다.

    사장님을 봐도 인사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사무실 비밀번호를 바꿔서 서류 몇 가지를 챙겨야 하는데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다. 부서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비밀번호를 물어보니 사무실에 있는 것 누가 가져갈까봐 바꿨다고 한다. 볼펜 한 개라도 없어지면 내가 책임을 지고, 사무실에 있는 모든 것은 직원들이 가져가도 상관 안 할 테니 제발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사정한 끝에 알아냈다. 직원이 쓰던 컴퓨터와 소소한 몇 가지 사무집기, 비품을 행여 다른 직원이 가져갈까봐 비밀번호까지 바꿔놓은 것이 부도난 회사의 속 좁은 직원들 마음인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나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좀 있었다. 어음을 막을 돈은 안 되지만 아직 남아 있는 회사의 자금이 있었다. 그리고 부도에 대비해 직원 숙소 등의 보증금을 뺀 돈도 좀 있었다. 거기에 회사의 자산을 급하게 정리한 돈도 좀 있었다. 사장님과 의논한 끝에 나는 직원들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 돈을 근로자 대표 김 차장에게 주었다. 정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직원 모두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골고루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의 개인통장으로 입금해주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김 차장이 돈을 나누어준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또 다른 이야기도 들려왔다. 분배 기준이 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입금해준 돈이지만 나도 돈은 받았다. 당연히 받아야 한다. 나는 300만 원을 받았다. 관리부 박 부장도 받았다. 그런데 27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박 부장과 나는 급여가 거의 비슷하다. 퇴직금도 거의 비슷하다. 대체 기준이 무엇인가? 돈을 만드는 데 기여한 정도에 따른 것인가? 돈의 분배를 두고 김 차장이 몇 억은 ‘먹었을’ 거라는 것부터 시작해 갖가지 뒷말이 돌기 시작했다. 김 차장에게 연락해 분배 내역과 기준을 알려달라고 했다. 김 차장은 알았다고 했지만, 이후 다시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를 찾아야 한다고, 분배 내역을 알아야 한다고 직원들이 잠시 술렁거렸다. 그뿐이었다. 다들 자기 앞가림이 더 바쁘다. 결국 김 차장을 찾는 것도 분배 내역 공개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011년 1월 20일

    다른 회사는 부도를 맞으면 회생신청을 내고 하다하다 안 되면 파산신청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 회사는 그 어떤 회생의 몸부림도 없이 바로 파산신청을 했다. 다행인지 모르지만 법원에서는 파산신청을 받아주었고 파산관재인이 선임됐다. 서울 서초동에 사무실이 있는 변호사였다. 사무실로 찾아왔는데, 오자마자 회사의 도장과 통장을 요구해 넘겨주었다. 본인은 법원 파산관재만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라고 했다. 이런 회사 정리를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연매출 600억 원의 회사가 회생신청 한 번 없이 바로 파산신청을 한 것은 처음이라 다소 의외라고 한다. “직원들이 체당금 수령을 위해 파산을 원하기에 그런 것 같다”고 하자 파산관재인은 “직원들이 애사심이 없네요. 요즘 재취업하기가 쉽지도 않은데요”라고 했다. 회생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다. 이 사람은 파산관재인이다. 회사를 정리하기 위해 왔다.

    파산관재인은 회사 재산 목록 작성을 요구했고 양식까지 주고 가기에 2주 안에 모든 것을 작성해 제출하기로 했다. 자료를 만들어서 넘겨주면 나머지는 모두 그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다. 회사의 자산을 전부 매각해 법원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를 정해진 분배 순서에 따라 나눠주는 것이다. 이것이 파산이다.

    파산의 과정에 그동안 회사가 쌓아온 가치와 이상, 기술력은 없다. 그리고 12년 세월동안 회사와 동고동락해왔으며, 부도 이후에도 사장님을 모신 내가 할 더 이상의 역할도 없다. 나 역시 다른 직원처럼 이제 회사를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2011년 5월 31일

    회사가 부도난 후 어느덧 6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부도 순간의 당황스러움도, 돌변한 사람들의 태도도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다.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해 가끔 회사에 나오던 몇몇 직원도 모두 제 갈 길을 찾아 떠났고, 남은 사람이라고는 연대보증 책임을 떠안은 관리부의 임원 두 분뿐이다. 그들만 수시로 사무실에 찾아와 사장님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지만 사장님은 대책이 없다.

    맞다. 모두들 떠나고 이제는 나와 사장님만 남았다. 한때 100명이 넘는 직원이 다녔던 회사지만, 지금 회사에 남아 있는 건 단 두 사람이다. 사무실은 부도와 함께 모두 비워줘 지금은 반지하 구석진 곳. 주차장 관리실로 쓰던 사무실 한 칸에서 파산과 관련한 작업을 한다. 이마저 이달 말이면 비워줘야 한다. 건물주는 사장님에게 얘기했다고 몇 달 더 있어도 된다고 하지만, 정리해야 할 사항도 모두 끝낸 마당에 더 있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파산 관련 자료 일체와 함께 참고할 만한 서류를 파산관재인에게 보냈다. 파산관재인은 회사 재산이 완전 매각되려면 앞으로도 1년에서 2년 정도는 걸린다고 했다. 그리고 회사 재산 매각이 모두 끝나면 직원에게 돌아갈 것이 조금 더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돈 될 만한 회사 자산은 거의 없기에 매각할 것도, 직원이 가져갈 것도 없을 것이다.

    사장님은 아직 회사에 남아 텅 빈 사무실을 지키고, 회사의 간판도 아직 남아 있지만, 12년 동안 내가 일해온 회사는 사실상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다른 회사에 가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이 회사에서 배운 지식과 경력을 갖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물론 회사의 보증을 섰다가 인생을 망쳐버린 두 분 임원보다는 내가 좀 더 형편이 나을 순 있겠지만 1440만 원의 체당금을 갖고 새 출발을 해야 하는 내 앞에 놓여 있는 길 또한 평탄한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명예퇴직금은 고사하고 12년을 일해온 회사에서 퇴직금도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나. 거기에 재무이사라는 직함 때문에 사장님과 짜고 뭔가 해먹은 놈이라는 끊임없는 의심까지 받았던 마지막 직원인 나도 회사를 떠난다.

    사장님께 내일부터 나오지 않겠다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사장님은 “내가 반드시 재기한다. 그때 김 이사 부를 테니 휴가라고 생각하고 집에서 쉬고 있으라”고 한다. 빈말인지 아니면 사장님 혼자만의 생각인지 알 수 없지만 사장님께 “사장님은 반드시 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격려의 말을 건네고 회사를 나왔다. 어차피 곧 사무실도 비워줘야 하기에 사장님을 마지막까지 모실까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사장님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안쓰러울 것 같아 미리 작별의 인사를 올렸다.

    새로운 출발

    ‘고용지원센터’를 방문했다. 그리고 오후 2시부터 시작한 실업급여 관련 교육을 받았다. 실업급여를 받는 사람이 정말 많은가보다. 매일매일 열리는 실업급여 관련 교육인데 150명 정원의 강당이 거의 다 찼다. 다들 비슷한 이유로 실업급여를 받는 것이리라. 회사 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퇴사한 직원의 실업급여를 챙겨주기만 했지, 내가 실업급여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이것도 현실이다. 나도 가정과 생활이 있기에 실업급여를 청구해야 할 것이며, 새 직장이 잡힐 때까지 다른 실직자처럼 실업급여를 받아야 한다.

    나는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르지만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의 운명이다. 그리고 내가 남을 걱정할 주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도와 함께 회사를 떠난 모든 사람의 앞길에 행운과 행복만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리고 나의 자금 운용 잘못이 부도의 한 원인이라면 사죄한다.

    12년을 다닌 직장은 부도나고 없는 지금. 내일이면 집을 나서도 갈 데가 없는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의문점이다.

    당선소감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김중식<br>● 1974년 경북 풍기 출생<br>● 한국방송통신대 졸업<br>● 전문건설회사 12년 재직<br> ● 現 전기공사업체 재직

    회사와 관련된 흔한 속설에 창립 1년을 넘기면 3년 가고, 3년을 넘기면 6년, 6년을 넘기면 10년을 간다는 말이 있다. 내가 몸담고 있던 회사는 10년을 훌쩍 넘겨 30년도 더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업력이 있는 회사였기에 믿고 의지하며 항상 고마워하며 다녔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갑자기 무너져버렸다.

    회사 부도 후 매일이 주말이나 다를 바 없었고, 아침이 돼도 나는 나설 곳이 없었다. 그러한 생활을 1년 가까이 보낸 끝에야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길을 찾아볼 여유를 가지게 됐다.

    실업자로 집에 있는 동안, 회사가 부도나기 전후 약 6개월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을 글로 정리해보았다. 결론인즉 회사가 부도나기까지 여러 원인이 있지만, 가장 후회스러웠던 점은 회사를 위해서든 개인을 위해서든 회사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동종 업종의 회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해 위기를 넘긴 모습을 보니 더욱 그러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오늘내일하며 위기 속에 있는 회사가 있다면, 그리고 그 회사를 다니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일단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회사가 살아나는 것은 회사를 위하는 길도 되지만 결국 개인을 위한 길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 좋은 작품이 많았을 텐데도 변변치 않은 졸작을 수상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박 전무가 힘없이 대답한다. 전 사장은 사장님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채업자다. 같은 학교를 나와서 친구라고는 하지만, 옛날 사업이 잘나갈 때나 친구지, 올해 들어 벌써 몇 번이나 급전을 당겨 쓴 마당에 친구일 리가 없다. 단골 사채업자일 뿐이다.

    일단 회의는 끝났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박 전무가 오후에 전 사장을 통해 1억5000만 원을 융통할 테니 그걸로 어음을 막으라고 한다. 직원의 생계가 달려 있는 급여는 안중에도 없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이번에는 관리팀 박 부장이 오늘 급여가 나오냐고 묻는다. 오늘은 지급이 안 된다고 얘기한다. 그럼 언제 나오는지 묻는다. 솔직히 언제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닷새 뒤인 20일에 지급할 예정이라고 답한다. 박 부장은 20일에도 안 될 것 같다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더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오후 늦게 전 사장으로부터 1억5000만 원이 들어왔다. 사채업자는 원래 그런 것인지, 참으로 간당간당한 시간에 돈을 넣어준다. 미리미리 주면 좋으련만 꼭 은행 마감 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돈을 보낸다. 나는 그 사이에 언제 자금이 들어오는지 몇 번이나 박 전무에게 물어봤다. 박 전무도 속이 타는 모양이다. 돈을 꿔줄려면 시원하게 꿔주지 이렇게 애태우면서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렵게 차입한 돈이니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전 사장의 세심한 배려인가?

    2010년 10월 17일

    9시 반쯤 관할 세무서에서 전화가 왔다. 오후에 회사를 방문하겠다며, 자리를 비우지 말라고 한다. 국세와 지방세를 합해 체납된 세금이 6억 원 가까이 된다. 아마 그것 때문에 방문하는 듯했다. 오후에 찾아온 세무서 김 계장이라는 사람은 체납된 세금에 대해 어떤 대책이 있는지 묻는다. 특별한 계획은 없지만 외부 투자자와 접촉 중이라는 형식적인 대답을 한다.

    이미 우리 같은 회사를 수없이 겪은 김 계장은 마치 알고 왔다는 듯 투자자가 누군지, 언제? 어떻게? 얼마나 자금이 들어오는지는 묻지도 않는다. 그저 투자가 잘 이뤄져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11월 4일까지, 즉 2주 후까지 체납 세금을 해결하지 않으면 회사 통장에 대해 압류 조처할 테니 미리 잘 해결하라는 당부 아닌 주의를 주고 간다.

    2003년에는 사장님이 우수납세자라고 세무서에서 표창을 받았다. 그 우수납세자가 불과 7년 만에 세금도 못 내는 고액체납자가 되어버렸다. 참으로 웃기는 세상이다.

    통장을 압류당하면 모든 거래가 중지된다. 바로 부도나 다름없는 결과가 초래된다. 공사기성금을 받아도 은행에서 돈을 찾을 길이 없어 바로 끝이 난다. 나는 잘 알았다고 하고,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며 김 계장을 배웅한다. 하지만 길이 없음은 저 사람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별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투자자가 있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다. 투자자가 있다 한들, 세금도 못 내고 있는 회사에는 결코 투자하지 않는다.

    회사의 위기가 외부적인 환경 변화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니다. 경기가 좋던 시절, 우리는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가 몇 번이나 헛발질을 했다. 그 때문에 지금 부도라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회사 같은 곳은 사업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한 해에 발주되는 교량 물량은 거의 정해져 있고, 시공을 하는 회사도 거의 정해져 있다. 원도급사가 어디냐에 따라 각각에 줄을 대고 있는 하도급 회사도 정해져 있다. 즉 H사에서 나오는 물량은 H사 출신 임원이 차린 F사가 대부분 가져가고, 몇 개 정도만 다른 회사에 배정하는 식이다. 일종의 커넥션이다. 이런 구도는 1980년대 중·후반부터 죽 이어져왔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완전히 변했다. 1997년의 위기와 달리 이번에는 원도급사까지 어려워졌기에 그간 유지되어온 커넥션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원도급사는 수익을 남기기 위해 기존 커넥션을 무시하고 무조건 제일 낮은 입찰가를 제시한 업체에 공사를 줬다. 따라서 기존 커넥션에 기대 회사를 운영하는 게 힘들어졌다.

    우리 회사는 D사, H사와 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D사, H사가 수주한 공사 구간에 교량 공사가 있으면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일정 부분의 리베이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커넥션이 모두 사라지면서 누가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공사를 따는 회사가 정해졌다.

    가스오븐레인지의 저주

    이 시기에 유행한 것이 사업다각화다. 우리같이 교량만 시공하는 회사의 경우 교량 공사를 수주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다른 공사는 해본 적도 없거니와 그런 공사를 할 면허도 기술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장님은 사업다각화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가 명품 주방가전 수입업이었다.

    사장님은 지금의 회사를 설립하기 전에 유럽에서 상사주재원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다. 그때 유럽의 주방가전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중 눈여겨본 것은 세라믹글라스 상판을 쓰는 독일제 가스오븐레인지였다. 우리나라에 들여오면 한국인의 명품에 대한 욕망을 자극해 ‘대박’을 칠 것이라고 여겼다. 또 아파트를 짓는 원도급사에 아는 사람도 많으니 빌트인(built-in)으로 납품하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수입 및 판권계약을 했다. 욕심이 다소 과했는지, 동북아시아 전체에 대한 독점 판권까지 샀다. 거의 10억 원 가까이 들었다. 제품 초기 물량을 수입하는 데도 거의 5억 원이 들어갔다. 매장을 꾸미고, 직원을 뽑고, 독일에 연수를 보내고, AS 부품을 수입하는 데 약 3억 원, 수입 주방기구에 대한 사용 허가를 받는 데 1억 원, 광고 및 홍보와 건축박람회 참가 및 백화점 입점료 등에 또 1년 동안 10억 원 가까운 돈이 들어갔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우리는 가스오븐레인지 수입과 판매, 홍보 등을 위해 거의 30억 원을 썼는데, 정작 이 제품은 1년 동안 10대도 채 팔리지 않았다. 사장님이 수입한 명품 가스오븐레인지의 판매가는 오븐이 붙어 있는 고급형이 700만 원, 오븐이 없는 레인지형이 400만 원이었다. 명품이라고는 해도 너무 비쌌다. 물론 수입원가 자체가 비싸기는 했다.

    게다가 원적외선이 방출되고 불꽃이 보이지 않아 안전하다는 세라믹 글라스 방식의 가스오븐레인지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불꽃이 보이지 않아 엄청나게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김이나 마른 오징어처럼 불에 바로 굽는 음식은 조리할 수 없었다. 또 세라믹 글라스가 가열돼야 해서 기본적인 반응 시간도 일반 가스레인지보다 느렸다. 라면을 냄비에 끓인다고 할 때 일반 가스레인지보다 1~2분 정도 물이 늦게 끓는 식이다.

    레인지의 점화방식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도 문제였다. 접지콘센트가 시공된 집이 아니면 가스오븐레인지를 점화조차 할 수 없는데, 한국의 최신 주택에는 대부분 이런 시공이 돼 있지 않았다. 결국 우리나라 소비자를 위해 별도로 접지 없이 점화가 가능한 장치를 만들어 각각의 가스오븐레인지에 부착해야 했다. 그런 뒤에도 문제가 나타났다. 한국과 독일의 조리법이 다른 데서 생기는 문제였다. 내부 점화장치가 장시간 가열에 취약해, 행여 곰탕이라도 끓이게 되면 여지없이 점화장치가 고장 났다.

    온갖 노력을 해보았지만 회사 협력업체에 한두 대씩 억지로 떠넘기는 것 외에 가스오븐레인지를 팔 방법이 없었다. 명품 가스오븐레인지라면서 고장은 또 얼마나 잦은지, 판매 제품의 거의 절반은 환불을 해줘야 했다. 명품을 표방했기에 환불에 너그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2년 동안 30억 원 이상을 손해 보고 가스오븐레인지 사업을 접었다.

    연이은 헛발질

    두 번째 헛발질은 계측 전문 업체를 합병한 것이었다. 우리는 교량 시공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다. 교량에는 안전을 점검하기 위해 많은 계측기가 들어간다. 새로 들어온 임원 한 명이 계측기 회사를 잘 알고 있다며, “계측기 사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했다. 교량을 시공하면서 원도급사와 잘 얘기하면 어차피 들어가는 계측 업무를 우리에게 맡길 것이고 그러면 계측기 몇 대 넣고 50년이고 100년이고 교량이 무너질 때까지 유지·관리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업다각화에 목마른 사장님은 새로 들어온 임원의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갔다. 사장님의 지시를 받아 급하게 계측회사를 합병했는데, 이 회사가 완전 빚 덩어리였다. 웬 부채가 그리 많은지 지금까지 어떻게 회사를 끌고 왔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계측기 회사의 대표는 자기도 사장이었다며 합병 후 부사장 직위를 달라고 했다.

    임원들이 반대했다. 빚 덩어리 회사를 갖고 온 주제에 무슨 부사장이냐고 했다. 직원들도 융화가 되지 않았다. 일단 너무 게을렀다. 출근 시간이 따로 없었다. 물어보니 원래 그쪽 회사 문화가 출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한다. 자기가 맡은 계측기만 관리하면 되는 일이다보니 반 자유직이었다. 한 3개월 지켜봤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속았다’는 것이었다.

    계측기를 유지·관리해서 받는 금액보다 계측기를 확인·점검하러 가는 출장비가 더 많이 들었다. 지방에 있는 교량이나 교량의 계측기를 점검하러 갈 경우 도로공사나 코레일에서 받는 계측기 관리비가 월 20만~50만 원인데 출장비는 한 달에 100만 원 가까이 들었다. 현장 대부분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기에는 어려운 지역이다보니 사정은 이해가 가는데, 대체 이 회사를 무슨 이유로 운영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계측기 회사를 끌고 들어온 임원의 말처럼 시너지 효과는 당연히 일어났다. 우리가 시공한 교량에 우리가 계측기를 설치·관리하겠다고 하면, 원도급사는 거의 대부분 별말없이 승인해줬다. 다른 계측 회사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니 들어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수익이 나지 않는 일을 할 ‘미친놈’이 있겠는가? 하면 할수록 적자였다. 결국 1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시간까지 줘가며 계측기 말고 다른 수익 구조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아무 방안이 없었고, 꼭 1년이 지난 뒤 회사를 분리했다. 그동안 직원 급여와 회사 관리비, 기존 채무까지 갚아주느라 쓴 돈이 거의 30억 원이었다.

    새로 들어온 임원도 같이 내보냈다. 원가 개념이 없는데다 상황 파악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자리 한번 잡아보겠다고 일을 벌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체를 알고 보니 원수 같았다. 임원이랍시고 가져간 월급만 근 1억 원이었다. 거기에 법인 차를 사용했고, 접대비 등 경비까지 썼다. 회사에 최소 10억 원 이상의 순수익은 가져왔어야 밥값을 한 것인데, 말 그대로 월급 도둑이었다.

    이후에도 사장님의 사업다각화는 계속됐다. 어느 날 갑자기 사장님은 지인이 소개했다며 특수 모르타르(mortar·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물로 반죽한 것) 회사를 인수해 유지·보수 분야에 진출한다고 했다. 공매로 나온 회사인데 모르타르 공장을 짓는 데 큰돈을 쓰다가 부도가 났다고 한다. 낙찰 후 유치권만 해결해도 땅값이 공매비의 몇 배가 남으며, 거기에 특수 모르타르까지 생산하면 완전 대박이라고 했다.

    공매로 낙찰을 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낙찰받은 후 하나하나 꼼꼼히 점검해보니 이것은 대박이 아니라 쪽박이었다. 유치권을 해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았다. 공매 내역 중 모르타르 재료 및 제품이 10억 원 가까이 됐는데 실사 결과 재료와 이미 생산된 제품은 다 굳어서 쓸 수 없었다. 기계설비도 지나치게 노후화돼 새로 교체해야 했다. 특수 모르타르 제작에 대한 특허권은 있었지만 공매다 뭐다 해서 몇 년이나 제품 생산이 중단돼 있는 동안 이미 다른 회사의 더 좋은 제품이 시장에 나와 있었다. 이제 와서 특허 제품을 생산해본들 경쟁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사장님은 지방 산업단지에 있는 허울뿐인 회사를 거액을 들여 인수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뿐이 아니었다. 공매 낙찰로 인수했고, 어찌 되었든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사장님이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그간 밀려 있던 직원들의 급여와 퇴직금까지 우리 회사가 떠맡게 된 것이다. 모르타르를 생산하려면 유치권으로 점거 중인 사람들을 내보내야 했는데 원만한 해결을 위해, 그리고 일부 인원은 재고용을 해야 모르타르 생산이 가능했기에 좋은 뜻으로 기존 직원들의 급여와 퇴직금까지 정리해주었다.

    정리 후 모르타르는 딱 한 번 생산했는데, 초기 생산품이라 그런지 품질이 아주 불량했다. 그 길로 사장님은 모르타르 사업도 바로 접었다. 원료를 수입해 제품을 계속 생산해도 이미 시판 중인 제품과 경쟁해 이길 자신이 없었다. 땅값도 감정가만 높았지 실제 매매가는 감정가와 연관성이 없었다. 지방산업단지 내에 위치한 공장이다보니 업종이 제한돼 있어 팔기도 쉽지 않았다.

    한 우물만 파도 성공하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 사장님은 너무 많은 우물을 팠다. 물론 사장님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어려운 건설 경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직원이 보기에 그는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헛발질이나 하고 있는 ‘팔랑귀’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2010년 10월 19일

    공사 수주다. 어렵게 입찰에 참여했는데 낙찰을 받았다. 현재 회사 사정에서 입찰에 참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주까지 받은 것은 정말 기적에 가깝다. 어떻게 150억 원짜리 공사가 우리 회사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수주 소식을 듣자마자 선급금을 받으면 우선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잘하면 올해를 넘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입찰 서류가 많이 부족했을 텐데 어떻게 낙찰을 받을 수 있었을까. 우선은 격려할 일이다. 영업이사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박 이사님, 수주 받느라 고생하셨어요! 그나저나 선급금은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일단 계약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럼 빨리 계약하고 선급금 좀 받아주면 안 될까요? 이사님도 아시다시피 요즘 회사 사정이 좀 그래서….”

    “나도 회사 사정 모르는 거 아닌데 당연히 빨리 진행을 해야지요. 공기가 촉박하니 바로 계약 들어가고, 계약만 들어가면 선급금은 바로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간만에 듣는 수주 소식이어선지 직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현재의 회사 사정을 보면 아주 큰 희망이다. 오랜만에 좋은 일이 생겨선지 여러 부서에서 회식을 한다고 한다. 임원들도 사장님과 저녁식사를 한다고 나보고도 오라고 했지만 나는 그다지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참석을 하면 회식 분위기가 자금 문제의 해결방안을 토론하는 분위기로 흘러갈까봐 걱정도 됐다.

    기적적인 수주, 희망의 수주! 하지만 진정 그럴까?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기겠지 하는 기쁜 마음으로 퇴근을 했지만, 내일의 좋은 일이 보증 문제라는 나쁜 일로 바뀔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평소 오전 8시경 회사에 출근한다. 그날의 예상 입금액과 예상 지출액을 계산해 하루 자금 수지표를 만든다. 이에 따라 자금을 운용하는 게 하루 일과다. 결산일이나 관련 신고가 있는 때가 아니면 거의 매일 똑같다.

    그러나 요즘엔 달라졌다. 오전 8시경 출근을 하면 바로 전화가 온다. 현장 관리직원이거나 소장이다. 내용인즉 오늘까지 어떤 자재가 안 들어오거나 거래처에 자금 집행이 안 되면 작업이 중단된다는 얘기다. 작업이 중단된다는 말은 진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일부 소장들은 회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에게 돌아올 피해를 막기 위해 우선적으로 자기 현장의 채무를 해결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현장에 자재나 장비, 인력을 공급하는 외주업체에서는 소장 얼굴을 보고 자재, 장비, 인원을 공급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가 부도나면 해당 업체에서는 소장을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회사가 부도나면 직원은 다른 곳에 취직해야 하는데 전에 다녔던 회사와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으면 옮겨간 회사에서 다시 자재, 장비, 인원을 공급받기가 힘들다. 건설회사에서는 자재, 장비, 인력을 잘 끌어오는 것이 곧 소장의 능력이다. 그렇기에 현장의 채무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중요한 업체의 채무는 특히 어떻게든 해결해주려고 ‘현장 스톱’이라는 협박성 전화를 거는 것이다.

    하루 종일 돈 걱정

    다 믿을 것은 아니지만, 몇몇 업체에는 자금을 집행해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현장이 멈추게 된다. 현장이 멈추면 소문이 금방 퍼지고, 그렇게 되면 바로 회사가 끝이 난다. 건설회사는 부도나면 책상밖에 남는 게 없다는 얘기가 있다. 돈 못 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 계속해서 자재, 장비를 공급해줄 바보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몇 푼 안 되는 돈이나마 쪼개어 어떻게든 운용할 계획을 세운다. 현재 회사 사정이 어떠하든,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장을 서게 해서는 안 된다. 하루에 최소 5, 6군데 전화를 해오는 현장소장의 죽는소리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나면 자금 관련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어차피 결론은 뻔하고 대응책은 없지만 그래도 회의는 한다. 자금 관련 회의를 마치고 나옴과 동시에 본사의 여러 부서에서 직원들이 찾아온다. 회의 결과가 무엇인지, 벌써 몇 차례 밀린 자금 집행이 오늘은 가능할지에 대해 묻는다. 본사에서도 본사에서 구매한 자재나, 장비 등에 대한 결제 독촉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월급은 언제 지급되는지, 또 개인이 선집행한 출장비나 회사 구매품에 대한 돈은 언제쯤 줄 수 있는지 곳곳에서 묻는다. 거기에 대답하다보면 거의 점심때가 된다.

    억지로 점심을 몇 술 뜨고 나면 다음에는 거래처 사람들이 찾아온다. 옛날에는 점심 전에 찾아와서 밥도 곧잘 사주던 이들이었는데 다 옛날얘기다. 거래대금이 언제 지급되는지 독촉하러 오는 것이다. 하지만 해줄 얘기는 없다. 그저 월말이 다가오면 다음 달 15일이라고, 15일이 되면 다시 월말이라고 계속 미루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아주 일부지만 거래대금을 자기네 것만이라도 주면 내게 커미션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어차피 부도나면 다 떼이는 것이니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회사에는 쥐약 살 돈도 없는 형편이다.

    퇴근 무렵이면 현장에서 다시 전화가 온다. 현장은 본사와는 다르다. 돈이 없으면 정말 멈추게 된다. 개인 돈을 써서라도 돌려야 한다. 그러기에 묻는다. “월급은 안 줘도 되지만 개인 돈 쓴 것은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집에 돈을 가져가지는 못해도 직원이 집안 돈 가져다가 쓰도록 하지는 말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맞다. 맞는 얘기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얘기다. 하지만 개인 돈이든, 현장 운영자금이든 줄 돈이 없다. 그것이 문제다. 이렇게 출근부터 퇴근까지 돈 걱정하다가 볼일 다 보는 것이 요즘 나의 하루 일과다.

    2010년 10월 20일

    기적의 수주가 좋은 것은 아니다. 보증서 발급 문제가 발생했다. 발바닥의 불이다. 공사를 계약하기 전 계약이행보증서와 선급금 보증서를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회사의 현재 형편으로 보증서를 발급받을 수 없다. 세금 체납 사실이 이미 보증기관에 통보됐기 때문이다. 전문건설공제조합에서 보증을 받는 것은 물 건너갔고, 민영기업인 서울보증보험에서는 연대보증인 두 명을 세우면 보증서를 발급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보증서가 내일까지 발급되지 않으면 계약은 취소된다. 안 그래도 우리 회사는 곧 부도난다면서 그곳과 계약하면 안 된다고 투서를 넣은 동종업체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누가 보증을 설 것인가? 오전 10시에 시작된 자금 관련 회의가 점심시간마저 훌쩍 넘긴 시점에도 끝나지 않는다. 연대 보증을 설 사람이 결정되지 않아서다. 아무도 서려고 하지 않는다. 계약보증은 15억 원. 선급금 보증은 7억 원이다. 두 개를 합치면 22억 원이다. 회사에 만일 문제가 발생한다면 22억 원에 대한 채무자, 즉 빚꾸러기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회사에 문제가 생길 확률은 대단히 높다. 이 문제로 자금회의 시간 내내 의논을 했다. 회의를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보증 설 사람을 정하자는 것인데 누구에게 보증을 서라고 강권하지 않는 한 아무도 보증을 서려고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관리부 임원 두 명이 관리부이고 회사에 오래 다녔다는 이유로 보증을 서기로 한다. 사장님은 “만일 문제가 생겨도 내 개인 건물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다. 그 건물도 벌써 몇 번이나 사채를 빼 썼고, 여기저기 근저당까지 잡혀 있어 그다지 신뢰할 수는 없다. 그래도 현실의 상황에서 어쩌겠는가. 회사 자금 문제는 지금까지 관리부에서 계속해 관리 및 관할을 해왔기에 보증을 못 서겠다고 할 수도 없다. 관리부 임원의 숙명이다.

    “아주 유능하신 분”

    사장님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권 사장이라는 분이 아주 유능한 분이라며 사람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정치권에 발이 넓고 특히 금융권에서 오래 근무해 대출이나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 등의 지원을 잘 받아올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복장이나 행색, 말하는 품새가 그리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사장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가 보다. 아주 반색을 하면서 귀인이라도 오신 양 지극정성으로 모시려 한다. 관리부 임원 방을 하나 빼서 ‘유능한 분’의 방을 만들어 드리고, ‘유능한 분’이 담배를 피운다고 하자 재떨이를 사주라고 하는가 하면 사장실에 있는 공기청정기까지 손수 가지고 가 설치해드렸다.

    권 사장이 소개해준 ‘아주 유능한 분’은 오자마자 차와 기사를 요구한다. 회사에서 업무용으로 쓰는 그랜저 차량을 드렸다. 그리고 현재 형편상 기사를 별도 채용하기는 어려우니 필요할 때는 직원이 운전을 하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다. ‘유능한 분’은 사장님과 얘기하겠다고 한다.

    다음 날 사장님이 부르신다. “어려운 형편은 알지만 그분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다. 정치권에 줄이라도 넣어 대출을 받아야 한다. 유능한 분의 친구가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인데, 친구 만나러 가는 데 내가 어떻게 기사도 없는 그랜저 같은 차를 타고 가냐고 하더라. 최소한 이사장보다는 좋은 차를 타고 가야 친구로서 체면이 서고 그래야 내 얼굴을 봐서라도 신용보증기금에서 자금 지원을 해줄 거 아니냐고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전해 들은 얘기지만, 그 양반이 ‘허’자 달린 렌터카 타고는 창피해서 어디 못 돌아다니겠다고도 한 모양이다. 그리고 서울 시내에서 가스 떨어지면 충전할 곳도 별로 없으니 겸사겸사 다른 차로 바꾸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사장님은 이왕 바꾸는 김에 에쿠스로 해주자고 했지만, 나는 몇 십만 원이라도 아껴야 하는 입장이기에 “사장님이 에쿠스를 타는데 어떻게 그 양반이 에쿠스를 타느냐”며 최종적으로 오피러스를 지원해주기로 했다.

    며칠 뒤 오피러스가 나왔다. 사장님의 2002년식 에쿠스와 그 양반의 신형 오피러스를 보니 많은 생각이 든다. 오피러스를 타는 그 양반이 더 사장 같아 보인다. 2002년식 에쿠스를 손수 몰고 다니는 우리 사장님은 꼭 대포차를 모는 것처럼 보여서 사장님의 현재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피러스 승용차와 함께 법인카드도 한 장 지급했다. 솔직히 ‘유능한 분’에게 기대하는 건 하나도 없다. 그 양반은 매일 어디를 그리 가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오늘은 국회에 간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기사로 임시 배치된 직원도 안 데리고 혼자 국회에 간다고 하기에 마침 여의도에 볼일도 있고 해서 내가 모시겠다고 했다. “김 이사는 바쁜데 혼자 갔다 올게”라고 한다. 왠지 모르게 같이 가보고 싶어 거듭 같이 가겠다고 했다. 마지못해 그러자고 한다.

    부도의 전조 증상

    운전은 내가 했다. ‘유능한 분’은 차문을 닫고부터 국회에 도착할 때까지 한시도 입을 쉬지 않는다. 수원세무서장이 옛날 자기의 ‘똘마니’였다는 것부터, 금융감독위원회 국장이 자기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한다고 하고, 국회의장과 옛날부터 호형호제 하는 관계였다고도 한다.

    문득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 양반의 양복저고리를 보니 소맷부리가 어찌나 닳았는지 반질반질하다. 번쩍거리는 금장시계도 꼭 금도금을 한 것처럼 구질구질해 보이는 건 왜일까? 가면서 국회에 전화를 걸더니 국회의장 비서실이냐고 묻는다. 자기의 이름을 밝히며 국회의장을 바꾸어달라고 하더니, 결국 비서인지 뭔지와 통화를 하고 끊는다. 묻지도 않았는데 지금 국회의장이 회의 중이라고 한다.

    국회에 도착했다. 나보고는 볼일을 보러 가라고 한다. 중소기업중앙회에 준비한 서류를 제출하고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다.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인즉, 정부 지원금은 많이 있지만 대부분 제조업 쪽에 편중돼 있고, 건설업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결과를 기다려보라고 한다. 10분 정도 업무를 보고 다시 국회 쪽으로 오니 ‘유능한 분’은 아직 차에 있다. 나보고 자기는 국회의장을 만나고 가야 하니 먼저 가라고 하기에 괜찮다고 제가 기다렸다가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나는 ‘유능한 분’의 능력이 어떤지 한번 보고 싶었다. 한 10분쯤 후 전화를 하더니 회의가 길어지는 것 같으니 내일 와야겠다며 돌아가자고 한다. 돌아오는 내내 나는 말을 걸지 않았고 ‘유능한 분’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회사가 부도나기 전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말로만 들었지, 실감이 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부도가 날 정도면 회사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건지 실감이 난다.

    일단은 직원들의 근태가 관리되지 않는다. 급여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다보니, 출근을 한다 해도 자기 볼일이 있으면 나가서 자기 볼일을 보고, 회사에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않는다. 점심만 먹고 집에 가기도 한다. 일을 시키려고 해도 시킬 수가 없다. 일을 시키고 통제를 하려면 급여를 줘야 하는데 월급을 안 주니 아무것도 시킬 수 없는 것이다.

    회사를 운영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당연히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구매를 하려고 해도 돈이 없으니 안 된다. 각종 계획을 세워도 집행할 수 없어 모두 허사가 된다. 심지어는 10월 급여대장을 작성해 올리라고 했더니 “줄 돈은 있냐”고 물어본다. “줄 돈 없으면 뭐하러 시간 낭비하냐”는 말이다. 짜증을 내기도 뭐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줄 수 없는 돈이다. 현장에서는 각종 돈 되는 자재, 장비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몇 백만 원 하는 광파기는 ‘짬밥’ 좀 되는 직원이 아예 자기 차에 싣고 다닌다. 저녁에도 사무실에 두지 않고 차에 보관한다. 심지어 주말에는 집에도 갖고 간다. 물론 부도가 나면 돈 될 만한 것은 업체들이 와서 다 가져가버리기 때문에 개인적인 목적에서든, 회사를 위해서든 돈 될 만한 것은 미리 챙겨놓아야 한다. 하지만 차에 광파기를 싣고 다니는 직원이 회사를 위해 그것을 챙겨 다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건설회사는 일반 회사와 다르다. 현장과 본사가 멀리 떨어져 있기에 현장에서는 일단 돈 될 만한 것을 본사 모르게 팔아먹을 수 있다. 어차피 지금쯤이면 팔아도 통제할 수 없고 통제를 할 만한 사람도 없다. 그것을 것을 막고 현장을 어떻게든 살려야 할 현장소장 솔선해서 팔아먹는데 그걸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여기저기 현장에서 뭐를 얼마나 팔았네 하는 우울한 첩보가 수시로 들려온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기록해놓았지만 얼마 전부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만일 아주 만일에 회사가 정상화된다면 이것들을 되찾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또 팔아먹은 직원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모두가 도둑놈이다. 말로는 다들 회사를 위해 고통을 참고 이겨내자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 도둑이다. 어떻게든 한 건 해먹고 튀려는 속셈을 가진 ‘유능한 분’부터 회사의 임원까지 모두 똑같다.

    임원들에 대한 모든 지출을 끊었다. 임원이 업무적으로 사용한 경비든 회사를 살리기 위해 쓴 접대비든 마찬가지다. 부사장이라는 인간이 자금 유치와 관련해 아주 중요한 손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가지고 온 영수증이 토요일 저녁 할인마트 푸드 코너에서 먹은 영수증이다. 토요일 저녁에 중요한 손님을 만났다는 것도 신뢰가 안 가지만, 그 손님과 할인마트 푸드 코너에서 식사를 했다고 하는 것도 우습다.

    일일이 다 지적하기에는 이런 일이 너무 많다. 일반 직원이 불쌍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회사가 언젠가는 살아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자기 돈 써가면서 다니는 직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원들은 자기 돈 10원 한 장 안 쓰고 어떻게든 회사 돈 빼먹을 궁리만 한다는 얘기가 자꾸 들어온다. 회사가 잘됐으면 이런 일이 내 귀에까지 들어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기네끼리 해먹고 말 사안이다. 이제는 자재나 장비를 공급한 후 대금을 수령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현장 직원이, 거래업체가 먼저 뭔가 중요한 소스나 되는 것인 양 나한테 얘기를 해주는 것이다.

    그들도 다 똑같다. 이왕 이야기를 할 거면 진작 해주지, 회사가 다 망해가는 시점에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 빼먹고 더 이상 빼먹을 게 없으니 비밀이랍시고 털어놓는 것 아닌가. 비밀은 무슨. 다들 자기 돈 못 받을까봐 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돈 빼먹은 것을 다 아는데 안 나눠주는 현장소장과 임원들이 보기 싫어서 들려주는 것뿐이다. 돈 해먹은 이들이 그것을 안 나누어주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다음부터는 해먹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해먹은 돈을 나누어주었다면 돈을 해먹네 마네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임원이든 소장이든 직원이든 결국 그동안 이리저리 해먹은 다 똑같은 도둑놈이다. 그리고 회사 사정이 좋았으면 계속 해먹고 있었을 놈들이다. 지금에 와서 고자질이나 하는 놈은 돈 빼먹은 놈보다 더 유치한 놈일 뿐이다.

    말라버린 자금줄

    2010년 10월 31일

    9월 30일에 이어 10월 31일이 되었음에도 급여를 지급하지 못했다. 급여가 두 달이나 밀린 적은 올해 초 딱 한번이었다. 그래도 올해분 선급금을 받자마자 다른 것은 모두 미루고 밀린 급여부터 주었다. 그런데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가을철에 1년 중 돈을 가장 많이 벌어야 하는 이때 두 달째 급여를 줄 돈이 없다.

    오늘은 급여가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린다. 하지만 나는 안다. 오늘도 급여는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오전에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급여를 줄 수 있냐고 묻기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럼 반이라도 줄 수 있겠냐 묻기에 그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매일 자금일보에 꼬박꼬박 서명을 하면서 사장님은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알면서 물어보는 것인가? 아니면 몰라서 물어보는 것인가? 여기저기서 돈 관리를 하는 내가 멍청해서 회사가 이 꼴이 됐다고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맞을 것이다. 내가 멍청해서 그랬다. 옛날에 잘나갈 때 돈을 제대로 관리했어야 했고, 사장님이 여기저기 일을 벌이며 헛발질을 하고 있을 때 제지했어야 했다. 헛발질로 까먹은 돈만 없다면 이렇게까지 코너에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결국 월급 못주는 것은 내 잘못이다.

    2010년 11월 15일

    11월 15일 기성수령일이 됐다. 예정대로라면 기성 수금으로 35억 원 정도의 자금이 입금돼야 하지만 실제 입금된 돈은 7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 10월 31일을 기점으로 거의 모든 현장이 직불 체제로 전환됐다. 현장의 자재, 장비, 노임 등이 두 달 가까이 결제가 밀리자 작업이 중지될 것을 우려한 원도급사에서 공사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현장 직불체제로 전환하든지 선택을 하라고 했다. 마지못해 15개의 현장 중 11개의 현장에 대해 공사기성 직불 동의서에 서명해줬다. 현장에서는 현장에 투입된 자재대나 노무비, 장비대 등을 먼저 정리하고 남은 돈을 본사에 입금했다. 그 돈이 7억 원이다. 35억 원을 받아 급한 불이라도 꺼야 하는데 28억 원이 현장 직불로 다 나간 것이다.

    공사를 포기하면 공사 포기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공사와 관련해 제출한 보증서에 대한 책임이다. 15개 현장 보증금은 계약 보증이 120억 원에 잔여 선급금 보증이 40억 원가량이다. 그렇기에 공사를 도저히 못할 지경이 되면 합의 타절(打切)로 공사를 종료해야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제는 합의 타절이고 뭐고 부도로 자동 타절될 처지다. 현장에서 직불을 하고 남은 돈 7억 원으로 이미 발행돼 돌아오는 어음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장님의 친구이자 사채업자인 전 사장에게 돈을 빌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지난달에 빌린 1억5000만 원도 아직 갚지 못했다. 전 사장의 이자는 연 20%다. 그나마 아는 처지라 싸게 줘서 그렇다고 한다. 처음 빌릴 때는 며칠만 쓰면 될 것 같았기에 이자 부담을 그리 크게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며칠이 지나도 전 사장의 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이자 부담이 어마어마해졌다. 1억5000만 원만 해도 월 이자가 250만 원이다. 전 사장은 두 달이 지난 시점, 즉 11월 16일부터 이자를 35%로 올리겠다고 통보해왔다. 자기네는 단기자금으로 알고 20%로 해줬는데 이렇게 길게 쓸 거면 저리로는 줄 수 없다는 것이다. 20%가 저리면 고리는 도대체 몇 %인가? 한발 한발 늪에 빠지는 느낌이다.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지는 기분. 더는 손을 써볼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이달 말에 돌아오는 어음은 도저히 막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결국 부도가 날 것 같다.

    문제는 계약과 선급금에 대해 연대보증을 선 관리부 두 임원이다. 기존의 보증이야 공제조합에서 신용으로 한 것이라 큰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된다 해도 사장 혼자만 책임을 지면 된다. 하지만 지난달 발급받은 보증서에는 두 분 임원이 연대보증을 섰다. 만일 부도가 난다면 22억 원에 달하는 보증금액을 두 분이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 이제 와서 사장을 원망하고 내가 보증을 왜 섰을까 한탄해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보증 서달라는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란 얘기도 있지만, 두 분은 이 회사에서 15년을 보냈기에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두 분 임원은 회의 내내 힘이 없어 보이고 아무런 말도 없다.

    사장님이 개인 건물을 팔아서라도 해결해주겠다고 얘기했지만, 그건 건물을 정상적으로 팔 수 있을 때 이야기다. 지금은 늦었다. 이미 그 건물은 전 사장의 사채를 쓰기 전에도 몇 건이나 근저당이 잡혀 있고, 부도가 나면 금융권에서 차압이 들어올 것이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22억 원의 빚을 곧 떠안게 될 두 분의 심정은 어떠할까? 아직 두 분 모두 집에 보증을 섰다는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두 분의 인생과 가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차라리 공사 수주를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수주했는데도 선급금으로 받은 7억 원은 어음을 막고 세금 조금 내느라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차라리 7억 원으로 직원들 밀린 급여라도 주었다면 22억 원의 보증 채무가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회사의 운명은 한 달 더 연장됐지만 그 노력도 허사였다. 두 분에게는 죄송한 마음이 든다.

    가끔 엄청난 빚 때문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선택한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곤 한다. 사장님도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두 분 임원에게 내가 어떻게든 해결을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결국 오늘 회의는 자금회의가 아닌 자살방지위로회의가 된 셈이다.

    사채업자의 농간

    2010년 11월 16일

    11월 15일자로 돌아온 어음을 전 사장의 도움으로 또다시 억지로 막은 다음 날, 전 사장이 찾아왔다. 사장님은 사장실의 문을 닫고 한참이나 얘기를 나눈 끝에 나를 불렀다. 결론인즉, 사장님의 개인 건물을 전 사장에게 급매로 넘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옆에서 전 사장은 “그깟 건물, 부도나면 10원도 못 건져. 나나 되니 급매로 사지 아무도 처리할 놈 없다”고 한다. 나는 가격을 물었다. 전 사장은 지금까지 급전 쓴 8억 원을 제하고, 건물에 잡힌 근저당까지 자기가 다 인수하고 잔금 9억 원을 지불하겠다고 한다. 9억 원에 팔기 싫으면 관두라는 것이다. “어차피 부도나면 다 날아가는 것, 9억 원이라도 숨겨서 노후를 대비하라”고 사장님을 부추긴다. 자기도 근저당된 것 풀고 나면 몇 푼 떨어지는 것도 없다고 한다.

    지하철 7호선 학동역 옆에 있는 건물. 사장님이 지금의 회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갖고 있던 순수 사장님 개인 건물. 현재 가치로 60억 원 정도 되는 5층짜리 건물이 단돈 17억 원에 허무하게 넘어간다. 근저당이 여러 건 잡혀 있지만, 매각 후 차액은 상당할 것이다. 그러기에 아까웠다. 진작 그 건물을 팔아 직원의 급여를 지급하거나, 어음을 막는 다른 방법도 강구해볼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어차피 부도나면 다 날아갈 건물이다. 여기저기서 압류가 들어오면 한 푼도 못 건진다는 전 사장의 말은 맞다. 회사가 부도나지 않는다면 모르되, 부도가 난다면 그 건물은 사장님의 것이 아니다. 채권자의 것이다. 채권자가 은행이든, 아니면 업체든 결국 남의 것이 되고 만다. 나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건물도 아니다. 사장님이 9억 원의 돈이라도 잘 챙겨서 한 10년 남은 인생, 편치는 않아도 걱정 없이 살아보시라고 별말은 하지 않았다.

    참으로 사채업자는 돈을 쉽게 번다. 계약과 매매, 대금 지급이 일사천리로 끝났다. 오전 10시에 회사를 찾아온 전 사장은 오후 3시 55분에 9억 원을 사장님 통장에 입금해주고, 오후 4시에는 법원에 이전 등기 신청을 하러 가야 한다며 나갔다.

    사장님께 건물을 팔고 받은 9억 원을 어떻게 할 건지 묻지 않았다. 그저 “현금으로 모두 찾아드릴까요” 하고 물어봤다. 어차피 부도가 나면 은행에 있는 돈은 모두 거래중지가 되기에 일부 생활자금이라도 하려면 현금으로 찾아서 갖고 있어야 한다. 사장님은 “내일 오전에 찾아도 될까” 하고 물어봤고, 나는 “문제없다”고 했다. 사장님은 “내일 오전 중에 돈을 찾아달라”고 하셨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사장실을 나왔다.

    보증을 선 두 분 임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분 임원을 위해서 무언가 말을 해줘야 할 것도 같았지만, 사장님이 그들에게 건물을 팔았다는 얘기를 아직 하고 싶지 않은 눈치라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어차피 두 분 임원도 곧 사장님이 건물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그전에 두 분 임원이 건물을 팔아서 보증 문제를 해결하자고 사장님을 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들 몰래 건물이 이미 팔렸고 사장님이 가져가실, 어디에 쓰실지 알 수 없는 돈 9억 원만 남았다고 하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전 사장이 나쁘다. 사장님도 나쁘다. 본인의 사정도 급하지만 자기를 믿고 보증 선 두 사람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은 할 수 없다. 입장을 바꿔 내가 사장이라면 나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다.

    2010년 11월 20일

    고용노동부에서 연락이 왔다. 임금체불과 관련해 퇴사한 직원과 현장 근로자가 진정을 낸 사건에 대해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어 검찰로 넘겼다고 한다.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주어야 사건이 종결되는데 그 금액이 8명에 1억5000만 원이 넘는다. 근로감독관이 회사 측의 사정을 봐줘 석 달이나 시간을 줬는데 단 한 명도 해결을 못했다. 근로감독관은 검찰로 넘어간 사건을 위임받아 조사를 하는 것이므로, 이제 피고소인 신분으로 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대동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대리인 출석은 허용되지 않으니 오후에 사장님이 직접 고용부에 출석하라고 한다.

    오후에 사장님을 모시고 고용부에 갔다. 동일한 8건의 임금체불 관련 진정이 이제는 범죄행위가 됐다. 사장님은 피진정인 신분에서 피고소인이 됐다. 감독관이 묻는다.

    “본인이 피고소인의 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것을 알고 있나요, 변호사를 대동하거나 불리한 진술에는 답변을 거부하실 수 도 있습니다.”

    내용과 결과가 빤한 것을, 답변을 거부하거나 변호사를 대동해 조서를 꾸밀 것이 무엇이 있나? 사장님은 모든 내용을 인정하며 급여를 받아 생활해나가는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이라는 요지로 조서를 꾸몄다. 조서를 꾸민 후 감독관은 검찰로 불려가 조사를 받기 전 얼른 취하서를 받으면 해결된다고 조언을 해준다. 하지만 어차피 돈이 없기에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감독관은 친절히 담당검사실의 전화번호를 준다.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 취하하면 아무 문제가 없으니 빨리 해결하라고 거듭 당부한다. 그리고 본인의 손을 떠나서 검찰로 넘어갔기에 이제 시간을 좀 더 줄 수도 없다며 안타까워한다. 돌아오는 길. 뒷자리에 앉은 사장님은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나도 아무런 말없이 회사로 돌아왔다.

    꼬이는 ‘똥파리’

    2010년 11월 21일

    사장님의 지인인 권 사장이 소개한 ‘유능한 양반’은 속칭 ‘똥파리’인 듯하다. 어제도 “여의도에 가서 국회의장을 만나겠다. 그리고 신용보증기금이나 기술보증기금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게끔 이야기를 해본다”며 직원을 운전기사로 보내달라고 해서 직원을 보내주었다. 다녀온 직원에게 뭐했냐고 물어봤다. 신림동이 집이라서 신림동으로 모시러 갔는데 신림동 구의원이 출판기념회를 해서 거기에 가서 인사하고, 하루 종일 차에서 전화하다가 기다리다가 전화하다가, 결론은 신림동만 뱅뱅 돌다가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이미 짐작하고는 있었다.

    어제 이 ‘유능한 양반’은 국회의장을 만나면 밥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100만 원을 달라고 해서 억지로 돈을 만들어 50만 원을 보냈는데 돈만 떼였다. 국회의장을 만났다면 받아간 돈은 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수시로 누구를 만난다며 돈을 요구해 그때마다 몇 십만 원씩을 보내주고는 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말이 실행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슬슬 사장님도 이 사람의 실체를 아시는 모양이다. 어제 사장님에게 법인 휴대전화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사장님이 알았다고는 했지만 직원에게 휴대전화를 만들어 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건성으로만 알았다고 했다.

    ‘유능한 양반’은 오늘은 뭔가 있기라도 한 듯 나를 밖으로 불렀다. 회사 앞 일식집. 이 음식 값은 누가 내려는가? 이 양반의 법인카드를 회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용건인지 물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어차피 안 될 거면 어음 할인이라도 해서 사장님 생활자금을 좀 만들어드리면 어떨까 하고.”

    “지금 물어음을 만들고 할인해서 돈을 만들자는 얘기십니까?”

    “굳이 얘기하자면 그렇지.”

    “우리가 어음을 발행한다고 해도 곧 부도난다는 것을 다 아는데 할인을 받을 때가 있을까요?”

    “그건 내가 받아올게, 내가 명동 쪽에서 할인을 받아 올 수 있어.”

    “몇 % 정도에서 할인이 가능할까요?”

    “우리 현실이 그러니, 잘되어야 20~30%가 아닐까?”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사가 부도난 후 ‘물어음’을 융통시킨 사실이 드러나면 사기죄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어음이 정당한 거래의 결과였고, 회사 사정상 대금을 지급하지 못한 것이라면 모를까, ‘물어음’을 유통시키는 건 사기다.

    그리고 문득 든 또 하나의 생각. 이 인간이 어음을 할인한 뒤 금액을 다 가져오지 않고 중간에서 자기가 얼마쯤 먹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1억 원짜리 어음을 들고 가 2000만~3000만 원만 받아오고 온갖 책임은 사장님에게 다 덮어씌우고, 그 과정에서 어음 할인한 금액 중 일부를 먹으려고 하는 것이 이 ‘유능한 양반’의 생각인 듯했다. 나는 “그럴 생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사무실로 돌아와 사장님에게 ‘유능한 양반’의 계획과 나의 생각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이 새끼는 완전 똥파리니 당장 쫓아내야 한다. 오늘부터 그 양반한테 10원 한 장 지급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그저 “김 이사, 알았네” 하고 나가보라고 하신다.

    2010년 11월 23일

    사장님이 이혼 신청을 했다. 모든 재산이 날아갈 상황에 처했고 이제 남은 아주 약간의 재산이라도 지키려고 이혼을 신청했다. 법적으로만 부부가 아닐 뿐, 우리는 여전히 부부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사모님의 눈물은 그치지 않는다. 사장님은 이혼을 하면서 그동안 온 가족이 살던 전세아파트를 사모님에게 증여했다. 말이 증여지 그냥 전세아파트 계약자 명의를 사모님 명의로 바꿔주는 것으로 사장님과 사모님의 이혼은 끝이 났다.

    아직 확정을 받을 때까지 숙려기간이 남아 있지만, 경제적인 사정 악화로 인한 가정불화를 사유로 한 이상 특별한 문제없이 이혼은 성립될 것이다. 30년 넘는 세월을 부부로 살아온 사장님과 사모님은 본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혼할 것이고, 각자 이혼남·이혼녀가 될 것이다.

    사장님은 우선 채권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당분간 고시원에서 지내겠다고 한다. 이혼한 상태에서 사모님 집을 들락거리면 채권자들이 위장 이혼으로 판단해 사모님의 전세아파트에 대해 가압류 등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65세의 사장님이 이혼남에 고시원 신세라니, 얼마 전까지 좋은 옷에 좋은 차에 좋은 집에 사시던 분의 신분이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리고 아파트 전세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고시원 생활을 하는 사장님이 안타깝다. 사모님에게 기껏 전세아파트 하나밖에 못해주고 그것도 뺏길까봐 고민하는 사장님이 너무나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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