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임금.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온갖 범죄가 횡행하고 있다. 집이 없어서 길에서 생활하는 노숙자가 한둘이 아니다. 학교 폭력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이 현상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은 안타깝다. 이 안타까움이 한(恨)으로 맺힌다.
어떤 학자가 ‘한국인에게 한이 많은 까닭은 수많은 외침(外侵) 때문’이라고 설명한 뒤로 그것이 거의 정설처럼 되어버렸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인의 한은 지상천국을 건설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천국에 살았던 때의 기억이 유전자 속에 남아 있다. 그 때문에 지옥처럼 되어버린 현재의 상황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럴수록 천국이었던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효과가 빠른 것이 정치다. 한국인이 정치에 관심이 많은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치(政治)란 다스린다는 말이고, 다스린다는 말의 한자어는 ‘치(治)’다. 그러나 단군신화에는 치(治)라는 글자 대신 ‘리(理)’라는 글자가 쓰이고 있다. 리(理)는 ‘옥(玉)’과 ‘리(里)’를 합한 것으로, 본래는 ‘옥의 무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옥의 무늬는 헝클어져 있지 않다. 지극히 아름답지만 질서가 있다. 우리나라 한국도 원래는 그처럼 지극히 아름답고 질서가 있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그 처음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 그것이 리(理)라는 말의 뜻이다. 사람의 머리카락은 처음에는 질서정연하게 돋아나지만, 자라난 뒤에 헝클어지곤 한다. 이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 ‘이발(理髮)’이다. 여자들의 경우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볶기도 하고 말기도 하면서 예쁘게 꾸미기 때문에 이발이 아니고 ‘미용(美容)’이다.
이발(理髮)과 미용(美容)
원래의 모습이었던 천국으로 되돌리는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사가 아니고서는 천국을 건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가는 천사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한국인은 늘 그런 천사 같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지난 수십 년간의 한국의 정치사는 기대와 실망이 되풀이되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실망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표를 하는 국민이 정치가의 실상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옛날 ‘노자(老子)’라는 사상가는 ‘노자’라는 책 제17장에서 정치가의 수준과 정치의 내용을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적이 있다. 선거철을 맞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가르침으로 생각된다. 노자는 최고 수준의 정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최고의 정치를 하면 아래의 국민은 그 정치가가 있다는 사실만을 안다(大上 下知有之).” 정치 현상을 어린이 놀이터의 관리에 비유해 보자. 최우수 관리인은 어린이들이 놀이터에 나오기 전에 어린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유리 조각이며 돌멩이 등을 치워 어린이들이 맘 놓고 뛰어 놀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는다. 그 결과 어린이들은 종일 아무 탈 없이 즐겁게 놀 수 있다. 이 경우 어린이들은 놀이터 관리인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 그에 대한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관리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초연할 수 있는 차원 높은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사고 위험이 있는 것을 미리 간파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미리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서나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기미를 알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만 나온다.
모든 사건에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기미가 보인다. 그 기미가 나타나는 현상을 ‘조짐’이라 한다. 기미를 보고 대처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큰일을 하는 것이다. 옆집의 굴뚝에서 조그만 구멍으로 연기가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다고 하자. 이는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 조짐이다. 기미를 보고 처리하는 사람은 옆집 아궁이의 작은 불씨를 끈다. 아무것도 한 것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화재가 났을 때, 그 불을 다 끈 사람이 한 일보다 더 큰일을 한 사람이다. 국보1호 숭례문이 불탔을 때도 조짐은 있었다. 누구든 아무 절차도 없이 숭례문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화재가 일어날 조짐이었다.
대통령선거에 나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안철수 무소속 후보(왼쪽부터).
“정치가가 있다는 것만 아는 게 최고 정치”
최고 수준의 정치인은 국민을 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남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공치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은 그의 훌륭함을 알지 못한다. 그러한 정치가는 마치 만물을 살리는 태양과도 같다. 태양은 빛과 에너지를 발산하여 만물을 살리지만 자기의 공을 내세우는 일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양의 공을 모른다. 사람들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을 하지만 모든 것을 자신의 공인 줄 안다.
태양 같은 정치가가 정치를 하면 국민이 잘살게 되더라도 정치가의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국민은 잘살게 된 것을 모두 자기들의 공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옛날 요(堯)임금 시대가 그러했다고 전한다. 요임금 시대에 농민들이 땅을 두드리며 불렀다는 ‘격양가(擊壤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日出而作),
해가 지면 들어가 쉰다(日入而息).
우물 파서 물 마시고(鑿井而飮)
밭을 갈아 밥 먹으니(耕田而食),
요임금이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帝何力於我哉).
노자가 제시한 정치의 두 번째 단계는 다음과 같다.
“그 다음 수준의 정치가 행해지면 국민은 그 정치가를 좋아하고 찬양한다(其次 親而譽之).”
어린이 놀이터 관리인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 두 번째 수준의 관리인은 최고 수준의 관리인처럼 기미를 보고 대처하지 못했다. 그는 사전에 어린이들이 다칠 수 있는 요인들을 다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낮에 어린이들이 놀다가 유리에 찔리거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들을 정성으로 보살피고 치료해 준다. 그렇게 되면 어린이들은 그 관리인을 자기 부모 대하듯 좋아하고 따를 것이다. 그래서 좋아하고 찬양한다고 했다.
이 수준의 정치가도 자기의 공을 내세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정치가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기의 공치사를 하지 않는다. 그의 정치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정성스럽다. 옆집에 불이 나도 자기 집에 난 불을 끄는 마음으로 불을 끈다. 불난 집에서 가장 고마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바람직한 정치란 첫 번째의 경우와 이 두 번째의 경우다. 세종대왕의 정치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노자가 제시한 세 번째 정치가는 다음과 같다.
“그 다음 수준의 정치가 행해지면 국민은 그 정치가를 두려워한다(其次 畏之).”
세 번째 단계의 정치인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정치가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국민은 그에게 일할 수 있는 힘을 실어준다. 정치가들은 그 힘을 권력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직업 중의 하나가 대통령일 것이다. 대통령은 자기 개인의 행복을 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대통령을 하라고 하면 싫어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열을 올리는 사람들은 거의가 본분을 망각한 사람들이다. 본분을 망각한 채, 권력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가득 찬 사람들이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자녀가 부모를 지지하듯, 그런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 최상이다. 그런 지지를 받는 방법은 국민의 아픔을 지극정성으로 달래는 것이다.
아픔을 자극하고 고쳐주겠다는 정치인
이 경우 전제조건이 따른다.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것은 먼저 국민에게 아픔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단계의 정치인은 국민의 아픔을 자극하기에 바쁘다. 국민의 아픔을 자극한 뒤에 그 아픔을 자기가 고쳐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는 어린이들을 위한 지극한 정성은 없지만, 어린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은 욕심이 있는 관리인과 같다. 그런 관리인은 어린이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 궁리를 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것은 다친 아이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고 보살피는 것이다. 아이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기 위해서는 우선 아이들이 다쳐야 한다. 그래서 그는 그런 기회를 만들기 위해 전날 밤에 유리 조각과 돌멩이를 몰래 뿌려 놓는다. 그리고 다음날 낮에 다친 아이들이 있으면 정성껏 치료해준다. 이 경우의 관리인은 존경을 받기 위해 고도의 술수를 쓴다.
정치가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 단계의 정치가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국민에게 아픔을 자극하고는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온갖 공약을 남발한다. 그 공약들 중에는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것 같지만, 엄청난 문제가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이 많다.
최근 여러 나라의 정치가들은 복지정책이란 미명하에 엄청난 빚을 낸다. 정부가 지고 있는 빚은 천문학적인 액수다. 이 빚은 나중에 고스란히 국민에게 되돌아온다. 이런 정치공세에 국민은 속고 또 속아 왔다. 이는 옆집의 불을 꺼줌으로써, 존경을 받고 싶은 사람이 불을 꺼주기 위해 몰래 불을 지르는 것과 같다.
어떤 여인을 손에 넣기 위해 폭력배를 매수한 남자가 있다. 그는 폭력배를 사주해 그 여인을 덮치게 하고는 그때 나타나서 폭력배를 물리치고 그 여인을 구출한다. 구출 받은 여인은 그 남자에게 고마움을 느낀 나머지 그 남자의 여인이 된다. 속은 것이다.
우리들이 정치인들에게 속고 있는 것도 이와 같다. 오늘날 성공하는 정치인들 중에는 이 세 번째 단계의 정치가가 가장 많은 것 같다. 갑자기 나타나 달콤한 말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속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많이도 속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것이 정치인 줄 착각하기도 한다. 이제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한다. 노자의 가르침은 그래서 자꾸 새로워진다.
노자가 제시한 네 번째 단계의 정치는 다음과 같다.
“그 다음 수준의 정치가 행해지면 국민은 그 정치가를 업신여긴다(其次 侮之).”
네 번째 단계의 정치가 가장 질 낮은 정치다. 다시 어린이 놀이터 관리인에 비유해보자. 최하 수준의 관리인은 전날 밤에 유리 조각과 돌멩이를 뿌려 놓고는 다음 날 낮에 다친 아이들을 치료해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경우에는 아이들이 그를 업신여긴다. 그런 관리인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만 입힌다. 어린이들은 그런 관리인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옆집에 불을 질러놓고 그 불을 꺼주지 못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 옆집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싫어하고 무시한다. 오늘날 한국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인기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가에 대해 무시하는 한국 국민의 태도는 도를 넘은 것 같다. 이러한 국민의 태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된 원인은 정치가에게 있다. 국민에게 무시당하는 정치가일수록 네 번째 단계의 정치가일 공산이 크다.
네 번째 단계의 정치가는 국민을 위하는 정치가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움직인다. 그런 사람일수록 국민을 이용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국민을 위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양심을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양심 있는 사람이 드물고, 진실을 외치는 사람치고 진실한 사람이 드물며,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치고 정의로운 사람이 드물다는 말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많이 속아 왔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사람을 믿지 않는다. 노자는 말한다.
“정치가에게 신의가 부족하면 아무도 그를 믿지 않는다(信不足焉 有不信焉).”
욕심이 많아 술수를 쓰는 정치가들은 자기의 공치사를 계속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자랑하기 바쁘다. 그들은 국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국민을 내버려두고 먼저 피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국민들은 많이 속아왔다. 국민은 이제 그런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국민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를 안다면 정치가는 말을 아껴야 한다. 말을 많이 하는 정치가는 속이고 있는 것이다.
최고 수준에 있는 사람은 내 것을 챙기지 않는다. 내 것을 챙기지 않기 때문에 남에게 칭찬을 받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공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묵묵히 자기의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들은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말을 할 일이 없다. 그는 태양과도 같다. 태양은 자기 몸을 불태우면서도, 만물에게 빛과 에너지를 선사하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말 많은 정치인은 속이고 있는 것
태양 같은 최고 수준의 정치가를 어떻게 하면 이번 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이 찾아낼 수 있을까? 그것이 관건이다. 지금이 매우 중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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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예로부터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모두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회가 낙원이요, 천국이다. 천국에서는 법이 없어도 되고 규칙이 없어도 된다. 한국인은 천국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에 법의 중요성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다. 규칙이나 법을 잘 어기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법을 어기는 것을 권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천사 같은 사람의 매력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다가 법질서를 초월하는 인간의 매력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 방식으로 살다가 사람들은 이제 초췌해졌다. 몸도 마음도 초췌해지고 각박해졌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의 초췌함을 해소하는 새로운 바람이 한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한류(韓流)바람’이다. 한류는 문화예술 부문에 국한되는 하나의 현상으로만 볼 수 없다. 전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바람이다. 한류는 비단 문화예술 부문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한류정치, 한류경영, 한류교육, 한류디자인, 한류건축, 한류철학 등등이 끊임없이 뒤를 이어 나와야 한다. 그리하여 황폐해진 세계인의 마음을 달래는 거룩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기회는 천년에 한번 올까말까 한 좋은 기회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주도하는 가장 적합한 기능이 정치다. 한국의 정치적 역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대선에 임하는 후보자들의 자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대선에 임하는 우리 국민의 판단이 더 중요하다. 노자의 가르침이 이번에 한번 크게 빛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