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가 화려하면서도 인간적인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은 걷고 싶은 골목길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모든 길에는 차도와 구별된 인도에 대한 배려가 각별하다. 보행자, 걷는 사람의 권리가 운전자의 권리에 앞서는 도시가 인간적인 도시다.
파리 16구 아농시아시옹 거리에 있는 시장의 과일상점.
공항에서 탄 택시는 에트왈 광장의 개선문을 지나 파리 16구 폴 소니에 거리에 도착했다. 주느비에브가 빌려준 작은 스튜디오에 짐을 풀었다. 작은 방에 짐 가방을 풀다보니 30년 전 처음 파리 기숙사에서 유학생 생활을 시작하던 때가 생각났다.
서울과 파리 사이 7시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파리 생활을 시작했다. 일단은 파리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범행 장소를 다시 방문하듯 나는 내가 다니던 파리의 장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익숙했던 풍경들이 그대로 있어 반가웠고 그동안 바뀐 것들이 눈에 들어와 새로웠다.
풍경 #54 파리에서 만나는 연도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다보면 파리에는 역사와 전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사는 건물 입구에 있는 글씨와 숫자는 이 건물이 1906년 레옹 드와네(Leon Doinet)라는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음을 알려준다. 동네 골목길에 있는 침구상점의 진열창 하단에 쓰인 ‘린보사주 더퓨이(Linvosage depuis) 1923’이라는 글자와 숫자는 이 상점이 1923년 개업한 상점임을 말해준다. 카페에서 손님들이 줄여서 ‘세즈(16)’라고 주문하는 프랑스 맥주의 상표 ‘1664’는 이 맥주가 처음 만들어진 해를 뜻한다. 모든 포도주 병에는 ‘보르도 1978’처럼 그 포도주의 산지와 만들어진 연도가 명기되어 있다. 루이비통 핸드백 상점의 쇼핑백에는 ‘루이비통 퐁데 엥(Louis Vutton fonden) 1852’라고 이 상점이 창업한 해가 쓰여 있다. 팡테옹 부근의 생트 바르브 중학교 정문 입구에는 1460년에 개교했다는 숫자가 적혀 있다. 파시 거리 빵집 입구에도 1964라는 창업연도가 적혀 있다. 파리의 일상 공간 곳곳에는 네 자리 연도가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박혀있다.
풍경 #55 기억의 도시
서울이 조선의 수도가 된 지 600년이 넘었다고 하지만 서울은 그리 오래된 도시로 보이지 않는다. 역사의 흔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에 온 어느 외국 학자가 서울을 30~40년 정도 된 신흥 도시로 느꼈다고 말한 적도 있다. 건물들이 석조가 아니라 목조라서 오래 보존될 수 없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6·25전쟁 중에 많은 유적이 재와 먼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중앙청을 해체하고 경복궁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나, 세종로를 국가 상징거리로 조성하고 끊어진 서울 성곽을 다시 잇는 작업 등은 모두 잊어버린 역사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의미 있는 작업들이다.
지금 2012년 파리의 팡테옹에서는 철학자 루소(1712년생) 탄생 3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 팡테옹 뒤에 있는 앙리 4세 고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는 거리의 이름은 클로비스 거리다. 클로비스 대왕은 508년 파리를 프랑스의 수도로 선포했다. 파리는 1500년 이상 프랑스의 수도 자리를 지켜온 셈이다.
파리에는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프랑스 혁명기와 근대에 이르는 역사적 기억을 간직한 기념비적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우선 생 미셸 거리에는 로마 시대의 공중목욕탕이 있다. 노트르담 사원과 생 제르맹 데 프레 성당은 중세의 유적이다. 루이 13세와 14세 부자가 지배한 17세기에 뚫린 샹젤리제 대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거리가 되었다. 그 당시에 지은 프랑스 한림원, 앵발리드, 발 드 그라스 성당을 비롯한 수많은 건물이 그대로 존재한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팡테옹은 처음에는 성당으로 지어졌다가 프랑스 혁명기에 위인들을 모시는 영예의 장소가 되었다. 건물 외벽에는 1791년 파스토레 백작이 지은 “조국이 감사하는 위대한 인물에게”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혁명의 주역이었던 마라와 당통이 여기에 안장되었다 철회되었고 프랑스 혁명에 이념을 제공한 볼테르와 루소가 지하 묘지 맨 앞자리에 모셔져 있다. 1885년에는 빅토르 위고가 이곳에 안장되었다.
파리에는 위인들뿐만 아니라 혁명에 참여한 민중의 유해도 곳곳에 모셔져 있다. 바스티유 광장의 ‘자유의 탑’에는 1830년 7월혁명의 희생자 50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들의 유해가 탑 밑에 안장되어 있다. 페르 라 셰즈 묘지에는 1871년 파리코뮌 희생자들의 묘역이 따로 설정되어 있다. 1806년에 시작되어 1836년에 완성된 개선문이 19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건축물이라면 187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에펠탑은 19세기 후반 시작된 산업문명을 대표하는 건축물일 것이다.
파리의 거리와 공원에는 수많은 동상과 석상이 서 있다. 나시옹 광장의 필립 오귀스트 상과 생 루이 상, 퐁뇌프의 앙리4세 상, 보즈 광장의 루이13세 상, 빅트아르 광장의 루이14세 상, 생 제르맹 데프레 거리의 당통 상, 앵발리드 안 마당의 나폴레옹 상, 리슐리외 거리의 몰리에르 상, 뤽상부르 공원 안의 베를렌, 플로베르, 스탕달, 쇼팽 등 수많은 문인 예술가들의 동상, 샹젤리제 대로의 드골 동상 등은 파리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상기시킨다.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은 길거리 이름에도 새겨져 있어 파리의 거리를 걷다보면 역사 교과서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거리를 걷다보면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석판들도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예를 들면 파리 4구 마레 지역의 페이엔 거리 5번지에는 사회학의 아버지 오귀스트 콩트가 만년에 제창한 ‘인류교’ 사원이 있다. 그 건물 벽에는 “사랑을 원칙으로, 질서를 기초로, 진보를 목표로”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파리 14구 몽수리 공원 서쪽 보니에 거리 20번지에는 1909년에서 1910년 사이 레닌이 이곳에 살았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풍경 #56 파리의 도로망
도시의 기본은 길로 이뤄진다. 어느 오후 내가 걸은 생자크 거리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다. 이 길로 옛날 로마 군대가 진군했다고 한다. 파리에는 샹젤리제 거리 같은 대로만 있는 게 아니라 좁은 골목길도 수없이 존재한다. 파리에서 가장 좁은 길은 20구에 있는 뒤에 샛길이다. 폭이 고작 90cm에 불과하다. 파리에서 가장 넓은 길은 샹젤리제 거리가 아니라 개선문 뒤의 포슈 거리로 그 폭이 120m에 달한다.
파리가 화려하면서도 인간적인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은 걷고 싶은 골목길이 많기 때문이다. 파리의 모든 길에는 차도와 구별된 인도에 대한 배려가 각별하다. 보행자, 걷는 사람의 권리가 운전자의 권리에 앞서는 도시가 인간적인 도시다. 서울 사대문 안 기본 도로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졌고 ‘신작로’라고 부른 근대적인 도로망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이후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을 바탕으로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현옥 시장이 서울의 도로망을 정비하고 기본 시설을 마련했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남작의 합작품이다. 제2제정으로 불리는 그 시기에 오스만 남작은 나폴레옹 3세의 권력을 배경으로 1860년대 파리 동서남북의 주변 마을들을 파리로 편입시켰고 파리의 주요 간선도로를 뚫었다.
효율적인 도시 생활이 가능하려면 특정한 장소를 쉽게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 도로의 이름과 각각의 건물에 붙이는 번호체계가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 파리의 거리에 체계적으로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한 것은 1728년부터다. 현재 파리에서 보는 푸른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쓴 거리 이름과 번지수를 알리는 판은 1844년부터 부착된 것이다.
도시의 밤은 위험하다. 어두운 길에서는 갖가지 범죄가 일어나기 쉽다. 그래서 ‘와사등’으로 불리기도 한 가스등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가스등을 대신해 전기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전기 가로등은 1844년 12월 콩코르드 광장에 처음 설치되었고, 1848년 7월에는 루브르 궁전에 두 번째로 설치되었으며 1861년에는 팔레 루아얄 입구에 가스등을 없애고 전기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파리에 전기 가로등이 일반화된 것은 1878년부터다.
사람 몸의 영양분이 혈관의 피를 통해 운반된다면 도시의 사람과 물건은 교통수단을 통해 이동된다. 자동차나 전차가 출현하기 이전 마차는 가장 유용한 교통수단이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을 남긴 철학자 파스칼은 운송업자이기도 했다. 그는 1662년 말이 끄는 승합차를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말이 끄는 승합차는 1913년까지 존속했다. 1854년 말이 끄는 전차가 퐁 드 세브르에서 콩코르드 광장 사이의 궤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전차가 처음 운행된 것은 1889년이다. 그 전차는 개선문이 있는 에투왈 광장에서 생제르맹 데 프레까지 운행됐다. 1903년 프랑스 전체에 자동차 대수는 9만 대였다. 그 가운데 1만8000대가 파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20세기 초 파리 거리에는 마차와 전차와 자동차가 공존했다. 파리의 지하철 공사는 1899년에 시작되었다.
풍경 #57 근대의 풍물과 근대적 생활양식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국사 시간에 개화기에 서구 문물이 도입되는 과정을 배우게 된다.고종이 지배하던 1880년대 무렵부터 1910년 한일강제합방 시기에 이르기까지 전기, 전등, 전화기, 자동차, 전차, 기차 등이 도입되면서 조선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나라들에서 시작된 근대의 풍물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비서구 사회의 근대화가 외압에 의해 강제되었다면 프랑스의 근대화는 내부적인 힘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게 비서구 사회의 역사적 열등감의 원천으로 남아 있고 그게 한이 되어서 산업화에는 늦었지만 정보화에는 앞서자는 구호가 만들어졌으며 그 면에서 한국은 프랑스를 능가하고 있다. 프랑스에 근대적 문물과 생활양식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이니까 우리나라 개화기보다 시기적으로 불과 50~60년 앞선 것이다. 게다가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일반인은 모두 어려운 시기를 경험했으며 1950년대가 되어서야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이 널리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몇 가지 구체적 연도를 보자면 다음과 같다. 파리 5구에 있는 식물원 주변의 길들은 식물분류학자 린네를 비롯한 생물학자들의 이름으로 명명되어 있다. 이곳의 식물원은 162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파리의 일반 가정에 처음 상수도가 설치된 해는 1782년이다. 페리에 형제가 센 강에서 튜브로 길어 올린 물을 정화해 가정집으로 수돗물을 공급했다. 1793년 유리판과 태양빛을 이용한 파리 최초의 전보 체계가 몽마르트르 언덕의 생 피에르 성당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대중에게 알리는 파리 최초의 산업박람회는 1798년 샹 드 마르스에서 처음 열렸고 1801년과 1802년에는 루브르에서 열렸다. 파리의 경마장 운영은 1819년에서 1833년 사이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샹드 마르스 광장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후 오퇴이유의 경마장으로 옮겨 제2제정 시기에 인기를 끌었고 불로뉴 숲의 롱샹 경마장으로 이어졌다. 오퇴이유와 롱샹 경마장에서는 지금도 경마가 이루어지고 있다. 1851년 아사스 거리 28번지의 루이 푸코의 저택에는 지구가 자전하는 것을 실험한 푸코의 추가 설치되었다. 파리 불로뉴 숲의 동물원은 1860년에 만들어졌다. 1879년 9월 8일에 파리 최초의 전화망이 설치되었는데 1881년 전화 가입자 수는 1602명이었다.
풍경 #58 파리의 동네시장 풍경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울과 파리의 도시 분위기는 역사와 기억의 차원에서 커다란 차이가 난다. 그러나 파리와 서울의 차이는 도시 공간의 차이이면서 동시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방식 차이이기도 하다. 어느 도시를 가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알려면 시장을 가보아야 한다.
파리에 온 다음 날 아침 동네 시장으로 나갔다. 파리 16구 아농시아시옹 거리의 토요일 오전,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시장 골목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 몸동작, 손짓, 시선이 서울과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유스러워 보인다. 여러 상점에서 풍겨나오는 냄새들이 이곳이 파리임을 즉각적으로 알려준다. 전에 다니던 빵집에서는 갓 구어낸 바게트를 비롯한 갖가지 빵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치즈 가게에서 나는 각종 치즈 냄새들이 코의 감각을 일깨운다. 식품점 앞에 설치된 기계에 얹힌 통닭이 누렇게 구워지면서 군침을 돌게 한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는 상큼한 냄새를 풍기는 백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원두커피를 파는 상점 앞에는 커피 볶는 냄새가 진동한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파리지엔들에게서 개성을 표현하는 갖가지 향수 냄새가 풍긴다.
서울 종로의 북촌길.
파시 거리를 걸어 내려가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하철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거기서 서울의 버릇이 작용했다. 서울에서는 지하철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힌다. 그러나 오래전에 만들어진 파리의 지하철 전동차에서는 승객이 전동차 출입문의 고리를 위로 젖혀야 문이 열린다. 내가 멍하니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뒤에 있던 파리지엔이 내 앞으로 와서 문고리를 올리며 이것도 모르냐는 식의 시선을 보낸다. 지난 10년 동안 익숙했던 파리에서의 습관이 어디로 사라지고 최근 11개월 동안 몸에 익힌 서울에서의 습관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다.
전동차에 올라타자 서울의 지하철과는 달리 여전히 신문이나 책을 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물론 가끔씩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젊은이들도 눈에 띈다. 지하철에 탄 승객들의 얼굴이 각양각색이다. 흑인, 백인, 아랍인, 유대인, 아시아인 등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인종이 다 모여 있다. 피부와 머리카락 색깔이 다 다르다. 인종이라는 차이에 남녀노소라는 차이를 합치면 지하철 안은 그야말로 수많은 인간 유형의 전시장이다. 앞에 앉은 젊은 아랍 여성은 눈만 내놓고 얼굴을 온통 다 가리고 있다. 옆에 앉은 프랑스 여성은 앞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셔츠를 입고 망사로 된 치마를 입고 있다. 10년 동안 매일 보던 풍경이지만 서울에서 비슷비슷한 얼굴만 보고 살다가 이색적인 얼굴들을 바라보니까 여기가 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파리의 지하철에서 서로 다른 세계 얼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된다.
지하철 6번선의 비르하켐 역에서 내려 파리일본문화원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화원 로비에는 ‘일본의 아름다운 미소’라는 제목으로 일본 여성들의 웃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고 3층 전시장에는 ‘일본 미술 속의 해학: 선사시대에서 19세기까지’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침침해진 일본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가 느껴졌으나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풍경 #60 크리스티앙 디오르 매장을 몰아낸 서점
살아 있는 생명체인 도시는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작은 변화를 계속한다. 지난 열흘 정도 파리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그런 변화들을 여럿 발견하고 감지했다. 파리 체류 10년 동안 다니던 익숙한 산책로에는 반드시 서점이 하나씩 끼어 있었다. 생제르맹 데 프레 근처를 갈 때면 으레 라 윈이라는 서점엘 들르곤 했다. 파리에 도착한 지 며칠 후 그 동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서점 문이 닫혀 있는데, 폐점한 것처럼 보였다. 놀란 마음으로 가까이 가보니까 굳게 닫힌 서점 입구에 생제르맹 성당 앞 광장으로 이전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당장 그곳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되마고 카페가 있는 광장 저 안쪽으로 라 윈 서점의 흰색 진열창이 보였다. 전에는 그 자리에 크리스티앙 디오르 부티크가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 라 윈 서점이 들어선 것이다. 사실 그 자리에는 1980년대에는 르 디방이라는 서점이 있었다. 그 서점이 비싼 임차료에 배겨나지 못하고 15구의 콩방시옹 거리로 이전한 다음 디오르 부티크가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이 파리 중심부의 지적 분위기가 사라진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많은 걱정을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다시 서점이 문을 연 것이다. 이번에는 1층만이 아니라 2층까지 서점 공간이 되었다. 전체적인 추세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젊은 세대들이 점점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파리 중심지 생제르맹 데 프레에 대형 서점이 자리 잡았다는 것은 아직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겠다는 출판사 쪽의 적극적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
풍경 #61 벽에 쓰인 랭보의 ‘취한 배’
내가 파리에서 자주 다닌 골목길이 여러 개 있다. 그 가운데 뤽상부르 공원과 생 쉴피스 광장을 이어주는 페루 거리만큼 기분 좋은 골목길도 없다. 일단 조용하다. ‘블랭’ 출판사와 ‘라주 돔므’ 출판사가 있으며 골목길의 담 너머 저편에는 롤랑 바르트가 살던 집도 보인다. 페루 거리의 돌담에는 대문이 있던 자리를 메운 흔적도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그 문으로 1920년대에 파리에 와서 살던 미국 출신의 사진작가 만 레이가 드나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골목길에 들어서니까 벽이 온통 글씨로 가득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까 랭보의 시였다. 네덜란드의 어느 문화재단이 아이디어를 내고 자금을 지원해서 랭보의 시 ‘취한 배’ 전문을 기다란 벽에 여러 단으로 나누어 적어놓은 것이다. 행인들이 벽 앞에서 그 시를 소리 내서 읽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담백한 모습으로 오가는 사람을 맞아주던 고요한 골목의 돌담 벽에 자리 잡은 검은 글씨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날로 요란한 광고판이 날뛰는 파리 거리에서 아무 광고도 없는 조용한 골목길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아직 검은색 페인트로 쓴 글씨가 너무 선명해서 생소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른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면서 그 글자들이 흐려지기 시작하면 새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풍경 #62 새로 생긴 센 강변의 횡단보도
파리에는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지만 센 강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는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의 문화 시설이 몇 군데 있다. 에펠탑 옆에 있는 케브랑리 원시미술박물관과 강 건너 우안 언덕에 있는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팔레 드 도쿄도 그중 한 쌍이다. 나는 케브랑리 박물관 6층에 있는 도서관을 자주 이용했다. 그곳의 환한 유리창 밖으로 저 멀리 몽마르트르 언덕이 보인다.
그곳을 오가려면 중간에 지하도를 건너야 했다. 자동차의 빠른 흐름을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항상 노숙자들이 남겨놓은 불쾌한 오물 때문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서 지하도를 오가는 사람 중에는 코를 막고 뛰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며칠 전 이 원고를 쓰기 위해 케브랑리 박물관 도서관으로 갔다. 박물관 정원에는 조경작가 질 클레망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조성한 갈대밭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도서관에서 작업을 마치고 드빌리 인도교를 지나 지하도를 건너려고 하는데 11개월 전에 건너다니던 지하도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갑자기 무엇에 홀렸나 싶어 주위를 살펴보니까 이게 웬일인가? 지하도가 사라진 대신 횡단보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때 몇 년 전 서울 세종로 거리에 횡단보도가 설치되어 북악산을 바라보며 가슴이 후련하던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때 센 강 위로 새들이 날고 있었다.
풍경 #63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파리 체류 시절 내가 자주 들르던 카페가 몇 곳 있다. 생 쉴피스 광장 앞의 카페 드라 메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카페 앞에 인도가 넓게 나 있고 차도 건너편의 광장 중심에 분수대가 있어 카페에 앉아 그 쪽을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든다. 길가 테라스에 앉아 지나다니는 각양각색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저마다 교양과 문화, 지식을 갖춘 파리의 문화인, 지식인, 예술가, 작가, 출판인들이 다니는 카페다.
그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유력 일간지 르몽드를 파는 파키스탄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내가 유학 생활을 하던 1980년대 초부터 라틴 구역과 생제르맹 데 프레의 카페와 식당들을 오가며 르몽드를 팔러 다녔다. 벌써 30년 가까이 매일 오후 르몽드를 팔고 다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 동네에서는 누구나 알아보는 명물이 되었다. 며칠 전 푸르 거리의 큰 벽에 어떤 남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바로 그 사나이였다. 그는 몇 년 전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도 하고 프랑스 퀼튀르라는 라디오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 나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에서 빈손으로 파리에 도착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로지 르몽드를 들고 팔러 다니면서 수많은 단골을 만들었다.
젊은이였던 그는 이제 나와 마찬가지로 흰머리가 난 중년의 남자가 되었다. 그래도 그는 오늘도 즐거운 표정으로 “르몽드!”를 외치며 라틴 구역과 생제르맹 데 프레 거리를 오간다. 예전에는 지식인들을 상대로 르몽드만 팔러 다니던 그가 이제는 ‘리베라시옹’과 ‘르 피가로도’ 가지고 다녔다. 르몽드를 한 부 사서 ‘하루 종일 인터넷 접속을 안 하면 정보비만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필요 이상의 영양분 섭취로 몸만 비만이 되는 게 아니라 뇌도 불필요한 정보의 누적으로 정보비만에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시대에 맞는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지하철 6번선을 타고 라스파이 역에 내리면 ‘라스파이 베르(초록의 라스파이)’라는 카페가 있다. 그곳은 예전에 많은 문인 예술가가 드나들던 곳이어서 실내의 벽에는 사르트르, 피카소, 자코메티, 앙드레 브르통, 호안 미로 등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경박한 시대의 천박한 변화에 저항하며 제 나름 자존심을 지닌 파리의 카페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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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몽파르나스 대로의 찬 서점에 들렀다가 그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에 가까워지자 그 일대가 과거와는 영 다른 분위기로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카페가 있는 건물 전체 외벽의 오래된 먼지 때가 깨끗하게 제거되어 밝은 느낌을 주었다. 거기까지는 그렇게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카페의 테라스와 실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안정감을 주던 초록색 차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가벼운 느낌의 하늘색 차양이 드리워져 있고, 구분되었던 실내 공간을 하나로 터서 툭 트인 느낌을 주었다. 나무색의 실내 색조도 주황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벽에 걸려 있던 내가 좋아하던 사진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예술가와 문인들을 위한 카페에서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싸구려 식당이 되어버렸다.
옛날의 카페 분위기를 아는 나로서는 차마 그곳에 들어갈 수 없어 주변을 배회하다 뤽상부르 공원의 야외 카페로 갔다. 그런데 그곳도 테이블과 의자를 새것으로 교체했는데 이전의 분위기에 비해 훨씬 상업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파리 이곳저곳에서 참을 수 없는 변화의 가벼움이 느껴진다. 살아 있는 도시는 변화를 거듭한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변화보다 옛것의 보존이 더 나을 때도 있다. 그건 서울이나 파리나 다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