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중반 여고생 임예진은 한국 영화의 중심이었다. 거친 남성들의 액션 영화와 호스티스 멜로 영화가 극장가를 양분하던 시절,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깨끗하고 순진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1980년대, ‘애마부인’을 비롯한 수많은 ‘부인’이 성적인 매력을 앞세워 스크린을 장악하면서 조용히 사라지고 만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복숭아 같은 뺨, 하얀 목덜미로 한 시대 소년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영원한 여고생, 임예진을 추억한다.
깜찍하고 풋풋한 외모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 임예진.
무슨 일일까? 언제나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재빠르게 정보를 획득한 자가 있었다. 한 학생이 진상을 밝혀줬다. 우리 학교에 하이틴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촬영팀과 배우들이 왔는데, 학교 측이 촬영허가를 내주었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이 학교에서 하이틴 영화 따위를 찍는 것에 분노한 고등학생들이 데모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배우들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달려갔겠지만, 그 당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내가 다니던 학교의 고등학생들은 영화 촬영을 반대하고 배우들을 몰아내기 위해 노도처럼 달려갔던 것이다.
이해가 안 갔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에서 하이틴 영화를 촬영하는 것이 뭐 그렇게 화가 날 일인지. 학교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느끼지 못하던 나는 하이틴 여배우 강주희가 왔다는 말을 듣고 혹시 그녀를 볼까 싶어 도서관을 나가 데모 학생들 주변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피신한 후였다.
까까머리의 해방구
1976년. 내가 막 중학생이 됐을 때 영화 한 편이 까까머리 소년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당시 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그 영화를 유치한 것이라 여기고, 오로지 무술 영화만을 보는 나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개봉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흥행을 이어가는 그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국 영화를 주로 개봉하던 을지로의 국도극장을 찾고야 말았다. 영화 제목은 ‘고교 얄개’. 극장 안에 들어서자 이상한 감동이 휘몰아쳤다. 검은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남학생들과 하얀 칼라의 단발머리 여학생들만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해방감이었다. 어른이 없는 검은 교복들만의 세계. 물론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하는 영화를 보러 가도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지만 그때는 강요에 의한 동원이었다. 그러나 ‘고교 얄개’를 보러 들어간 극장 안은 순전히 자발적인 의지의 검은 교복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중학생이 된 뒤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때면 항상 불안에 시달리곤 했다. 극장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지도부 선생들에 대한 공포. 그들에게 걸리면 최소한 유기정학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보고 싶은 영화를 마음대로 보러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자마자 극장에 가는 것은 학칙을 위반하는 ‘범죄 행위’라는 것을 알고 나는 절망에 빠졌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물론이고 청소년 입장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조차 교칙 위반 행위라는 것이었다. 아니 왜? 학생지도부 선생들은 교칙을 위반한 학생을 잡아내려고 일제 고등계 형사들처럼 눈에 불을 켜고 극장 안을 순찰한다고 했다.
게다가 초등학생 때는 몰랐던, 극장 화장실에 기생하는 깡패의 존재도 알게 됐다. 그들에게 걸리면 팬티만 남기고 모조리 빼앗기고 재수 없으면 죽도록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반 아이 중 몇몇이 시계를 빼앗기기도 했다. 반 아이 중 하나는 여자친구와 극장엘 갔다가 학생지도부 선생에게 걸려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왕우 주연의 무술 영화가 들어오면 나는 내 신상정보가 만천하에 유출되는 이름표와 교표가 있는 교복 윗도리를 벗어 가방에 집어넣고, 학생모 역시 집어넣고는 까까머리를 숨기려 털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이고 ‘미션 임파서블’ 작전만큼의 긴장을 하며 극장 안에 숨어들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그런 불안이 없었다. 잡아가려면 잡아가라! 우리 모두를.
고교생 스타의 탄생
영화가 시작됐고, 나와 친구들은 마음껏 웃고 즐겼다. 그 옛날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감독, 1968)과 ‘꼬마 신랑’(이규웅 감독, 1970)에서 이모와 고모들의 하얀 손수건을 적셨던 꼬마 스타 김정훈이 어느새 나이를 먹어 고등학생이 돼 있었다.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 1975)에서 구두닦이 소년으로 나와 각박한 세상에서 정직함을 잃지 않은 행동을 보여 감동을 줬던 이승현 역시 고등학생이 돼 있었다. 신기했다. 저들도 나이를 먹고 성장하는구나. 이웃집 형·누나 같은 고등학생 연기자들의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는 것도 즐거웠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고교 얄개’지?
초등학생 때, 길고 긴 겨울방학 동안 나는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조흔파 원작의 ‘얄개전’. 표지에 만화가 신동우의 그림이 있던 책으로 기억한다. 개구쟁이에 낙제생인 중학생 ‘나두수’의 천방지축 모험담이었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인공의 낙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중학생이 되면 낙제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기도 하고 무서운 일이기도 했다. 중학생이 돼 내가 본 영화 ‘고교 얄개’의 주인공은 고등학생이었는데, 하는 짓은 소설 속 중학생과 똑같았다. 아니 고등학생이 되면 중학생과는 다른 무엇이 있을 것 아닌가? 게다가 영화에는 소설 속에서 내게 두려움을 준 낙제에 대한 위협이 없었다. 그냥 까불기만 하는 것이었다.
약간 화가 치밀었던 부분도 있다. 이전에 보았던 한국 깡패 영화들은 주인공이 천방지축 날뛰거나, 못된 짓을 일삼아도 라스트에 가면 그동안 저지른 나쁜 짓이 사실은 형사인 그가 정체를 숨기고 간첩 또는 악당들을 잡기 위해 꾸민 것으로 밝혀지거나, 깡패 주인공이 지난 잘못을 모두 뉘우치고 선행을 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고교 얄개’는 주인공이 갑자기 천방지축 까불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의젓한 모습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뭐야 이거!
1976년 청소년 영화 ‘고교 얄개’는 성인들이 보는 영화들을 제치고 흥행에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이승현·김정훈 주연의 고등학생 영화가 봇물 터지듯 개봉됐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시대에 검은 교복을 위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청소년이 된 베이비붐 세대가 불러일으킨 기적인가?
소년의 순정
1970년대 중반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임예진, 전영록.
내가 냄새나는 사내들이 싸움질하는 영화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에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이미 서너 편이나 개봉된 상태였다. 하지만 곧장 극장으로 달려가지는 못했다. 그때는 좋아하는 여자 배우가 있어도 그녀의 얼굴이 담긴 브로마이드 혹은 사진을 갖고 다니거나 방에 붙여 놓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때였다. 친구들에게 걸리면 “사내새끼가 여자 사진이나 보고, 쪽 팔리게” 하며 비웃음을 샀기 때문이다.
그랬다. 사내가 어떻게 여고생이 나오는 영화를 본단 말인가? 그것은 말도 안 됐다. 그러나 나는 임예진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역 뒤편의 봉래극장이었다. 집과 학교에서 먼 곳이었기에 아는 사람의 눈에 걸릴 위험이 없어 선택한 장소였다. 그러나 문제가 좀 있었다. 봉래극장은 극장 안 깡패들이 무섭기로 소문난 곳이었고, 근처에 고등학교가 많아 지도부 선생들이 심심찮게 출몰하는 요주의 장소이기도 했다.
극장 매표구 앞에 섰다. 여직원이 표를 주는데 그 눈이 “사내새끼가 여고생이 나오는 영화나 보고, 너도 참 한심한 놈이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표를 받는 아저씨 역시 “한심하군. 넌 사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 남자가 거의 없었다. 여중생·여고생뿐이었다. “아! 제기랄.”
영화가 시작됐다. 임예진 주연의 ‘정말 꿈이 있다구’(문여송 감독, 1976)라는 영화였다. 임예진이 소매치기로 나와 마지막에는 착한 소녀가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사실 스크린으로 임예진을 처음 본 감동 같은 것은 전혀 기억에 없다. 오로지 여학생 영화를 보러 왔다는 부끄러움밖에는 없었다.
그 뒤로 제법 뻔뻔해져 임예진 주연의 영화를 보러 다녔고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최고의 문제아이며 ‘짱’이었던 학생이 다가와 쭈뼛거리며 임예진을 좋아한다고,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 결국 같이 ‘푸른 교실’(김응천 감독, 1976)이란 영화를 보러 갔는데 녀석은 중학교 1학년밖에 안 된 주제에 영화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려 해 그것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더랬다.
또래 여배우
1970년대에 나와 또래들이 사모하던 여배우는 많았다. ‘로미오와 줄리엣’ ‘썸머타임 킬러’ 두 편의 영화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올리비아 허시. ‘정무문’과 ‘맹룡과강’의 노라 마오, ‘사랑의 스잔나’의 진추하. 그녀들은 아름다웠지만, 나와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저 먼 나라의 여자들이었다. 판타지 세계 속의 여성이었다. 물론 한국 여배우들도 아름다웠지만 보통 이모나 고모뻘이었다. 그런 우리 앞에 같은 학생복을 입은 또래의 여자 배우가 등장한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 영화에서 청소년 연기자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청소년 대상 영화는 거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고교 얄개’의 원작 ‘얄개전’을 각색해 중학생 안성기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있었지만, 청소년 영화 붐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1970년대 중반. 극장가를 휩쓸던 문희·남정임이 결혼과 함께 사라졌다. 대신 투박하고 사나운 남성들이 등장하는 깡패 영화가 주류를 차지했다. 홍콩에서 날아온 이소룡 영화도 돌풍을 일으켰다. 사나운 남성들의 찡그린 얼굴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즐비할 때. 소리 소문 없이 개봉한 영화가 있었다. 제목은 ‘여고 졸업반’(김응천 감독, 1975). 여고생 임예진이 남자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내용의 영화였다. 소설 ‘불타는 신록’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본격적인 여고생 영화는 아니었다.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이른바 문예영화였다. 이 영화로 주연 임예진은 대종상 특별상을 받았고, 영화 주제곡으로 사용된 김인순의 노래 ‘여고 졸업반’은 중년 여성들에게까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사랑받는 히트곡이 됐다.
물론 여고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강대선 감독이 만든 세 편의 여고생 영화, ‘여고생의 첫사랑’(1971)과 ‘여고시절’(1972), ‘지나간 여고시절’(1973)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청소년 영화라기보다는 여고생이 등장하는 멜로 영화 쪽에 가까웠다.
그 시기 일본 대중문화에 밝았던 문여송 감독이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본 청소년의 사랑과 애환이 담긴 영화를 기억해내고 임예진을 주연으로 기용해 청소년들의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이른바 하이틴 영화 ‘진짜 진짜 잊지 마’(1976)였다. 주연은 임예진과 이덕화. 영화가 시작되면 고등학생으로 가득 찬 통학 열차에 학생모를 단정하게 쓴 모범생 이덕화가 등장한다. 이덕화는 언제나 같은 칸 같은 자리에 혼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친구들이 놀리고 비웃어도 그의 눈엔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창가의 소녀, 임예진이다.
진짜 진짜 잊지 마
그때 그들 사이에 운명적이고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떠나는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려온 임예진이 공교롭게도 이덕화가 매달린 출입구 쪽으로 달려와 이덕화에게 손을 내민다. 임예진의 손을 마주 잡는 이덕화. 이덕화는 임예진을 기차로 끌어올린다. 기차는 속력을 내서 달리고 이덕화와 임예진은 학생들로 가득한 출입구에 서로의 몸이 밀착된 채 매달린 꼴이 된다. 임예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하얀 목덜미와 복숭아 같은 뺨이 드러난다. 그녀의 냄새에 취한 이덕화는 임예진의 포로가 됐고, 임예진 역시 이덕화의 포로가 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놀라운 기적이 이뤄진 것이다.
전영록 임예진 이덕화(왼쪽부터)가 출연한 영화 ‘푸른 교실’의 한 장면.
영화의 라스트에 이르러 눈물을 강요하는 신파조의 억지스러운 결말과 그들의 사랑을 자꾸만 우정이라고 포장하는 감독의 검열과 세상에 대한 눈치가 몹시 거슬리기는 하지만, 임예진의 놀라운 연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그들의 욕망과 불안을 생생히 전달한다. ‘진짜 진짜 잊지 마’는 한국 청소년들의 욕망과 불안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며 그해 흥행 성적 2위에 올랐다.
그리고 ‘임예진·이덕화·문여송’의 두 번째 영화가 만들어진다. ‘진짜 진짜 미안해’(1976). 고아이며 학교도 다니지 않고 야생마처럼 날뛰는 불량소년 이덕화와 그를 선도하려는 임예진의 노력이 줄거리인 이 영화는 일본에서 유행한 이른바 ‘학복물’의 영향을 받은 느낌이 강하다. 학생복을 입은 깡패 소년들의 액션 만화 ‘사나이 골목 대장(男一匹ガキ大將)’이나 ‘남조(男組)’‘청춘산맥(靑春山脈)’ 등의 흔적이 보인다.
어른이 된 소녀
1980년대 스크린에서 사라진 임예진은 이후 TV 드라마에서 생활 연기를 펼쳤다. 채널A 드라마 ‘불후의 명작’의 한 장면.
활짝 핀 꽃도 시간이 지나면 지고 만다. 여고를 졸업한 최고의 인기 배우 임예진은 1979년, 10여 년 전 신성일 엄앵란 조가 눈부신 활약을 했던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 1964)의 리메이크에 도전한다. 대학생이 된 임예진과 이덕화가 주연한 ‘맨발의 청춘’(김수형 감독, 1979)이다. 여고생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임예진 덕에 이 영화도 성공할 듯 보였지만,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더 이상 여고생이 아닌 임예진을 그 누구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영화는 실패한다. 얄개 패거리 이승현과 김정훈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얄개’(김응천 감독, 1982)가 된 것에 대한 반응 역시 시들했다. 휴교조치와 최루탄이 난무하던 그때 ‘대학 얄개’라니 시대착오였다. 그들의 시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같은 해 임예진은 다시 성인 영화에 도전한다. 이원세 감독의 ‘땅콩 껍질 속의 연가’(1979)였다. 하숙방을 전전하던 30대 노총각 신성일은 집을 보러 갔다가 집주인이 이민을 떠나고 갈 곳이 없어진 가정부 임예진을 보고 어찌 보면 무례하고 바보 같은 제안을 하나 한다. 갈 곳이 없으면 자신의 가정부가 돼달라고. 그런데 문제가 있다. 신성일이 얻은 방은 달랑 한 칸이다. 결혼도 안 한 성인 남녀가 같은 방에서 살 수 있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당찬 임예진은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방 한가운데 커튼을 쳐놓고 밤 8시 이후에는 서로 커튼을 넘어가지 않기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기면 서로의 관계는 끝내기로 한다.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닌, 숙녀가 된 임예진은 1963년 영화 ‘또순이’ 속 도금봉처럼 악착같이, 굳은 일 안 가리고 일을 해 자기 생활을 한다. 신성일과의 관계도 유지한다. 그 사이 임예진을 사랑하게 된 신성일. 그러나 임예진은 “나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일식집 주방장 김영호와 결혼하겠다”며 기분 좋게 거절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간다. 영화는 무척 유쾌했고 임예진의 연기도 좋았다. 하지만 극 중 임예진이 누드모델을 하면서 그녀의 반라가 사진 속에 등장하고, 제작사가 그것을 홍보해 흥행의 미끼로 삼으려 하자 임예진의 남성 팬들이 분노한다. 그들 마음속의 여동생 또는 연인이었던 소녀의 변모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대의 종말
이듬해 임예진은 좋은 영화에 적역으로 출연한다. 이장호 감독이 절치부심해서 만든 걸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었다. 한창 개발 중인 강남의 어느 곳에서 중국집 배달부, 목욕탕 때밀이, 이발사 보조로 일하는 세 청년의 이야기인데, 임예진은 이발사 보조인 이영호의 여동생으로 나와 중국집 배달부 안성기를 좋아하는 가난하지만 당차고 똑똑한 또순이를 연기한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안성기와 우연히 마주치자 그에게 곱게 포장한 양말을 선물하면서 은근히 데이트 신청을 하려는 장면. 그때 가난한 청년 안성기를 희롱하는 정체가 아리송한 부잣집 처녀 유지인이 차를 몰고 나타나 그들의 사이를 방해한다. 안성기는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자 유지인에게 홀렸다. 공장 노동자인 임예진이 끼어들 틈은 없다. 안성기는 유지인에게 홀려 그녀와의 데이트 약속이 불러올 비극적인 결말은 생각지도 않고 불나방처럼 뛰어들고, 임예진은 그런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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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여배우들이 온통 성적 자극만으로 승부를 걸던 시대. ‘애마부인’을 비롯한 수많은 매혹적인 ‘부인’이 남성의 눈을 희롱할 때 임예진이 설자리는 없었다. 임예진은 이 영화를 끝으로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린다. 한국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깨끗하고 순진했던 여고생 스타가 조용히 사라져버린 것이다.